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반 형사 빅토르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8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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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처음 아르센 뤼팽의 전집에 수록된 이 작품의 제목은 '풍운아 빅토르'그래서 나는 착각을 했었다. 아, 뤼팽의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이다라고... 참, 착각도... 이 작품은 빅토르라는 조금은 괴팍하면서도 능력 있는 강력반의 나이 든 형사 빅토르가 아르센 뤼팽을 잡으려고 집념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해결하는 자잘한 사건과 마침내 뤼팽을 잡게 되는 과정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읽으면서 독자들은 뒤에 써 있는 작품에 대한 설명은 읽지 마시길 당부 드리고 싶다. 재미가 반감될 수도 있다. 물론 전집을 모두 읽은 독자라면 상관없이 읽을지도 모르지만... 과연 빅토르는 뤼팽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간단하면서도 어떤 거창한 사건이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뤼팽을 잡으려는 형사들의 모습은 참 제 각각이다. 처음 등장하는 가니마르는 진짜 뤼팽을 잡으려는 열의가 대단한 형사다. 하지만 가니마르 이후 등장하는 형사들은 가니마르에 못 미친다. 최근 작품에 등장한 베슈 형사만 하더라도 뤼팽을 잡으려고 하기는커녕 그의 조언을 구하는 실정이다. 역시 뤼팽의 진정한 적은 칼리오스트로 남작 부인뿐일까... 벌써부터 마지막 작품이 기다려진다. 이제 딱 한 권 남았다. 그 동안 즐거웠는데 너무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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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비친 악마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33
루스 렌들 지음, 강호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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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드거 앨런 포의 시 <Alone>에서 제목을 따온 이 작품은 이상성격자인 한 남자의 일생과 일상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 시는 다름과 같다. 

From childhood's hour I have not been
As others were; I have not seen
As others saw; I could not bring
My passions from a common spring.
From the same source I have not taken
My sorrow; I could not awaken
My heart to joy at the same tone;
And all I loved, I loved alone.
Then in my childhood, in the dawn
Of a most stormy life was drawn
From every depth of good and ill
The mystery which binds me still:
From the torrent, or the fountain,
From the red cliff of the mountain,
From the sun that round me rolled
In its autumn tint of gold,
From the lightning in the sky
As it passed me flying by,
From the thunder and the storm,
And the cloud that took the form
(When the rest of Heaven was blue)
Of a demon in my view. 

이 시의 해석은 책 앞에 쓰여 있다. 아서에 대해 참 잘 설명된 시다. 어려서 이모에게 억압받고 자란 한 소년. 그 소년은 이모가 세상의 전부이면서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그는 남과의 접촉을 극도로 피한다. 그의 삶은 이모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 그리고 가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 일어날 때 지하살에 가서 이모의 옷을 입고 있는 하얀 살결의 마네킹의 목을 조르는 일이 전부다. 그의 이런 삶이 변하게 되는 것은 그가 세 사는 아파트에 그와 성이 같은 또 한 명의 존슨이 이사 오면서부터다. 그 남자는 가이 포크스 데이에 태울 인형으로 아서의 마네킹을 선택하고 이제 사라진 인형으로 인해 아서는 지난날의 일을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심지어 그런 사람에 대한 논문을 쓰는 또 다른 존슨조차도.  

우리는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 우리의 가족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마지막 결말이 조금 허무하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가 조금씩 이상성격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내 일이 아니면 상관하지 않고 희생자가 나만, 내 가족만 아니라면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사는 그 자체가 이상성격자가 아닌가 싶다. 루스 렌델의 작품은 이런 스며드는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면서 과연 누가 더 나쁜가 생각하게 한다. <유니스의 비밀>에서도 그랬다. 사회적 관점에서 개개인을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그녀만이 갖고 있는 장점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약간 늘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것이 역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여백의 미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작가의 대표적 단편 <열병 나무>와 <유니스의 비밀>을 보고 기대가 컸던 작품이다. 초기 도서 추리 소설과 요즘 등장한 범죄자의 심리 위주의 작품들 사이에 놓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만한 작품인데 그래서 그런지 초기 도서 추리 작품에 비해서는 범인의 심리 묘사가 디테일한 점을 알 수 있지만 요즘 작품에 비하면 긴박함이 떨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작품의 긴박함이 과도한 잔인함의 확대 묘사와 독자가 생각할 수 없게 뇌를 마비시키는 중독성에 기인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차라리 이 작품이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보인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를 떠올렸다. 그 주인공의 삶과 아서의 삶이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각각의 작품에서 비둘기는 자신의 마조히즘에 대한 표출로, 마네킹은 새디즘의 표출 대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런 병들은 내 눈에 비친 것만이 아닌 우리 눈에 비친 악마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 장에서 나타나듯이 그런 우연으로 없어지거나 마치 심판 받은 것처럼 보여 지는 그런 행동에 의해 단죄되지는 않음을 아이러니컬하게도 느끼게 해 준다. 기대했던 것만큼 대작은 아니었지만 볼 수 있었다는 점에 만족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보기를 기다렸던 작품이므로. 

내 눈에 비친 악마는 섬세한 작품이다. 지루할 정도로 아서의 심리와 일상을 묘사하는데 주력하고 있어 읽다 보면 조금 실망을 느끼게도 되지만 그것이 루스 렌델이 구상한 작품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 주변에 있음직한 어떤 사람에 대한 묘사로 우리가 주변을 돌아보며 전율하게 하려는 의도가 깔린 듯 보여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세세하게 묘사하면서 그의 주변 인물들이 모두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할 리 없다. 또 다른 존슨이 이상 성격자에 대한 논문을 쓰는 사람이고 처음 아서를 보고 그가 이상한 편집광적 인물임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 내면에도 악마가 있어 다른 악마를 느낄 수 없다는 의미 아닐까. 조금 다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그런 스며들 수 있는 여지가 우리에게 무심함과 무지에 의한 전율을 선사하려는 것 아닐는지. 그의 단편 <열병 나무>처럼. 그래서 이 작품이 평이해 보이면서 어떤 작품에 대한 평가를 망설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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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아홉 고양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3
엘러리 퀸 지음, 문영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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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명을 연쇄 살인한 살인자의 등장으로 뉴욕은 공황 상태에 빠진다. 그 살인자의 닉네임은 '고양이'. 모두 엘러리 퀸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지만 단서가 너무 없다. 희생자들에게는 어떤 공통점도 없고 살인자가 남긴 단서라고는 교살할 때 쓴 비단 천뿐. 나이도 제각각, 성별도 남자 2명, 여자 7명, 독신 8명에 유부남 1명, 신분도 부자에서 가난한 이까지 다양하고 직업도 다양하고 심지어 전신 마비 환자까지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남자 희생자에게는 파란 천으로, 여자 희생자에게는 연어 속살 같은 색깔의 실크 천으로 교살 당했다는 점이다. 누가, 왜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일까. 그리고 엘러리 퀸은 <10일간의 불가사의>에 이어 다시 한번 실패를 맛볼 것인가.  

고양이 목숨은 아홉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나라에 구미호라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있는 것처럼 '고양이'라는 닉네임이 붙은 살인자가 뉴욕에 나타나 아홉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0일간의 불가사의>에서 톡톡히 실패를 맛본 엘러리 퀸은 사건을 맞지 않으려 하지만 교묘히 던져진 미끼에 낚여 사건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그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어차피 탐정이란 범인이 단서를 남겨 줘야만 힘을 쏟을 수 있는 존재인지라 아홉 번째 살인으로 단서를 잡게 되기까지 엘러리 퀸은 자신의 머리만 쥐어뜯는다.   

연쇄 살인범의 등장은 경찰이나 탐정을 난감하게 한다. 그가 어떤 공통점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한 살인범을 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무차별적 맹목적으로 보이는 살인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어떤 문제를 야기하게 마련이다. 이 책에서 나타나듯이 폭동이 일어나 살인 사건보다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하고 도시를 탈출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생기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게 되고 밤거리는 무법 천지가 되기 쉽다. 경찰을 불신하는 시민들은 자체적인 자경단을 조직하려 하고 그것이 또 다른 사회 문제를 발생하게 된다.  

이 작품은 엘러리 퀸의 작품에서 쓰이지 않던 연쇄 살인 사건이 사회에 끼치는 문제를 살인 사건 해결보다 더 표면에 등장시키는 느낌을 준다. 전성기가 지난 작가는 트릭보다 범죄의 내면에 깔린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추리소설에서 범죄소설로의 변신의 시도가 아닌가 느껴졌다. 작가가 자신의 네 번째 걸작으로 꼽은 작품이니 만큼 기대도 크고 애정도 많았던 작품인 모양이지만 이 작품에서 엘러리 퀸이 보여주는 모습은 왠지 예전의 모습 같지 않아 보여 약간 낯설었다. 라이츠빌 시리즈의 작품인 <10일간의 불가사의>와 <일곱 번째 살인 사건> 사이에 낀 작품이라 <10일간의 불가사의> 다음에 보면 좋을 듯 싶다. 이 작품 안에 언급도 되었으니. 마지막으로 스물 한 번째 엘러리 퀸의 작품을 보게 되어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었다.

엘러리 퀸의 작품치고는 좀 장황하고 지루한 면이 없지 않은 작품이었다. 기대가 컸는데. 이 작품을 보면 엘러리 퀸(작가)은 이미 전성기를 넘어서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 까닭에 이 작품 이후 우리 나라에 소개된 작품은 <일곱 번째 살인 사건>, <악의 기원>, <킹은 죽었다>정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트릭이나 기발함은 줄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 인간 내면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는 점은 엿보인다. 안타까운 점은 그것이 엘러리 퀸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는 점과 독자가 그런 엘러리 퀸의 모습을 과연 원하는 지 작가가 생각했을까 하는 점이다. 역시 반 다인의 말처럼 한 작가가 쓸 작품은 열 두 편이 한계란 말인지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조금 되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제 국명 시리즈에서의 트릭이나 비극 시리즈에서의 날카로운 플롯, 심지어 라이츠빌 시리즈에서의 기발함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썼다면 괜찮은 평을 받았겠지만 작가의 명성에는 다소 못 미치는. 하지만 엘러리 퀸은 작가나 탐정 모두 깨달은 바가 있는 모양이다. 범인을 반드시 잡는 다거나 살인을 미연에 방지하는 일만이 전부가 아님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신의 역할이라고.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엘러리 퀸이 지향한 추리 소설의 마지막 모습은 어떤 것인지 그의 마지막 작품, 맨프레드 리가 사망하기 전의 두 사촌이 쓴 마지막 작품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그 작품은 어떤 작품일지 또 기대하게 된다. 명성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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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블랜디시 동서 미스터리 북스 127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 지음, 이태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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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목이 <No Orchids for Miss Bladish>다. 예전에는 <미스 블랜디시의 위난>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었다. 그때 난이라는 글자가 蘭이기도 했고 難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앞의 난으로 원제 그대로 했는데 우리 실정으로는 뒤의 難자가 더 어울렸던 모양이다. 도대체 Orchid가 어떤 성격의 단어인지 모르겠다. 난초나 연보랏빛 이외의 어떤 뜻이 있는 것인지. 어쨌든 미스 블랜디시에게는 난초가 없다??? 난초가 온실 속 화초나 행복에 대한 뜻이라면 맞는 말이다.  

미스 블랜디시의 고가의 목걸이를 노린 조무래기 갱들이 목걸이를 훔치려다 얼떨결에 살인을 저지르고 미스 블랜디시를 납치해 몸값을 요구하려 하지만 더 큰 갱에게 들켜 살해당하고 미스 블랜디시는 더 큰 곤경에 빠지게 된다. 경찰은 조무래기 갱들의 소재만 파악하려 하고 그녀의 아버지도 몸값을 조무래기 갱들에게 주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렇게 갱들은 완전범죄를 저지르고 유유히 다른 도시로 옮겨 나이트클럽을 차린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는 탐정을 고용하고 고용된 유능한 탐정은 미스 블랜디시를 찾아내지만 그녀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그러니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이 작품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앞부분은 미스 블랜디시가 납치 당하고 무사히 돈을 받아 악당들이 사라지기까지의 일련의 사건의 나열이다. 뒷부분은 돈을 주고도 딸을 돌려 받지 못한 미스터 블랜디시가 탐정을 찾아와 딸을 찾아 달라고 의뢰하고 탐정이 미스 블랜디시를 찾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양지의 권력과 음지의 권력의 싸움을 그린 하드보일드 작품이다. 작품 배경이 1938년인 만큼 경찰도 폭력적이고 갱들은 난무하고 부자들도, 그 부자의 자식도 자신의 힘만 믿고 산다. 첫 장면에서 미스 블랜디시가 값비싼 목걸이를 걸고 아무런 보호 없이 다니지 않았다면, 조무래기 갱에게 잡혔을 때 재빨리 목걸이만 넘겼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 아버지가 누군 줄 알아? 하는 식의 행동이나 갱들의 납치, 감금은 같은 방법이다.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 부자인 그녀의 아버지도 양지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죄 지은 것이 많았을 것이고 그 아버지의 돈을 물쓰듯하는 자식의 거들먹거림 또한 정글의 법칙이다.

갱들의 총질도 정글의 법칙이다. 조무래기 갱을 제압하고 좀 더 강한 갱들이 미스 블랜디시를 낚아 채가는 것도 그들만의 정글의 법칙이고 돈 때문에 미스 블랜디시를 찾아 나서는 탐정의 행동의 과격함, 경찰의 과격함도 정글의 법칙이다. 이 작품을 보면 미스 블랜디시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어리석은 온실 속의 화초였고 그 화초가 온실 밖에서 겪는 일은 당연히 냉혹한 법이니까.  

이 작품은 원판의 번역이 아니다. 영국에서도 원판은 너무 잔인해서 많이 수정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 수정판의 번역이다. 마지막 미스 블랜디시의 행동에서 알 수 있듯이 결말은 탐정이 원한 대로였지 않나 싶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개똥밭을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그러면서 살면서 한번쯤은 이런 말을 내뱉고는 한다. 죽지 못해 산다고. 이 작품은 그 말 그대로 미스 블랜디시의 죽지 못해 사는 과정을 담고 있다.

하드보일드를 표방하는 작품으로 갱들의 싸움과 갱과 경찰의 싸움이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있고 그 가운데 희생되는 많은 여자들, 미스 블랜디시는 제외하고도 안나라든가, 나이트클럽 접수계의 여직원 모두 한 시대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약한 고리가 아니었나 싶다. 강을 건너는 누우 무리 중 가장 약한 것들만이 악어의 표적이 되는 법이니까. 냉혹한 정글의 법칙을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작가는 한편의 잘 쓰인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것을 재미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고문하는 광경을 구경하는 것과 같다. 하긴 우린 항상 그런 것을 보고 즐기지만. 하드보일드 납치 소설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지만 여과 없이 동정 없이 보여주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잘 쓰여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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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관의 살인사건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YUKITO AYATSUJI / 학산문화사(만화)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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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책이라는 액자 소설 형태를 의도적으로 작가가 구사한 작품이다. 이 작가가 관 시리즈에서 나타내려고 하는 공통점은 이중 구도다. 그것과 기묘한 건축가가 지은 건축물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 그리고 밀실 살인과 그것이 해결되는 건축가가 건축주의 의도였든, 의도와 상관없이 만들었든 비밀 통로나 밀실이 있다는 점이 유키토 아야츠지의 관 시리즈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갖는 또 하나의 다른 작품과 구별되는 점은 이 작품에서 그 동안 아마추어 탐정역을 맡았던 인물이 비로소 본격적인 탐정의 길을 걷게 된다는 점이다.

괴팍한 추리 소설가의 생일에 모인 사람들... 그 날은 공교롭게 만우절... 하지만 노 작가는 자살을 하고 밀실이 되어 버린 집에서 제자들은 유산을 놓고 추리 소설 쓰는 경쟁에 돌입한다. 하지만 한 명씩 살해당하게 되는데 그것은 공교롭게도 그들이 쓰다 만 추리 소설 그대로 살해되는 기묘함을 보인다. 범인은 그들 가운데 있지만 알 수 없고 책 속의 책은 박진감을 더해 간다. 이 작품은 <수차관의 살인 사건> 다음에 읽은 작품인데 그 작품보다는 이 작품이 더 나아 보인다. 두 작품 모두 비슷하지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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