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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의 밤 - 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권보드래 지음 / 돌베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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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진부하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연애소설만큼.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낡은 말에 기꺼이 속아주는 이유는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정말로 첫눈에 반해서라기보다는, 그럴 수 있는 상대방이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마치 주문처럼 저 말을 되뇌고 또 되뇐다. 하지만 그런 마법 같은 일이 과연 실제로 벌어질까? 설사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서 강렬한 스파크가 튄다 해도, 그걸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 않은지라 이런 말 꺼내기 민망하지만, 사랑이란 익숙한 존재가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생전 처음 느끼는 낯설음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잠시, 나는 어떻게든 그를 알아보려 아등바등한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갈 뿐임에도 이 공부가 전혀 헛되게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알아가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고,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그를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이전과는 다른 빛깔로 채워져 간다.

낯설음에 놀라워하고, 알아감에 기뻐하는 이런 사랑은 비단 사람만을 향하지 않는다. 사람은커녕 생물도 아니고, 심지어는 형체조차 없다 해도 우리는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출간된 권보드래의 31일의 밤역시 3.1 운동이라는 사건을 이렇게나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권보드래의 오랜 팬으로서, 나는 그가 언제쯤 자신의 숙제라 이야기하던 3.1 운동의 문화사를 퍼낼지 늘 애가 달던 터였다. 책을 읽고 나서야 나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그가 이런 글을 쓰려고 그토록 오랜 시간 공을 들여왔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저자 본인도 이야기하듯 31일의 밤3.1 운동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앎을 더하고자 쓰인 책은 아니다. 학술서가 아니기에 서술은 때때로 중구난방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의 목소리에 감정이 한껏 실려 있는 대목도 적지 않다. 하지만 감히 이야기하건대,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은 바로 이러한 두서없음이다. 저자는 기존의 미끈한 내러티브를 답습하는 대신, 3.1을 둘러싼 복잡하고 모순적인 목소리들을 모두 끌어안는다. 고작해야 유관순 누나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3.1 이해는 불안과 희망, 냉소와 기대, 욕망과 숭고가 뒤엉킨 무수한 꿈들 앞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3.1 운동을 새롭게 알아가기 위해, 그럼으로써 그를 보다 깊게 사랑하기 위해 저자는 렌즈를 돌려가며 줌아웃과 줌인을 반복한다. 세계사의 맥락 속에 3.1을 위치 짓는 동시에, 개개인의 삶 속에서 3.1이 어떤 의미였는가를 파고드는 것이다. 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와 이 자리에 펼쳐 보이는 11<선언>에서 이미 지나간 과거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44<후일담>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세계와 개인을 분주히 오고가며 3.1 운동에 너비와 깊이를 부여한다.

저자에 따르면 1910년대는 세계적인 혁명의 시대였다. 1910년 멕시코혁명을 시작으로 1911년 신해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핀란드와 독일, 헝가리혁명에 이르기까지 세계각지에서 기성체제를 타파하려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운동이 잇따라 발생했다. 또한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당시 사람들에게 단순한 종전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문명을 자임하며 전 세계에 오만하게 군림하던 유럽은 누구보다 추하게 자멸했다.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유의 제국과 정의의 제국을 자임했다. 체코, 아일랜드, 인도, 이집트 등 세계 각지의 식민지와 속령에서 독립의 움직임이 들끓었다.

이처럼 혁명의 에너지가 넘쳐나던 1910년대, 일본의 지배에 놓인 조선만은 유독 고요하고 안온했다. 뜻밖에도 식민통치는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총독부는 조선인에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기쁨을 누리는 소박한 양민(良民), 개인과 가족 외에는 일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착실한 선민(善民) 되기를 요구했다. 게으르고 불결한 조선인이라는 모욕을 받아들인다면, 공적인 일에 목소리를 내려는 욕구를 억누른다면, ‘내지가 위험에 처할 경우 가장 먼저 내쳐질 신세라는 사실에 눈을 감는다면 충분히 괜찮은 세상이었다.

그러나 침묵은 결코 무기력한 순응을 의미하지 않았고, 지난 10년간 차곡차곡 쌓여간 저항의 에너지는 결국 19193월 한꺼번에 폭발했다. 조선의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신과 가족을 넘어 다양한 타자들과 연대했고, 비로소 사회를 상상할 수 있었다. 식민권력은 일체의 사회단체를 허용치 않았기에 운동을 지휘할 지도부가 부재했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대표자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했다. 바야흐로 너도나도 대표를 자임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대표하는 세계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의 꿈을 그야말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화정을 지지했지만, 독립을 지키고 정국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선 왕정복고가 불가피하다 여기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공화정이라 해도 그 구체적인 모습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을 것이다.

비단 정체(政體)에 대한 이야기만 오고간 것이 아니다. 1차 세계대전을 근거로 서구문명의 종언을 고하는 거대담론과 공동묘지가 아닌 선산에 부모를 묻겠다는 소박한 요구가 같은 시공간에 나란히 존재했다. 사람들은 일제의 폭력근대의 폭력모두에 저항했고, 양자를 굳이 구분하려 들지 않았을 뿐더러 그럴 수도 없었다. 독립(獨立), 개조(改組), 도의(道義), 공존(共存), 균분(均分)과 같은 말들이 희망과 불안을 머금은 채 거리를 부유했다.

물론 가능성은 가능성으로만 남았을 뿐, ‘개벽은 결코 도래하지 않았다. 조선은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고, 세계 역시 공존공영의 길로 나아가지 못했다. 3.1 운동과 함께 터져 나온 무수한 말과 글들도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3.1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중심과는 다른 주변의 근대를 개척하고자 고군분투한 생생한 증언록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주변의 근대는 수탈개발이라는 이항대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주변이 황폐화되었든 윤택해졌든 간에 이를 실현한 x변수는 결국 중심이라는 점에선 수탈개발이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주변의 모던함에 주목하는 문화사나 중심(제국)과 주변(식민지)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제국사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긴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중심의 역사를 그대로 주변에 이식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권보드래는 이 x(중심/제국)y(주변/식민지)라는 도식 자체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는 게 보다 정직한 표현일 것이다. 중심의 그림자를 애써 걷어내려는 시도는 결국 꼴사나운 자기연민이나 광기에 찬 폭주로 이어지기 마련이므로. 대신 그는 y가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벡터에 주목한다. x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해서 y가 이를 그대로 답습하는 건 아니다. y, 즉 주변이라는 위치 자체로부터 비롯된 힘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변은 거의 언제나 중심에 비해 미숙하고, 중심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위치 덕에 주변은 중심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3.1을 전후해 터져 나온, 설익었지만 생생히 살아 있는 목소리들이야말로 한반도의 근대인 것이다. 김수영의 말마따나 우리는 이 근대에 거대한 뿌리를 박아야 한다, 3한강교의 철근기둥도 좀벌레의 솜털로 느껴질 만큼 거대한 뿌리를.

아울러 다른 주변과의 접점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단순히 3.1 운동이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식으로 xy의 도식을 그대로 반복할 게 아니라, 세계 각지의 y들이 만들어낸 변화무쌍한 벡터를 넓은 시야로 아울러야 한다. 저자가 3.1에 닿기 위해 프랑스혁명과 아이티혁명,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라틴아메리카와 인도차이나의 역사를 공부한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친구가 그랬던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결국 그와 함께 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친구도 필시 어느 소설이나 영화에서 들었던 것이겠지만, 이제 와서 출처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 싶다. 31일의 밤을 읽으며 나는 한반도의 근대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 물 수 없으면 짖지도 말라던 윤치호나 민족개조를 외친 속물교양 이광수뿐 아니라, 일제가 나무를 꺾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무명씨까지 말이다.

잘못 쓴 거 아니냐고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제대로 쓴 게 맞다. 그동안 내가 마음을 주고 관심을 쏟아온 대상은 어디까지나 윤치호나 이광수 같은 사람들이었다. ‘트랜스내셔널한 코스모폴리탄으로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는 내 모습이 이들 식민지 지식인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윤치호와 이광수는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라 나랑 비교하는 게 실례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윤치호와 이광수는 물론이고, 이들을 좌절케 하고 끝내는 흑화시킨 식민지 조선 역시 사랑하려고 한다. 주변이라는 좌표로부터 비롯된 가능성과 한계를 낯설게 봄으로써 한반도의 근대를, 나아가 한국어 화자로서의 나를 조금 더 좋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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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과 회사의 본질 - 재산권과 계약권의 이종교배
김종철 지음 / 개마고원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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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표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단연 가오나시(顔無). 이름 그대로 얼굴 없는 요괴인 가오나시는 반투명한 검은 몸 위에 표정 없는 가면 하나를 덩그러니 달고 있는데, 누군가를 삼켜 목소리를 빌려야만 말을 할 수 있다. 영화에서 가오나시는 가짜 사금으로 주인공 치히로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만, 물욕이 없는 치히로는 이를 거절한다. 분노한 가오나시는 여관 종업원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며 폭주한다. 결국 치히로가 건넨 쓴 경단을 먹고서야 가오나시는 모두를 토해내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 이제 영화를 약간 비틀어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자. 치히로는 가오나시에게 여관의 물질적 피해와 종업원들이 겪을 트라우마에 대한 보상을 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글쎄 가오나시가 쓰고 있던 가면을 툭 던지면서 모든 건 이 가면이 한 일이라고 발뺌하는 게 아닌가! (, 가오나시는 말을 못 하니깐 손가락으로 가면을 가리키기만 했을 것이다.) 치히로의 얼빠진 표정이 스크린에 비치는 순간 관객들은 그대로 극장을 빠져나왔을 것이고, 스튜디오 지브리가 문을 닫는 시점은 10년 정도 앞당겨졌을 것이다. 가면한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다니,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그런데, 영화 시나리오로도 써먹을 수 없는 이 얼토당토않은 일이 현실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면 믿겠는가? 청해진해운의 대주주인 유병언 일가, 60여 명의 직원들이 백혈병림프종 등의 암으로 사망했지만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는 삼성가 등, 대기업의 대주주는 매우 적은 지분으로 막대한 권한을 누리지만 사회적 책임으로부터는 사실상 자유롭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주위의 모든 걸 게걸스레 집어삼키면서 필요할 땐 가면을 내세워 교묘히 책망을 피해가는 가오나시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인 것이다.

김종철의 금융과 회사의 본질은 회사(정확히는 유한책임 주식회사)라는 이름의 가오나시에게 가차없이 매스를 들이대며 그 기원과 본질을 탐구하는 역작이다. 영미권의 정통정치사상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저자는 회사의 본질이란 다름 아닌 재산권과 계약권의 이종교배라고 이야기한다. 재산권과 계약권의 이종교배라니, 관념에 불과한 권리를 어떻게 생물처럼 교배할 수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만큼 회사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한 표현은 없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칠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동서고금 어디에나 존재해왔던 계약권과 달리, 재산권은 로마법 이외의 법체계에서 찾기 어려운 독특한 권리다.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던 로마제국은 정복지의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는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마련된 법적 권리가 바로 Dominium이다. 이후 로마의 노예경제가 발전하며 Dominium노예의 주인에서재산 일반에 대한 권리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그 기원에서 알 수 있듯 Dominium은 소유물을 마치 노예를 부리듯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며, 소유에 대한 사회의 인정을 필요치 않는다는 점에서 허구적이다.

로마의 지배계급은 이 재산권을 국가기구를 통해 법적으로 정당함으로써 막대한 토지와 노예를 손에 넣었고, 심지어는 세금마저 사적으로 갈취했다. 그러나 이토록 탐욕적인 로마사회에서도 한 사람이 재산권과 계약권을 동시에 누릴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내가 계약을 통해 누군가에게 재산을 양도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재산을 남에게 넘겼으면서도 여전히 그것이 내 것인 양 행세한다면 이는 횡령으로 간주되었다. 현대인이 보기에도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니라니, 무슨 슈뢰딩거의 재산도 아니고!

그러나 이 상식은 13세기 잉글랜드에서 처음으로 뒤집히기 시작한다. 원래부터 잉글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중앙집권적인 국가였고, ‘분권적인봉건제조차 잉글랜드에선 노르만 정복왕조의 국가재편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같은 봉건제라 해도 이웃 프랑스와 달리 잉글랜드의 모든 땅은 원칙적으로 왕의 것이었다. 당연히 영주에겐 이런 저런 제약과 의무가 따라붙었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을 경우 사후 토지를 왕에게 반환해야 했다.

토지에 대한 재산권은 누리면서도 이에 따른 사회적 의무는 지고 싶지 않았던 잉글랜드의 영주들은 토지를 제삼자에게 파는 것도 아니고 안파는 것도 아닌 기묘한 방법을 고안한다. 바로 재산권을 양도하되 매달 배당금을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동의 없이는 토지를 함부로 처분할 수 없게끔 합의하는 것이다. 이를 신탁(trust)이라고 한다. 신탁을 통해 재산권과 계약권은 융합의 토대를 마련했다. 있는 자들에겐 무한한 권리를 누리되 책임은 0에 수렴하게끔 살아갈 길이 열렸고 말이다. (역시 세상의 온갖 추악한 협잡질은 영길리 놈들이!!)

토지라는 인큐베이터를 거쳐, 재산권과 계약권은 17세기 런던의 금세공업자들 손에서 보다 세련된 융합을 시작한다. 금세공업자들은 자신에게 금을 맡기는 사람에게 약속어음을 발행해 주었다. 이는 예금주가 금에 대한 소유권을 금세공업자에게 넘기는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동시에 금세공업자는 약속어음을 받은 사람에게 언제나 돈을 찾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줬다.(요구불 지급) 그렇다면 금세공업자는 소유권을 넘겨받은 게 아니라 그저 남의 재산을 보관해줄 뿐이라고 볼 수도 있게 된다.

이러한 이종교배를 통해 금세공업자들은 하나의 예금에 대해 이중의 재산권을 창조해냈다. 금은 금세공업자의 것인 동시에 예금주의 것이기에, 같은 돈을 금세공업자도 쓰고 예금주도 쓴다. 게다가 금세공업자들이 발행한 은행권은 이를 지참한 누구든 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뻥튀기된 돈은 더 넓은 곳에서, 더 수월하게 퍼져나간다. 현대 금융과 화폐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17세기 말에 이르러, 재산권과 계약권의 이종교배를 위한 단단하고 영구적인 토대로서 근대적 인격(Person) 개념이 탄생한다. 영어의 Person은 한국어에는 없는 말인데, 본래 무대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뜻하던 그리스어 Persona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인격이란 인간 그 자체라기보다는, 텅 빈 가면과도 같은 추상적 관념이다. 흥미로운 점은 17세기 잉글랜드의 자유주의자들이 사람을 인격과 재산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파악했다는 사실이다.

근대 자유주의의 기틀을 다진 로크는 통치론에서 “Every man has a property in his own person”이라고 자신의 주장을 간명히 요약했다. 그간 이 문장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체/일신/인신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다라고 번역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모든 사람은 그의 인격 안에 어떤 재산이 있다야말로 올바른 해석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로크는 사람=인격+재산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 때 재산은 비단 물질 뿐 아니라 사람의 신체와 재능, 심지어는 자유와 생명까지 포괄한다.

재산의 범주에 사실상 유·무형의 모든 것들이 들어간다고 했을 때, 그럼 인격은 무엇인가? 인격이란 이들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며 자유롭게사고 팔 수 있는 행위자다. 행위자로서의 인격은 자신의 노동을 섞는 행위를 통해 무제한으로 재산을 불려갈 수도 있지만, ‘합법적인계약을 거친다면 그 어떤 재산도 처분할 수 있다. 심지어는 신체와 생명까지 말이다! 인격의 결정아래 재산으로서의 자유를 팔아치우는 노예제는 이렇게 정당화된다. 노예에게 남겨진 페르소나는 사실 행위자는커녕 존재하지도 않는 텅 빈 가면에 불과함에도.

잉글랜드의 자유주의자들은 사람에게서 추출해낸 페르소나라는 인공물을 이제 공동체에게까지 덧씌우기 시작한다. 그 결과로서 탄생한 게 바로 근대 은행과 주식회사, 그리고 대의제이다. 공동체는 단순히 사람들의 집합을 넘어선 불멸의 인격(法人)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이 인격은 권력자들이 유사시에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방패막이에 불과하다. 주식회사의 대주주는 평소에는 회사라는 가면을 쓰고 지극히 주인답게행동한다. 하지만 회사가 망하면 대주주는 재빨리 가면을 벗어버리고 자신은 저 가면과 그저 계약을 맺었을 뿐이라고 발뺌한다.

대의제 의회의 국회의원 역시 자신이 곧 국가 자체인 양 거들먹거리면서도, 뭔 일만 터졌다하면 자긴 국민의 뜻을 대표했을뿐이라며 징징댄다. 게다가 이제 국가는 왕 개인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인격이기 때문에, 과거라면 왕의 죽음과 함께 탕감되었을 부채 역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는 불멸의 빚쟁이, 불멸의 액받이 무녀로 전락한다.

강자는 인격이란 가면을 필요에 따라 썼다 벗었다하며 끊임없이 재산을 불려가고, 약자는 인격 하나 덩그러니 손에 쥔 채 모든 걸 빼앗긴다. 이 비정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저자는 기본자산제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인격뿐 아니라 최소한의 자산 역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개인의 일부로 남겨두자는 것이다. 마치 팔과 다리, 장기와 같은 신체처럼 말이다. 기본자산은 어떠한 채무변제 의무로부터도 자유롭지만, 동시에 개인 역시 이를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비생산적으로 소비할 수 없다.

저자가 내건 기본자산제라는 대안은 근대 영미 정치사상에 대한 그의 비판만큼이나 급진적이다. 그렇기에 글을 읽으며 그 신박함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과연 이를 실현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비관적으로 본다면, 기본자산제의 미래는 결국 21세기 판 정전제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23세기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에서 200년 전의 극심한 양극화를 설명할 때 양념처럼 끼워 넣는, 실현되지 못한 대안 중 하나로 치부될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그 때도 학교라는 제도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남아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많은 책들이 현실을 탁월하게 분석, 비판해놓고 정작 해법에 대해선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생각했을 때, 기본자산제라는 대안은 매우 소중하다. 일단은 이러한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다. 200년 뒤 고등학생들이 저자를 실패한 개혁가 조광조로 기억할지, 새 체제의 설계자 정도전으로 기억할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운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책의 제목과 디자인이 너무나 구리다! 작년 국민일보기사에선 페르소나와 정치란 제목으로 소개되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밍숭맹숭한 제목을 달고 나온 걸까? 표지도 너무 평범하다. 이래서야 그저 그런 영미권 경제학자가 쓴 그저 그런 자본주의 비판서의 그저 그런 번역서 같지 않은가! 나였다면 제목은 페르소나와 정치로 그대로 밀고 가고, 표지에는 텅 빈 가면 뒤 불온한 그림자가 우글거리는 그림을 실었을 거다. 지난 3월에 나온 이 책에 대한 서평이 고작해야 세 개(그나마도 한 개는 출판사에서 쓴 거다!)밖에 안 되는 건 전적으로 출판사 탓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2쇄부터는 다른 제목과 표지를 달고 나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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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고원 2020-12-15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렇게 충실한 리뷰라니~~ 감사!

사족: 책의 표지와 제목은 이미 책을 읽어 내용을 아는 독자가 아니라 책을 읽기 전 독자의 눈에 들기 위한 것이랍니다. <페르소나와 정치>라는 제목이나 가면과 불온한 그림자가 등장하는 표지라면, 아마도... ‘겉과 속 다른 위선적 막장 정치(가)‘ 같은 이야기를 다룬 너무 뻔한 책을 독자들은 연상하기 십상이었을 겁니다.^^
 
아시아 건축기행 - 유토피아를 디자인하다 My Little Library 7
강영환 지음 / 한길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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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알고 있다,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그리고 둥근 지구에는 6개의 대륙과 크고 작은 섬들이 떠있으며, 그 위에 200여 개의 국가가 아웅다웅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이 세상이 평평하다고 믿던, 그래서 세상의 끝까지 가면 떨어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옛 사람들을 마음껏 비웃어줄 만큼, 우리는 스스로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자신감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터치 몇 번으로 세계 구석구석을 징그러우리만치 선명하게 담아낸 위성사진을 간단히 검색할 수 있다. 각종 위키에는 세계 각지에 대한 자질구레한 정보가 그야말로 넘쳐흐른다. 하지만 단순히 알 수 있다고 해서, 진정으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알고 있다는 건 어떤 상태를 일컫는 걸까? 지구에 사는 그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이란 게 존재할까?

예컨대 동양은 어떨까?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책 오리엔탈리즘에서 유럽인에게 동양이란 아나톨리아와 서남아시아(근동/중동)인 반면, 미국인에게 동양이란 곧 동아시아(극동)라고 지적한다. 똑같은 세계지도라 해도 한국의 세계지도는 동아시아가 중심인 반면, 영국의 세계지도는 유럽대륙이 중심에 놓인다. 내가 누구고 어디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지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나 다른 것이다.

강영환의 아시아 건축기행이 독자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 역시, 세계의 모습은 여럿이라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깨달음이다. 이는 책의 제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책에서 다루는 지역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국한되지만, 제목에는 별다른 수식어 없이 아시아만 떡하니 써놓았기 때문이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만 다녀왔으면서 아시아 건축기행이라니, 한국 독자라면 어딘가 허전하게 느낄 법도 하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평소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던 아시아는 과연 어떤 아시아였던가? 말만 안했다 뿐이지, 한국인에게 아시아란 사실 한국이 속한 동()아시아였다. 인도아대륙과 인도차이나반도, 인도양의 수많은 섬들은 한국인에겐 아시아그 자체라기보다는, ‘이나 동남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만 하는 곳이었다. 많은 한국인들은 은연중에 아시아의 대표는 어디까지나 동()아시아고, 나머지 지역은 쩌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영환은 그간 한국에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라 불리던 지역을 과감하게 아시아라고 부름으로써, 우리의 좁은 시야를 과감히 열어젖힌다. 그렇다, 저들도 아시아다. 서울에선 동()아시아가 곧 아시아겠지만, 프놈펜과 방콕, 자카르타에서는 그곳이 바로 아시아다. ‘이나 동남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시아의 당당한 일원인 것이다. 저자가 자칫 혼란을 줄 수도 있는(예컨대 , 이거 중국이랑 일본 얘기 아니었어?!”) 제목을 구태여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여정은 인도 남부에서 시작해 바다를 건너 스리랑카를 들르고, 자와 섬을 거쳐 다시 인도차이나 반도를 둘러본 후 네팔과 부탄에서 끝을 맺는다. 행선지를 이어보면 길고 비스듬한 타원이 만들어진다. 이 매끄러운 타원은 그냥 나온 게 아닌지, 본래 경상일보에 연재된 글을 묶은 것임에도 마치 한 번에 쓴 책처럼 짜임새가 있다.

저자는 아시아 곳곳의 종교건축을 소개하는데 책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신을 찬미하고 그 전능함을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이 장엄한 건축물을 유토피아라고 볼 수도 있겠다. 유토피아의 의미는 어디에도 없는 곳인데, 종교건축이란 초월적인 무언가를 형이하의 세계에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종교건축은 어디에도 없는 곳’, 다시 말해 유토피아를 감히 이 땅에 세워보려는 야심찬 시도인 것이다.

한데 아시아 곳곳에 들어선 이 유토피아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그리 따스하지 않다. 아니, 따스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매섭다. 자이나교의 성지인 인도 스라바나비라골라의 사원과 위압적인 입상 앞에서는 평화공존과 해탈을 추구했던 자이나교의 정신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냐며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자와의 보로부두르를 보면서는 이곳 사람들의 찬란한 고대문명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이를 추동한 게 신앙심보다는 왕의 욕심이 아니었을까하고 넌지시 질문한다. 미얀마 양곤에서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편에는 휘황찬란한 황금불탑이, 다른 한편에는 너저분한 시장이 들어선 모습에 부처의 가르침이 진정 무엇이었나를 고민한다.

아시아의 종교건축을 향한 저자의 비판은 꽤나 수위가 높은지라, 혹자는 이거 오리엔탈리즘 아니야?’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시선을 식민지의 옛 수도를 거니는 백인 제국주의자의 그것과 동렬에 놓을 수는 없다. 저자는 서구, 정확히는 서구 식민국가가 아시아에 남겨놓은 위압적인 관공서와 랜드마크 역시 통렬히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건축이든 식민국가의 개선문이든, 모두 주변을 무시한 채 홀로 우뚝 서서 그 압도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전까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코 다시 나올 수 없는 유토피아가 되어보려는 그 오만함이야말로 저자가 경멸해 마지않는 것이리라.

아시아를 거닐며 만난 너무 많은 유토피아에 기가 빨린 듯,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한국 전통건축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신비롭고 경건한 석굴암과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인간다움이 물씬 느껴지는 불국사는, 저자에겐 온갖 기름진 음식에 질렸을 때 들이키는 동치미 한 사발과도 같다. 다른 나라까지 가서 굳이 한국 전통건축을 예찬하는 저자의 모습에 젊은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1953년생이다. 그가 한창 커리어를 쌓아가던 시절, 문화예술계 최대의 과제는 한국적인 것의 영역을 발견하고 개척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자부심은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오늘날 한국적인 것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지만!)

길고 비스듬한 타원을 그리며 펼쳐지는 저자의 아시아 건축기행은 네팔과 부탄에서 끝을 맺는다. 결코 부유하다 할 수 없는 이 작은 나라들에서, 저자는 자신이 꿈꿔온 이상적인 공간을 비로소 마주한다. 네팔 박타푸르의 광장들은 오직 관광객만을 위한 박제된 문화유산이 아니다. 광장은 평범한 주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면서도, 길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탑과 사당이 자리하고 있어 그곳이 신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상기해준다. ()과 속(), 인간과 신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지 않고 광장에서 한데 어우러진다. 그 결과 박타푸르에서는 일상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어떠한 영성이 깃들어 있다.

유토피아는 없다. 장엄한 종교건축이든 휘황찬란한 랜드마크든, 유토피아를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사람들의 삶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건축,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주되 그 삶에 경건함을 불어넣어주는 건축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다. 긴 여행 끝에 저자가 얻은 깨달음은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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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 세상의 통념을 저격하다
강양구 지음 / 북트리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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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로 쓰인 좋은 교양서가 없다!!” 어쩔 수 없는 한국어 화자이자 중증의 활자중독자인 내가 한국 출판계에 갖는 불만 중 하나다.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어로 된 좋은 학술서는 사실 적지 않다. 생각해보라. 한국에 대학이 몇 개고 연구자가 몇 명인데, 이들이 쓴 박사논문 중에 건질 만 한 게 없겠는가? 심지어 훌륭한 연구자와 명민한 출판사가 만나면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만 잘 엮어도 훌륭한 학술서 하나를 뚝딱 만들어낸다.

반면 교양서의 경우는, 안타깝지만 좋은 책을 찾기 쉽지 않다. 어쩌면 당연하다. 교양서가 학술서보다 쓰는데 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같은 선수들사이에서 읽히는 걸 전제로 하는 학술서와 달리 교양서의 독자는 말 그대로 교양시민’, 그러니깐 새로운 지식과 깨달음에 목말라 있는 일반인이다. 이들 교양시민에게 지식의 첨단을 요령 있게 소개해야 할 뿐 아니라, 보다 깊은 공부로 나아갈 수 있게끔 신선한 자극을 주는 일이 교양서 저자의 의무다. , 간결하고 우아한 문장도 빠질 수 없다. 그러니까 좋은 교양서 쓰기란 무지하게 어려운 일인 것이다.

이 어려운 일을 보란 듯이(?) 해내는 강양구 기자님이 최근 또 한 권의 훌륭한 교양서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을 내셨다. 그런데 이 책, 조금 이상하다. 우선 새빨간 표지부터 뭔가 불온한(!) 기운이 물씬 풍긴다. 내용은 더 자극적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과연 제대로 작동하는지, 미세먼지가 정말 중국 탓인지, 시골이 도시보다 친환경적인지 등,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겨온 통념에 거침없는 질문을 던진다.

좋다, 여기까진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책, 이런 수상한 질문들을 꺼내고 있는 걸로도 모자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며 자기 생각을 밝히는데 거리낌이 없다. 아니 이게 교양서, 그것도 고등학생을 상대로 쓴 글(고교독서평설)에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 본디 교양서의 사명이란 지식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전달이 아니던가! 혹시 저자가 교양서의 이름을 빌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고등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려는 건 아닐까?

이에 대한 내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식의 전달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수업평가에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얘기 중 하나가 선생님이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가르쳐요인 것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객관중립을 신봉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과연 객관중립이 가능할까?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특수하고 편향된 입장에 불과하다. 이를 숨기고 자신만이 객관이고 중립이니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라는 태도야말로 오히려 내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오만이며, 다양한 생각을 억누르는 폭력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남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큼 순진무구하지도 않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선생님이 정치적이라는 불만이 그렇게나 많이 터져 나오는 모습은, 학생들이 선생님의 생각에 전혀 감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교사의 편향된주장은, 그간 막연한 느낌으로만 존재했던 학생들의 생각을 보다 단단히 영글게 하는 촉매의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요컨대, 가르치는 쪽이 말을 쎄게할수록 배우는 쪽에게 도움이 된다.

저자가 우물쭈물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7p.)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대충 글을 마무리 짓지 않는다. 대신 온갖 흥미진진한 주제들을 풀어놓고는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라며 독자에게 질문을 건넨다. 전지전능한 선생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독자와 눈을 맞춘 채 스파링이나 한 판 뛰자며 주먹을 쥐어 보이는 저자라니! 없던 호기심도 절로 생기지 않을까?

물론 저자와 독자의 체급 차는 굉장히 큰지라, 아무 것도 없이 맞짱을 뜬다면 어느 쪽이 질 지는 너무나 뻔하다. 따라서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은 상세하고 친절하게 배경지식을 설명해 줌으로써 둘 사이의 밸런스를 맞춘다. 특히 각 챕터 끝부분에 더 읽어보면 좋을 책들을 소개한 <확장해서 읽기>는 저자의 꼼꼼함과 배려심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비단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책 뿐 아니라, 이와 반대되는 책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위험한선거에 반대한다에서 저자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비판하며 제비뽑기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출판사는 무려 후마니타스다!!) 역시 <확장해서 읽기>에 들어가 있다. 마찬가지로 집단 지성인가, ‘집단 바보인가우리보다 멍청한 판단을 내릴 위험을 경고하는 글이지만, 저자는 집단 지성의 가능성을 긍정한 대중의 지혜도 친절하게 소개해놓았다. 판을 깔아줄 테니 제대로 맞짱한 번 떠보자는 저자의 진심이 느껴진달까?

이처럼 독자들을 향해 도발적인 물음을 던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저자가 바라는 건 더 많은 수상한 질문위험한 생각이 넘쳐 나는”(8p.) 세상이다. 우리 몸 속 약 39조 마리에 달하는 세균들은 저마다 중요한 면역 기능을 담당하는 공생자라고 한다.(요구르트의 꿈, 김치의 꿈, 유산균의 꿈) 마찬가지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상한 질문위험한 생각이야말로 세상을 보다 건강하고, 활기차고,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주는 세균들일 것이다.

수상한 질문위험한 생각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매개체로서는 뭐니 뭐니 해도 책만 한 게 없다. 저자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챕터 역시 책을 향한 저자의 뜨거운 애정이 느껴지는 <들어가며>였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읽으며 책 읽는 재미를 깨달았다는 저자의 경험담에선 치과진료를 기다리며 흑백판 먼나라 이웃나라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 보여 조금 뭉클하기도 했다.

물론 세상은 우리 같은 독서 중독자들에게 그리 녹록하지 않다. 저자가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지적했듯 몇몇 셀럽들의 책이 베스트셀러를 독점하는 쏠림 현상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롭고 참신한 책들이 담고 있는 수상한 질문위험한 생각셀럽들의 책에 가로막혀 독자에게 채 가닿지도 못한다. 저자는 책 동네의 역동성이 사라져가는 이러한 현실에 우려를 금치 못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지하 토굴에서 비밀 회합을 이어가던 초기 기독교가 화려하게 부상해서 세상을 점령했듯이 책 읽는 사람들 사이의 느슨한 연결이 쌓이고 쌓여서 책읽기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감을 과시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글쎄, 나는 저자가 올린 게시물을 읽고 책 읽는 사람의 지위가 로마제국의 가혹한 박해를 받아 숨어 지내던 기독교도에 비견될 정도로 추락했구나 싶어 조금 우울하긴 했다. (공교롭게도 오늘 도서관 서가에서 뽑아든 책의 제목은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이다.) 그래도 다른 어떤 수단보다도 넓고 깊은 경험(6p.)을 선사하는 독서의 가치와 즐거움을 굳게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책이라는 숙주를 거쳐 온 세상에 수상한 질문위험한 생각들이 우글거리기를 꿈꾼다.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이 질문하기를 가르치지 않는 사회, 책 읽지 않는 시대에 자그마한 균열을 낼 수 있는 짱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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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학의 왕국 - 호락논쟁 이야기
이경구 지음 / 푸른역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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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락논쟁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주제다. 최소한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이라면, 조선 전기와 후기에 사단칠정논쟁과 예송논쟁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락논쟁은 앞의 두 논쟁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논쟁으로 꼽힘에도 그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나 역시 재수 시절 풀었던 국어 모의고사 지문을 통해 처음으로 호락논쟁을 접했다.

  사실 세 논쟁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운 건 의외로 호락논쟁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사단칠정논쟁과 예송논쟁의 경우, 막상 조금이라도 깊게 들어가는 순간 깎아지른 듯 솟아오른 절벽을 맞이하게 된다. 역사와 철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상태에서 사단과 칠정이 리()와 기() 중 어디에 속하는지, 계모인 자의대비는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전개된 치열한 논쟁을 접한다면 누구라도 얼이 빠질 것이다.

  반면 호락논쟁이란 거칠게 말해 인간과 동물,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본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두고 벌어졌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머리에 팍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호락논쟁의 당사자들이 부딪혔던 쟁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고민거리이기에, 비교적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껏 호락논쟁이 대중에게 이토록 홀대받았던 이유는, 다른 두 논쟁과 달리 논쟁 바깥의이야깃거리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사단칠정논쟁은 젊고 야심찬 기대승의 도발에 나이든 대학자 이황이 보인 진지하고 겸손한 태도로 두고두고 회자되며, 조선 전기의 건강한 학문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논쟁으로 기억된다. 예송논쟁 역시 그 쓸모없음을 조롱하건, 조선후기 공론정치의 성숙에 감탄하건 간에 어쨌든 이야깃거리가 차고 넘친다. 이와 달리 호락논쟁은 소위 임팩트있는 사건이 없어서인지 그간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 듯하다.

  요컨대 누구나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그 문제의식에 공감할 수 있지만, 이야깃거리가 상대적으로 풍부하지 않다는 점이 호락논쟁을 21세기 한국인의 삶으로 끌고 들어오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였던 것이다. 조선, 철학의 왕국(이하 철학의 왕국)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대범함을 보여준다.

  저자 이경구는 호락논쟁의 쟁점들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기보다는 이를 두고 벌어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논쟁의 당사자인 한성의 낙론과 충청의 호론, 논쟁을 중재해야 했던 영조와 정조, 논쟁 바깥에 비켜서서 이를 객관적으로 관찰했던 남인과 소론 등 호락논쟁을 키워드로 다양하게 뻗어나가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새 조선후기 사상사의 전체상이 들어온다. 단순히 글이 좋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너무나 단정하고 아름다워 탐이 날 지경인 저자의 문장 역시 독자로서 누리는 과분한 호사이자 즐거움이다.

  이처럼 술술 읽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철학의 왕국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철학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리학이란 무엇이며, 호락논쟁은 무엇을 두고 벌어졌는가를 서술한 2장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머리를 싸매는 성리학(!!)을 알기 쉽게 정리해 놓았을 뿐 아니라, 이쪽 분야의 책으로는 퍽 이례적으로 주자학의 양면성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땅에 무려 500년 넘게 뿌리를 내려온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었던지라, 나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은 주자학을 평정심을 갖고 차분히 바라보지 못한다. 학자들 역시 다르지 않은지라, 자신이 생각하는 조선이 오래된 미래북한의 조상이냐에 따라 주자학에 대한 평가가 널을 뛰곤 한다. 하지만 사람이란 모름지기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인데, 주희 선생이 아무리 꼼꼼하고 똑 부러진다 한들 우리와 얼마나 다르겠는가!!

  콩알만 했을 때부터 저 하늘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했다던 조숙한 소년 주희는 불교와 도교의 도전에 맞서 송대 유학을 집대성하고, 하나의 체계를 세운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는 리()의 보편성을 근거로 만인의 성인됨을 옹호했는데, 김상준이나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를 근거로 주자학에 근대성의 맹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시에 주자는 기()의 차별성을 내세워 금수와 이민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는 여진족의 금에게 중원을 빼앗겼다는 열패감에 시달리던 남송의 한족 이데올로그이기도 했던 것이다. 주자학은 중화와 야만, 성인과 범인을 구별 짓고 차별하는 이데올로기라고 여기는 계승범의 경우 바로 이러한 차별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리라.

  요컨대 주희는 김상준과 미야지마 히로시 식으로도, 계승범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지금의 우리가 그렇듯이 상당히 다면적인 인물이다. 그가 집대성한 주자학 역시 아무리 체계적이라 한들 평등과 차별의 양 측면을 모두 갖고 있고 말이다. 호락논쟁이란 결국 주자 자신보다도 주자를 완벽히 이해하고자 했던 조선의 유자들이, 주자학의 어느 한 측면에 주목하여 이를 정밀하게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불거진 대립인 것이다.

  조선 최대의 이데올로그였던 송시열의 제자들은 만물의 본성에 대한 문제를 두고 분화를 시작했다. 충청도의 권상하를 중심으로 단단히 결집한 호론은 인간과 동물, 성인과 범인의 본성이 다르다며 차별을 정당화했다. 한성의 김창협을 중심으로 느슨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낙론은 만물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며 평등을 주창했다. 호론과 낙론이 벌인 치열한 논쟁은 굉장히 흥미진진하며, 진리를 향한 그들의 열정과 노력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특히 낙론을 부흥시킨 김원행과 그 제자들이 속세와 거리를 두고 마치 종교인처럼 몸과 마음을 갈고닦는 모습은, 세속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우리 근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허나 시간이 흐르며 호락논쟁은 초기의 역동성과 건강함을 잃고 논쟁만을 위한 논쟁, 아니 극단적으로 말해 상대방을 파멸시키기 위한 정쟁으로 변질되고 만다. 글을 읽어가며 이들이 과연 얼마만큼 실제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해가고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애초에 호론과 낙론 모두가 사상적 지반으로 삼고 있던 주자학이 가장 강조했던 게 다름 아닌 경전 공부였음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논쟁이 주자를 들어 주자를 비판하는 공리공론으로 흐르는 건 어쩌면 예정된 파국인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러한 독자의 반응을 예상한 듯 5장의 한 챕터를 할애해 당시 조선이 이전과는 다른 흐름 속에 놓여 있었고, 호론과 낙론 역시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저자의 문제가 아니라 호락논쟁 자체의 문제이며 동시에 조선이란 국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철학의 왕국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하자마자 떠올랐던 건, 조선은 고도의 관념국가였다는 이영훈의 일갈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철학의 왕국관념국가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던 나의 조선상은, 6장에 이르러 결국 후자로 기울고 말았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아마 누구라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컨대 호락논쟁의 당사자들이 인식하고 있던 사회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사회란 말이 풍기는 근대의 냄새가 영 어색하다면, 생활세계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당시 조선 유자들에게 사회란 지리적으로는 궁궐 혹은 넓게 잡아 사대문 안이고, 인적으로는 같은 양반에 국한되는 왜소하고 폐쇄적인 공동체였으리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최근 한국에서 가장 핫한(!) 지식인인 김영민은 얼마 전 일본비평에 통념과 달리 조선은 중앙정부와 사회가 모두 약한 국가였다는 문제적인 논문을 개제한 바 있다. 그의 냉정한 분석은 적어도 내겐 꽤 타당하다고 느껴진다. 한성의 중앙정부에서 활동하던 호락논쟁의 당사자들은 궁궐 바깥의 사회를 이해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형식화·교조화된 호락논쟁은 파국으로 치달았고, 이와 더불어 철학의 왕국 조선 역시 황혼을 맞이한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종필은 2004년 총선에 출마하며 해는 지더라도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인다는 말을 남겼다. 노회한 정치인이 자신의 욕심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수사에 불과하지만, 조선의 19세기는 이 멋들어진 말이 꽤 어울리는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호락논쟁이라는 해는 저물었지만, 그 붉은 빛이 주변으로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성리학을 다룬 2장이라면, 19세기의 변화를 다룬 7장은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중앙 유자들의 논쟁은 활력을 잃었지만, 이 시기에 이르면 오히려 유학이 민간으로 널리 전파되어 집마다 학설을, 사람마다 의견을 내세우는 수준에 도달한다. 19세기란 결국 이와 같은 인민의 유교화가 진행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최근 학계에서는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착실히(?) 이루어진 전 사회의 유교화가 이후 한국의 근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밝히려는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물론 주자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교화에 대한 평가 역시 극과 극으로 갈린다. 혹자는 인민의 유교화란 사실상 가족 단위의 신분상승에 몰두하는 온 나라 양반되기에 불과했다고 단정한다. 이로부터 비롯된 한국의 근대는 결국 혈족공동체의 지원을 받은 개인들이 중앙을 향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의 사회였으며, 그 에토스는 연대 없는 평등주의였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반면 인민의 유교화를 만인이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갖추고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군자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 이들에 따르면 식민지시기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건 다름 아닌 군자들의 행진이었다.

  저자는 19세기 인민의 유교화가 결국 한국의 근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제가 호락논쟁인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리라. 저자가 여백으로 남겨놓은 부분을 채워가는 건 독자인 우리들의 몫이다. 물론 저자에게 바라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작년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잔잔한 파장을 몰고 온 와타나베 히로시의 일본정치사상사와 같은 훌륭한 통사를 저자가 써주었으면 한다. 물론 길고 지난한 과정이 되겠지만 철학의 왕국을 주춧돌로 삼는다면 아예 불가능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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