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나이듦 - 노년의 질병,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정희원 지음 / 두리반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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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관악 갑 후보로 출마한 김대호 씨는 지역 장애인 체육시설 건립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사실상 정치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흥미로운 점은 김대호 씨의 발언이 장애인 차별이 아닌, “노인비하로 보도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다 장애인이 된다는 이야기를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점점 침침해지는 눈, 나도 모르게 절게 되는 다리, 예전 같지 않은 소화력 등 나이가 들수록 달라지는 몸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장애인이라는 말에 갑작스레 폭발한 건 아닐까. 의도한 것 같지는 않지만, 김대호 씨는 어쨌거나 노화라는 방 안의 코끼리를 모두에게 드러낸 셈이다.

 

물론 코끼리의 존재를 인지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 덩치에 놀라 호들갑을 떨며 잘못된 대책을 내놓거나, 최악의 경우 책임소재를 두고 옥신각신하다 자멸할 수도 있다. 그 점에서 노년내과 의사인 정희원이 쓴 지속가능한 나이듦은 흔치않은 책이다. 코끼리를 못 본 체 하지도, 그렇다고 그 위험을 과도하게 부풀리지도 않는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지은이는 어떻게 하면 노화라는 코끼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사회에서 개인에 이르기까지, 노인과 비노인을 아우르며 각 층위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지은이의 탁월함과 진지함에 여러 번 놀라며 책을 읽었다.

 

책은 노화를 최대한 늦출 수 있는 방법을 다룬 1부와 노년의 질병에 대한 2, 사회 차원의 대안을 고민하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목차를 그대로 따라가면 재미없으니 순서를 뒤집어 보자. 지은이는 이른바 초고령사회에 대한 일각의 두려움은 상당히 과장되었다고 여긴다. 오늘날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폐지 줍는 노인들과, 앞으로 노인이 될 이들은 꽤나 이질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현재의 기준에 따르면 머지않아 노인으로 분류될 1960년대 생은 현 시점의 노인인 1930~40년대 생과 달리 비교적 건강하고, 아직 일할 능력이 있으며,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췄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앞으로 노인인구가 늘어난다 해서 정확히 이에 비례해 부담이 커진다는 건 터무니없는 진단이다.

 

오히려 문제는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분류하는 현재의 기준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충분히 일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을 65세가 넘었다는 이유로 은퇴시키고, 연금까지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무려 70년 동안이나 바뀌지 않고 있는 노인의 기준을 조금씩 뒤로 밀어내서, 최종적으로 77세 정도로 상향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이에 따를 여러 혼란과 저항을 알고 있기에, 지은이는 앞으로 15년간 1년에 4개월씩 노인 기준을 상향하고, 그 뒤에는 28년간 1년에 3개월씩 상향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만약 2022년부터 이렇게 상향을 시작하면 2065년에는 노인 기준 연령이 77세에 도달하므로, 국민연금 고갈과 과도한 총부양비 문제도 어느 정도 완화하면서 사회적 저항 역시 최소화할 수 있다.

 

노인의 기준이 뒤로 밀리면, ‘젊은이의 기준 역시 똑같이 밀린다. 1950~60년대에 젊은 청년이 장군도 되고 건설회장 사장이 될 수 있었던 건 당시 중위 연령이 19세 정도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시 20~30대는 오늘날 40대와 비슷했다는 것이다. 1972년생인 유재석의 현재 나이는 1960년생인 이경규가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던 때와 같지만, 어느 누구도 그때의 이경규와 지금의 유재석이 똑같이늙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1981년생은 만으로 쉰이 되는 2031년에야 1967년생이 만으로 서른이었던 1997년에 누린 사회적 지위에 이를 수 있다. 앞 세대가 똘똘 뭉쳐 기득권을 수호하고 사다리를 걷어차 버려서가 아니라, 생애주기가 전체적으로 길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맞춰 사회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재정비하고, 개인 역시 더 길어진 삶에 적응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과거에 비해 사람들이 더 오래, 건강하게 살게 되었다 해도 노화를 피해갈 수는 없다. 또 앞으로 노인이 될 60년대 생이야 그렇다 쳐도 이미 노인인 30~40년대 생의 질병과 장애, 빈곤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노화라는 정해진 미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지은이는 살던 곳에서 나이 들기라는 현재의 재가 중심 서비스에 의문을 던진다. 서비스 제공자가 여러 곳을 순회해야 하는 만큼 효율이 떨어지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돌봄은 저밀도의 재가 중심이 아니라 고밀도의 시설 중심이어야 한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아마 눈 밝은 독자라면 마강래의 지방도시 살생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원격의료의 도입 역시 고려해봄직하다.

 

나아가, 지은이는 보건복지부를 보건부와 복지부로 쪼개려는 일각의 움직임에도 단호하게 반대한다. 그도 그럴 것이 특히 노인에게 질병과 장애, 돌봄은 복잡하게 얽혀있어 어느 하나만 떼어내기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노화가 진행되면 기력이 쇠하고, 병에 걸리기도 훨씬 쉬워지며,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앞으로 고령화에 따른 노인인구의 증가가 한국사회의 중요한 과제가 되리라는 점이 무척이나 자명한 만큼, 보다 통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보건과 복지의 긴밀한 연계는 꼭 필요하다.

 

노인 문제를 고민할 때의 이러한 복잡성은 노화에 따른 질병을 다룰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적어도 노년의 질병에 대해서만큼은, 해결책은 간단명료할수록 좋다는 오컴의 면도날이 제 역할을 못한다. 나이를 먹어가며 얻게 된 여러 지병과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는 장기가 상호작용하며 일종의 복잡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무려 1년 넘게 소화 장애와 파킨슨병 증상이 멈추지 않던 70대 후반 A씨의 고통이 고작 진통소염제 한 알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진통소염제와 함께 처방한 소화제가 신경계 부작용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처방받은 파킨슨 약이 구역과 구토를 일으키고, 이것이 다시 소화제 처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일으킨 것이다.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등산과 골프를 즐길 만큼 건강하던 A씨는, 다른 사람의 부축 없이는 걷지도 못하고, 흰죽과 미음밖에는 먹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고 말았다.

 

주치의 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급격히 의료자원이 풍부해지며 환자가 곧바로 전문의를 만날 수 있게 된 한국의 독특한의료시스템 역시 A씨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구토를 하면 내과 의사를 찾고, 손발이 떨리면 신경과 의사를 찾는 식으로 질병 중심의 진료를 받은 결과, 오히려 약물 사이의 예상치 못한 상호작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지은이는 A씨가 지난 1년간 복용했던 약들의 자서전을 꼼꼼히 살핀 결과 복잡계를 건드린 원인을 찾을 수 있었고, A씨는 밥과 김치를 먹고 지팡이 없이 병원에 걸어올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노인의학은 얽히고설킨 이어폰 줄을 풀어가는 일과 비슷한, 일종의 역추적 문제풀이인 셈이다.

 

이렇듯 노년의 질병은 원인을 찾기도, 상태를 호전시키기도 무척이나 어렵다. 하지만 지은이는 노화에 대응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잘 먹고, 꾸준히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면 노화를 (아예 막을 순 없지만) 최대한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본격적으로 노화에 따른 변화가 진행되는 50대 이전에 이를 실행에 옮길 필요가 있다. 마치 적금을 드는 것처럼 매일 매일의 조그만 실천이 노화의 그래프를 최대한 길고 완만하게 연착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단언한다, 기술이 발전해 노화를 멈추고 영원한 젊음을 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무병장수를 선물하리라는 희망은, 마치 컴퓨터 게임을 잘 하기 위해 반도체 공학을 공부하는 것과 같은 전형적인 생목의 오류. 심지어 지은이는 어린 시절에는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나이가 든 뒤에는 우수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 1960년대 생에 비해 어릴 때부터 전자기기와 불량식품에 둘러싸여 생활한 1980~90년대 생의 평균수명이 더 낮을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마저 내놓는다. 한때 트위터에서 유행했던 글처럼, 우리는 고장 난 스마트폰 같은 몸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운명이다.

 

이 운명은, 아무리 영양제와 건강식품을 챙겨먹는다고 한들 절대 바꿀 수 없다. 오히려 역효과만 낼 뿐이다. 방법은 단 하나, 절식하고,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길 뿐이다. 특히 절식! 설탕은 금물이다. 탄수화물도 줄일수록 좋다. 인간은 좀 적게 먹는다고, 식사횟수 좀 줄인다고 크게 잘못되지 않는다. 오히려 건강해진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어차피 고기를 소화하기 힘들어하는 노인인구가 늘어난다면 대체육 시장이 발달하고 소고기는 최상류층의 사치품이 될 테니 미리 적응한다는 마음으로 지금부터 고기를 줄이면 된다.

 

당연하겠지만,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아니, 동의하지 못한다가 정확한 표현이겠다. 노화를 최대한 늦추기 위한 로드맵이 너무나 따라가기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솔직히 이건 뭐 평생 수도승처럼 살라는 얘긴가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그저 노화라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는데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출간된 전현우의 거대도시 서울 철도와 마찬가지로, 지속가능한 나이듦역시 노화에 대한 새로운 사회계약을 제안한다. 노인의 기준은 몇 살로 잡을 것이며 새로운 기준에 따라 개인과 사회의 라이프 사이클은 어떻게 재조정될 것인지, 노인에 대한 의료와 복지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해 어떠한 물적, 제도적 조건이 필요한지, 노화를 최대한 늦추기 위한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까지, 노화에 대해 논의하고 합의할 사항이 이렇게나 많다. 노화라는 코끼리에 어찌 대처할지 몰라 쩔쩔매지 않고 보다 나은 사회계약을 고민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첫 단추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읽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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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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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정말 탁월하다, 고 생각했다. 이건 괴물같다, 와는 다르다. 사람들이 보통 젊은 작가에게 기대하는 건 천재성, 광기, 실험성, 불안함 등이다. 하지만 서이제는 놀랄 만큼 안정적으로, 원숙하게,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90년대 초반생(아마 92~94년생 정도?)의 삶을 그려낸다. 비슷한 또래의 예술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관찰되는 자의식 과잉, 불안, 폐쇄성, 히스테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자조나 달관을 가장한 위악을 부리지도 않고 정직하게, 일체의 비하나 연민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그것도 거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이렇게 쓰면 이렇게 읽히겠구나를 충분히 고민하고 글을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 에세이, 비평, 학술논문, 웹툰(작가는 영화를 전공했다지만 난 이쪽이 제일 잘 맞을 것 같다) 등 정말이지 다양한 장르가 소설에 녹아 있는 느낌인데, 작가가 글쓰기의 영역을 좀 더 확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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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 좋아요, 알림설정까지 - 유명해지고 싶은 2030 인류학 보고서
정연욱 지음 / 천년의상상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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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루언서에 대한 탁월한 비평이라기보다는, 그러한 비평의 재료로 (가령 "비평적 픽션"의 형태로!) 쓰임직하다. "이런 식으로 문화기술지 쓰면 교수님께 혼 안나요?"라고 묻고 싶었으나, 한편으론 이 납작함과 투명함이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자동 사람들》이나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처럼 '전형적인' 연대 문화학 협동과정틱한 글과는 거리가 있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연대 출신의 이미지에는 부합하는 희한한 텍스트. 《대학내일》이나 장류진의 소설(공교롭게도 이쪽 또한 '전형적인' 연대생 멘탈리티!)과 비슷한, 일종의 '풍속도'로 읽으면 될 것 같다. 그래도 몇몇 대목은 꽤 뼈때렸어, 가령 이런 식으로.

"게다가 돈 많고 몸 자랑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완결된 사람들이다.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정신파는 결핍에서부터 출발한 매서운 반골들이다. 단단한 정신으로 무장하여, 세상의 인정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내보인다."(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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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새해가 찾아온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어느 때보다 책에 빠져들기 좋은 환경이었음에도, 올해 읽은 책은 작년보다 줄어 총 124권입니다. 제가 책을 고르는 안목이 없어서인지, 출판계가 예년보다 부진했는지,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순히 읽은 책의 양뿐 아니라 질 역시 떨어진 느낌입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2020년에 나온 책만으로는 올해의 책 열권을 추릴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12월 들어 반짝이는 신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일찍 읽었더라면 오랫동안 그만뒀던 서평 쓰기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요.

 

  2020년도 역시나 주요 언론사가 꼽은 2020년의 책들은 경향신문정도를 제외하곤 그저 그랬습니다. (특히 동아조선처럼 감각 있는 외부 필진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지도 못한 한겨레는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작년처럼 2020년에 나온 책들로만 열권을 꼽아 봤습니다. 작년에 쓴 글을 보니, 2020년의 목표로 두 가지를 적었더군요. 하나는 매주 꾸준히 서평을 쓰는 것, 다른 하나는 저자를 기다리게 하는 서평가가 되는 것. 이 얼마나 오만한 목표였는지요. 올해는 그저 뜨문뜨문, 하지만 완전히 놓지는 않고 서평을 써보려 합니다. 늘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하 반말)

 

1. 정의의 감정들 

조선의 법체계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건 크게 두 가지, 원님재판과 저 놈의 주리를 틀라!”일 것이다. 공명정대한 성문법도, 독립적인 판관도 없이 고을 수령이 제멋대로 내리는 판결, 그리고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가혹했던 야만적인 고문과 처벌은 그간 조선시대가 법에 의한 지배가 전혀 관철되지 않는 사회였다는 유력한 증거가 되어 왔다. 그 연장선상에서 1912년 일제가 도입한 조선민사령이야말로 이 땅에 처음으로 뿌리내린 근대의 씨앗이라는 주장도 가능했다.

정의의 감정들은 조선의 법체계가 근대적이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고루한 논쟁을 우회해, 당대의 약자였던 여성들이 어떻게 법정이라는 무대에서 정의를 호소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원통함()을 해결하고자 기꺼이 주체가 되어 목소리를 낸 다양한 신분의 여성들을 보노라면, SF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이감(Sense of Wonder)은 비단 거대하고 웅장한 서사를 통해서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임진전쟁 이후의 조선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원을 찾는 건 이제 좀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국민청원을 비롯해 오늘날 한국의 모습을 자꾸 떠올리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2. 거대도시 서울 철도 

  매일 밤,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 앞에는 광역버스를 기다리는 긴 줄이 여럿 만들어진다. 하남, 성남, 용인, 수원 등 경기 동남부의 위성도시 거주자인 이들은, 낮 동안 서울 각지에서 분주히 일하다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입구역에 집결해 각자의 보금자리로 가기 위한 긴 여정을 기다린다. 거대도시 서울철도의 저자 전현우는 이들이야말로 서울이란 거대도시의 통근 패턴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 서울 내 이동에선 지하철이 앞서지만 시계(市界)를 넘는 먼 거리는 광역버스가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후위기를 대비하기 위해선 자동차와 버스의 수요를 철도가 흡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핵심은 신분당선과 같은 광역급행의 확충과 GTX를 연장한 광역특급의 대대적 준설이다. 북한과 중국까지 내다보는 호방함과 경기도 도농복합시 중 최약체인 광주를 배려해주는 세심함을 갖춘 동시에, 분석철학 전공자가 철덕이 되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가 탄생할 수 있는지를 실감케 한다.

 

3. 대표: 역사, 논리, 정치 

  정치사상은 흔히 현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상아탑의 고담준론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소한 대표(representation)에 관한 한, 정치사상은 여전히 현실을 보다 잘 이해하고 나아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강력한 자원이다. 가령 총학생회가 학내 구성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남혐강사를 초청했다며 전학대회에서 총학생회장 탄핵안이 발의된 모 대학을 살펴보자. 총학생회는 선출된 순간 나름의 자율성을 지니는가, 아니면 학내 구성원의 뜻을 철저히 모사(摹寫)해야 하는가? 만약 후자라면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대표: 역사, 논리, 정치는 이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대표 개념의 역사와 그 논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미래를 위해 그 범위를 확장할 것을 제안한다. 얇지만 밀도가 높기에 후루룩 읽고 넘기기보다는 여러 번 정독하며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4. 연년세세 

 황정은이 2014년에 퍼낸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는 주인공 소라와 나나를 돌봐주는 이웃집 아주머니 순자가 등장한다. 그는 접경지대에 있는 할아버지의 묘에 매년 제사를 지내러 간다. 그리고 황정은이 2020년에 퍼낸 연작소설 연년세세의 첫 단편인 파묘破墓, 똑같이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역시 접경지대에 있는 할아버지의 묘를 파버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책이 나온 해를 기준으로 6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황정은은 연속보다는 단절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단절은 의식적인 결단이라기보다는 자연스레, 혹은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어버린 상황에 가깝다. 연년세세, 즉 여러 해를 거듭하며 계속 이어진다는 뜻을 담은 제목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그간 해오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기도, 가장 가깝지만 그래서 자신을 힘들게 한 이를 원망하기도, 혹은 전혀 뜻밖의 일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 그 무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은 끊길 수밖에 없고 무엇은 이어져야만 하는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질문이다.

 

 

5. SF 작가입니다 

  단언컨대 배명훈은 한국에서 가장 지적인 작가다. 그가 처음으로 낸 에세이집인 SF 작가입니다는 평행우주나 타임머신처럼 SF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SF하면 으레 떠올리는 주제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배명훈이 이야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계. 이때의 세계란 있는 그대로의 세상보다는 조금 작은, 그러니까 세상을 나름의 주관과 논리에 따라 재배열해 만든 작지만 질서 있는 소우주다. 배명훈이 생각하는 SF란 결국 세계에 대한 이야기, 즉 작가가 만들어낸 소우주가 주인공인 이야기이며, 그런 만큼 순문학과 SF의 독법은 달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비단 작가 지망생이나 SF 애호가들뿐 아니라 대학원생이나 연구자, 좀 더 소박하게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은 모든 이들이 읽으면 좋겠다.

 

6.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하나의 유령이 출판계를 배회하고 있다, 유튜브라는 유령이. 구텐베르크 혁명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매체로 등극했던 책은 이젠 유튜브 혁명으로 영상에게 그 자리를 내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있다. 머지않아 책은 박물관에서나 보게 될 것이라는 비관과 책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낙관이 횡행하는 가운데,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이러한 불안에 따뜻하고 진지하게 응답하는 흔치않은 책이다. 두 저자는 책의 존폐 여부보다 중요한 건 사람과 사람, 매체와 매체를 잇는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이며, 이를 가장 잘 기를 수 있는 방법은 읽기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결국 책을 다시 살려낸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와 조롱이 유독 심했던 2020년이었던 만큼, 상대방을 존중하며 대화를 통해 앎을 확장하는 두 저자의 모습이 참 귀하고 소중하다.

 

7. 서울, 권력도시 

 이른바 근대는 한국사회가 아직도 풀지 못한 커다란 숙제다. 특히 일정기(日政期)에서 대일항쟁기까지 그 명칭도 다양한 식민지시대에 대한 평가 문제에선 더더욱 그렇다. 이 시기를 설명하는 유력한 관점들인 수탈론과 근대화론, 근대성론은 모두 근대의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려왔다. 다만 근대가 조선을 철저히 털어먹었는지, 발전시켰는지, 아니면 규율권력을 창출했는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반면 서울, 권력도시, 비록 의도하진 않았을지언정 총독부의 동화정책에 웃음으로 저항한 경성의 조선인들을 통해 근대란 기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대담한 생각을 내비친다. 조선인들은 그 안에 담긴 총독부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오락을 오락으로 즐겼으며, 총력전이라는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신사 앞에서 조선식 큰절을 했다. 그들은 근대의 폭력에 저항해야겠다는 거창한 사명감으로 움직인 게 아니다. 그저 근대를 의식조차 하지 않고 평소처럼 생활했을 뿐이다. 어쩌면 카터 에커트가 말한 제국의 후예란, 강력한 발전국가나 이에 기생하는 재벌 따위가 아니라 이처럼 권력의 선전에 웃음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8. 사치와 고요 

 누군가에게는 동인문학상과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끝내 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 책의 전부일 수도 있겠다. 확실히 기준영의 소설은 심심하고, 밋밋하다. 요즘 출판시장 최대의 소비자인 2030 여성의 호응을 얻을만한 요소도 부족하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독자는 이 책에서 때론 사치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과잉된 감정들이 모두 잦아든 뒤 찰나와도 같이 찾아오는 고요의 순간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기준영은, 마치 섬세하고 정교한 유리 공예품 같은 그의 소설에서, 오해와 불신,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도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그는 장편보다는 단편이, 초기작보다는 나중 작품이 좋은 작가다.

 

9.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그 성과에 부러움과 질시의 시선을 보내든, 그 불충분함에 야유 섞인 눈초리를 보내든, 그간 한국에서 메이지유신이란 기본적으로 서구화 운동이었다. 21세기의 나이토 고난이라 할 수 있는 박훈이 문제 삼는 건 바로 이러한 서구중심주의다. 그의 첫 한국어 학술서인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는 메이지유신의 원동력이 사대부적 정치문화였다고 이야기한다. 종적(縱的)인 박스형 사회였던 일본에서 하급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확산되며 횡적(橫的)인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이를 토대로 천하의 공론에 목소리를 내는 문화가 형성됨으로써 비로소 메이지유신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유교 없는 유신은 불가능했어도 유신 없는 근대는 가능하지 않았을지, 혹은 군현화가 시대적 대세던 일본에서 어떻게 봉건화의 핵심인 의회개설이 가능했을지와 같은 재밌는 질문거리를 안겨주는 책이기도 하다. 다만 편집이 조금 아쉬운데, 까치나 일조각에서 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10. 누가 백인인가?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의 블랙페이싱 논란 등, 한국에서 2020년은 그 어느 해보다 인종차별에 대한 관심이 컸던 해일 것이다. 그럼에도 누가 백인인가?가 크게 화제를 모으지 못한 건, 조금 이상하게까지 느껴진다. 저자는 명료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미국에서 백인, 흑인, 황인, 히스패닉을 비롯한 인종이 어떻게 발명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때로는 그 명료함이 조금 아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저자가 명료하게 정의내린 것이 과연 그렇게까지 명료한지 토론해볼 여지를 마련해준단 점에서 결코 나쁘진 않다. 가령 저자는 미국에서 히스패닉이 민족집단인지 인종집단인지 논란이 계속됐다고 하는데, 애초에 민족과 인종이 그렇게까지 상호배타적인 개념일까? 고등학교나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이 책을 읽고 인종을 둘러싼 여러 쟁점들에 대해 한바탕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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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eg 2021-01-04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보았습니다.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되었네요. 찾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유찬근 2021-01-04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운하와 중국 상인 - 희.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조영헌 지음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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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이 한창이던 1957년 미국, 예순을 갓 넘긴 유대계 독일인 망명객 카를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은 곧 세상을 뒤흔들 한 권의 책을 내놓을 참이었다. 제목은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 소련 체제의 기원을 동양에서 찾음으로써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사실은 공산주의 비판보다도 막스 베버를 사사하고 그 자신 탁월한 중국연구자이기도 했던 비트포겔 평생의 연구를 집대성한 성격이 더 강한 책이었다.

 

비트포겔이 보기에 소련 공산당이 정통으로 공인한 단선형 발전론, 즉 세계의 모든 지역이 시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근본적으로 동일한 역사적 궤적을 그려간다는 가정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자본주의로 이어지는 맑스의 도식은 사실상 유럽과 일본의 역사에만 적실성을 지니며,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비서구는 수력사회(hydraulic society)라는, 영속적이고도 억압적인 체제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수력사회는 주로 대규모 치수(治水)가 필수적인 반건조지대에서 형성되지만, 몽골지배 이후의 러시아처럼 자연조건이 맞지 않을지라도 유목민이라는 감염원을 통해서 얼마든 뿌리내릴 수 있다. 비트포겔은 심지어 태평양의 도서지역인 하와이마저 수력사회로 분류하니, 수력사회란 사실상 봉건제를 거치지 않은 세계의 모든 지역에 해당하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수력사회에선 무소불위의 지배자와 그를 보좌하는 관료집단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된다. 사회는 국가에 완전히 종속되며, 상업과 수공업은 최소한의 수요를 뒷받침할 수준으로만 발전한다. 아무리 부유한 자라 할지언정 자식에게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하기에 그 규모가 점점 영세해질 뿐 아니라 그나마도 약탈적 관료집단에게 수탈당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때문에 수력사회에서는 사적소유권에 기초한 대의민주주의도, 자유로운 상거래를 통한 자본주의의 발전도 모두 난망한 일이다. 억압과 굴종, 가난을 영구히 이어가는 것만이 수력사회에 주어진 운명이며, 이를 유일하게 반전시킬 수 있는 건 오로지 선진적인 외세의 침략뿐이다. 물론 수력사회의 관성은 매우 강하기에 기껏 주어진 해방의 기회조차 도리어 더욱 억압적인 체제로 귀결될 따름이다. 1차 세계대전의 결과 러시아에 민주적인 공화국이 아니라 차르전제의 업그레이드판인 소련이 들어섰단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외세의 침략이 없는 이상 비서구엔 꿈도 희망도 없다는 비트포겔의 이야기는 분명 고약하고 오만하다. 하지만 그에 맞서 비서구도 서구와 같은 역사발전과정을 겪었다고 주장하는 건 되려 비트포겔이 짜놓은 판에 놀아나는 꼴이다. 생각해보라, 그간 얼마나 많은 비서구 지식인들이 자국 역사에서 중세봉건을 발견, 혹은 발명하려 들다가 끝내 주화입마에 빠지고 말았는가? 따라서 정말로 비트포겔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이고 싶다면, 오히려 그의 동양적 전제주의와 수력사회론을 받아들이되 그 실상을 조금은 다르게 그려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그리고 조영헌의 대운하와 중국 상인,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비트포겔에 대한 가장 탁월한 전유(專有)처럼 읽히는 책이다. 수력사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운하를 둘러싼 우여곡절과 이를 이용해 부와 명성을 거머쥔 휘주상인의 흥망사를 따라가다 보면, 동양적 전제주의란 꼭 일방적인 지배와 굴종, 그리고 가난으로 점철되지만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황하를 다스림으로써 순() 임금의 뒤를 이었다는 우() 임금의 전설에서 알 수 있듯, 치수는 중국에 문명을 꽃피운 가장 중요한 요인이자 제국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 물을 다스리려는 노력은 천명이 바뀔지언정 면면히 이어졌고, 마침내 수나라 양제(煬帝)는 화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의 대운하는 그 북쪽 종착점이 고작해야 낙양이었던 데다, 황하, 회하, 장강이라는 자연하천을 연결한 데 지나지 않았기에 한계가 뚜렷했다. 북경과 항주를 잇는 총연장 1794km의 대운하가 완공된 건 원대에 이르러서다. 그나마도 몽골 조정은 유목민답지 않게(?) 운하를 통한 하운(河運)보단 바다를 통한 해운(海運)을 선호했던지라 중요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운하가 천하를 다스리는 중요한 인프라로 부상한 건 한족 왕조인 명이 원을 북쪽의 고비사막으로 쫓아내고 중원의 지배자로 등극하면서부터다.

 

다들 알다시피, 명조의 첫 수도는 유서 깊은 한족의 도시 남경이었다. 그러나 명태조 주원장의 4남인 연왕(燕王) 주체가 쿠데타(정난의 변)를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남경의 수도 지위는 매우 위태로워졌다. 북경 천도가 공공연히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가 된 주체, 아니 이젠 영락제로서는 불순분자들이 득시글대는 남경을 떠나 자신의 홈그라운드에서 마음 편히 포부를 펼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단순히 영락제 개인의 선호로 치부하기엔 문제가 조금 복잡했다. 사실 명은 중국사를 통틀어 이전 왕조를 완벽히 소멸시키지 못한 유일한 왕조였다. 천명이 자신들에게 완전히 넘어오지 않았다는 명분상의 약점은 물론, 막북(漠北, 고비 사막 이북)의 몽골이 언제든 중원을 위협할 수 있었다는 보다 실제적인 위협도 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락제는 과감하게 오랑캐가 건설한 식민도시인 북경으로 천도, 북방의 군권을 직접 통솔하며 북으로는 몽골을 견제하고 남으로는 중원을 다스리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북경이 수도로 확정되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북경 천도를 지지하던 신하들은 송의 수도 개봉이 의지할 험요함이 있으나 막힘없는 수로가 없고(有險可依而無水通利也), 당의 수도 장안이 막힘없는 물길이 있으나 의지할 험요함이 없는 반면(是有水通利而無險可依也) 북경은 이 둘을 모두 갖추었으니 새 수도로 손색이 없다며 황제의 뜻을 옹호했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북경은 의지할 험요함도, 막힘없는 수로도 쉬이 확보하기 힘든 곳이었다. 어느 쪽이든 국가의 인위적인 개입을 통해 보강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명은 북으론 만리장성을 쌓아 험요함을 더했고, 남으론 대운하를 뚫어 수로를 마련했다. 이후 북쪽의 장성과(정확히는 장성이 상징하는 북방경비) 남쪽의 대운하, 그리고 양자를 연결하는 수도 북경은 명과 그 이후의 청대까지 제국의 성격을 규정짓는 근본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저자가 북경 수도론을 내세우는 이유다.

 

문제는 장성도, 운하도 한 번 쌓거나 뚫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 다 자연을 거슬러 만든 인공물인 만큼 꾸준한 유지·보수공사가 필수적이었다. 특히 운하의 경우 명왕조가 바다를 걸어 잠그고 조운을 비롯한 모든 물류를 대운하로 일원화했기 때문에 막대한 부담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곳이 이른바 회·양 지역이었다. 회하(淮河)와 홍택호를 끼고 있는 회안(淮安)에서 시작해 장강을 마주보는 양주(揚州)까지를 일컫는 이 지역의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로 대운하의 상류에서 황하의 막대한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둘째로 중류에서 택국(澤國)이라 불릴 정도로 많았던 이 지역의 호수들이 걸핏하면 대운하에 간섭해 수심이 일정치 않았으며, 셋째로 하류에서 하수(河水)를 양자강과 바다로 배출하기 쉽지 않았던 데다 자칫하면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양회염전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요컨대, 풍요로운 강남의 물류를 화북으로 실어 나르는 초입에 위치한 회·양 지역은 조운과 염정(鹽政), 그리고 하공(河工, 운하 공사)의 삼대정(三大政)이 마치 이 지역의 수로마냥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이었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말마따나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어떠한 부족함도 없는도시인 북경의 풍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회·양의 삼대정을 해결해야 했고, 아무리 전제적일지언정 이는 국가가 단독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연히 국가는 북경을 수도로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부담을 나눌 수 있는 상대를 찾아 나섰고, 이에 기꺼이 응한 자들이 바로 상인, 그중에서도 휘주(徽州) 상인들이었다.

 

휘주는 안휘성(安徽省)의 한 부(), 산지가 많아 예로부터 농사로 먹고살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이 궁벽한 동네가 천하를 쥐고 흔드는 상인들의 고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일차적으로는 소금, 보다 근본적으로는 북경이라는 돈 먹는수도 덕분이었다. 예로부터 소금은 철과 더불어 중국 역대 왕조의 가장 중요한 관리대상이었는데, 명 왕조는 개창과 함께 개중법(開中法)을 제정해 소금을 국방과 연결시켰다. 개중법이란 상인에게 북방 변경의 지정된 장소로 곡물을 운송하면 양주의 염운사에서 소금의 운송·판매권인 염인(鹽引)을 지급하는 법으로, 수도 북쪽의 방비를 탄탄히 하고자 고안된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곡물의 운송부터 소금의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을 동일 상인이 부담해야 했으므로, 당시 소금으로 부를 거머쥔 건 지리적으로 변경과 가까웠던 산서(山西)와 섬서(陝西)의 상인, 곧 산섬상(山陝商)이었다.

 

하지만 북방에 곡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걸 감안해도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었던 개중법은 결국 1492, 양주의 염운사에 은을 납부하는 것만으로 염인을 부여하는 운사납은제(運司納銀制)로 바뀌게 된다. 이로써 소금의 유통과정 역시 분업화되기 시작했는데,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간 이들이 바로 휘상이었다. 이들은 전당업에 주로 종사했기 때문에 국가의 화폐인 은과 민간의 화폐인 동전의 환전에 유리했다. 또한 이전부터 장강을 따라 목재를 유통했던 만큼 어디까지나 북쪽 출신인 산섬상과 비교해 영업망도 결코 꿇리지 않았다. 여기에 강력한 가족·종족 결속력이 더해지며 휘상은 소금을 유통하는 수상(水商)으로, 일부는 양주의 염운사와 직접 소금을 거래하는 내상(內商)으로 활동영역을 조금씩 넓혀갔다.

 

이처럼 16세기를 거치며 휘상은 염운계의 슈퍼루키로 성장해갔지만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간다고, 아직까진 산섬상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했다. 그러나 1598, 몽골의 보바이 난, 조선의 임진왜란, 묘족의 양응룡 난(일명 만력 3대정)을 진압하는데 들어간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고자 태감(太監) 노보가 파견되며 휘상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 노보는 충분한 고민 없이 세금 징수를 위한 염인인 부인(浮引)을 남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규 염인인 정인(正引)을 유통하던 산섬상이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반면 휘상에게 부인은 수상을 넘어 내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매우 좋은 사다리였다. 이들은 기존 질서가 와해되는 과정에서 간상(奸商, 간사한 상인)이란 소리까지 들어가며 세력가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고, 그 결과 산섬상을 몰아내고 회·양 염상계의 지존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물론 휘상의 약진은 어디까지나 명말의 혼란기를 틈타 이루어진 만큼 언제든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는 불안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하늘은 여전히 휘상의 편이었다. 1617년 등장한 강운법(綱運法)은 기존의 산발적인 내상들을 강()이라는 10개의 조합으로 재편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강책의 권리인 염와(鹽窩)에 대한 배타적 세습권을 인정한 것이다. 휘상으로서는 치고 올라가야 할 시점에는 질서가 흔들리더니 정점에 오른 뒤에는 질서가 그대로 굳어져버린, 이보다 좋을 수 없는 결과였다. 게다가 강에 속한 상인들은 할당량에 대한 세금만 납부하면 나머지 염운 과정에선 국가로부터 재량권을 위임받았기에 휘상은 상업활동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자유까지 얻은 셈이었다. 결국 명에서 청으로 천명이 교체된 뒤에도 강운법이 계속 유지됨으로써 휘상은 회·양 최대 상인집단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굳힐 수 있었다.

 

휘상의 이러한 약진은, 당연하겠지만 주변의 질시와 경멸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상업을 천시하는 사대부의 고장인 강남에서 휘상은 어디까지나 권세가에 빌붙고 경쟁자를 잔혹하게 제거하여 부를 일군 모리배에 불과했다. 휘상으로서도 간상 딱지는 사업에 좋지 않았으므로 어떻게든 이미지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을 터, 고심하던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게 전란으로 황폐화된 회·양 지역, 특히 양주의 참상이었다. 휘상의 기반인 이곳은 남명군과 청군의 연이은 침략으로 삶의 기반이 모조리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안 그래도 말썽이던 대운하의 기능 역시 정지되어 국가적으로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휘상은 양주, 나아가 천하의 근심을 기꺼이 떠맡음으로써 자신들이 그저 이익만을 탐하는 천한 장사치가 아님을 몸소 증명해보이기로 한다. 그중에서도 잠산도 정씨(程氏)의 사례는 전근대 중국에서 상인이 차지한 독특한 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기할 필요가 있다.

 

안휘성 휘주부 흡협에 위치한 향촌인 잠산도(岑山島) 출신인 정씨 일족은 본래 유학을 공부하는 문인 가문이었으나 가세는 조금씩 쇠락해갈 뿐이었다. 결국 17세기 초, 11세손 정필충은 휘주에서 회안의 안동현(安東縣)으로 이주해 소금장사에 뛰어든다. 정필충은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원만히 처리하고 빈민구제에도 힘써 정옹(程翁)이라는 존칭을 얻을 정도로 지역사회의 신망을 얻었고, 그의 아들 정재는 염상계의 대표로서 관과 교섭하는 좨주(祭酒)로 추대된다. 좨주가 된 정재는 소금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국고를 빌려 운하를 준설했을 뿐 아니라, 이미 안동을 떠나 회안에 살고 있었음에도 당시 황하의 범람으로 고통 받던 안동에 제방을 쌓는 등 치수에 힘썼다. 이에 감읍한 읍민의 요청으로 관부는 정씨 가문에 안동적(安東籍)을 부여했다. 천한 상인에다 외지인이기까지 한 정씨가 비로소 지역 신사(紳士)에게 내부자로 인정받는 순간이자 그 자신도 신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조선의 조카 정증 대에 이르러 정씨 가문의 영광은 극에 달했으니, 무려 강희제를 알현하는 은총을 입은 것이다. 정증은 독서를 즐기던 엘리트이자 회·양 지역 염상의 대표자인 총상으로, 하공·조운·염정의 삼대정을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 손쉽게 해낸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강희제를 가장 골치 아프게 했던, 양주와 장강을 잇는 길이 약 10km의 망도하(芒稻河) 준설에 필요한 재원을 뚝딱 마련했을 뿐 아니라 실제 공정도 진두지휘했다. 감격한 강희제는 1705년 그의 다섯 번째 남순(南巡)에서 정증을 행궁으로 초대해 정로(旌勞, 노고를 위로하고 표창함)라 쓴 어서를 하사하고 종7품인 중서사인(中書舍人)의 직함을 제수했다. 상인으로는 유일무이한 명예요, 영광이었다.

 

황제가 안겨준 명예는 단순히 명예에 그치지 않았다. 관직을 제수 받았다 함은 곧 지역사회의 현안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신사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정증은 돈 많은 상인에서 지역사회의 각종 현안을 처리하는 지역 엘리트로 부상했고, 그의 자식들은 대부분 관직을 역임했다. 경제적인 특혜도 있었다. 남순 2년 뒤인 1707년 강희제가 호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증을 비롯한 30여 명의 총상에게 다른 상인들이 담당하던 식염(食鹽) 판매권을 준 것이다. 새로 얻게 된 사회적 영향력과 한층 두터워진 경제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정씨 가문은 각종 공익사업에 활발히 참여했다. 정증의 넷째 아들 정종은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 시절 회안의 자선단체인 육영당에 운영 자금을 보탰고, 아예 보제당이라는 별도의 자선단체를 건립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그는 회안에 수재가 발생했을 때 수재민을 위한 구호 시설인 서류소 건립에 참여하고 운영을 주도해 10만여 명의 수재민을 구하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그러했듯 정종의 선행은 황제를 감동시켰고, 건륭제는 그에게 의돈임휼(誼敦任恤, 정의가 돈독하여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이라 쓴 어서를 내림으로써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비록 잠산도 정씨 가문이 유달리 튀는경우이긴 하지만, ·양 지역의 최대 현안인 삼대정의 해결에 적극 참여하고 공익사업에 헌신함으로써 관부, 나아가 황제의 신임을 얻는 건 당시 휘상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특히 강희제와 건륭제가 각각 6번씩 행한 남순은 휘상에게 자신들이 이렇게나 신사적인상인임을 어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는 하공을 중시했던 강희제보다 강남의 고급문화 향유가 목적이었던 건륭제 때 두드러졌는데, 휘상은 그야말로 영혼을 끌어모아 천자의 남순에 필요한 각종 공무와 연회 준비에 앞장섰다. 상인들의 이와 같은 자발적인헌신에 건륭제는 각종 사여와 의서로 보답했고, 양자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저자의 말마따나 휘상이 아쉬워했던 건 황제의 잦은 방문도, 남순에 따른 경제적 부담도 아니었다. “오히려 1784년 이후 기세등등한 황제가 다시는 양주로 내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p.292.) 황제는 회·양의 지역 경제와 도시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대운하를 둘러싼 우여곡절과 이를 이용해 부와 명성을 거머쥔 휘주상인의 흥망사는, 우리로 하여금 비트포겔의 입론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게끔 북돋는다. 다시 말해 중국의 전제주의(Despotism)’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상상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명과 청은 거대한 장성을 쌓고 기다란 운하를 뚫을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 동시대 유럽이나 일본의 국가들보다는 강력하고, 또 총체적인 권력이었다. 하지만 이를 실제로 시행한 건 휘상을 비롯한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국가의 명령을 받들어, 혹은 자발적으로 공공사업에 헌신했으며 그 대가로 관직을 얻고 경제적 이익을 누렸다.

 

물론 비트포겔 역시 중국에 대해서만큼은 수많은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가령 그는 중국이 수력사회 중 사적 소유권이 고도로 발달한 거의 유일한 지역일 뿐 아니라, 신사계급의 구성원들이 때로는 백성을 대변하여 통치자에게 일정 수준의 합리성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고 이야기한다. 스승 막스 베버가 제정 중국의 중앙정부가 비교적 허술한 방식으로 지방관료기구를 지휘감독 해나갔다는 점에 놀랐다고도 적고 있다. 그럼에도 비트포겔은 중국의 노역이 여타 동양과 달리 세금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이 그 강제성과 예속성을 지워주진 못한다며, 끝내 중국에 대한 비관적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곡물을 북방 변경까지 직접 운송하는 대신 은을 지불하는 식으로 염운법을 바꿈으로써 중국 경제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떠올린다면, 적어도 비트포겔처럼 이를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으리라. 특히 명대 조세의 은납화가 비단 중국경제뿐 아니라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경제마저 쾌락의 혼돈”(티모시 브룩)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은 경제만이 아니다. 잠산도 정씨가 보여주듯 운하 정비와 공공사업에 힘써 황제의 인정을 받은 유력 상인 가문의 존재는, 명청대 국가와 상인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황제는 허함(虛銜)에 가까운 직함과 9품 관원이 착용한 모자를 하사하는, 자신에겐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을 통해 상인들을 길들이려했지만(p.292.), 상인들은 상인들대로 황제의 후광을 이용해지역사회의 신망을 얻고 특권을 따냈다. 이 점에서 저자의 박사논문에 유용한 논평을 해주기도 했다던 피터 볼의 통찰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볼은 명청대 중국의 인구가 크게 늘어났음에도 관직 수는 거의 변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며, 이를 성리학의 전파에 따라 스스로를 도덕적 실천의 주체로 자임하는 사() 계층이 두텁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즉 만인의 성인됨을 긍정하는 성리학이 사회에 점차 뿌리내리며 정부 바깥에서도 이상을 추구하고 공공선에 복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앙보다는 지방에서, 정부조직보다는 자발적 결사체를 통해 각종 현안에 참여하지만 끝까지 천하에 대한 관심의 끊은 놓지 않는 사대부, 볼은 이들이야말로 송 이후의 후기제국을 당까지의 전기제국과 구별지어주는 특징적인 존재라고 여긴다. 그리고 휘상의 사례는 조선과 달리 중국에선 이들 사대부의 범주가 상당히 탄력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상인일지언정 유교적 교양을 익히고 공공선에 헌신한다면 국가로부터 사대부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국가는 이를 통해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지배력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잠재적 불순분자들을 체제 내로 포섭함으로써 모반의 위험도 미연에 방지했다. 이해관계자를 최대한 늘려 체제에 충성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중국적 제국시스템의 핵심이었다. 만일 비트포겔의 말마따나 중국의 전제주의가 영속적이라면, 그건 제국을 저버릴 경우 잃을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비단 경제사나 사회사뿐 아니라 정치사와 사상사, 심지어 과학기술사의 맥락에서도 유용한 통찰을 안겨주는 건 물론이요, 학술서임에도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이 책에도 단점은 있다. 바로 중국이 바다를 저버리고 운하로 모든 물류를 일원화한 이유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바다에 대한 중국의 근원적인 공포, 조운 관료와 하공 관료의 입장차 등을 그 이유로 들지만 이 역시 석연치 않다. (이 책의 출간 즈음에 동아일보와 한 인터뷰에서는 중국 왕조가 북방민족을 집중적으로 경계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실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는데, 이쪽이 오히려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책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대운하는 결코 안전하고 효율적인 운송 시스템이 아니었다. 건조한 화북의 특성상 겨울철엔 운하가 자주 가물었고, 구간별로 고도차도 커서 수위가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방죽인 패()에선 밧줄로 배를 끄는 수부(水夫)가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상인들을 노리는 수적(水賊)들도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었으며, 고용된 운송업자들은 언제 무뢰배로 돌변할지 몰랐다. 그럼에도 중국이 끝끝내 대운하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저자는 올해 출간될 대운하시대에 그 답을 준비해놓은 듯하다. 대운하와 중국 상인이 나온 지 어언 10, 그 사이에 저자는 해양사로 관심을 넓혀 바다에서 본 역사셀던의 중국지도를 번역하는 등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새로이 이해하려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바다처럼 깊고 넓어진 저자의 연구가 대운하시대에 어떻게 반영되었을지, 독자로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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