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
이광수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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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고대국가 중에서도 가야는 유달리 신비로운 이미지가 강하다. 일단 삼국시대에 존재했던 네 번째나라라는 사실부터가 어딘가 비밀스럽고 애잔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가야는 질 좋은 철을 생산했고, 해상무역을 주요 업으로 삼았다. 자연히 땅이나 파먹고 살던 농업국가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개방적이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심지어 가야는 여섯 나라의 연맹으로 이루어졌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반도에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중세풍 판타지 속 도시동맹을 떠올리게 하는, 정말이지 한 설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가야는 그야말로 덕질을 위해 만들어진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가야 판타지의 결정판은, 아마도 허왕후 신화일 것이다. 인도 아유타(阿踰陁國)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은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많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에게 시집을 가 왕비가 되었다. 허왕후가 김수로왕과 낳은 아들 열 명 중 한 명은 아비를 이어 가야의 왕이 되었고, 나머지 일곱은 산으로 들어가 신선 혹은 부처가 되었다. 딸 둘은 동쪽으로 건너가 일본에 나라를 세웠으며, 오빠 장유화상은 가야에 불교를 들여왔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가야는 건국신화마저 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의 저자 이광수는 허왕후 신화란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물론 지역과 민족을 막론하고 건국신화란 다 어느 정도 뻥이 섞여있다는 점에서, 굳이 가야의 허왕후 신화만 끄집어내 면박을 주는 건 좀 너무하다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저자가 애써 이를 비판하는 이유는, 유독 허왕후만 신화가 아닌 역사속의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고조선의 단군은 천신과 짐승 사이, 고구려의 주몽과 신라의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기에 애시당초 진짜라고 믿을 수가 없다. 반면 허왕후는 그런 미신적인요소는 일절 없는데다 상당히 구체적이기까지 해서 역사를 좀 안다싶은 사람도 혹하는 것이다. 바로 이 그럴싸함을 이용해먹고자 사람들은 허왕후 신화에 살을 붙여 제 욕망을 채워왔고, 대중은 대중대로 여기에 속아주며 가야 판타지를 충족시켰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허왕후 신화의 원형은 신라 혜공왕 대(재위 765~780) 김지정의 난(780)이 일어나 김유신계가 모조리 숙청당한 뒤 처음 등장했다. ‘패밀리의 구성원 대다수가 처형당하거나 육두품으로 강등되는 위기 앞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김유신의 뿌리인 가야의 위대함을 찬양함으로써 결속력을 다지고 열패감을 보듬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게 개황력(開皇曆)혹은 개황록(開皇錄)이고, 이는 고려 문종 31(1076) 편찬된 가락국기(駕洛國記)의 모본(模本)이 된다. 승려 일연이 그 가락국기를 참고해 삼국유사가락국기를 지은 건 이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뒤이다.

 

  승려 일연의 손을 거친 허왕후 신화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불교색 짙은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애초에 김유신 가문에 의해 창작되었을 때만해도 허왕후는 그냥 바다 건너 어디메에서 넘어온 존재였다. 그러나 일연은 허왕후의 출신지를 아유타국으로 둔갑시켰다. 아유타국이란 힌두 최고의 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사리유(Saryu) 강변에 위치한 힌두 제1의 성도(聖都) 아요디야의 음차로, 그저 신화 속의 도시일 뿐이다. 오늘날 북인도 웃따르쁘라데시(Uttar pradesh) 주에 아요디야라는 도시가 있긴 하지만, 허왕후가 김해 앞바다에 닿았다던 서기 48년 무렵 이 도시의 이름은 사께따(Saketa)였다.

 

  한때 번영을 구가했으나 라마야나의 최종 편찬이 이루어지던 5~6세기경에는 몰락한 황성옛터가 된 사께따는, 이 무렵 비로소 라마야나의 성도 아요디야로 불리기 시작한다. 그랬기에 5세기 초에 인도를 다녀온 법현은 불국기에 사께따(沙祗)만 달랑 언급한 반면, 7세기 중반에 인도를 다녀온 현장은 아요디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요디야, 음차해서 아유타(阿踰陁)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도시보다는 불교의 나라 인도 자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였고, 허왕후 신화에도 정확히 그러한 의미로 삽입되었다. 천축국(天竺國)이라 했으면 그래도 좀 허구 같았을 텐데, 하필이면 현존하는 도시인 아요디야에서 왔다고 해서 쓸데없이 사실감을 높인 셈이다.

 

  허왕후와 김수로왕이 결혼한 곳에 452년 왕후사를 세웠다거나, 풍랑을 만난 허왕후가 아유타국으로 다시 돌아와 파사석탑(婆娑石塔)을 가지고 간 덕에 무사히 가야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모두 거짓이다. 통일국가를 이루지도 못한 가야가 백제와 신라보다 100년 앞서 불교를 받아들일 턱이 만무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랬다 해도 흥국(興國)이나 흥복(興福), 흥륜(興輪)처럼 이데올로기적인 이름이 아니라 시조의 결혼 따위를 기념하는 이름을 사찰에 붙이는 건 어불성설이다. 파사석탑 역시 기이한 돌을 숭배하는 김해 지역의 풍습에 따라 만들어진 돌무지가 허왕후가 배를 타고 올 때 가지고 온 석탑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저자는 추측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허왕후 신화는 불교라는 틀을 넘어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욕망을 투사하는 장으로 진화했다. 그 시작은 성리학의 확산과 발맞춘 족보 붐을 타고 가문의 격을 높여줄 수 있는 매력적인 소스를 물색하던 양천허씨 집안이었다. 조선 중기의 유력한 권력자였던 허엽(1517~1580)과 허적(1610~1680)은 모두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재임 중 수로왕릉을 크게 보수했다. 김수로왕을 추켜세움으로써 그의 아내인 허왕후 역시 역사 속 인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 것이다. 이들은 허왕후가 여성이기에 성씨를 물려줄 수 없다는 페널티조차 그가 열 아들 중 두 명에게 허씨 성을 잇게 했다는 민간설화를 끌어옴으로써 해결했다. 물론 허적의 12촌 형인 허목이 양천허씨족보서(陽川許氏族譜序)에 적었듯, 양천허씨의 시조는 허왕후가 아니라 고려의 개국공신 허선문이었다.

 

  사찰이라고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오늘날엔 흥국사로 이름이 바뀐 김해 명월사는 증수과정에서 허왕후의 오라비 장유화상과 관련된 기와가 나왔다며 신도들을 현혹했다. 아예 이름부터 장유화상을 연상시키는 장유사는, 사찰이 왕후사 터에 지어졌다고 자랑스레 비문에 기록했다. 왕후사는 허왕후와 김수로왕이 식을 올린 곳에 세웠다고 일컬어진 사찰인데, 앞서 보았듯 이는 명백한 날조다.

 

  이른바 이성합리의 시대라는 근현대에 접어들고도 허왕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은 도무지 식을 줄 몰랐다. 아동문학가 이종기는 탐사문 형식의 소설인 가락국탐사에서 허왕후가 북인도의 아요디야에서 서기 20년경 출발해 몇 년 뒤에 태국 아윳티야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48년 음력 5월에 마침내 김해에 왔다고 주장했다. 1977년 발표한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에서는 허왕후에게 열 아들뿐 아니라 두 딸이 있었으며, 그 중 한 명은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는 어디까지나 아동문학가고, 저자가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이런 작업을 했다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버젓이 학자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들이 이종기의 상상을 고대로 베껴와 마치 사실인 양 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고고학자 김병모는 서울대-옥스퍼드라는 탑티어 학벌을 무기삼아 이종기의 주장을 교묘히 자신의 연구 성과로 둔갑시켰다. 그는 200년도 채 안된 수로왕릉의 쌍어문이 아요디야 시의 공식 문장이라거나, 단청의 요상한 그림이 인도에서 신성시하는 코끼리라고 주장한다. 전부 이종기의 소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옮겨온 것이다.

 

  김병모의 발랄한(!)’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허왕후 집안은 중국 사천성 보주(普州) 출신으로 인도로 건너가 꾸샨국을 세웠고 그 일파가 아요디야로 이주했으나 전란에 휘말려 고향인 보주로 돌아온 뒤 서기 48년 김해의 금관가야에 당도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허왕후는 결혼예물로 운남·사천의 명산물인 차나무 씨앗을 가져와 가야에 차문화를 널리 전파했단다. , 이토록 아찔한 트랜스내셔널함이란!

 

  정치권 역시 김병기를 비롯한 유사역사학자들의 재롱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유력한 김해김씨 정치인인 김종필과 김대중은 1999429일 김해숭선전춘향대제에 자신을 허왕후의 후손이자 아요디야 왕손이라 주장하는 미슈라(Mohan Pratap Mishra) 씨를 초청해 주한 인도 대사와 함께 허왕후릉에 참배하게 했다. 사실 대다수의 김해김씨와 마찬가지로 김종필과 김대중 역시 조선후기 언제쯤에 족보를 구입한 평민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말이다.

 

  전 국민의 판타지로 떠오른 허왕후 신화는, 급기야 본국 인도로 역수출되기까지 했다. 2002년 아요디야시에 검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멋을 낸 허왕후 탄생 기념비가 들어섰다. 당시 인도의 집권 여당이었던 극우 인도국민당의 적극적인 후원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57월에 개최된 허왕후 관련 국제 심포지엄 역시, ‘위대한 인도를 알리려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에게 한국정부가 놀아난 꽃놀이패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 선생님껜 죄송한 얘기지만,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허왕후 신화의 왜곡은 분노나 안타까움보다는 오히려 감탄과 놀라움을 자아낸다. 본디 아주 보잘것없었을 한 줄의 이야기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살이 붙고 개연성을 갖춰가며, 끝내 그럴싸한 역사로 거듭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굉장히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허왕후 신화의 역사는, 역사란 곧 저마다의 욕망에 의해 끊임없이 첨부, 생략, 변형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묻게 된다.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유사역사학 진영에 팩트체크만으로 대응하는 기존의 전략은 과연 유효했던가? 엄밀한 사료비판의 중요성을 부정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어차피 첨부, 생략, 변형이 이야기의 운명이라면, 사료를 기반으로 하되 보다 재밌고 풍요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유사역사학의 구림을 만천하에 까발릴 순 없느냐는 것이다. 요컨대, 젊은역사학자모임의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만큼이나, 곽재식의 역적전역시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작업은 전문 역사학자들에게 맡길 수 없다. 일단 그들은 너무 바쁘다. 무엇보다 좋은 연구자라 해서 언제나 좋은 이야기꾼인 것도 아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한 얘기지만, 저자 선생님의 필력은 유사역사학자 김병기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애초에 재미를 염두하고 쓴 책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두 사람의 재능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에는 이미 역사를 소재로 재밌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이 여럿 있다. 소설가 곽재식과 이문영, 만화가 굽시니스트와 박시백 등이 그들이다. 전국의 수많은 역사학과에서 이런 사람들을 보다 전문적으로육성할 수는 없을까? 학내 구성원의 반발을 깡그리 무시하고 기왕에 역사문화콘텐츠학과로 이름을 바꾸었다면, 그에 걸맞은 새로운 인재라도 길러내야 한다. 그게 갑작스런 학과 통폐합과 명칭 변경으로 혼란스러워하는 학생들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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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과 한국 기독교
이혜원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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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역사에서 (중원과 만주를 포괄하는) 대륙의 존재는 상수에 가까웠다. 중원의 역대 왕조는 별달리 먹을 게 없었던데다 알아서 납작 엎드리기까지 했던 한반도를 대체로 건드리지 않았지만, 일단 중원에서 뭔 일이 터졌다하면 그 불똥은 무조건 한반도로 튀었다. 고조선, 백제, 고구려, 고려가 그렇게 대륙의 불길에 휩쓸려 멸망했다. 그 뒤를 이은 조선 역시 국토의 세 면이 바다라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다 끝내 임진년의 참극을 맞은 반면, 대륙과 이어진 나머지 한 면만큼은 언제나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가 있기에 유달리 자주를 강조하는 오늘날의 ()국사 교과서에서도 웬만한 대륙의 변고는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X변수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푸대접을 넘어 아예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사건이 있으니, 바로 의화단 운동이다.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기치로 북중국을 휩쓸고 한때는 서태후의 지지까지 등에 업었으나 끝내 8개국 연합군의 총탄에 스러진 이 영적인 복서들(The Spirit Boxers)’, 그간 한국에선 미지의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저 러시아가 의화단 토벌을 이유로 만주를 점령함으로써 러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짤막한 설명만 전해질 따름이다. 좀 더 파고들면 깜냥도 안 되면서 출병카드를 만지작거렸다던 고종의 웃픈일화 정도를 찾을 수 있겠다.

 

  하지만 역사학자 이혜원이 보기에 한반도 역사에서 의화단 운동은 결코 러일전쟁의 원인정도로 자리매김 될 수 없다. 원말의 홍건적이나 명말의 모문룡 일당만큼은 아닐지언정, 청말의 의화단 역시 이 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반()서양, 구체적으로는 반기독교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의화단 운동은 한반도 기독교의 나아갈 길을 사실상 결정지었다.

 

  이혜원의 책 의화단과 한국 기독교는 일본과 미국으로부터의 영향만을 중시하던 그간의 풍조에서 벗어나 중국, 구체적으로 의화단과의 관계 속에서 한반도 기독교의 역사를 새로이 써내려간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혹은 동아시아사는 불가능할지언정 세계사/동아시아사 속의 한국사는 충분히 가능하며 또 필요하다는 확신을 안겨주는 책으로, 논문 모음집임에도 마치 처음부터 단행본으로 계획된 양 탄탄하고 짜임새가 있다.

 

  중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지만, 그것이 소수의 신앙을 넘어 보다 광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건 19세기 중반 이후이다. 18447월 청은 미국과 맺은 망샤조약(望廈條約)에서 조계지 내에서의 예배당 설립을 보장했고, 같은 해 12월 도광제(道光帝)는 이금(弛禁, 기독교 금지령의 해제)을 허가하는 조서를 내렸다. 비록 북경의 천주당 몇 곳을 내줌으로써 중국 내륙에서의 선교를 막아보려는 예방적 조치였을지언정, 천주교가 사교(邪敎)가 아닌 엄연한 정교(正敎)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윽고 1860년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중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중요한 전기를 맞이한다. 개신교와 가톨릭, 정교회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을 뿐 아니라 허가증만 발급받으면 외국인일지라도 자유롭게 중국 내륙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 교파의 선교사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중국 각지에 믿음을 퍼뜨렸고, 치외법권의 보호와 발전한 문물이 뒷받침된 결과 1900년에 이르면 개신교와 가톨릭은 세례교인만 각각 10만 명, 72만 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를 확장했다.

 

  기독교가 중국에서 보여준 경이로운 활약상은, 그러나 그만큼의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중국의 향촌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던, 공묘(孔廟)와 문묘(文廟)를 중심으로 행해진 제례와 마을축제에 기독교 개종자들이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용부담 역시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종교란 개인의 사적인 믿음이 아니라 사회를 규율하는 거대한 체계였던 만큼, 어쩌면 갈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거창하게 세계관 충돌까지 갈 것도 없이, 외국인 선교사가 누리는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제 잇속을 챙기는 일부 중국인 역시 이웃들의 공분을 샀다. 기독교는 어느새 중국의 평범한사람들 사이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 그 자체와 동일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1898, 오랜 시간 쌓여온 갈등이 마침내 폭발했다.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의 갈등이 유독 심했던 산둥(山東)에서 무술단체 대도회(大刀會)와 비밀 종교결사 백련교(白蓮敎)가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기치로 의화단(義和團)을 결성한 것이다. 본래 서양 사교에 맞서 중국의 전통과 도덕을 바로 세우는 게 목표였던 의화단은, 마침 발생한 대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대거 유입되며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가진 민중봉기로 거듭났다. 이들의 에너지는 금세 산둥을 넘어 화북, 만주, 내몽골로 뻗어나갔고, 한때는 제국의 수도 베이징까지 장악하는 등 엄청난 위세를 자랑했다.

 

  흥분도 잠시, 19008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키며 의화단은 이내 정리되었다. 누군가는 이들을 반세기 넘게 중국에서 오만하게 군림해오던 서양에게 한 방 먹인 유쾌한 혁명투사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북중국에 거주하던 기독교도에게 의화단은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는 메뚜기 떼에 불과했다. 개신교 선교사 188명과 신도 19000여 명이, 가톨릭 선교사 47명과 신도 3만여 명이 의화단의 무자비한 폭력에 목숨을 잃었다. 의화단은 당시 놀랄만한 성장세를 보이던 중국 기독교계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북중국 평원에서 일어난 폭동의 여파는 저 멀리 남중국 해안지대까지 닿았다. 중국 최남단인 광둥(廣東)에서도 겁에 질린 신도들이 교회와 학교에 나가지 않고 선교사를 방해하는 일들이 속출했다. 오늘날까지도 중원과는 물리적·정서적 거리감이 강한 광둥이 그랬을진대, 황해와 요동만 거치면 바로 대륙과 연결되는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비록 1985년의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독립을 이뤘을지언정, 이번에도 한반도는 의화단이라는 X변수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는 Y변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시작은 역시 도망 온 피난민들이었다. 서양인 선교사들과 중국인 신도들이 의화단을 피해 바다로, 육지로 밀려들어왔다. 일종의 난민캠프가 들어선 인천항과 평안북도는 낯선 풍습과 언어의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저 사람이 들어오기만 한 게 아니었다. 당시 한반도에 들어와 농업이나 건설업에 종사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고향에서 일어난 변란 소식에 예정보다 일찍 대륙으로 떠났다. 한국 성공회의 경우 영국 해군의 요청으로 의료 선교사들을 대거 중국으로 파견했고, 그 결과 서울에 있는 둘 뿐인 병원이었던 성마태병원과 성베드로병원 모두 문을 닫았다.

 

  물리적 충돌 또한 잇따랐다. 8개국 연합군에 격퇴당해 만주로 패주한 의화단과 청나라 군대의 패잔병들은 일단 이 지역의 한인(韓人)교회를 공격했다. 1884년 호러스 알렌이 최초의 정주(定住) 선교사로 한반도 땅을 밟기 5년 전인 1879년 이미 첫 삽을 떴고,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최초로 간행하는 등 여러 면에서 앞서나갔던 만주 한인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의화단의 마지막 물결에 휩쓸린 셈이었다. 평안북도 의주, 함경북도 삼수, 갑산을 비롯한 국경지대에서도 의화단과 청의 패잔병들이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켰다. 급기야는 의주 군수 이창권이 청국 비도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기까지 했다.

 

  이처럼 대륙으로부터 낯선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고 이들을 둘러싼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한반도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비기독교도는 우리도 중국처럼 서양을 몰아낼 수 있다는 흥분에, 소수의 기독교도와 선교사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것이다.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북쪽 평안도에서는 동학당이, 남쪽 경상도에서는 활빈당이 들고 일어나 기독교 척결을 외치고 다녔다. 제주에서 가톨릭 신자가 300명 넘게 살해된 1901년의 신축교안 역시 직접적인 원인은 가톨릭을 믿던 마름의 가혹한 수탈이었지만, 저자는 그 정도의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건 의화단의 영향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의화단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최대의 사건은 190011월의 도륙밀지사건(屠戮密旨事件)일 것이다. 비록 언더우드의 기지와 알렌의 노력으로 미수에 그쳤지만, 몇날 며칠에 일제히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도륙하라는 고종황제의 가짜밀서가 전국 각지에 유포되었던 이 사건이 현실이 되었다면 그 피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터였다. 지금까진 내장원경 이용익과 평리원재판장 김영준의 이름으로 밀서가 배서, 유포되었던 만큼, 당연히 이들이 사건의 주모자라는 해석이 정설로 자리잡아왔다. 하지만 저자는 두 사람이 고종의 총애를 입었던 데다 사건 후에도 아무런 처벌을 받은 기록이 없다며, 이들은 그저 이름을 도둑맞았을 뿐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렇다면 도륙밀지사건의 진정한 주모자는 누구인가? 특정할 순 없지만 의화단 운동에 영향을 받은 반기독교세력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당시 한반도에 주재하던 선교사들이 하나같이 도륙밀지사건과 의화단의 연관성을 지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1900년 가을과 겨울은 한반도가 의화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날조된 밀지 말미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모든 전봇대를 파괴하라는 명령 역시, 중국의 기를 억누르는 모든 전선과 철도를 파괴하려던 의화단을 모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다 건너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친 의화단의 엄청난 에너지, 그 가공할 폭력성에 세계 선교사 사회는 일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그 충격은 극동의 야만성에 대한 경악이 아닌, 지금까지의 선교방식에 대한 진지한 회의와 성찰로 선교사들을 이끌었다. 대표적으로 1900921, 미국과 캐나다를 대표하는 개신교 교파 32개의 대표가 뉴욕에서 모인 초교파 선교회의에서는 하루 빨리 중국으로 돌아가 선교지를 안정화하되, 본국의 힘을 선교에 이용하거나 중국 정치에 개입하지 말 것을 결의했다. 또한 이들은 부패한 중국 지방 관리가 죄 없는 빈민들을 쥐어짤 우려가 있다며 선교사의 사망과 고통에 따른 위로금마저 청구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다.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로 1901년 중국과 한국, 필리핀, 태국 등을 방문한 아서 브라운 역시 놀라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는 선교사들이 외국인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이용해 현지의 각종 송사에 개입함으로써 중국인들의 공분을 샀다며, 중국에서의 선교는 철저한 정교분리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브라운은 광대한 중국을 서양인 선교사만으로 복음화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미국 교회가 유럽으로부터 독립했듯, 중국 교회 역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으로 목사를 길러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브라운의 제안은 곧바로 한반도 선교에 반영되었다. 1900년까지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말하며 가까운 미래에 별도의 신학교를 세울 계획은 없다고 단언하던 장로회 선교사들은, 브라운의 한국방문 이후 입장을 바꿔 이듬해 평양에 신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같은 해 9월 새문안교회에 모여 연합공의회를 개최한 한국의 네 장로교회는 대한(大韓) 나랏일과 정부 일과 관원 일에 대해 도무지 그 일에 간섭 아니하기를 작정했다며 정교분리를 천명했다.

 

  수많은 선교사와 신도들이 무참히 살해된 초유의 사태 앞에서, 미국 기독교계는 결코 분노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의 민중이 기독교에 갖는 적개심을 이해하고자 했고, 그간의 잘못을 냉정하게 반추했다. 이를 토대로 미국 기독교계는 정교분리현지인 목회자 자체 양성이라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진보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시대의 진보는 다음 시대의 퇴보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일부를 제외한) 식민지시기 한국 기독교계의 침묵은, 결국 브라운의 보고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건 아닐까? “교우를 가르치기를 교회가 나랏일 보는 단체가 아니요 또한 나랏일은 간섭할 것도 아니라는 한국 장로교 연합공의회의 결의는, 총독부의 지배를 합리하화는 그럴싸한 알리바이는 아니었을까? 식민지시기 내내 기독교가 천도교에 맥을 못 추었던 것 역시, 전자와 달리 후자에겐 어쨌거나 자신들이 주도하는 국가에 대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브라운은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불의를 참지 못한다고 보았고, 청교도혁명이나 미국혁명처럼 그 에너지로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킨 사례 역시 얼마든지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의 정치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그 방향을 고민할 수는 없었을까.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필요할 때만 요긴하게 써먹는 정교분리’,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 등장한 전광훈 같은 이들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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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 음식문헌 연구자 고영이 읽고 먹고 생각한 것들
고영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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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근래 사람들은 더 이상 음식을 먹고() 마시기만() 하지 않는다. 이제 음식은 무엇보다 보고 듣는 무엇이다. 영세 유튜버에서 지상파까지, ‘매체를 자처하는 모든 이들이 이른바 먹방에 열을 올리는 탓이다. 카메라에 담아낸 음식의 맛깔스런 자태, 그리고 이를 게걸스레 해치우는 셀럽들의 짭짭대고 후루룩거리는 소리에 대중은 열광한다. 바야흐로 미각을 대신해 시각촉각이 음식을 느끼는 주된 감각으로 떠오른 시대다.

  먹고 마시라고 만들어놓은 음식을 보고 듣는 하 수상한 시절에, 음식문헌연구자 고영은 생뚱맞게도 음식을 읽는다.’ 읽는 감각, 굳이 한자로 옮기면 독각(讀覺)’ 정도 되려나. 그의 책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는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잔잔하게 음식을 읽어간 기록들의 모음이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카스테라를 본뜬 노란 표지인데, 매끄럽게 빤딱거리는 재질로 만들어서 카스테라보다는 커스터드 푸딩을 닮았다. 고전문학 전공자답게(?) 리듬감이 느껴지는 그의 글은 보드라운 카스테라보다는 탱글탱글한 커스터드 푸딩과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지금껏 접한 책 디자인 중 최고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오른쪽 아래에 떡하니 박힌 “2019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마크만 없었다면 말이다.

 

  앞서 언급했듯 고영은 음식문헌연구자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그의 이름만 뜨는 걸로 보아 스스로 만든 직함인 듯한데, 이만큼 고영의 정체성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말도 없으니 한 번 찬찬히 뜯어보자. 우선 그는 음식을 연구한다. 또한 문헌도 연구한다. 무엇보다 그는 문헌과 음식의 얽힘을 연구한다. 말장난 같다고? 조금만 더 읽어보시라.

  우리가 음식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기까지의 과정은 찰나에 비견될 정도로 짧다. 우리가 느낀 음식의 감촉과 맛을 어렵사리 말로 꺼내보기도 전에, 음식은 이미 꿀떡하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버리기 일쑤다.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표현을 찾아내는 일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그렇기에 형언(形言)할 수 없는그 맛을 어떻게든 형언해보려는 노력은, 동시에 언어를 가꾸고 그 경계를 넓히는 일이기도 했다. 음식은 언어를 북돋았고 언어는 음식을 증언했으므로, 음식의 역사는 곧 언어의 역사일 수밖에 없었다. 음식문헌연구자가 음식문헌을 기계적으로 이어붙인 직함이 아닌 이유다. 음식과 문헌의 복잡한 얽힘은 그 자체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고영은 음식을 읽는 감각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살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의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또 그 맛을 적확히 표현하고자 고심해왔다. 희대의 이단아 허균은 1610, 유배지인 전라도 함열에서 읽는 먹방도문대작을 썼다. 혀로 느낄 수 없다면 글로라도 실컷 맛보자는 심보였다. ( 허균, ‘먹방의 추억)

  1720, 아버지를 따라 세계 최대의 도시인 북경을 방문한 멋쟁이 도련님 이기지는 보다 정교하고 관능적으로 음식을 감각했다. 총명함과 친화력으로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사로잡은 그는 유럽의 식사와 간식, 무엇보다 와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빛깔, 풍미, 촉감, 마시고 난 뒤의 감각까지, 이기지가 남긴 조선 최초의 와인 시음기는 오늘날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 이기지, 떠나고 먹고 감각하다) 다만 전근대의 기록이란 어디까지나 양반 엘리트가 한문으로 쓴 것이었기에, ‘읽는 먹방을 향유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상황이 달라진 건 이른바 근대(modern, 책에서는 현대라 표현)’라는 미증유의 시대를 맞이하고부터다. 아직까지 근대를 둘러싼 여러 정의들이 옥신각신하고 있지만,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한정한다면 근대란 무엇보다 사람들이 넘치는 활자에 둘러싸여 살아가게 된 시대다. 국가를 초월한 교양인의 보편언어를 저잣거리의 입말이 밀어냈고, 비밀스레 유통되던 필사본 대신 대량으로 찍어낸 활자본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유라시아 동쪽의 궁벽진 반도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제 한문이 아닌 언문으로 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몇몇은 이를 새로 주조한 활자에 찍어 널리 퍼뜨렸다. 그 결과, ‘한국어혹은 조선어라는 오래된 미래는 식민지라는 제약 속에서도 산업현장, 이주 노동, 분규, 쟁의, 파업, 민족 같은 근대의 개념들을 너끈히 품어낼 수 있게 되었다. ( 소금 한 톨에 깃든 사연)

 

  언어만 바뀐 게 아니었다. 음식 역시 근대라는 롤러코스터에 올라탔다. 은자의 나라 조선은 이웃한 청과 일본, 대만은 물론이고 저 멀리 서양까지 이어진 글로벌한 연결망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청의 호빵과 일본의 팥빵, 유럽의 맥주 등 새로운 음식들이 조선으로 물밀 듯 밀려왔다. ( 한국 빵 문화사의 원형/ 맥주나 한 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에 뿌리내려온 음식이라 해서 근대의 파고를 피해갈 순 없었다. 대표적으로 소금은 일본의 자본, 대만의 기술, 중국 산둥(山東)의 노동력이라는 트랜스내셔널한 조건에 놓이며 자염(煮鹽)에서 천일염(天日鹽)으로 새롭게 태어나다시피 했다. ( 소금 한 톨에 깃든 사연)

  이처럼 근대를 맞아 환골탈태한 음식을, 역시 환골탈태한 언어가 가만둘 리 없었다. 새로운 맛을 담아내려는 궁리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다. “전정(前程, 앞길)이 구만리라는 고리타분한 수사로 애써 주인공을 위로하던 무정속 하숙집 노파는, 어느새 조선중앙일보기자에게 우유 넣어드려요?” 하고 새침하게 물어보는 다방 마담으로 탈바꿈했다. 1917년에서 1936, 불과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 빙수 한 그릇/ 음식이 만든 풍경들)

 

  모름지기 냉면은 초여름에 먹어야 제맛이라는 조선중앙일보와 이에 질세라 냉면은 원래 겨울음식이라는 매일신보의 기싸움, 커피와 코코아를 선전하는 화려한 신문광고들, 퇴근길에 맥주잔을 기울이는 경성의 화이트컬러 남성까지, 정말이지 하지 아니할 수 없다. ( 냉면 먹방/ 음식이 만든 풍경들/ 맥주나 한 잔) 이게 바로 -이구나 싶어 그 흥취에 한껏 거나해지려는 찰나, 저자는 명랑하게 부글거리는 -의 거품을 슬그머니 걷어버린다. 거품이 사라지고 남은 건, 어느 하나 내 것 아닌 초라한 잡동사니뿐이다.

  요즘엔 흔히 도란스(ドランス, trans의 가타카나 표기)’란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된다만, 한국의 근대가 곧 일본과 미국을 짬뽕한 열화판이란 사실은 모두가 아는 비밀이다. 가령 오늘날 우리가 빵이라 부르지만 사실 빵도 과자도 아닌 그 무엇은, 일본식 제빵제과의 산물을 미국의 원조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로 찍어내 대량으로 유통함으로써 탄생했다. ( 한국 빵 문화사의 원형) 그 기원과 내력을 살피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은 결과, 이제 대부분의 한국인은 빵과 과자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한국 근대의 이러한 족보없음, 명실상부 1세계의 말석에 걸터앉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하나의 족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의지할 중심이 없으니 바깥에서 뭐가 유행한다 하면 앞뒤 가릴 것 없이 일단 들여오고 본다. 대만카스테라가 그렇게 한 차례 골목상권을 휩쓸고 지나갔고, 이제는 흑당버븥티가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잘 되기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되기에만 치중한 결과는 이토록 아리고 쓰리다. ( 아리고 쓰린 카스테라 담론)

 

  저자는 힘주어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카스테라와 카스텔라의 사이를 느끼는 감각이라고 말이다. 일본의 카스테라(カステラ)16세기 말 포르투갈 사람들이 전해준 카스텔라(castella)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일본은 물론이고,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카스테라는 카스텔라와는 다른 일본의 전통과자로 받아들여진다. 일본식 달걀찜인 챠완무시(茶碗蒸) 조리법을 응용하여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카스테라와 카스텔라에 사이를 만들어주는 건, 내 입맛의 기호와 공동체의 선택을 동력삼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온 역사 그 자체다. (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되돌아본다. 한국이라는 공동체는 지금껏 어떠한 감각과 방법, 태도로 음식을 대해왔는지, 그리고 나는 내 입맛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우리 한국어 화자들은 옛 문헌을 뒤져가며 음식을 읽는감각을 기르기보다는 먹방에 탐닉하며 먹어보지 못한 음식에 대한 선망과 환상만 키워가진 않았던가. 혹은 조선의 선농제로부터 설렁탕이 시작됐다거나 커피를 처음 마신 사람이 고종이라는 흰소리를 주워듣곤 낭설 수집을 음식 문화사 공부로 착각하진 않았던가. ( 차례 앞두고 기억할 말, 가가례)

  또 나는 어떠했는가. 매 끼 식사를 제대로 챙겨먹기보다는 스누피 커피로 때우고’, 내 입맛을 섬세히 계발하기보다는 펄펄 끓는 마라탕을 조지고’,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분들에 대한 감사 없이 허겁지겁 해치우지않았던가. 저자는 온전한 밥그릇을 누리는 삶이야말로 진정 인간답다고 이야기한다. ( 온전한 밥그릇을 누리는 삶) 일단은 밥 먹을 때 락앤락 통에서 반찬을 꺼내 그릇에 옮겨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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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권력 도시 - 일본 식민 지배와 공공 공간의 생활 정치
토드 A. 헨리 지음, 김백영 외 옮김 / 산처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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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무라 아야코(島村文子),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조선철도국에 발령받은 오빠를 따라 식민지의 수부 게이죠(京城)에 자리 잡는다. 여성에게 현모양처나 교사 정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꿈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 워낙에 총명했던지라 자신의 운명 정도는 진작 간파했던 그는 용산역 철도관사 근처 만철경성도서관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인다.

  그런데 갑자기, 칠흑같이 어두운 높은 벽이 그의 눈앞에 불쑥불쑥 나타난다. 오직 자신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성벽에 불길한 예감이 든 아야코는 서둘러 조선을 뜬다. 이윽고, 두 차례의 태풍이 철도의 중심이자 일본인의 새 수도 용산을 집어삼킨다. 19257월의 일이었다. 쑥대밭이 된 용산과 달리, 한때 아야코가 모든 물자를 수운으로 공급받는 주제에 왜 그리도 강에서 멀리 떨어져있느냐며 의아해했던 조선의 옛 수도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다들 눈치 챘겠지만, 아야코는 실존인물이 아니다. 배명훈의 소설 고고심령학자(2017)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로, 사건해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서울이란 도시에 빙의하려는 코끼리 혼령을 막아보고자 고군분투하는 고고심령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책의 제목이자 중심 소재인 고고심령학부터가 허구란 점에서 자칫 판타지로 비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지적인 작가답게 배명훈은 역사적 사실을 적절히 곁들임으로써 소설의 현실감과 몰입도를 높였는데, 이른바 이중도시역시 그러한 장치 중 하나다.

  이중도시란 간단히 말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도시로, 원래의 중심 옆에 이민족의 정복이나 교통의 발전 등으로 또 하나의 중심이 생겨남으로써 만들어진다. 인도의 델리-뉴델리, 오키나와의 슈리-나하, 몽골의 카라코룸과 더불어 서울 역시 이러한 이중도시에 해당한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중심이었던 한양(사대문 안) 남쪽에, 용산이라는 군사와 철도의 중심이 일제에 의해 하나 더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코끼리 혼령이 서울, 구체적으로는 용산에 빙의하려 드는 이유도 도시의 중심이 두 개인 꼴을 보지 못해서다.

 

  만약 역사학자 토드 A. 헨리가 고고심령학자를 읽었다면, ‘이중도시론이 문학적 알레고리로는 의미가 있을지언정 학문적으로는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한 개념이라고 단언할 것이다. 그가 바라본 식민지 경성은 지리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중심이 뚜렷하게 갈리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헨리의 책 서울, 권력도시는 경성의 공공 공간을 중심으로, 총독부의 동화(同化, assimilation) 정책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응한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사람들을 그려낸다. 역자들이 공들인 흔적이 역력함에도 결코 읽기 쉽지 않은 책이지만, 소위 식민지 근대뿐 아니라 권력과 개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만큼 도전할 가치가 있다.

 

  저자는 식민지 조선에서 이루어진 총독부(식민국가 혹은 식민정부)의 동화정책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재구성한다. 첫째, 동화란 단순히 일본의 정신과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았다. 일본이 조선보다 훨씬 진보했다는 게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진 만큼, ‘일본인 되기는 곧 근면하고 청결한 근대인 되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동화를 정신적(spiritual), 물질적(material), 공중적(civic, 公衆的) 동화로 구분하여 그 외연을 넓힌다.

  둘째, 동화는 총독부가 일방적으로 내리꽂듯이이뤄지지 않았다. 근래 한국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나오는 이야기지만, 총독부는 결코 전능하지 않았다. 늘 돈에 쪼들리며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요구를 고려해야만 하는, 강력하지만 한계가 뚜렷한 정부야말로 총독부의 실상에 가까웠다. 지배의 대상인 조선인과 일본인 역시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인구집단이 아니었다. 경성에 언제 터를 잡았는지, 사는 곳은 어디였는지, 얼마나 부유했는지 등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인종만큼이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총독부도 동화를 적극적으로 강요할 수 없었고, 다종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경성부민들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만큼, 엘리트들의 논쟁이나 국가정책을 통해 동화의 실상을 파악하기엔 한계가 뚜렷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가 주목하는 건 경성의 공공 공간이다. 총독부와 경성부민들이 일상적으로 얼굴을 맞대는 이곳 접촉 지대야말로 동화의 너른 스펙트럼을 남김없이 펼쳐 보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남산의 경성신사와 조선신궁,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에서 개최된 두 차례의 공진회와 박람회, 도시 곳곳에서 이루어진 위생검사와 캠페인을 각각 정신적 동화, 물질적 동화, 공중적 동화를 분석하는 공공 공간으로 설정한다. ‘시간의 구분 역시 공간만큼이나 신박한데, ‘무단통치-문화통치-민족말살통치라는 기존의 도식을 묘하게 비틀어버리기 때문이다. 저자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불만세력을 평정1(1910~1915), 통치방식의 전환이 모색되었으나 여전히 갈팡질팡하던 전환기(1915~1925), 명실상부 문화통치의 시대로 접어든 2(1925~1937), 총력전과 함께 내밀한 사상통제가 시작된 3(1937~1945)라는 새로운 시대구분을 제시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인종/계급/젠더/거주지에 따라 총독부(사실은 총독부조차 단일한 실체가 아니었다!)가 제시한 동화라는 약속을 전유해간 양상은 굉장히 혼란스럽지만, 그만큼 흥미진진하다. 가령 1898년 세워진 남산의 경성신사는 총독부가 명실상부 조선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등극한 뒤에도 경성의 일본 거류민을 위한 신사라는 본연의 정체성을 고집스레 이어갔다. 총독부는 1914년 일본 거류민단을 해체하고 1916년에는 마침내 단일한 도시 행정체계를 확립했지만, 경성신사만은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그저 각 지구의 제사를 주관하는 씨자총대((氏子總代)의 일부를 조선인이 맡게끔 강제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1925년 전 조선의 제의(祭儀)를 주관하는 매머드급 규모의 조선신궁이 완공되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똑같이 남산에 자리한 저 거대한 라이벌과 맞서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1919년 터져 나온 엄청난 저항의 에너지를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인들을 경성신사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마침 조선신궁이 오로지 일본의 신과 천황만을 모시겠다며 자민족중심주의를 대놓고 선언하자, 잇속 바른 신사의 지도자들은 재빨리 단군을 비롯한 조선의 토착신을 경성신사에 합사(合祀)해버렸다. 1929년에는 아예 단군을 위한 별도의 신전(神殿)까지 만드는 등, 경성신사는 차츰 일본 거류민만의 신사에서 경성부민의 신사로 바뀌어갔다.

  급기야, 1931년에는 조선인 씨자총대들이 대제행렬을 총괄하기에 이르렀다. 주체만 바뀐 게 아니었다. 모자와 바지는 신토 스타일로, 그 외에는 흰색 깃과 검정색 두루마기로 맞춘 퓨전의복이 처음 등장했다. 신여(神輿)를 진 일본인들이 외치는 왓쇼이(わっしょい)”에 조선인 구경꾼들은 얼싸둥둥으로 화답했다. 식민통치도 어느덧 20, 구호에 불과한 줄로만 알았던 내선일체(內鮮一體)’가 드디어 이루어지기 시작한 걸까.

  안타깝게도(?) 이는 몽상에 불과했다. 대제행렬의 총책임자인 전성욱은 스스로를 문외한이라 낮추며 자기 대신 더 부유하고 저명한 일본인이 이 일을 맡아야한다고 제안했다. 오랫동안 씨자조직에서 활동해온 지역 명망가인 그조차도 외부의 권위를 빌려오지 않고서는 자신의 일본인됨을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최고의 엘리트조차 이러했을진대, 보다 아래에 위치한 조선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그저 신사 주위를 어슬렁거리거나, 기생과 게이샤에 열광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참배객들의 지갑을 슬쩍했다. 이들에게 경성신사는 경건한 참배의 공간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유원지에 가까웠다. 앞서 언급한 조선인 구경꾼들의 얼싸둥둥역시, 신사의 제전행렬을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한 것일 수 있다고 저자는 추측한다.

 

  물질적 동화 역시 마찬가지 결과를 낳았다. 1929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박람회는 내지관광객에겐 조선의 이국적인 흥취를 맛볼 수 있는 관광코스였으나, 조선인 민족주의자에겐 식민지 수탈의 적나라한 전시장이었다. 조선인이 3분의 2 가량을 차지한 여성 안내원에겐 키스 비즈니스를 통해 돈은 물론이고 모던 보이와의 연애까지 노려볼 수 있는 기회였으며, 시골의 농민들에겐 강요에 떠밀려 큰돈을 내고 참석당한 관제행사였다.

  공중적 동화의 일환인 위생 캠페인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총독부와 조선인 엘리트들은 경성이 똥의 수도혹은 제국의 병든 도시로 불릴 만큼 위생수준이 열악하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하지만 전자는 이를 조선민족의 열등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삼은 반면, 후자는 공공자원을 충분히 확충하지 않는 총독부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 삼았다. 말하자면 이들은 같은 침대(同床) 위에서 다른 꿈(異夢)을 꾼 셈이다. 물론 열악한 위생시설의 최대 피해자인 대다수 조선인 하층민들은 침대에 걸터앉을 수조차 없었다.

 

  이처럼 식민지의 수부 경성의 공공 공간에서 펼쳐진 동화의 동역학(動力學)은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고,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기에 하나의 정연한 흐름으로 정리하기 어렵다. (그것이 아마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복잡한 메커니즘 속에서 유달리 두드러지는 움직임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건 아마 웃음 혹은 오락이 갖는 고유한 힘일 것이다.

  오락은 흔히 선전에 곁들여지는 양념 정도로 폄하되곤 한다. 권력에 대한 불만을 웃음으로 무마할 뿐 아니라, 그 속에 특정한 메시지를 녹여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중을 권력이 원하는 대로 길들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부터 혐오를 농담화하는 일베의 전략에 이르기까지, 오락을 통한 선전의 효력은 지금껏 한국사회에서 여러 차례 입증된 바 있다.

 

  하지만 서울, 권력도시에서 보여주는 건 이와는 정반대의 양상, 그러니까 선전이 오히려 그 오락적 요소에 의해 무력화되는 모습이다. 경성신사는 게이샤와 기생을 불러 모으고, 아마추어 스모 대회를 개최하는 등 오락을 통한 은밀한 정신적 동화를 도모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일본 정신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경성신사를 유원지로 단정지어버림으로써 역으로 신사의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크게 해쳤다.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에서도 선전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기생에 열광했고, 최첨단 물 펌프를 폭포물 놀이시설로 착각했으며, 잔망스런 원숭이에 매료되었다. 망해버린 왕조의 유적과 국적불명의 -한 전시관을 대비시킴으로써 조선인들을 물질적으로 동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던 총독부의 바람은, 경성 사쿠라이 소학교 학생들이 남긴 피상적인 감상 앞에서 보기 좋게 무너져 내렸다. 일본인 소학생들에게도 공진회는 그저 이상하고, 놀랍고, 아름다운 체험이었을 뿐이다. 심지어는 가장 계몽적이고 엄숙해야 마땅할 공중적 동화조차 기생과 활동사진, 바이올린 연주에 의존함으로써 흥미 위주의 오락거리로 전락했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공략하기보다는 낙후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총독부의 동화정책에 성공적으로 저항한 경성의 조선인들은 식민지 근대를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수탈론과 근대화론, 근대성론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한반도의 근대를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들은 하나같이 그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려있었다. 다만 근대가 조선을 철저히 털어먹었는지, 발전시켰는지, 아니면 규율권력을 창출했는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반면 저자는 정교한 선전을 오락으로 만들어버린 조선인들을 통해 근대란 기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대담한 생각을 내비친다. 조선인들은 그 안에 담긴 총독부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오락을 오락으로 즐겼으며, 총력전이라는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신사 앞에서 조선식 큰절을 했다. 그들은 근대의 폭력에 저항해야겠다는 거창한 사명감으로 움직인 게 아니다. 그저 근대를 의식조차 하지 않고 평소처럼 생활했을 뿐이다. 어쩌면 카터 에커트(Carter Eckert)가 말한 제국의 후예(Offspring of Empire), 강력한 발전국가나 이에 기생하는 재벌 따위가 아니라 이처럼 권력의 선전에 웃음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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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
오수창 지음 / 일조각 / 200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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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엔 북조선의 본진이자 냉면의 고장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못하는 평안도는, 사실 한반도의 근대를 선도한 지역이었다. 안창호, 이승훈, 김동인, 이광수, 조만식 등 개화기와 식민지기의 지식계와 언론계를 이끈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모두 평안도에서 나고 자랐다. 해방 후에도 장준하, 김준엽, 서영훈, 백낙준을 비롯한 평안도 출신 월남민들은 동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리버럴 우파로 자리 잡았다. 2017년 출간돼 소소한 반향을 일으킨 김건우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기실 이들 서북 리버럴에 바치는 헌사에 다름 아니다. (물론 난 이들이 대한민국을 정말로 설계했다기보다는, 설계했다면 좋았을이들이라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설계자는 박정희를 위시한 영남 국가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을까?)

  비단 몇몇 인물만의 활약상만이 돋보인 게 아니다. 20세기 초 평안도는 조선의 어느 지역보다도 교육열이 높았다. 있는 집 자식들은 앞다투어 일본으로 떠났고, 평양의 고등보통학교나 사립 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많았다. 여학생의 비율 역시 다른 곳보다 높았다. 경제적으로도 평양은 조선의 오사카’, ‘조선의 기타큐슈로 불릴 만큼 공업이 흥기했다. 총독부의 정책적 배려도 있었겠지만, 평양의 기업인들이 일본 기업과 당당히 경쟁해서 얻어낸 결과였다. (김두얼, 한국경제사의 재해석참고)

 

  20세기 초반 평안도가 이토록 눈부신 활약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그네들이 조선 왕조 오백년간 아웃사이더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오랜 세월 야만의 땅으로 멸시받아온 만큼, 옛 질서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새 질서에 재빠르게 올라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정치적, 문화적 주변부라는 점만으로는 평안도의 번영을 설명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똑같이 소외받았던 함경도나 강원도, 제주도는 근대가 도래한 뒤에도 여전히 변방이었다. 서울을 위시한 근기(近畿)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지역은, 오로지 평안도뿐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벌어졌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근대 이전부터 평안도에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변방이 언제나 다음 시대의 중심으로 등극하는 건 아니다. 새 시대의 중심을 꿰차는 건 어디까지나 옛 시대의 슈퍼루키다.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쓰마와 조슈 역시 열도 서남부의 변방이었지만 그 위세는 가히 웅번(雄藩)이라 불릴 정도로 어마어마했고, 막부 역시 이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평안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차별받았던들 이들에겐 돈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18세기 평안도의 인구는 전통의 강호 경상도에 이은 2위였다. (물론 평안도의 면적이 인구밀집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를 합친 것보다도 넓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평양은 한성, 개성과 더불어 물류와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으로 이름을 날렸다. 요컨대, 평안도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소외되었을 뿐 근대 이전에도 충분히 잘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평안도의 번영은, 그러나 한 가지 사실 앞에서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바로 평안도가 논농사에 극히 불리한 환경만을 그러모은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저번 서평에서 다루었듯, 논농사는 가히 원예에 비견될 만큼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이 요구된다. 기술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지리적, 기후적 조건 역시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동아시아의 논농사는 온난하고 비가 많이 오는 산간지대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의 강남, 일본의 간사이, 한국의 영남 모두 위의 세 조건을 만족하기에 논농사 최선진지대가 될 수 있었다.

  반면 평안도는 일부러 이렇게 만들기도 어렵겠다 싶을 정도로 논농사에 불리한 환경만 갖추고 있다. 우선 평안도는 춥다. 평안도 최남단의 평양만 해도 최한월 평균기온이 영하 6도까지 내려간다. 매스컴이 한겨울의 평양을 취재할 때면 으레 등장하는, 너도나도 푹 눌러쓴 러시아 털모자는 결코 패션이 아니다.

  다음으로 평안도 남부(평안남도)는 너른 평야와 구릉이 펼쳐져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기상이 웅대하다며 추켜세운 이 평야지대는, 그러나 논농사에는 극히 불리하다. 간단한 천방(川防)만 만들면 되는 산간지대에 비해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규모 수리시설을 축조·관리하지 않는 이상, 넘실대는 대동강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범람해서 농작물을 쓸어가지나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평안도 남부는 가뜩이나 비 안 오는 한반도에서도 손꼽히는 소우지다. 사실 이는 평야지대라는 지형적 조건의 결과이기도 하다. 산이 없으니 구름이 턱 부딪혀 비를 뿌리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버리기 때문이다. 오죽 물이 귀했으면 봄철 토양의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 발로 꼭꼭 눌러주는 진압농법(鎭壓農法)이 등장했을까.

 

  이처럼 평안도, 그중에서도 평양이 위치한 남부는 한랭/평야/소우라는, 논농사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많은 문헌기록이 보여주듯 조선후기 평안도는 분명 발전했다. 여타 작물에 비해 압도적인 생산량을 자랑하는 벼가 쉬이 자랄 수 없는 환경임에도 인구가 증가하고 번영을 구가한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오수창의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를 읽은 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조선후기 평안도의 번영은 근대 이후 이 지역 엘리트들의 약진이 빚어낸 일종의 착시가 아닐까하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였다. 저자의 박사논문을 보완한 이 책은 평안도라는 창을 통해 당대의 조선사회를 근사하게 조망한다. 서울중심주의와 지역차별, ()에 매우 의존적이었던 상업의 발전, 백성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한 당근으로서 무과의 빈번한 시행 등, 나온 지 18년이 되어가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지금도 조선시대사 연구의 핫한 주제들이다.

 

  그러나 정작 내 눈길이 머문 곳은 따로 있었다. 바로 정조가 함경도(關北) 백성들에게 윤음을 내리며 너희는 삼남(三南)과 같은 아름다운 벼와 솜이 나지 않고 또한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와 같은 풍요(豊饒)한 재화(財貨)가 있지도 않다고 어르는 대목이었다. (정조실록, 정조 710월 정해) 삼남의 벼와 평안도의 재화를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정조가 함경도 백성을 달래기 위해 생각 없이 던진 말이 아니다. 영조~순조 대 남부지방의 곡식과 평안도의 재화를 대비시키는 언사는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일성록등에서 꾸준히 등장한다. 가령 영조 대 평안감사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오른 김상철은 양남(경상도와 전라도)은 전적으로 곡식에, 서로(西路, 평안도)는 전적으로 목면과 돈에 의지한다고 이야기했다. 정조 대 부수찬이었던 한광근 또한 과거 삼남에는 곡식을 저축한 사람이, 양서에는 돈을 저축한 사람이 많았으나 지금은 아무도 없다며 사치로 인한 국가의 빈곤을 책망했다.

  ‘삼남양서의 이러한 대비는, 적어도 두 가지 추론을 가능케 한다. 첫째, 조선후기 평안도는 무엇보다도 부유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둘째, 평안도의 부는 남부지방과 달리 논농사를 통해 일군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평안도의 번영을 이끌었던 것은 무엇인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20세기 초 유럽 역사학계를 풍미한 앙리 피렌의 주장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앙리 피렌, 벨기에 출신의 역사가로 유럽중세사 연구에서 괄목할 업적을 남긴 학계의 거인이다. 그가 제시한 이른바 피렌 테제는 중세 유럽을 연구한다면 좋든 싫든 한 번은 거쳐야 할 관문으로, 사실상 폐기된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재밌는 통찰을 안겨준다.

  ‘피렌 테제의 핵심은, 유럽을 농업에나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 대륙으로 전락시킨 건 게르만이 아닌 이슬람이라는 주장이다. 게르만 용병들이 로마를 접수한 뒤에도,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어진 광대한 무역 네트워크와 도시문명은 여전히 번성했다. 그러나 예언자 마호메트의 등장 이후 이슬람이 급속도로 세를 불려나가 8세기에 전 지중해를 장악했고, 바다를 잃어버린 유럽은 급속도로 가난해졌다. 물론 도시문명에서 농업문명으로 퇴보한 이 시기의 유럽에도 도시 비스무리한 인구밀집지대인 키비타스(civitas)와 부르구스(burgus)가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이는 도시라기보다는 각각 종교중심지와 정치·군사중심지에 가까웠다.

  가난한 암흑의 대륙 유럽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친 건 10세기에 이르러서다. 대륙 동남부의 베네치아, 그리고 서북부의 플랑드르에서 상업이 흥기하고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도시를 견인한 게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자극이라는 사실이다. 베네치아는 당대 세계 최고의 대도시인 콘스탄티노플과, 플랑드르는 온 유럽의 바다를 휘젓고 다니던 노르만과 거래를 틈으로써 부를 거머쥐었다. 실제로 이들 지역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뻘밭으로, 결코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었다. 피렌의 말마따나, “상업부활은 외부자극의 결과였다.” (앙리 피렌, 중세유럽의 도시, p.75.)

 

  조선후기 평안도의 번영 역시 외부와의 교역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실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평안도는 상업조차 별 볼 일 없는,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낙후한 동네였다. 대표적으로 이 시기 상업발달의 지표라 할 수 있는 장시의 수와 규모에서 평안도는 삼남에 크게 뒤졌다. 변경의 군사지대라는 성격 역시 사람과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17세기 초 조선과 청이 벌인 두 차례의 전쟁은 평안도를 아예 초토화시켜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1683년 청의 대만 정복을 끝으로 동아시아에서 100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의 시대가 일단락되며, 평안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긴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며 나라와 나라 사이에 총알과 대포가 아니라 사람과 물자가 오고가게 된 것이다. 조선은 세계 2위의 은 생산국인 일본과 세계 최대의 은 수입국인 청을 잇는 물류의 허브로 부상했다. 조선에서 중계무역을 통한 이익을 가장 많이 누리는 지역은, 단연 평안도였다.

  마치 콘스탄티노플과의 교역을 통해 급성장한 뻘밭베네치아처럼, 평안도 역시 당대 최대의 도시인 북경을 등에 업고 조선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거듭났다. 요컨대, 평안도에서 상업의 발전은 농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약간의 비약을 감수해보자면, 오히려 상업이 농업을 견인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 오랜 번영이 끝나갈 무렵인 18세기 말에 이르면 평안도의 토지가 비옥하고 농민이 근면하다는, 이전까진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수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무렵엔 평양의 선상(船商)들이 바다가 험하기로 악명 높은 황해도의 장산곶을 가뿐히 넘어 일상적으로 삼남을 왕래하는 등, 국내교역 역시 활성화되었다. (승정원일기, 영조 47514일 갑인)

  물론 평안도의 사례가 피렌의 가설에 완전히 들어맞는 건 아니다. 가령 평안도의 상업발전에서 유달리 부각되는 ()’의 존재는, 상업 고유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피렌이 보기엔 영 마뜩찮을 것이다. 그럼에도 농업 없는 상업이 가능하며 그렇게 성장한 지역의 분위기는 확실히 다르다는 피렌의 주장은, 조선후기 평안도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

 

  오늘날 특정 지역을 희화화하거나 비하하는 지역드립, 이른바 문명인이라면 입에 담지 말아야 할 금기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지역드립에 대한 강력한 제재는, 역으로 그것이 얼마나 일상화되어있고 또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여전히 술자리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곳 사람들은 어떠어떠하다고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정교한 통계나 방대한 문헌자료로 증명할 수는 없을지언정, 특정 지역의 성격 비스무리한 것을 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역드립을 완전히 틀어막기보다는, 한 번 제대로 밀고 나가보는 것은 어떨까? 가령 콜린 우다드는 분열하는 제국(원제는 American Nations)에서 미국이 서로 다른 11개의 민족(nation)’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주장하며 그 기원과 성격을 규명한 바 있다. 엄밀히 따지고 들어가면 문제될 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나름의 설명력과 재미를 갖고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역사도 몇 개의 작은 민족들이 벌이는 각축전으로 이해해볼 여지는 없을까? 앞서 살펴보았듯 경상도와 평안도는 지형과 기후가 달랐고, 이로 인해 주요 산업 역시 달라졌으며, 끝내는 사람들의 기질마저 달라졌다. 20세기 한반도를 풍미한 서북 리버럴영남 국가사회주의자의 뿌리는, 어쩌면 조선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다른 지역은 어떨까? 가령 함경도나 전라도, 혹은 남한강 유역의 사람들 말이다. 이들 지역의 역사를 엮어 Korean Nations라는 풍요로운 오류를 빚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일단 재밌는 망상으로 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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