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게 비범한 철학 에세이
김필영 지음 / 스마트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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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해서는 묘한 동경이 있다. 무엇을 하든, 심지어 예술과 문학, 이과 영역에서도 그 끝은 철학과 닿아있는 것 같기도 해서 그리스 철학가부터 근대, 그리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철학가들이 한 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어졌었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철학책들을 한권씩 읽어보기 시작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글도 많긴 했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배워보자 마음으로 접하고 있다. 언젠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할 날을 꿈꾸며 말이다.

이 책의 저자 김필영님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전기공학 전공에 관련 직종으로 30년을 근무하면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4년 전부터 유튜브 채널 '5분 뚝딱 철학'을 운영하며 철학의 대중화에 힘쓰면서 강의를 하고 있다.

철학의 대중화를 꿈꾸는 만큼 철학을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평범하게 비범한 철학 에세이>는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지만 철학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도록 간질맛 나는 밀당을 해 주어서 즐겁게 읽은 책이다. 26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책, 영화, 유명 일화 등을 다루며 이를 한데 묶어서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해 주어 좋았다. 철학을 고민해본 시늉을 하거나 가볍게 접근 한게 아니라 '깊이있으면서도 재미있는 비범함'이 있는 책이다. 그동안 했던 경험들이 이 책에서 언급된 경우가 많아서 반갑기도 했고 나와의 차이, 같은점을 발견해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26가지 에세이 중 몇 가지에 대해 정리하면서 나의 생각도 곁들여 보았다. 이 책은 읽는 데도, 리뷰를 쓰는데도 오래 걸렸으나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 죽고 싶지만 철학은 하고 싶어 (feat. 비트겐슈타인, 마틴 셀리그만)

'긍정 심리학'의 마틴 셀리그만은 행복한 삶의 첫번째 조건은 '즐거움', 두번째는 '몰입', 세번째는 '삶의 의미'라고 했다. 20세기 오스트리아 위대한 철학자 비트센슈타인은 비극적 삶을 산 사람 같지만 죽음을 앞두고 '멋진 사람'을 살았다고 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인생을 좀더 즐기지 못했다는 점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즐거움이나 행복이 아니다. 즐거움 그 자체는 삶의 목표가 아니라 감정의 상태일 뿐이다.

저자는 수단이 목표가 될 수 없으므로 즐거움은 부수적으로, 일시적으로 따라오는 감정일 뿐이니 '즐거움'은 우리 인생에서 '후순위'로 두고 '몰입'과 '의미'에 집중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말한다. 우리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에 몰입하고 또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도 죽음을 앞두고 비트겐슈타인처럼 "내 삶은 멋졌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재미없고 하기 싫어 죽겠는데 '몰입'하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 즐거움과 몰입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가까이 붙어 있다. 그리고 몰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 의미를 어느 정도 찾았다고 보여진다. 아무 가치없는 일에 몰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feat. 페스팅거, 카뮈, <이방인>)

우리가 원하는 대로, 믿는 대로 세상이 흘러가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을 기만한다. 내가 진짜로 믿었던 것을 그것이 아니라며.

이전에는 나도 종종 자기합리화를 했다. 이런 자기합리화가 내 마음의 안정을 주기도 하지만, 때때로 나 자신에 대한 객관화를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해서 '자기합리화' 중이구나에 솔직하려는 연습을 하곤한다.

  • 목숨을 건 인정투쟁 (feat. 헤겔, 호네트, <스타트렉>, <신세기 에반게리온>, <더 레슬러>)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의 핵심 개념은 목숨을 건 인정투쟁이다. 독일의 철학자 학셀 호네트는 이를 더 발전시켜서 우리가 어떤 특정한 타자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일반적인 다수의 타자들로 부터 인정받으려 한다고 했다. 그래서 죽어라 공부하고, 승진을 위해 애를 쓰고, 먹을 때마다 SNS에 올리는 행동을 하게 된다.

과도한 인정욕구는 불행을 부르므로 어떤 이들은 타인으로부터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라고 하는데 사실 불가능한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고 '누군가'에게만 인정을 받으면 된다. 또한 동시대 사람일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삶의 기술'이다.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바라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무엇'에 대한 인정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가장 쉬운 예로 인터넷 의 '숫자'이다. 블로그를 예를 들어보자면, 이웃이 늘고 '좋아요' 숫자가 늘고 댓글이 있으면 당연히 기분이 좋다. 그런데, 이 숫자 중 허수가 많다.

정성스래 글을 쓰고, 그 글에 공감을 해서 증가한 숫자는 단순한 '1'이 아니다. 그 속에는 '교감'이 분명히 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에 대해 충분히 노력을 하고 거기서 얻는 '인정'이야 말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낯설고도 낯익은 내 안의 또 다른 나 (feat. 프로이트, 라캉, <지킬박사와 하이드>)

카프카의 책을 읽었을 때, 낯설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데 등장인물들은 당연한 듯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책에서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해석을 해 주어서 반가웠다.

주인공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고 가족들이 떠나게 되는 기묘한 이야기에 대해 카뮈와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적 소설로 해석하고,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소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해석한다.

도기숙 교수는 카프카라 '하이퍼그라피아' 였을 수 있다고도 말한다. 하이퍼그라피아란 글쓰기에 집착하는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조증, 우울증, 과대망상을 동반하기도 하고, 자페적 성향이 강하므로 내면의 생각의 흐름을 글로 쓴다. 따라서 상징적으로 함호같아서 해독이 어려운데, 이런 설명을 듣고 보니 카프카 책이 왜 그리도 난해한지 알겟다.

'카프카스러운'은 '수수께끼 같고, 섬뜩하고, 위협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프로이트의 '언캐니'는 친숙한과 낯선 두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다. 카프카 소설은 두 상반된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카프가 스러운 것이다.

카프카 소설은 분명히 이해가 어려운데 희한하게도 뇌리에 남아 있다. 이 책을 읽고 보니, 내가 느낀 것도 실존주의, 인간 소외여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전 프라하에 여행을 갔다가 카프카의 흔적을 쫓은 적이 있다. 두개의 카프카 동상과 프라하성에 있는 황금 소로에 갔었는데 확실히 장소가 주는 힘이 있다. 하이퍼그라피아 성향이 그의 글에 녹아 있을 수 있지만 성장배경과 그의 정체성도 크게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 무아지경에 빠져버린 미니멀리스트 (feat. 불교, 데이비드 흄, 러셀)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할까.

영국의 철학자 흄은 '자아'는 없으며 자아라고 생각되는 것은 감각과 생각의 다발일 뿐이라고 했다. 러셀은 '나'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태를 기술하는 불환전한 기호일 뿐이라고 했다. 불교의 무아사상에 따르면 나는 실체가 아니라 생각의 무더기일 뿐이라고 설명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나'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이다.

닉 체터의 <생각한다는 착각>에서는 마치 컴퓨터의 RAM 처럼 생각은 뇌의 켠에 평면적으로 머무는 것이고 정신, 마음, 나라는 실체 모두 뇌가 과거의 경험으로 '즉흥적'으로 만든 창작물로 설명한다.

나의 육체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한 것처럼 유전자 보존을 위한 생존기계이고, 나의 자아는 사실은 '생각의 다발'이라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런 주제로 접근하게 되면 우리가 현재 중요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부질없이 느껴진다. 재미있는 주제이기도 하니, 러셀의 철학 책을 한번 찾아 읽어봐야 겠다.

* 러셀의 책은 두권 읽은 적이 있다. 오래전 쓰였으나 의외로 재미있다.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나 완독의 기쁨을 줬고 두권다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세상을 놀이터로 본 보모 (feat. 발터 벤야민, 비비안 마이어)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은 현대 미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아우라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의 호흡, 숨결이라는 말에서 유례했다. 어떤 사람이나 물건에 영적 분위기, 신비스러운 분위기,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을 때 아우라가 있다고 한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경험하는 세가지 조건에 대해 이야기 한다. 물질성, 유일무이한 원본성, 공간적 일화성이다. 그런데 19세기에 사진이 등장하면서 이 세가지 모두가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원본과 복제된 그림에 대한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원작은 어떤 정보를 통해서도 느낄 수 없는 침묵과 고요함이 있는 반면, 현대 복제기술로 만들어낸 복제 예술은 무가치하고 자유로운 것이 되었고 했다.

지금은 AI까지 등장하였으니 원본의 아우라까지도 흉내를 내는 세상이 되었다. 앞으로 어떤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할 까. 어쩌면 스포츠를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아우라가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 상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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