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물건 - 물건들 사이로 엄마와 떠난 시간 여행
심혜진 지음, 이입분 구술 / 한빛비즈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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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시리즈'가 안방극장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많겠지만 그중 우리의 향수와 추억을 자극할 만한 그 시절의 가구, 물건, 옷, 신발 들도 크게 한 몫했다. 도대체 어디서 구했을까 싶을 정도로 과거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 내서 신통방통하게 생각했다. 다이얼식 전화기만 해도 추억 돋는데 그 아래 깔려 있는 손뜨게 레이스. TV위에 어김없이 놓여 있는 못난이 인형 삼형제. 이런 소소한 소품들을 보면서 어린시절을 떠올려 보곤 했다.

<엄마와 물건>을 읽으면서도 아주 어린시절을 떠 올리게 하는 물건들이 있었다. 그 첫번째가 이태리 타월이다. 어릴 때 나도 이태리 타월을 써서 때를 벗겼다. 그러다 이태리 타월로 때를 미는 것이 피부에 자극이 크다고 들은 후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이제는 그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태리 타월 부터 시작해서 손톱깍이, 우산, 진공청소기, 다리미, 가스보일러, 고무장갑 등 스물한가지 물건들에 대한 변천을 어머니의 입을 빌려 알려준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는 심혜진 작가님이지만, 책의 표지에 있듯 어머니의 구술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어머니의 옛이야기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신문기사들을 통해서 스물한가지 물건들이 그 이후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는지까지 함께 알려주어 흥미로웠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봤던 과거의 물건은 '추억'에 가깝다면 <엄마와 물건>에 등장하는 과거의 물건들은 '역사'에 더 가깝다. 그 역사란 제품의 역사일 수도 있지만, '가사노동의 역사'이자,' 여성들이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어 가는 역사', '가사일을 바라보는 사회 인식의 변화' 라고 볼 수도 있다.

오래전 <살림하는 여자들의 그림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은 중세부터 시작해서 20세기까지 그림에 등장한 인테리어의 변천을 통해 가사노동의 변화를 알려주었다. 긴 세월 동안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어 가는 여성의 역사'를 따라가 보았을 뿐 아니라, 남을 위해 일해야 했던 평민과 노예 및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살아야 했던 왕족과 귀족으로 살아야 했던 시절에서 '나를 위한 삶'으로 바뀌어 가는 인류의 역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가사일을 도와 주는 제품이 개발될 때마다 여성입장에서는 노동에서 좀 더 편리해졌고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인식도 바뀌었다. 그런데 마냥 쉽게 핑크빛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인 인식은 '남성중심' 이었기 때문에 가사일을 도와주는 기계들, 제품이 생길 때마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남성'기준이었다. 고무장갑의 대한 기사만 해도 손 시림과 살이 트는 고통을 덜기 위해서라기 보다, '고운 손'을 가꾸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여성에게 유독 '아름다움'을 강요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면 '사치와 허영'이라고 비난하는 이중 잣대는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이런 시선은 은밀히 남아 있는데 과거에는 더 했기 때문에 고무장갑을 쉬이 살 수 없었다고 했다.

세탁기, 전기밥솥, 냉장고, 다리미기와 같은 제품들은 확실히 가사일을 편리하게 도와 주었다. 하지만 '바깥일'하는 남자들로 하여금 '집안일'은 도깨비 방망이가 뚝딱 하면 되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밥은 전기밥솥이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지, 빨래가 되고 나면 탈탈 털어 빨랫줄에 널고 마르면 차곡차곡 게고, 몇 옷은 다림질을 해야 하는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은 직접 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생리대와 브레지어의 변천도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었다.

다른 제품의 눈부신 발전과 마찬가지로 생리대도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다. 돌이켜 보면 생리대 품질 향상만큼 변한것은 생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같다. 어릴 때 엄마 심부름으로 생리대를 사러 가면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줬던 기억이 있다. 생리대는 숨겨야 했던 물건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TV에 광고를 시작하고, 마트에서 다른 물건과 함께 내어놓고 계산을 하고, 회사에서 생리휴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브레지어는 아직 모르겠다. 제품 자체야 눈부신 발전을 했다. 와이어가 옥죄던 제품에서 무봉제에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무더운 여름날 남자들은 이제 넥타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로 많이 바뀐 반면, 여성들의 브레지어 착용은 여전히 의무이자 책임이다. 여름날 에어콘이 신통찮을 때 남자들이 넥타이 때문에 덥다고 말할 때 여자들은 속으로 '우리도 브레지어 때문에 더워 죽겠어요.' 삼킨다.

스스로 생을 버린 한 어리고 고운 여배우가 살아생전 브레지어를 하지 않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가 악플에 시달렸던 사실은 여전히 가슴 한 켯을 답답하게 짓누른다. 평생 착용한 것이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더 허전한 것이 브레지어다. 평생 목줄을 차고 있는 개처럼 풀어놔도 도망갈 줄 모른다.

오래전, 명절 날 고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다가 젖을 물리는 젊은 엄마를 보고 기차에서도 수유공간이 필요하다는 기사에 달린 여성비하 댓글에 분노했던 적도 있었다.

이 책에 스마트폰이나 헤드셋, 인바디를 잴 수 있는 체중계, 전자담배 같은 제품을 함께 언급했다면 '편리함'에 비중을 두고 읽었을 것 같다. 하지만 저자가 뽑은 물건들은 여가나 취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집에서 '맨 손'으로 했던 일을 도와주는 것들이고 우리 어머니의 살림살이 이야기다보니 단순히 '편리함'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나, 그리도 나의 다름 세대로 연결되는 여성의 지위가 더 눈에 들어왔다.

점차 집안일에 대한 가치가 존중되고, 집안일을 남녀가리지 않게 하고, 남성에게서 지나친 남성상을, 여성에게서 지나친 여성상을 바라지 않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훗날 저자의 자녀가 저자에게 이야기를 듣고 <엄마와 물건2>를 쓰게 된다면, 그때는 여성의 가사노동과 지위 변화를 논할 의미가 없는 그런 세상이 되어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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