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속삭임 1
기시 유스케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을 인상 깊게 읽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장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가 <검은 집>으로 호러 대상을 받은 것과 같이 호러 장르의 작품인지, 아니면 <검은 집>을 추리 소설로 생각했듯 추리 장르인지. 하지만 해설을 <미토콘드리아 이브>의 작가 시이나 시데아키가 쓴 것을 알았다면 조금 망설였을 것이다. 작가와 친구이기도 한 그의 작품은 SF장르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작품이 1998년 일본의 올해의 미스터리 50에서 5위를 차지했다고 하니 이제 장르의 경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듯 하다.  

아마존에서 탐험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자살과 실종. 애인의 자살에 의문을 품은 정신과 의사와 기자, 그리고 신흥 종교같은 가이아의 자식들에 참가한 사람들의 자살까지 인간의 영원한 행복 추구와 고통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인간만이 지구의 유일한 고도의 지능을 가진 생명체라는 오만이 주는 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서 정신과 의사의 행동은 또 한번 인간의 병적인 자기 기만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원죄는 탐욕이다. 탐욕은 절대 불행해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다시 극단적 희열과 행복에 대한 끝없는 욕구불만으로 나타난다. 고통은 당하는 사람, 바라보는 사람 모두에게 평상심을 요구한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것 또한 탐욕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일일까. 그건 탐욕이 아니라 인간의 작은 바람과 소망, 자비에 대한 호소일 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에서의 주인공의 행동은 이런 생각을 갖게 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인간의 또 다른 원죄는 오만이다. 자신들만이 최고라는 생각, 자신들보다 우월한 생명체는 지구상에, 아니 어쩌면 우주에도 없을 지 모른다는 생각, 이것은 또 다른 탐욕의 표현이다. 하지만 진짜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존재일까. 지금 자기 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도 모르는 인간이,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가 살고 있는 지 아직까지 알고 있지 못하는 인간이 말이다. 인간은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자신들이 알아냈다고 생각하고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생명체에 스스로 이름을 붙이고 연구를 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과연 인간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볼 지 알지는 못한다.  

에이즈나 에볼라가 등장했을 때의 인간을 생각해 보면, 아니 미세한 세균에 감염되어 쉽게 죽고 마는 인간임을 생각해 보면, 또한 지금도 인간이 개발한 항생제가 듣지 않는 변종의 균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고 싸쓰에 그렇게 쉽게 쓰러지는 존재가 인간임을 인식하면 이제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반납하고 그냥 백사장의 무수히 많은 모래알 중 하나인 존재임을 자각하여 자연에 순응하며 살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해 본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능이라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오만함의 표현일 뿐 아닐까. 인간이 그런 대단한 지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리 먼 곳에서도 라도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비둘기들과 같은 지구 자기장을 이용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연어가 강에서 나서 바다로 떠났다가 다시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거슬러 오는 감각도 없다. 인간은 자신들의 먼 조상인 마야, 잉카 제국의 멸망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단지 추측과 이론뿐. 그것을 가지고 인간의 지능을 과대평가 해야 하는 걸까. 아마존에 사는 어떤 원숭이 무리가 자신들의 무리에서 한 마리를 왕따 시키는 이유를 원숭이는 이미 오래 전에 알고 있는데 인간은 모른다. 아니 아마존의 원시 부족은 아는데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과학적 사고를 가졌다는 인간만 모른다. 인간이 지금까지 이룬 것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 존재인지 인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다.

인간은 지구가 자신의 종말을 위해 선택적으로 만들어 낸 존재일 뿐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지구의 시한폭탄 인간. 그것에 달린 시계는 탐욕과 오만. 그것이 극에 달할 때 지구는 인간의 자폭으로 인해 우주에서 사라지려 하는 것이다. 천사의 속삭임은 그런 시한폭탄의 째깍거림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연속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3
사카구치 안고 지음, 유정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외딴 시골의 부호의 집에 모인 문인들. 그들은 이 집과 조금씩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부호의 집안 어른인 아버지가 워낙 많은 첩을 두었던 인물이라 그 첩과 달아난 아들의 친구, 친구의 아내와 재혼한 아들, 아들과 이혼한 후 남편 친구이기도 하고 자신의 동료이기도 한 남자와 동거하며 사는 전처, 배다른 여동생과의 사랑을 고민하기도 하고 요상한 의사와 간호사에 요상한 소문과 괴이한 편지, 때 마침 등장한 협박자, 등등 많은 인물들이 모여 한바탕 살인 잔치가 벌어진다. 과연 이 살인들은 여러 사람에 의한 여러 살인 사건이 단지 우연히 한 장소에서 일어난 것뿐일까, 아니면 동일범이 어떤 목적에 의해 하는 연속 살인 사건일까.

인간들의 비뚤어진 행동과 말이 트릭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작품이다. 처음 이 작품을 읽으면서 참 일본이란 나라는 성에 대해 개방적이고 우리보다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그렇지만 거부감이 느껴지는 우리와는 많이 다른 나라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동료의 동거녀를 돈을 주고 사서 결혼을 하고, 이혼한 전처와 그녀가 동거하는 남자를 함께 초대하고, 친한 친구는 아버지의 애첩과 달아났는데 그들을 초대하고, 또 다른 아버지의 변호사 또한 아버지의 애첩과 결혼하고 뻔뻔스럽게 집에 드나들고, 거기다가 아들은 배다른 여동생과의 금지된 사랑으로 고민을 하고. 초대된 손님들은 난교 수준은 아니더라도 버젓이 상대방이 있는데도 여자를 바꿔 가며 잠을 자고 그러다가 한사람씩 살해를 당하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 군상들의 적나라한 속내가 드러난 작품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이미 작가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일본인이다. 그렇게 쉽게 속내를 드러낼 리가 없다. 일본인 특유의 겉과 속이 다른 면을 트릭에 교묘히 이용한 작품이다. 마지막에 '아니?'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읽어보시길.

독자가 범인을 못 맞추게 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를 이 작품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 인물에게 저마다 주인공을 시켜서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간다는 작전을 펼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엽기적인 인간 관계와 그 인간 군상들의 엽기적 행동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또 너무 많은 살인으로 독자를 정신없이 만들어 범인을 찾지 못하게 하는 수법을 사용한 작품이다. 결말을 알고 나면 그 단순함에 놀랄 일이지만 속고 난 뒤니 할 말은 없다. 등장 인물의 이름을 유난히 못 외우는 난 정말 인내심을 가지고 읽을 수밖에 없었다. 대화도 어쩌면 그렇게 많은 지 말하는 인물이 누구이고 누구와 어떤 사이인지 앞의 등장 인물 해설을 보며 읽어야 했다. 등장 인물이 많으니 피해자도 많이 나온다. 하루에 한 명씩 살해당하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살아 있어 말하는 자, 난동 부리는 자, 시선을 분산시키는 자는 충분히 많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인간과 인간, 남과 여의 사이가 견원지간 아니면 성적인 관계만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여러 상황들의 얽히고 설킨 내용들의 전개로 인해 가장 기본적 사항을 잊게 만들고 너무도 쉬운 답을 놓치게 만들었으니 이 작가의 언변에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그렇다고 별로인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것도 작가의 고도의 노림수일 수도 있으니까... 뒤에 실린 단편 진 슌신의 <얼룩 화필>은 하필이면 며칠전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서 읽었던 작품이라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요일, 랍비는 늦잠을 잤다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5
해리 케멜먼 지음, 문영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마일은 너무 멀다>를 읽고 작가에게 반해서 그의 대표작인 랍비 데이비드 스몰 시리즈를 간절히 읽기 원했는데 드디어 이루어졌다. 랍비 데이비드 스몰 시리즈 1편이다. 모두 5편이 나왔는데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요일별로 다섯 편이다. 왜 수요일과 목요일은 없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유대인의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금요일, 랍비 데이비드 스몰은 늦잠을 잤다. 1년 임기가 끝나는 유태인 교회의 위원들이 자신의 연임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나쁜 소식을 전날 전해 들었는지라, 또 기다리던 책을 늦게까지 교회 서재에서 읽은 탓에 예배를 건너뛰고 늦잠을 자 버렸다. 그 때문에 그는 오해를 받고 살인 사건 용의자가 된다. 성직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또 성직자라 조사는 덜 받은 형편이지만 유태인을 싫어하는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좋은 표적이 된다. 이에 랍비는 탐정이 되어 자신의 확신을 검증하기에 이르고 드디어 범인을 카톨릭 신자인 경찰 서장에게 알려주기에 이른다.  

제목이 왜 금요일, 랍비는 늦잠을 잤다 일까. 왜냐하면 하필이면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피해자의 핸드백이 랍비가 교회에 두고 온 그의 차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전날 랍비는 밤늦게까지 교회 서재에서 책을 읽었고 해서 랍비는 제 1의 용의자가 되었는데 그가 다음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예배에 늦었으니 경찰이나 사람들이 그를 의심할 수밖에. 하지만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젊은 랍비 데이비드 스몰은 그런 사실에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용의자의 무죄를 주장하기도 하고 카톨릭 신자인 경찰 서장과 친분을 다지며 사건에 뛰어든다.  

이 작품의 장점은 추리 소설적 트릭이나 재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1960년대 미국 유태인 사회를 잘 묘사한 점에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랍비가 이런 사람이었군 하고 생각했으니. 작가는 추리 소설의 기본 틀어 너무 충실했다. 그래서 초장에 범인을 알아 버려서 내 관심은 작가가 그려내는 유태인 사회와 랍비에게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랍비 데이비드 스몰이 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참 신선하고 랍비에 대한 - 내가 알고 있는 극히 작은 부분이나마 - 생각을 바꿔 버렸다. 또한 랍비 데이비드 스몰은 언제나 작은 분쟁이 일어날 때 탈무드를 뒤적인다. 탈무드는 누구나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유태인이건 비유태인이건 한번쯤 읽어본 책일 것이다. 유태인의 지혜가 담긴 삶의 인도서쯤으로 해석하면 좋을 듯 싶다. 그 탈무드가 랍비가 해석하면 분쟁도 조정하게 되고 누군가의 상담에 도움을 주는 조언도 되는 모양이다. 이 책을 읽고 제대로 된 탈무드를 읽고 싶어졌다.

또 한 명의 특이한 직업의 탐정을 만나게 되었다. 간단하고 재미있고 깔끔한 작품이다. 추리적인 면은 조금 약하지만 유태인 사회의 분위기를 나름대로 느낄 수 있고 종교간의 화합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시리즈의 묘미는 추리 소설의 트릭이나 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랍비라는 특이한 탐정이 등장하는 점과 1960년대 유태인 사회와 미국 속에서 여러 인종과 여러 종교가 섞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조금 엿볼 수 있다는 데 매력이 있다. 특히 랍비가 다른 신부나 목사, 승려와는 다른 존재라는 점과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들의 지혜를 담은 탈무드에 있다는 듯한 언급이 재미를 준다. 추리 소설에 선입견이 있거나 무섭다고 생각되는 독자들이 읽기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도 놓치지 말고 봤으면 한다. 작가의 단편집 <9마일은 너무 멀다>를 본 독자라면 당연히 보겠지만. 또한 랍비 시리즈 전권이 출판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1
키리노 나츠오 지음, 권남희 옮김 / 산성미디어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내 아이일까... 아니면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모습일까... 이 여자는 왜 잃어버린 한 아이에게만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은 죄의식에서 일어나는 모성의 본능일까... 아니면 이기적인 자신의 자학성 만족감 때문일까... 여자에게는 또 다른 아이가 있다. 자신이 외면한 남편을 닮은 아이... 그 아이는 또 다시 잃어버린 아이처럼 버려 둔 채 잃어버린 한 아이만을 찾아다닌다.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것은 또 다른 죄를 짓는 일 아닐까... 아이는 어른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어른은,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 중에서 그래도 자신을 더 닮은 아이에게 더 애정을 갖게 되는 모양이다. 이것 또한 인간의 이기심과 비뚤어진 자아의 실현이다. 이제 여자는 자신의 아이 둘을 모두 잃었다. 남편도 없고, 사랑했다 믿었던 남자도 떠났고, 자신이 위안을 삼던 남자는 죽었다. 여자는 아이 찾기를 그만두지만 세상 어디에도 그녀를 반기는 곳은 없다. 왜 그녀는 그녀의 한 아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일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가를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황의 인질금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32
존 클리어리 지음, 이기원 옮김 / 해문출판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아버지의 이름으로. 영화와는 상관없다.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에도 아일랜드인들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이 작품을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이 작품에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는 두 젊은이가 등장한다. 한 명은 아일랜드인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에 IRA의 목적에 동참하게 되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아버지가 독일의 SS대원이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며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으려 한다. 한 명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바티칸의 보물을 훔치려다 일이 잘못되어 교황을 납치하게 되고 다른 한 명은 교황을 죽이려고 로마에 왔다가 교황의 납치범을 추적한다. 그 사이에 낀 교황의 인간적 고뇌가 잘 그려진 작품이다.  

교황청 보물을 훔치려던 얼뜨기 IRA 조직원들이 하필이면 그때 보물을 순찰 나온 교황과 마주치는 바람에 보물 대신 교황을 납치하고 인질로 삼아 인질금을 받아 내려 한다는 이야기다. 코미디 같지만 절대 코미디는 아니다. 작가가 호주 사람이라 아무래도 영국편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아니라면 IRA를 바보 집단이라고 생각되게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일랜드에게 반감이 있던가. 작가의 사견이 들어간 작품을 읽는 것을 제일 싫어하기 때문에 이 작품도 사실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 못했다. 아주 비극적 상황인데 단 두 사람만 행복하게 남는다. 그들은 선한 인간이고 죽은 이들은 악한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생각도 마음에 안 든다.  

테러리즘에 대한 반감이 높은 요즘이지만 한번쯤 테러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나라 사람들의 심정, 자신의 몸에 폭탄을 달고 자살 공격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렸으면 싶다. 당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일이므로. 이 작품은 영미권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상까지 받은 작품이지만 소재에 비해 너무 생각이 편협했다고 말하고 싶다. 영미권 인간만 인간이란 말인 듯 싶고 그들에게 반기를 드는 인간들은 모조리 테러리스트에 죽을 만한 인간이라는 내용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을 바보라고 말하기는 뭐하다. 남에게 몇 백년 밟히고 살다 보면 무슨 일이든 하게 되는 법이니까. 세상은 이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말하지만 자기 땅을 힘이 약해 남에게 빼앗겨 본 사람들이라면 감히 이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 투사요 전쟁의 한 방법인 게릴라전을 행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남에게 빼앗기만 한 사람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IRA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지금도 싸우는 독립 투사들이고 헤즈볼라, 알 카에다 등도 마찬가지다. 천주교를 믿는 아일랜드인들을 위해 싸워 주지 못한 바티칸과 교황은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교황의 인질금이든, 교황청의 보물이든.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 작품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나라를 위해 어떤 방법을 쓰는 사람이든 방법이 비난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절박함을 희화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당신 집에 강도가 들어와도 그것을 우스꽝스럽게 생각하겠는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고 당신이 평생 모은 재산을 빼앗기고 집도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되는 상황인데. 테러리즘과 테러리스트에 대한 재 정의가 필요한 시점이 지금이 아닌가 싶다.

인간에게 평화는 잠시 주어진 안식일뿐이고 전쟁이 삶의 전부라고 교황은 말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전쟁은 일어나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면 누가 죽어도 상관하지 않는 실정이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런 인간이 종교에 집착하는 이유도 어쩌면 자신들의 이런 잔인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단지 재미있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작가의 의도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교황의 납치는 조금 황당하게 이루어졌고 마지막의 결말은 비극과 희극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어쨌든 세상은 살아남은 자만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인지. 참 감정을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