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경상도의 권력중심이동 태학총서 36
김성우 지음 / 태학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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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순우리말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한자와 그다지 친하지 않다. 알파벳은 술술 읽어도 한자 앞에서는 숨이 턱 막혀버리는 사람은 별나다기보다는 차라리 평범하다. 하지만 자기 이름 하나 한자로 못 쓰는 한자 까막눈일지라도 자신 있게 끼적일 수 있는 한자가 몇 있으니, ‘밭 전()’ 역시 그 중 하나다. 역시 먹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걸까.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바로 한국인의 주식인 쌀()은 밭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을 대지 않는 작물, 가령 밀이나 보리, 메밀 등을 재배하는 경지가 밭이다. 그럼 쌀은 어디서 나느냐, 바로 논이다. 한자로는 ()’이라 한다. ‘()’ 위에 ()’을 올린 모양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다. 하나, 오늘날과 달리 과거, 최소한 한자가 등장했을 무렵의 동아시아에선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일반적이었다. , 논농사의 성패는 전적으로 물에 달렸다.

  먼 옛날에도 당연히 지금처럼 쌀로 지은 밥을 먹었으려니 했을 현대 한국인, 특히 도시생활자에게는 퍽 놀라운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논농사는 결코 쉽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괜히 프랑스 역사학자 브로델이 동아시아의 논농사를 정원 가꾸기에 비유하며 그 세심함과 정교함에 경탄한 게 아니다. 특히 여타 지역보다 겨울이 춥고 강수량이 고르지 못한 한반도에서 무사히 쌀을 길러내기란, 원예를 넘어 분재(盆栽)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학자 김성우의 의문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겨울이 길기에 파종 시기가 늦을 수밖에 없고, 비가 많이 오지 않아 제때 물을 대기 어려운 한반도에서 어떻게 쌀이 주식이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논농사가 보편으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에서 한반도의 풍경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의 책 조선시대 경상도의 권력중심이동은 조선전기의 최선진지대인 경상도를 중심으로 이 의문을 풀어나간다. 단순한 지역사라기보다 경상도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조선시대사에 가까운 책으로, 문장 역시 명료하고 깔끔하다.

 

  앞서 이야기했듯, 한반도에 논농사가 뿌리내린 건 비교적 최근이다. 구체적으로 한반도에서 마른 땅(旱田)에서 띄엄띄엄(休耕) 짓던 농사를 물을 댄 땅(水田)에서 연이어(常耕) 짓게 된 건 13세기 후반이고, 지역적으로는 경상도가 시작이었다. 고려 말이나 되어서야, 그것도 경상도라는 좁은 공간에서만 겨우겨우 우리가 아는 형태의 논농사가 막 걸음마를 뗀 것이다.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은 이전의 그 어느 왕조보다 농업을 중시했고, 쌀의 놀라운 생산력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각종 농서 편찬, 저수지 조성 등 태종~성종 대까지 활발하게 실시된 각종 권농정책은 왕조가 논농사의 확산과 정착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물론 노력을 쏟는다고 곧바로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가령 세종 대 편찬된 농사직설(1429)이 전면에 내세운 조도(早稻)의 수경직파법(水耕直播法)이 이루어졌던 곳은 경상도, 그중에서도 일부 지역뿐이었다. 조선 농업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추켜세워졌던 농사직설, 사실 이렇게 되어야한다는 당위적 성격이 강한 이념형 농서에 가까웠던 셈이다.

 

  이처럼 논농사를 정착시키려는 왕조의 바람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머니 속 송곳처럼 홀로 치고 올라가는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경상도다. 역대 국왕들이 유독 경상도를 아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 기본기가 잘 갖춰진데다 경상도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첨단 농법을 제 고향에 야무지게 적용한 결과라 하겠다. 실제 세종실록지리지(1432)에 기록된 전국의 저수지 43곳 중 무려 46.5%20곳의 저수지가 경상도에 설치되었다. 15세기 중반에 이르면 경상도의 저수지는 720, 몽리면적은 2300여 결로 급증했는데, 수리정책을 처음으로 시도한 태종 대로부터 각각 3500%, 1238% 증가한 수치다.

  당대의 최선진지역인 경상도에서도 가장 앞서나갔던 곳은 경상도 서북부, 당시 표현으로는 우상도(右上道)에 위치한 선산(善山, 오늘날의 구미)이었다. 영남대로와 낙동강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자 완만한 평야와 구릉이 펼쳐진 선산은 신생왕조의 권농정책을 실험할 최적의 장소였다. 지리적 이점과 국가의 지원이 맞물리며, 고려 말까지만 해도 한적한 속현(屬縣)이었던 선산은 상주나 성주와 같은 전통의 강호들과 어깨를 겨루는 슈퍼루키로 거듭났다. 길재, 김종직, 김굉필 같은 조선 성리학의 기라성은 물론이요, 정초, 박서생, 하위지처럼 국가의 권농정책을 입안한 테크노크라트 역시 선산 출신이었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15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선산의 선진적인 농법은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경상도 서남부, 그러니까 우하도(右下道)에도 수경직파법이 도입된 것이다. 낙동강 하류의 드넓은 평야가 밭에서 논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이제는 우하도가 경상도, 나아가 전 조선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임진전쟁 때 누구보다 맹렬하게 일본에 맞서 싸움으로써 권력을 틀어쥐었으나, 끝내 인조반정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북인의 거점이 바로 이곳 우하도였다. 남명 조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이들의 거침없고 호방한 기질은, 어디까지나 곳간에 그득히 쌓인 쌀포대 덕에 가능한 것이었다.

  15~16세기의 선산과 16~17세기의 진주에 이어, 17세기 이후 경상도의 새로운 중심으로 등극한 곳은 안동이었다. 경상도 동북부인 좌상도(左上道)에 위치한 안동은, 그러나 이전까지의 중심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선산과 진주는 오늘날 사람들이 으레 떠올리곤 하는 농사짓기 좋은 땅의 전형으로, 큰 강을 끼고 너른 평야와 구릉이 펼쳐져있다. 반면 안동은 어떻게 이런 곳에서 먹고사나 싶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저 옛날 퇴계 선생이 고고히 리()와 기()의 오묘한 원리를 궁리하시기에나 알맞을 법한 이 궁벽진 동네가, 어떻게 경상도의 중심을 꿰찰 수 있었을까?

  원인은 15세기 후반 처음 시작되어 점차 퍼져나간 이앙법(移秧法, 모내기)에 있다. 일단 봄철 가뭄을 이겨내고 물만 잘 대면 잡초제거에 들어가는 노동력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는 건 이앙법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문제는 안정적으로 농업용수를 공급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통념과 달리, 하천 유역은 의외로 물을 대기 까다로웠다. 대규모 수리시설을 축조하고 꾸준히 관리하지 않는다면, 넘실대는 강물은 농사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상습적인 범람으로 애써 기른 작물을 휩쓸어갈 뿐이었다.

  모내기에 도전해보고 싶지만 대규모 제방이나 저수지를 세울 여력은 없었던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게 바로 조선 땅에 널리고 널린 산골짜기였다. 계곡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물만 잘 받아도 모내기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곡물을 막는 작은 둑인 천방(川防)을 세우는데 들어가는 노동력은 저수지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마침 연산군-중종-명종으로 이어지는 암군의 시대에 접어들며 수리시설을 축조·관리하려는 국가의 의지와 역량이 쇠퇴한데다가, 인구는 인구대로 늘어났기에 사람들은 평야를 떠나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산투성이 안동이 경상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17세기 중반 이후 안동이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며, 경상도의 풍경 또한 크게 달라졌다. 교통의 요지였던 선산과 달리 첩첩산중인 안동은 외부와 문물을 주고받기가 훨씬 어려웠다. 자연히 안동은 퇴계의 학설을 종교 수준으로 추종하는 폐쇄적인 사회로 변해갔고, 이웃 지역들을 깔보기 시작했다. 물류의 중심인 한성에 자리한 만큼 나름의 포용력과 유연성을 보여준 근기(近畿)의 노론과 달리, 안동의 남인은 가뜩이나 조선의 섬이 돼버린 경상도 안에서도 섬처럼 고립되었다.

 

  산으로, 산으로 농경지를 확대하다 끝내는 외부와 단절된 폐쇄적인 공동체로 전락한 안동은, 당시 조선에서 결코 특수한 사례가 아니었다. 오히려 저자는 안동이야말로 중국이나 일본과 구분되는, ‘한국식 지역개발의 전형이라고 이야기한다. 중국과 일본 역시 평야에서 논농사를 시작해 산으로 올라간 것까지는 비슷하지만, 끝내는 양쯔 델타와 간토로 내려와 뻘밭을 옥토로 가꾸었다. 반면 요즘말로 ‘K-지역개발이라 부름직한 조선의 개간은, 망국 직전까지 계속해서 위로만 올라갈 뿐이었다. 황해도와 전라도의 드넓은 평야가 비옥한 곡창지대로 거듭난 건 일제의 자본과 기술이 투입된 식민지시기에 이르러서다. (이와 관련해선 윤춘호의 봉인된 역사를 참고하라)

  산 속에 고립된 조선의 촌락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외부로부터 물자를 공급받기 극도로 어려운 환경인만큼, 자원은 한정된 것이기에 공동체 내의 누군가가 부를 일구면 이는 필시 다른 누군가의 몫을 뺏은 결과라는 생각이 자리 잡는다. 따라서 부자라 해도 주기적으로 큰 잔치를 열거나해서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당시 조선의 촌락을 움직인 것은 법이나 이기심이 아니라 체면과 위신, 도덕이었다. 19세기 초 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한목소리로 이야기하듯, 지구상에서 조선만큼 도덕경제가 잘 돌아가는 곳도 없었다. 호미 헐버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선은 봉건제적 공산주의사회나 다름없었다.

  양반과 상민이 도덕과 관습으로 얽혀 운명공동체를 이룬 19세기 조선의 촌락은 동시대 잉글랜드의 자본가와 노동자가 빚어낸 살풍경보다는 확실히 따뜻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강고한 도덕경제야말로 조선이 ‘19세기의 위기를 맞이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냉정히 지적한다. 아무리 가난하고, 또 부유할지언정 결국 도덕에 의해 평균으로 수렴하므로 빈자든 부자든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기력은 대부분의 촌락이 산간에 자리할 경우 더욱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산림을 공들여 가꾸지 않은 만큼 비가 조금만 내려도 온 마을이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19세기의 조선이 그러했다.

 

  외부와의 교류가 극히 제한된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촌락들의 집합체라는 저자의 조선상(朝鮮像), 그 참신함만큼이나 아쉬움과 궁금증 역시 자아낸다. 우선 저자가 역사의 주요 행위자로 설정한 국가권력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계속해서 눈에 걸린다. 저자에 따르면 이른바 ‘K-지역개발이 경상도를 넘어 전국으로 확대되고, 끝내는 19세기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 건 일차적으로 국가권력의 부재 때문이었다. 16세기에 암군의 시대가 계속되며 국가가 더 이상 대규모 저수지를 축조·관리할 수 없었기에 농민들이 쉽게 물을 댈 수 있는 산골짜기로 향했으며, 19세기의 세도정치 역시 농민들을 한계지대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부재로 인해 결국 나라가 멸망에 이르렀을 정도로, 국가권력의 존재감이 컸던 것일까? 그렇게 전능한 국가였다면 지방의 촌락들이 중앙으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이뤄가는 걸 무려 60년 넘게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애초에 저자는 조선중기 사족들이 혼인과 세습을 통해 강고한 카르텔을 구축하며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는 과정을 연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 19세기의 위기를 규명하는 데에도 단순히 국가권력, 구체적으로는 국왕의 역할 부재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사족 역시 중요한 변수로 고려해보면 좋을 듯싶다.

  저자가 제시한 ‘19세기 조선상은 그간 이 시기를 이해하는 유력한 관점이었던 소용돌이의 사회와 충돌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소용돌이의 사회20세기 중반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한 문정관 그레고리 헨더슨이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한국인은 정당이나 결사와 같은 중간단체를 거치지 않고 권력의 중심부를 향해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듯 곧바로 질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래저래 문제가 많지만 오늘날에도 조선후기 이래 형성된 한국인의 특질을 설명하기 위해 심심찮게 동원되곤 하는데, 저자의 주장은 이와는 영 딴판인 것이다.

  생각해보라,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자급자족하는 촌락의 농민들에게 중심부의 소식이 전해질 턱이 있겠는가? 만약 19세기 조선사회가 정말 저자의 생각과 같았다면 소용돌이는커녕 산들바람조차 살랑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용돌이의 사회가 현대 한국을 이해하는 데 꽤 유용하다고 여기고, 저자의 주장은 그것대로 설득력이 있어 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양자를 잘 버무려 또 하나의 테제를 만들어야만 할까?

  그보다는 조선후기부터 21세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줄곧 이러했다고 설명하려는 욕구를 버리는 게 나을 듯싶다. 개인적으론 소용돌이의 사회와 같은 그럴싸한 거대서사를 퍽 좋아한다만, 장기지속하는 한국인특질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자칫 매우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긴 시간에 걸쳐 한 사회의 성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규명하고픈 욕구는 어쩔 수 없다. 따라서 약간 방향을 틀어, 다음 서평에서는 경상도와 더불어 조선에서 기호(畿湖)에 비벼볼 수 있는 둘 뿐인 지역이었으나, 지리적 위치부터 시작해 지형과 기후, 심지어는 사람들의 기질까지 경상도와는 정 반대였던 지역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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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품격 - 과학의 의미를 묻는 시민들에게
강양구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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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하나. 오늘날 수많은 분과학문 중 유독 유사논쟁에 휘말리는 분야는 무엇일까? 바로 역사학과 (의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과학이다. 한데 이 둘이 자신의 유사쌍둥이들에게 시달리는 이유는 좀 다르다. 역사학이 특유의 만만함때문에 이른바 재야 사학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면, 과학은 외려 그 어려움으로 인해 극렬한 반감의 대상이 된다.

  평범한 시민에게 과학은 막연한 동경과, 그만큼의 공포를 함께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일상 언어와는 몇 억 광년정도 떨어진 것만 같은 난해한 수식, 그걸 또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너디한 전문가, 그리고 이들이 내놓은 결과물의 가공할 파괴력까지! 시민 입장에서는 도저히 과학과 맞대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기에 근대문명 전반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반감까지 가미될 경우, 선량한 시민은 차라리 유사과학의 너른 품에 안기기를 선택하고 만다.

  하지만 아무리 무섭고 싫어도 과학에 등을 돌리면 안 된다. 시민과 과학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과학을 악용해 제 잇속을 채우려는 이들이 활개칠 공간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덕목은, 과학에 대한 숭배나 혐오, 혹은 무관심이 아니다. 과학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진지하게 고민하고 또 노력하는 자세다. 과학 전문 기자이자 지식 큐레이터인 강양구가 꾸준히 시민과 과학의 만남을 주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강양구의 책 과학의 품격역시 과학 전문가가 아닌,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과학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가 담겼다. 서점에 깔리기 훨씬 전부터 저자가 외국의 이름난 언론에 실린 과학 기술 에세이와 비교해도 정보의 넓이, 고민의 깊이, 해석의 참신함 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p.16.) 장담한 책인데, 읽다보면 괜히 표지에 얼굴을 내건 게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 사회의 지적 역량은 모어로 쓰인 교양서의 수준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교양의 품격’, 나아가 저자의 품격을 보여준 이 책이 매우 반갑다.

 

  미리 경고부터 해두자. 만일 놀랍고도 경이로운 과학의 원리와 자연의 신비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책을 읽고 실망할 수도 있다. 강양구의 관심은 과학이 이렇게나 대단하다고, 혹은 자연이 이렇게나 아름답다고 열을 올리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이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체계라는 근대 이래의 오래된 믿음에 도전하며,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을 흩뜨려놓는다. 강양구가 고민하는 건 과학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회 속의 과학이다.

  그렇게 강양구가 그려낸 사회 속 과학의 풍경은, 안타깝게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연결 사회(hyper-connected society)’가 도래했음에도 사람들은 집단 지성을 발휘하여 슬기로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 집단 바보가 되어갈 뿐이다. (집단 지성인가, ‘집단 바보인가)

  기술의 발전이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자유케 하리라는 전망 역시 빗나갔다. 세탁기나 청소기처럼 가사노동을 수월케 해주는 기계가 도입됨에 따라 이전까지 남편이나 아들의 몫이었던 힘든 일역시 여성에게 떠넘겨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계의 도움은 여성으로 하여금 가사노동을 더욱 자주, 꼼꼼하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았다. 끝없는 가사노동에 시달리다 끝내 손목이 망가져 병원을 찾은 김지영이 의사에게 집안일은 기계가 다 해주는데 요즘 여자들은 힘들게 뭐냐는 모욕을 받은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은, 그래서 더 아프다. (지영 씨, 세탁기 때문에 행복하세요?)

 그래, 과학기술의 진보가 꼭 사회의 진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건 인정한다.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이기도 하고. 하지만 강양구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는 과학탐구의 대상이자 사회와는 별개라고 여겨지던 자연의 존재마저 의심한다.

  책 맨 앞에 실린 추천의 글에서, 물리학자 김상욱은 자연에 인간이 만든 어떤 의미나 품격은 없다고 일갈한다.(p.7.) 하지만 글쎄, 지금 당장 인간이 멸종한다면 고양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동물들이(심지어 쥐나 바퀴벌레까지도!) 도시에서 사라지고(인간 없는 도시의 주인), 강제로 국립공원을 지정해 원주민을 몰아내고 반달곰을 복원하는 상황에서(설악산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을 인간과는 완전히 무관한 그 무엇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자연을 스스로() 그러한() 것으로 여김으로써 결과적으로 파국을 막기 위한 아무런 인위적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숙명론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강양구가 진정 경계하는 일이 아닐까?

 

  이처럼 과학 기술은 그 자체로 문화.”(p.14.) 뿐만 아니라 지구에서 인류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커져버린 결과, 사회와 자연은 서로를 분간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얽혀 들어갔다. 이제 인간과는 무관한 순수한자연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이 과학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나아가 과학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강양구 본인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행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해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과학 기술에 대한 꾸준한 감시와 비판, 그리고 윤리에 대한 고민이다. 저자가 책 1부를 통째로 할애한, 이른바 황우석 사태를 둘러싼 치열한 투쟁이 대표적이다. 강양구가 들려주는 사건의 전모는 이를 모티브 삼아 만든 임순례 감독의 영화 제보자처럼 극적이진 않다. 하지만 합리적인 의심을 시작으로 기자와 과학자, 평범한 시민들이 힘을 합쳐 끝내 진실을 밝혀내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두툼한 사회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무려 20년간 과학 기술의 민주화를 위해 성실하게 논리를 개발하고 제도를 제안해온 시민 과학 센터 역시 좋은 사례다.(시민 과학 센터, 너의 이름을 기억할게!)

 

  둘째, 과학을 품은 사회 자체의 개혁이다.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들, 사회가 여전히 정체해있다면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세탁기와 청소기라는 새로운 기술이 가부장제라는 기존의 억압을 더욱 강화시킨 사례 역시 얼마든 찾을 수 있다.

  심지어 과학은 이제 사람들이 당연히 과학의 문제라 여기는 것들에서조차 맥을 못 추고 있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기만 하는 기후변화가 대표적으로, 과학은 이 희대의 난제 앞에서 자신의 전매특허인 확실성을 포기해야만 했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 심화됨에 따라, 안 그래도 복잡한 기후 과학의 불확실성이 더욱 증폭됐기 때문이다.(기후 변화, 과학이 정치를 만날 때)

  인간으로 인해 자연은 점점 더 변덕스러워지고 끝내는 병들고 말았지만, 강양구는 여기서도 희망을 본다. 어쨌든 인간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니만큼, 자연을 충분히 덜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25000만 년인 고생대 페름기에 일어난 다섯 번째 대멸종 전문가 더그 어윈(Doug Erwin) 역시 아직 여섯 번째 대멸종이 시작하지 않았기에 지금 우리의 고민과 선택, 행동이 의미를 갖는다고 이야기한다.(여섯 번째 대멸종)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과학의 품격이라기보다는, 과학을 품은 사회의 품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품격을 갖춘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 강양구는 이에 대해선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 햇볕과 바람, 심지어는 유기물을 태워 에너지를 얻는 바이오매스까지 포함해 다양한 에너지원이 섞인 모자이크 에너지모델을 상상하자거나(에너지, 슈퍼 히어로는 없다) 환경이 유전자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보다 따뜻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자는 등(행복했던 마을의 몰락), 단편적인 대책만을 제시할 뿐이다.

  그렇다고 강양구가 사회의 품격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글을 꾸준히 찾아 읽는 독자로서 미루어보건대, 아마도 강양구는 생태주의를 (유일하지는 않을지언정) 유력한 대안 중 하나로 여기는 듯하다. 실제로 그는 녹색평론편집자문위원이며, 동 잡지의 발행인인 김종철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기도 하다.

  누구보다 명민하고 까칠한 과학전문 기자인 강양구가 한국에서 가장 강경하고 전면적인 ()근대문명론을 설파하는 녹색평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롭게 다가오는 동시에, 여러 생각을 안기기도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강양구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근대문명 자체에 정말로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과연 지금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지 한 번쯤 회의가 드는 것이다.

  지금껏 내가 읽은 강양구의 글들은 전부 짤막한 칼럼이거나, 그 모음집이었다. 안 그래도 감질나던 차에, 그가 과학 전문 기자가 본 생태주의를 주제로 한 권의 완결된 책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사회의 품격이라는 제목이 붙어도 좋을 그 책에서, 지금껏 세상을 향해 던진 번뜩이는 질문들을 갈무리해 멋진 대답을 마련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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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세밑마다 올해 무슨 책을 읽었는지 정리해보곤 합니다. 이런 걸 읽었나싶어 눈이 휘둥그레지는 책도, 참 좋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책도 있습니다. 그렇게 올해를 함께한 책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책 열권을 추리면, 그제야 제대로 일 년을 마무리한 느낌입니다.

올해는 총 143권의 책을 읽었고, 30편의 서평을 썼습니다. 예년과 달리 올해의 책 Best 10은 가급적 2019년에 나온 책들로 꼽아보았습니다. 언론사에서 꼽은 2019년의 책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언론사끼리 겹치는 책들도 많았고요. 그래서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나 박효근의 여성, 종교개혁과 통하다처럼 굉장히 감명 깊게 읽었음에도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책들도 있습니다.

내년에도 열심히 읽고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목표는 일주일에 한 편 이상 서평 쓰기입니다. 좀 더 욕심을 부려보자면, 저자를 기다리게 하는 서평가가 되고 싶습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하 반말)

    

 

1. 아빠의 아빠가 됐다

돌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돌봄이 드물게나마 세간의 관심을 끄는 건 그것이 일단락되었을 때, 그러니까 돌봄노동자가 고통 끝에 목숨을 끊거나 효자/효녀라며 정부나 시민단체로부터 표창장을 받았을 때뿐이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의 저자 조기현의 돌봄은 이런 극적인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돌봄은 삶이 흘러가는 한, 계속 이어진다. 그렇기에 그는 흘러가는 삶을 어떻게든 주체적으로 이어보려 노력하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돌봄을 사회적 문제로 끌어올리고자 고민한다. 자신의 글이 어떻게 읽힐지를 고민하는 사려 깊은 저자, 영웅서사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 건강한 서사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https://brunch.co.kr/@msg2012/38)

    

 

 

2. 종이 동물원

이른바 전통은 발목을 붙잡는 구닥다리나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다. 특히나 가장 보편적이며, 미래 지향적이어야 할 SF를 쓸 때는 더더욱. 하지만 켄 리우는 중국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민감하게 의식하며, 그 전통을 적극적으로 끌어와 SF를 쓴다. 그렇게 탄생한 그의 소설집 종이 동물원,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현대적작품들보다 매혹적이고 아름답다. 결코 보편을 자임할 수 없는 비서구 출신으로서, 전통을 어떻게 이 아닌 밑천으로 삼을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단편 즐거운 사냥을 하길은 가장 제국주의적인 장르인 스팀펑크를 식민지 홍콩을 무대로 통쾌하게 전유해냈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이 책으로 유영번역상을 받은 장성주의 맛깔나는 번역 역시 독서의 즐거움을 돋운다.

    

 

3. 금융과 회사의 본질

왜 기업인과 국회의원은 수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합법적으로책임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을까? 김종철의 금융과 회사의 본질은 이 질문에 답하고자 영미 정치사상을 뿌리부터 파헤치는, 한국인이 썼다고는 믿기 어려운 역작이다. 로마시대 확립된 배타적인 재산권이 기독교의 위세에 눌려 중세 내내 잠들어 있다가, 근대 초 잉글랜드에서 가면과 같은 텅 빈 인격과 합체해 마침내 개인과 국가를 불멸의 채무자로 전락시키는 과정이 흥미롭게 읽힌다. 저자가 미래사회를 위한 대안으로 내세운 기본자산 역시 자칫 사회복지의 대대적인 축소를 초래할 수 있는 기본소득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제목과 표지를 좀만 더 기깔나게 뽑았어도 여러 언론사에서 이 책을 올해의 베스트로 꼽았으리라는 아쉬움이 크다.

(https://brunch.co.kr/@msg2012/10)

 

    

 

4. 31일의 밤

주변부의 근대는 어딘가 어설프고 조잡하다. 지배담론이든 저항담론이든 죄다 중심부의 그것을, 한 단계 떨어지는 수준으로 베껴온 게 대부분이다. 그런 근대를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름 아닌 주변부라는 위치자체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권보드래는 이야기한다. 비록 그 원산지가 중심부일지언정, 주변부에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전혀 다른 에너지와 벡터를 갖고 끝내는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주변부의 근대가 빚어낸 가능성의 최대치이자, 한반도의 오늘을 이루는 풍요로운 수원으로서 3.1을 새로이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세계개인을 분주히 오고가며 너비와 깊이를 부여받은 3.1이라는 호수로부터 무엇을 길어다 쓸 수 있을지, 저자는 3.1을 살아간 수많은 무명씨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묻고 있다.

(https://brunch.co.kr/@msg2012/11)

    

 

5. R. H. 토니-, 사상 기독교

오늘날 바람직한 종교인이란 모름지기 사적으론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이를 공적인자리에까지 끌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종교의 본령에 부합할까? 종교란 본디 세속과 신성을 아우르며 개인의 삶에 리듬과 안정감을 부여하는 거대한 체계였는데 말이다. 영국 노동당의 정치인이자 사상가, 경제사학자였던 R. H. 토니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던 것도 바로 개인의 내면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종교의 소심함이었다. ‘과학을 표방한 맑스주의나 페이비언 협회와 달리, 그는 서구인의 삶에 깊게 뿌리박은 기독교의 전통을 쇄신함으로써 자본주의의 폐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토니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기독교라는 지반을 조명한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의 문제는 세상을 아우르고 북돋을 도덕이 없다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https://brunch.co.kr/@msg2012/39)

    

 

6. 바이마르의 세기

군부독재시기, 아니 지금까지도 한국인에게 바이마르 공화국은 지나친 자유로 끝내 자유를 파괴한 반면교사의 이미지가 강하다. 바이마르의 세기는 그러한 바이마르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독일 망명자들이 펼쳐내는 흥미로운 지성사다. 나치즘의 광풍에 나라를 내주었다는 개인적 회한과, 이들을 받아준 미국 정보기관의 의도가 맞물리며 독일 망명자들이 생산한 담론은 1950년대 자유세계의 이념적 나침반 역할을 했다. 비단 냉전 지성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후발국 지식인들이 이른바 영미 근대성을 어떻게 생각했느냐를 엿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아울러 현대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선 같은 시기에 독립한 비서구 국가들보다는 오히려 일본과 독일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통찰 역시 던져준다.

    

 

7.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역사란 곧 해석이라는 명제를 가장 잘 뒷받침하는 사례는, 한국 전근대사에선 아마도 병자호란이 아닐까싶다. 2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이 신생국 청에게 무력하게 패배한 이 사건을 두고, 그간 수많은 해석과 평가가 갑론을박을 벌였다. 구범진의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은 이 지리한 개싸움을 끝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책으로, 아주 오래 전 역사연구에서 폐기된 줄 알았던 진실 탐구가 여전히 유효한 가치임을 보여준다. 저자는 병자호란이 조선의 오만과 게으름이 아닌, 홍타이지의 야심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라고 일갈한다. 홍타이지는 황제의 꿈을 이뤄줄 마지막 인피니티 스톤인 조선을 손에 넣고자 심혈을 기울였고, 실력에 천운이 겹치며 끝내 목표를 이뤘다. 한문과 만주어는 물론, 첨단 과학기술까지 동원해 이중삼중으로 그물을 쳐 진실을 포획하는 저자의 치밀함을 보노라면, “서울대 동양사학과란 이런 것인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8.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18세기 조선 양반들은 왜 천주교를 받아들였을까? 남부럽지 않은 지위에 성리학이라는 든든한 이념적 무기까지 갖춘 그들이 구태여 믿음을 갖고, 끝내 그 믿음 때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경이와 의문을 동시에 안긴다. 윤춘호의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는 이 복잡함을 풀어가는 열쇠로 최초의 영세자였으나 배교자로 생을 마감한 이승훈 베드로에 주목한다. 책의 백미는 단연 이승훈이 여러 사람들과 나눈 가상의 편지글이다. 천주교를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복잡미묘한 심경, 그리고 각자의 의도가 묘하게 어긋나고 부딪히며 빚어내는 불협화음을 보노라면, 당시 조선에서 믿음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나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

(https://brunch.co.kr/@msg2012/36)

    

 

9. 아편과 깡통의 궁전

의외의 사실일 수도 있지만, 서평 쓰기 어려운 건 너무 못 쓴 책보다는 외려 너무 잘 쓴 책 쪽이다. 저자가 다 해버려서 서평가가 도무지 할 얘기가 없기 때문이다. 말라카 반도 페낭 화인(華人) 사회의 흥망사를 다룬 강희정의 아편과 깡통의 궁전이 딱 그런 책이다. 완성도면에선 올해 최고의 책으로, 저자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걸 넘어 얄미울 지경이다. 세계를 재패한 대영제국은 편법을 동원해 페낭을 사들이고는, 정작 방치에 가까울 정도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해골정부의 살과 근육을 채워간 건, 복건과 광동에서 온 중국계 이주민들이었다. 아시아의 바다를 주름잡은 중국계 네트워크의 화려한 역사로도, 중국과 영국, 말레이시아라는 삼중의 정체성 사이를 오고간 화인들의 트랜스내셔널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물론, 어느 쪽이든 무척이나 흥미롭다. 혹 책을 읽고 한반도에는 이들 화인의 입김이 닿지 않았는지 궁금해진다면, 강진아의 이주와 유통으로 본 근대 동아시아 경제사를 엮어 읽기를 권한다.

    

 

10. 열세 살의 여름

다 큰 어른들이 초등학교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때는 아무런 고민 없이 그저 순수하고 행복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아름다운 과거를 추억하고픈 마음에 애써 외면해서 그렇지, 그때도 우리는 이런저런 문제로 고민하고, 다투고, 설레여도 하며 지냈다. 이윤희의 만화 열세 살의 여름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선하지만 소심한 여자 주인공, 조용하고 비밀스런 남자 주인공, 깨방정이어도 속은 깊은 주인공의 단짝, 딱 축구 좋아하는 남자애지만 의외로 섬세한 면이 있는 서브남주까지, 등장인물들은 연애만화의 클리셰 그 자체다. 하지만 그렇게 빚어낸 인물들이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무엇보다 따뜻한 선과 색으로 아이들의 미묘한 감정을 탁월하게 그려내기에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된다. 1998년 여름이 배경이지만 응답하다 시리즈처럼 추억팔이에 치중하지 않고, 첫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에 집중한 점도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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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강 2020-02-18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개덕분에 10권 모두 읽어보고 싶어요

유찬근 2020-02-29 13:03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화로 읽는 류큐 왕국
정진희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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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31, 오키나와의 슈리성이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비록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한 번 전소된 것을 1992년에 복원한 모조품일지언정, 독립적인 해상왕국이었던 류큐의 역사를 상징하는 슈리성이었던 만큼 오키나와 사람들의 상실감은 컸다.

과거 바다 건너 한반도와도 활발히 교류했던 류큐 왕국의 궁궐이 불에 타버렸다는 소식에 많은 한국인들 역시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흔히 사람들이 일본하면 떠올리는 높게 솟은 천수각이 아닌, 조선의 경복궁과 유사한 정전(正殿)의 모습도 한국인들의 안타까움을 더했으리라. 실제로 슈리성의 주인인 류큐 왕국은 당시의 글로벌 스탠다드인 조공-책봉 체계에 적극적으로 편승하여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당당한 일원이었다. 열도 한구석에 처박혀 자족적으로 살아온 왕따일본과는 달랐다.

하지만 류큐 왕국은 조선처럼 전형적인유교국가는 아니었다. (사실 페어뱅크 등에 의해 전근대 동아시아 조공국의 전형으로 취급되어 온 조선은, 외려 매우 특수한케이스였다)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슈리성은 동쪽을 등지고 서면(西面)하고 있다. 대체로 북쪽을 등지고 남면하고 있는, 경복궁을 비롯한 전근대 동아시아 왕조의 정전과는 다르다. 게다가 슈리성 정전의 2층에는 국왕을 제외한 남자의 출입이 금지된, 여성 사제들만의 비밀스런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앞바다에 봉긋이 솟아오른 이 작은 섬나라에는, ‘유교조공-책봉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정진희의 신화로 읽는 류큐 왕국이 주목하는 건 바로 이러한 특별함이다. 동아시아 여타 지역에 비해 국가의 성립이 늦었던 류큐는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무속과 신화를 적극 활용했다. 기코에오기미(聞得大君)를 정점으로 한 여성 사제 조직이 각종 의례를 주관했고, 국왕은 성지(聖地)에서 매년 영험한 힘을 부여받았다.

신화 역시 나라를 떠받치는 중요한 대들보였다. 나라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류큐의 사람들은 신화를 통해 고난을 이겨내고 바람직한 미래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책을 읽다 보면 류큐 왕국은 신화라는 이야기를 엮어 바다에 띄운 나룻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류큐 왕국의 본섬인 오키나와에 국가라 불릴만한 정치체가 들어선 건 14세기 무렵이다. 그 이전까진 여러 아시(按司)들이 각지에 구스쿠라는 성채를 쌓고 경쟁하는, 일종의 춘추전국시대가 계속되었다. 여러 아시들은 스스로를 태양이라는 뜻의 데다로 일컬었는데, 이는 군사적 용맹성의 표상이었다. 일단 구스쿠를 쌓고 아시의 자리에 오르면 누구나 데다를 자임할 수 있었으니, 당시 류큐의 하늘엔 태양이 여러 개 떠있었던 셈이다.

상황이 달라진 건 영조왕(재위 1260~1299) 때부터다. 류큐 개벽신화에 등장하는 천손씨의 후손이자 선양에 의해 중산왕(中山王)의 자리에 오른 영조왕은 데다가 아닌 데다코(日子)’로 불리었다. 겨우 아들 자하나 더 붙은 게 무어 그리 대수냐 생각할 수 있지만, 아들이란 부모로부터 무언가를 독점적으로물려받은 존재다. 이제 너도나도 데다를 칭하는 시대는 지나고, 초월적인 태양으로부터 세상을 다스릴 능력을 부여받은 단 한명의 지배자만 남은 것이다.

 

중국의 천자에 상응하는 데다코의 등장과 함께, 각종 의례도 재편되기 시작한다. 세상을 다스리는 영험한 마나인 세지, 본래 각 구스쿠의 아시들이 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힘이었다. 허나 영조왕 이후 바다 저편의 초월적 타계인 니라이 카나이로부터 세지를 받을 수 있는 존재는 데다코 한 명 뿐이었다. 세지를 충전하는 성지(聖地)데다가아나(태양의 굴)’ 역시 동쪽 바다에 위치한 작은 섬인 구다카지마(久高島) 한 곳으로 굳어졌다.

류큐의 국왕은 매년 2월 험한 바다를 건너 구다카지마에서 세지를 충전하고 돌아옴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는 한편 해상왕국의 정체성을 되새겼다. 서문에서 언급했던, 서쪽을 바라보는 슈리성의 정전 역시 동쪽으로부터 세지를 부여받는 태양왕의 관념을 형상화한 것이다.

 

노로(祝女)라는 여성 사제로 이루어진 전국적 무녀조직도 태양왕의 권력을 뒷받침했다. 상진왕(재위 1477~1526)이 임명한 최초의 기코에오기미부터가 본디 왕의 누이였던 사람이다. 국왕과의 혈연관계가 오라비를 지켜주는 누이 신인 오나리 가미에 대한 류큐의 전통적인 신앙과 포개지며, 기코에오기미는 오라비 국왕을 서포트해주는 누이 사제로 자리매김했다.

기코에오기미의 즉위식은 구타가지마 맞은편 해안에 위치한 섬인 세화 우타키(齊場御嶽)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슈리성 정전의 2층은 국왕을 제외한 남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는데, 국왕은 매일 아침 이곳에서 여성 사제들과 함께 동쪽을 향해 의례를 지냈다. 이 모든 게 성()과 속()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국왕의 세지는 누이 사제를 통해 날마다 새로이 차올랐고, 갱신된 세지는 국왕이 나랏일을 보는데 매우 요긴하게 쓰였다. 다마키 마사미의 말을 빌리자면, 기코에오기미는 최대의 왕권 이데올로그였다.(p.117.)

 

성과 속이 한데 얽혀 서로를 북돋으며 나라살림을 꾸려가던 류큐의 풍경은, 그러나 1609년 이후 크게 뒤바뀌기 시작한다. 시마즈 가문이 이끄는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이 류큐를 침략해 수도인 슈리(首里)를 초토화하고 국왕인 상녕을 포로로 끌고 간 것이다. 이후 류큐는 전통적인 종주국인 중국과 더불어 사쓰마번과 에도 막부 역시 상전으로 섬기는, 이른바 양속(兩屬)체제에 놓이게 된다. 이때부터 메이지 신정부에 의한 오키나와현 설치(1879)까지의 시기를, 사쓰마번 침략 이전 시기인 고류큐와 구분해 근세 류큐라 부른다.

수도가 불타고 국왕이 잡혀간 초유의 사태 앞에서, 류큐의 지도층은 무엇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냄으로써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국가기록이 전소되기도 했거니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정하기 위해서라도 지금까지의 역사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는곧 미래를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작은 한자와 가타카나를 표기문자 삼아 일본어로 쓴 중산세감이었다. 편찬자 향상현(向象賢, 일본식 이름은 하네지 초슈)은 일본에서 유학하며 일본적 교양을 익혔을 뿐 아니라 류큐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시마즈 가문의 위력을 몸소 체험한 인물이다. 일본에서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는 류큐의 창세신화를 일본의 기기신화(고사기일본서기에 수록된 일본신화)와 비슷하게 재구성한다. 일본에 예속되고자하는 식민지 근성이 아닌, 류큐 역시 일본과 같은 신국(神國)이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실제로 향상현을 지배한 감정은 일본에 대한 동경보다는, 일본에 무력하게 무너진 고류큐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섭정의 자리에 오른 그는 무녀조직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노력했고, 국왕의 구다카지마 행행(行幸)을 끝내 폐지시켰다. 류큐 창세신화의 재구성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향상현은 고류큐의 각종 의례와 관습을 태초의 것으로 봉인해버림으로써 새로운 토대를 구축할 여지를 만들었다.

 

향상현의 뒤를 이은 학자관료 채탁과 그의 아들 채온이 편찬한 중산세보에 이르러, 신화라는 이야기는 다시금 재구성된다. 부자 모두 유학자였을 뿐 아니라 일본의 지배에 대한 반발로 외려 중국에 대한 동경이 강해지고 있었기에, 창세신화에 유학적 색채가 짙게 녹아든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바로 문자로, 중산세감과 달리 중산세보는 가나문자 없이 순수하게 한문으로 쓰였다.

문자만 달라진 게 아니다. 중국의 복건성을 기준으로 류큐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음양론에 기반한 유교적 합리주의가 태양왕 데다코를 몰아냈다. 데다코라는 왕가의 신화는 류큐라는 국가의 신화로부터 분리되었고, 창세신화의 자리를 꿰찬 건 후자 쪽이었다. 그간 왕권을 지탱해오던, 기코에오기미를 정점으로 한 무녀조직의 위상 역시 꾸준히 약해져갔다. 그 빈자리를 채운 건 농경의 수호자라는, 유교의 이상적인 군주에게 어울리는 민본주의적인상징이었다.

 

이처럼 류큐의 지도층이 난관을 극복할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과정은 굉장히 흥미롭게 읽히면서도, 몇 가지 의문과 아쉬움 역시 남긴다. 가장 큰 궁금증은 역시, 엄연한 해상왕국인 류큐의 신화 속에서 유달리 두드러지는 농경의 중요성이다.

저자는 16세기부터 서구 세력이 아시아로 진출하고 명나라가 해금을 철폐하여 류큐의 해상무역 경쟁력이 약화된 데다, 1609년 사쓰마의 침략 이후 각종 수탈이 횡행했기에 왕조가 불가피하게 농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창세신화에서 농경을 강조한 것 역시 변화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류큐의 창세신화에서 바다가 갖는 중요성은 농경의 그것에 비해 확 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바다는 기껏해야 흰 항아리에 담긴 보리와 조, 콩을 운반하는 매개(유로설전에 남아 있는 구다카지마 행행의 기원)거나 중산왕 찰도가 해상무역으로 부를 쌓아 끝내 왕으로 추대되게끔 도와주는 수단에 불과하다.(채온본 중산세보) 그나마도 찰도가 바다를 오가며 사고팔았던 건 농기구를 만들기 위한 철괴였다.

애초에 사쓰마의 침략이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왕조가 찾은 해법이 농경이었던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류큐의 본진인 오키나와섬(1206.99)은 제주도(1833.2)보다도 좁다. 신숙주가 해동제국기에서 이야기했듯 류큐는 땅은 좁고 사람은 많은데, 아무리 농경에 올인한들 그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을까.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고산다고, 몇 세기에 걸쳐 구축해온 무역 네트워크도 남아있었을 텐데 말이다.

 

 최근 학계에선 해상세력의 움직임을 육상 정치권력(왕조)종속변수가 아닌, 역동적인 독립변수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작년에 민음사에서 나온 바다에서 본 역사역시 해상세력의 입장에서 재구성한 동아시아사 연구가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학계의 트렌드에 비추어보았을 때, 류큐의 창세신화에서 드러나는 농경의 엄청난 존재감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무리 온 바다를 누비고 다닌들, 국가가 자리한 곳은 배가 아닌 육지이기에 어쩔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저자가 (필연적으로 농경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국가의 공식적인 창세신화에 집중한 나머지, 바다의 존재를 미처 살피지 못했던 걸까? 원래 쓰기로 마음먹었다던 류큐에 대한 교양서를 혹 다시 내게 된다면, 저자가 류큐에게 바다란 무엇이었는가를 예의 그 고운 문장으로 조곤조곤 알려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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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H. 토니 - 삶, 사상, 기독교 대우학술총서 신간 - 사회과학(번역) 622
고세훈 지음 / 아카넷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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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14일간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이다 끝내 병원으로 실려간 자유한국당 대표 황교안.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이낙연 총리와 자웅을 겨루는 그이지만, 열성 지지자만큼이나 안티도 많아 지지층 확장에 애를 먹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애매한 태도, 강한 반공주의, 리더십 부재, 권위의식까지, 아직까진 그를 지지해야 할 이유보단 그렇지 않은 이유가 많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황 대표에 대한 지지를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다름 아닌 그의 신앙심이다.

황 대표는 독실한 침례교 신자다. 사법연수원 시절 신학대학원을 졸업해 전도사가 되었고, 개신교 계열의 민영교도소인 소망교도소 설립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세상법보다 교회법이 우선이라고 이야기해 논란을 빚기도 했으며, 지난 석가탄신일에는 절을 찾고도 합장을 하지 않아 이슈의 중심에 섰다. 엄연한 세속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황 대표의 행보는 사적인 신앙을 공적인 자리에 끌고 들어온, 비판받아 마땅한 언동이리라.

하지만 신앙을 개인의 내면에 가둬두는게 가능할까? 동서를 막론하고, 전근대에 종교는 개인의 사적인 믿음이 아니라 삶에 안정감과 리듬을 부여하는 거대한 체계였다. 신성은 고고한 성채가 아니라 범속한 일상에 깃들었고, 일상은 신성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양자는 무 자르듯 깔끔하게 나뉘지 않았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세속정부가 무려 20세기 초반까지 이어간 교회와의 싸움 역시, 본질은 사람들의 삶을 통제할 권한을 누가 갖느냐에 있었다. 어쩌면 황 대표는 그 누구보다 종교의 본령에 충실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종교는 기껏해야 믿을 자유 따위에 만족할 수 없다. 세속주의에 떠밀려 무력하게 사라지거나, 세상을 북돋을 새로운 도덕을 마련해야 한다. 20세기 전반 영국 노동당에서 활동한 정치인이자 사상가, 경제사학자였던 R. H. 토니는 후자의 입장에 섰다. 그 역시 황 대표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문제는 종교가 개인의 내면에 안분지족한데 따른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지만, 다다른 결론은 완전히 달랐다. 고세훈의 R. H. 토니- , 사상, 기독교는 토니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기독교라는 지반에 대해 탐구한 훌륭한 책이다. 다소 산만한 감이 있지만, 한국인이 이런 책을 썼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하다.

 

1880년 인도 캘커타에서 엘리트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1962년 런던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토니의 삶에는 항상 기독교가 함께했다. 명문 사립고인 럭비(Rugby School)에선 훗날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는 윌리엄 템플과 우정을 쌓았고, 옥스퍼드 베일렬 칼리지에선 성공회 사제 찰스 고어를 통해 사회적 도덕주의에 눈 떴다. 특히 찰스 고어는 토니 평생의 스승으로, 앵글로-가톨릭주의를 혁신하여 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에 뛰어들 것을 주문한 그의 신념은 토니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물론 토니는 그리 성실하게 믿음생활을 하진 않았고, 주변으로부터 나이롱 신자라는 비아냥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토니의 마지막 제자인 에일머의 말마따나, 그는 가장 먼저 크리스천이었고, 그 다음에 민주주의자였으며, 그 다음에 사회주의자였다.(p.16.)

자신이 살았던 20세기 영국의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토니는 우선 역사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것을 소환하여 당대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로 조명하기 위해(p.253.) 종교개혁을 전후로 한 유럽의 역사를 훑었고, 그 결과가 바로 세기의 명저인 16세기 농업혁명(1912)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1926)이다. 특히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이하 발흥)은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고, 1540년에서 1640년까지의 잉글랜드를 토니의 세기로 불리게 할 만큼 역사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토니는 학부 졸업을 끝으로 제도권 교육을 마무리했으니, 그야말로 척척석사인 셈이다.

 

토니는 발흥에서 세간의 통념과 달리, 자본주의는 이미 중세에 그 싹을 틔웠다고 이야기한다. 수도원이 운영한 대농장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관리로 부를 일궈갔고, 이탈리아의 가톨릭 은행가들은 전 유럽에 지점을 세우고 광대한 금융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초 유럽 최대의 도시는 저지대의 안트베르펜으로, 당연히 가톨릭을 믿었다.

종교개혁의 사도 루터가 공격한 것도 당대 만연했던 물질주의였다. 그는 로마에 또아리를 튼 탐욕스런 적그리스도가 독일의 부를 쪽쪽 빨아들이는 현실에 크게 분개했고, 사제를 거치지 않고 오직 믿음을 통해 개개인이 주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을 주창했다. 그 유명한 이신칭의론과 만인사제론이다.

하지만 루터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으니, 교회조직의 타락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일체 부정해버린 것이다. 비록 잘 되지는 않았지만, 가톨릭은 절제되지 않은 부를 규율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법에 의거해 이자를 통제할 정교한 방안을 고민했고, 청지기사상(stewardship)의 전통에 따라 재산권은 항상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수반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안타깝게도, 루터는 기성교회를 격렬히 비판했을 뿐 그간 교회가 맡아온 역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누구도 해할 수 없는 개개인의 양심이었지, 생활고에 찌든 독일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가 아니었다. 루터로 인해 이기심을 통제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조직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반면, 믿음은 사람들의 내면으로 퇴각해버렸다. 그 결과, 욕망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말았다. 루터는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고 만 것이다.

 

루터와 달리 칼뱅은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있었으며, 쥬네브에서 이를 현실로 옮길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그는 이익추구를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이를 신의 뜻에 종속시키는 쪽을 택했다. 그 결과 고안된 개념이 바로 소명으로, 본디 일상의 노동마저 수도승처럼 경건하고 성실하게 수행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실제로 칼뱅이 컨시스토리(consistory, 일종의 자문회의 겸 감찰기관) 의장으로 평생 시민들을 단속했던 쥬네브에서, 상행위는 철저히 종교에 종속되었다.

반면 청교도가 박해받는 소수파였던 잉글랜드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가 발생했다. 종교가 상행위를 붙잡아두기는커녕 상행위가 종교를 방패삼아 그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분명 칼뱅주의의 소프트웨어는 반자본주의적이었다. 허나 그 하드웨어, 예컨대 예정설이나 소명의식, 엄격한 기율 등은 자본주의와 선택적 친화성을 가졌고, 잉글랜드에서 살아남은 건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 쪽이었다. 토니 자신의 우아한 비유처럼, 영적 화살을 쏘는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에 떨어질지에 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p.298.)

 

1660년의 왕정복고를 기점으로, 잉글랜드에서 교회는 사회제도들을 길들이는 독자적인 가치기준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했다. 빈곤은 사회문제에서 개인의 책임으로 전락했다. 로크는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재산의 보존이라 천명했다. 이 신성불가침한 재산권을 행사하는 데 뒤따르는 책무는, 물론 전혀 없었다.

18세기에 이르면 경제는 윤리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자기규제 메커니즘이며, 그 언어는 수학과 물리학이라는 인식이 점차 자리를 잡았다. 애덤 스미스의 말마따나, 이제 사람들은 특별히 윤리적인 행위를 할 필요 없이 그저 성실하게 이윤을 추구하면 될 터였다. 개개인의 이기심도 보이지 않는 손을 거치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19세기를 거치며 탈취사회가 도래한다. 탈취사회란 첫째로 권리와 기능이 분리되고, 둘째로 사유재산을 신성시하며, 셋째로 경제이익의 무한한 추구를 긍정하는 사회를 일컫는다. 탈취사회를 특징짓는 소유방식은 이른바 무기능자산으로, 사회적 이윤을 다하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는 데만 쓰이는 자산을 일컫는다. 무기능자산은 탐욕스럽게 제 몸집을 불려가고 사회의 분열은 점점 더 심해져가는 가운데 맞이한 20세기를, 토니는 깊이 우려했다.

 

그렇다면 탈취사회를 극복할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토니는 페이비언 협회의 개량적 사회주의는 답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공리주의적인 마인드로 생활수준의 개선에만 치중한다면 사람들은 서비스의 혜택을 입는 소비자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자본주의 극복 역시 요원하다는 게 토니의 입장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방을 청소하면서 영혼의 창은 닫아두는 우를 범했다. 토니가 보기에 개개인의 도덕적 각성이 없는 물질적 진보는 오히려 탈취사회의 폐단을 심화시킬 뿐이었다.

토니에게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다름 아닌 도덕, 구체적으로는 기독교 정신의 회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위계가 뚜렷한 중세 가톨릭의 영적 유기체 사회로 돌아가길 바랐던 건 아니다. 토니는 무한하고 전능한 신 앞에서 모두가 똑같이 작아짐으로써 평등을 이루는 사회, 동료애로 연대하며 민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사회, 자산이 더 이상 이윤추구 그 자체가 아니라 공통의 도덕에 이바지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국가와 시장이 아닌, 도덕의 지도아래 모두가 연대하여 나름의 쓸모를 담당하는 사회, 토니는 이를 기능사회라 명명한다.

 

토니는 자신이 살았던 20세기를 위한 도덕을 구태여 새로이 창안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오랜 세월 서구가 공동의 자산으로 가꿔온 기독교라는 샘에서 지혜를 길어 올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우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아마도 시민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는 도덕적 지반을 갖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랜 세월 이 땅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해온 성리학은 19세기의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빠르게 소멸해버렸다. 무력한 황실을 뒷방으로 밀어내고 조선을 접수한 일본의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 일체의 정치적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문인 아니면 테크노크라트인 사회에서 사회를 통합할 도덕을 마련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에도 도덕을 갖지 못하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분단과 친일이라는 과오를 안고 출발한 정부가 강요하는 도덕은 사람들 사이로 쉽사리 녹아들지 못했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도덕과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도덕이 계속 경합했으나, 그 어느 쪽도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2019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그간 사회를 아우르는 도덕을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산업화 서사민주화 서사는 각각 박근혜 탄핵과 조국 사태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형편이다.

 

다시 황교안 대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황 대표, 그리고 그의 행보를 지지하는 적잖은 기독교인들은 최소한 하나의 진실을 보여준다. 바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도덕을 향한 갈망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이러한 갈망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애매한 다원주의로 일관할 것인가, 아니면 산업화 서사민주화 서사를 대신할 새로운 도덕을 제시할 것인가? 어쩌면 성리학이 저지른 최악의 잘못은 조선을 끝내 멸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게 아니라 너무 빨리, 그리고 추하게 무너짐으로써 이 땅에 다시는 세상을 북돋을 도덕을 세울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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