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2)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

   - 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 야마시로 무쯔미(山城むつみ),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자본의 운동이 끝날까. 실은 그것은 간단한데 잉여가치가 없게 된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간단하지 않은 것은 잉여가치가 이윤과 달리 개별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개의 기업에게, 노동자에게 잉여가치는 불투과적입니다. 잉여가치는 사회적인 총자본, 엄밀하게 말하면 세계적인 총자본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는 일반적으로 잉여가치가 생산과정에 있으며 노동자가 그것을 다시 탈취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고전파 경제학의 사고에 기초하고 있으며 교환이 화폐를 매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거기에 자본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맑스 이전에 리카도좌파는 노동가치설에 근거하여 잉여가치=착취이론을 생각하고 노동운동(차티스트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것은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를 보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를 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 봉건사회에서 영주가 농민을 착취하지만 이제는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하여 같은 것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사회적」인 모든 관계는 본래는 대단히 투명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투명할 수밖에 없음에도 화폐경제에 매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보이지 않으며, 그것은 인간의 관계가 물과 물의 관계로서 물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된다. 루카치의 물상화론은 그런 논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기초한 논의도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경제에서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를 영주와 농노의 관계와 비슷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폐경제에서 교환관계는 영주와 농민이라든가 주인과 노예라고 하는 지배관계와 완전히 다른 관계이다. 일반적으로는 맑스도 고전파 경제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생산과정에서 착취로부터 전체를 본다고 하는 관점을 취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자본론』이 난해한 것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맑스는 유통과정을 중시했다. 맑스가 가치형태론과 같은 난해한 것은 쓴 것은 교환이 화폐를 매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또한 가치가 실제로 교환되는 것에서만(사후적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맑스가 자본을 상인자본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찰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산업자본에서도 잉여가치가 실현되는 것은 생산과정만이 아니라 유통과정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생산과정이 어떻든 간에 팔리지 않는다면 가치도 잉여가치도 없다. 신고전파는 맑스를 고전파의 아류로 보고 그 노동가치설을 형이상학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맑스가 중시한 것은 오히려 사용가치(효용)입니다. 생산물은 우선 타인에게 사용가치가 없다면 가치일 수 없습니다. 가치를 생산과정에서 투과적인 것으로 보는 고전파의 견해가 맑스주의에 계수되었을 때, 전생산과정과 교환을 국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컨트롤하면 좋다는 사고가 도입되었습니다. 그것은 맑스가 고전파 경제학의 비판에서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인 것입니다.


  맑스는 산업자본의 잉여가치는 생산과정 자체는 아닌, 또한 유통과정 자체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여기서 뛰어라」라는 유명한 건입니다. 그러면 자본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잉여가치라면 자본의 운동에 대한 대항은 어디에서 가능할까. 생산과정 자체에서는 아니며 유통과정 자체에서도 아니다. 예를 들면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물상화된 의식을 계몽하고 자본에 저항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 레닌이나 루카치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생산과정에서 임노동자는 「주체」가 아니다. 거기서 가능한 것은 단지 경제적인 투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제 경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노동자의 의식을 변하게 하는 것은 곤란하며, 실은 지금은 이미 그것을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경제과정은 자본에 맡겨져 있으며 그것을 정치적으로 제어해 나간다고 하는 사회민주주의의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 운동에 대한 제어장치일 수 없으며 국가를 제어하는 것도 될 수 없다. 생산관계 자체를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본제도 국가도 남게 되며, 또한 실제로 자본도 국가도 그것이 존속하기 위해서 사회민주주의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쌍방에 관계된 장소가 아니라면 자본의 운동에 대한 저항은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운동에 대항하는 운동의 주체성이라는 것은 나는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본론』에는 그러한 윤리, 「주체」가 나올 여지는 없다. 그런데 자본의 운동 G-W-G', 그 속에서 주체를 형성하는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 자본가가 주체적으로 보이는 것도 자본가 개인이 주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운동하는 자본의 「인격적 담당자」이기 때문이며, 자본의 장소가 능동적, 주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되는 장소는 어디인가, 그것은 노동자가 「사는 입장」, 결국 소비자로서 존재하는 장소입니다. 자본의 운동에 대항할 수 있는 장소는 거기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소비자운동이나 시민운동이라면 생산관계에 미치는 것이 없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것이 된다. 결론을 말하면 나는 소비자협동조합과 생산자협동조합을 조직해 나가는 것만이 자본주의의 존립기반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리고 그것을 자본도 국가도 저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이나 국가를 가능하게 하는 것과 같은 기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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