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세밑마다 올해 무슨 책을 읽었는지 정리해보곤 합니다. 이런 걸 읽었나싶어 눈이 휘둥그레지는 책도, 참 좋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책도 있습니다. 그렇게 올해를 함께한 책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책 열권을 추리면, 그제야 제대로 일 년을 마무리한 느낌입니다.
올해는 총 143권의 책을 읽었고, 30편의 서평을 썼습니다. 예년과 달리 올해의 책 Best 10은 가급적 2019년에 나온 책들로 꼽아보았습니다. 언론사에서 꼽은 2019년의 책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언론사끼리 겹치는 책들도 많았고요. 그래서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나 박효근의 『여성, 종교개혁과 통하다』처럼 굉장히 감명 깊게 읽었음에도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책들도 있습니다.
내년에도 열심히 읽고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목표는 일주일에 한 편 이상 서평 쓰기입니다. 좀 더 욕심을 부려보자면, 저자를 기다리게 하는 서평가가 되고 싶습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하 반말)
1. 『아빠의 아빠가 됐다』
돌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돌봄이 드물게나마 세간의 관심을 끄는 건 그것이 일단락되었을 때, 그러니까 돌봄노동자가 고통 끝에 목숨을 끊거나 효자/효녀라며 정부나 시민단체로부터 표창장을 받았을 때뿐이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의 저자 조기현의 돌봄은 이런 ‘극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돌봄은 삶이 흘러가는 한, 계속 이어진다. 그렇기에 그는 흘러가는 삶을 어떻게든 주체적으로 이어보려 노력하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돌봄을 사회적 문제로 끌어올리고자 고민한다. 자신의 글이 어떻게 읽힐지를 고민하는 사려 깊은 저자, 영웅서사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 건강한 서사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https://brunch.co.kr/@msg2012/38)
2. 『종이 동물원』
이른바 ‘전통’은 발목을 붙잡는 구닥다리나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다. 특히나 가장 보편적이며, 미래 지향적이어야 할 SF를 쓸 때는 더더욱. 하지만 켄 리우는 중국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민감하게 의식하며, 그 전통을 적극적으로 끌어와 SF를 쓴다. 그렇게 탄생한 그의 소설집 『종이 동물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현대적’ 작품들보다 매혹적이고 아름답다. 결코 ‘보편’을 자임할 수 없는 비서구 출신으로서, 전통을 어떻게 ‘짐’이 아닌 ‘밑천’으로 삼을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단편 「즐거운 사냥을 하길」은 가장 제국주의적인 장르인 스팀펑크를 식민지 홍콩을 무대로 통쾌하게 전유해냈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이 책으로 유영번역상을 받은 장성주의 맛깔나는 번역 역시 독서의 즐거움을 돋운다.
3. 『금융과 회사의 본질』
왜 기업인과 국회의원은 수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합법적으로’ 책임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을까? 김종철의 『금융과 회사의 본질』은 이 질문에 답하고자 영미 정치사상을 뿌리부터 파헤치는, 한국인이 썼다고는 믿기 어려운 역작이다. 로마시대 확립된 배타적인 재산권이 기독교의 위세에 눌려 중세 내내 잠들어 있다가, 근대 초 잉글랜드에서 가면과 같은 텅 빈 인격과 합체해 마침내 개인과 국가를 불멸의 채무자로 전락시키는 과정이 흥미롭게 읽힌다. 저자가 미래사회를 위한 대안으로 내세운 기본자산 역시 자칫 사회복지의 대대적인 축소를 초래할 수 있는 기본소득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제목과 표지를 좀만 더 기깔나게 뽑았어도 여러 언론사에서 이 책을 올해의 베스트로 꼽았으리라는 아쉬움이 크다.
(https://brunch.co.kr/@msg2012/10)
4. 『3월 1일의 밤』
주변부의 근대는 어딘가 어설프고 조잡하다. 지배담론이든 저항담론이든 죄다 중심부의 그것을, 한 단계 떨어지는 수준으로 베껴온 게 대부분이다. 그런 근대를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름 아닌 주변부라는 ‘위치’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권보드래는 이야기한다. 비록 그 원산지가 중심부일지언정, 주변부에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전혀 다른 에너지와 벡터를 갖고 끝내는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주변부의 근대가 빚어낸 가능성의 최대치이자, 한반도의 오늘을 이루는 풍요로운 수원으로서 3.1을 새로이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세계’와 ‘개인’을 분주히 오고가며 너비와 깊이를 부여받은 3.1이라는 호수로부터 무엇을 길어다 쓸 수 있을지, 저자는 3.1을 살아간 수많은 무명씨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묻고 있다.
(https://brunch.co.kr/@msg2012/11)
5. 『R. H. 토니-삶, 사상 기독교』
오늘날 ‘바람직한 종교인’이란 모름지기 ‘사적으론’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이를 ‘공적인’ 자리에까지 끌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종교의 본령에 부합할까? 종교란 본디 세속과 신성을 아우르며 개인의 삶에 리듬과 안정감을 부여하는 거대한 체계였는데 말이다. 영국 노동당의 정치인이자 사상가, 경제사학자였던 R. H. 토니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던 것도 바로 개인의 내면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종교의 소심함이었다. ‘과학’을 표방한 맑스주의나 페이비언 협회와 달리, 그는 서구인의 삶에 깊게 뿌리박은 기독교의 전통을 쇄신함으로써 자본주의의 폐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토니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기독교라는 지반을 조명한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의 문제는 세상을 아우르고 북돋을 도덕이 없다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https://brunch.co.kr/@msg2012/39)
6. 『바이마르의 세기』
군부독재시기, 아니 지금까지도 한국인에게 바이마르 공화국은 지나친 자유로 끝내 자유를 파괴한 반면교사의 이미지가 강하다. 『바이마르의 세기』는 그러한 바이마르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독일 망명자들이 펼쳐내는 흥미로운 지성사다. 나치즘의 광풍에 나라를 내주었다는 개인적 회한과, 이들을 받아준 미국 정보기관의 의도가 맞물리며 독일 망명자들이 생산한 담론은 1950년대 ‘자유세계’의 이념적 나침반 역할을 했다. 비단 냉전 지성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후발국 지식인들이 이른바 ‘영미 근대성’을 어떻게 생각했느냐를 엿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아울러 현대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선 같은 시기에 독립한 비서구 국가들보다는 오히려 일본과 독일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통찰 역시 던져준다.
7.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역사란 곧 해석이라는 명제를 가장 잘 뒷받침하는 사례는, 한국 전근대사에선 아마도 병자호란이 아닐까싶다. 2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이 신생국 청에게 무력하게 패배한 이 사건을 두고, 그간 수많은 해석과 평가가 갑론을박을 벌였다. 구범진의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은 이 지리한 개싸움을 끝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책으로, 아주 오래 전 역사연구에서 폐기된 줄 알았던 ‘진실 탐구’가 여전히 유효한 가치임을 보여준다. 저자는 병자호란이 조선의 오만과 게으름이 아닌, 홍타이지의 야심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라고 일갈한다. 홍타이지는 황제의 꿈을 이뤄줄 마지막 ‘인피니티 스톤’인 조선을 손에 넣고자 심혈을 기울였고, 실력에 천운이 겹치며 끝내 목표를 이뤘다. 한문과 만주어는 물론, 첨단 과학기술까지 동원해 이중삼중으로 그물을 쳐 진실을 포획하는 저자의 치밀함을 보노라면, “서울대 동양사학과란 이런 것인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8.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18세기 조선 양반들은 왜 천주교를 받아들였을까? 남부럽지 않은 지위에 성리학이라는 든든한 이념적 무기까지 갖춘 그들이 구태여 믿음을 갖고, 끝내 그 믿음 때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경이와 의문을 동시에 안긴다. 윤춘호의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는 이 복잡함을 풀어가는 열쇠로 최초의 영세자였으나 배교자로 생을 마감한 이승훈 베드로에 주목한다. 책의 백미는 단연 이승훈이 여러 사람들과 나눈 가상의 편지글이다. 천주교를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복잡미묘한 심경, 그리고 각자의 의도가 묘하게 어긋나고 부딪히며 빚어내는 불협화음을 보노라면, 당시 조선에서 믿음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나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
(https://brunch.co.kr/@msg2012/36)
9. 『아편과 깡통의 궁전』
의외의 사실일 수도 있지만, 서평 쓰기 어려운 건 너무 못 쓴 책보다는 외려 너무 잘 쓴 책 쪽이다. 저자가 다 해버려서 서평가가 도무지 할 얘기가 없기 때문이다. 말라카 반도 페낭 화인(華人) 사회의 흥망사를 다룬 강희정의 『아편과 깡통의 궁전』이 딱 그런 책이다. 완성도면에선 올해 최고의 책으로, 저자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걸 넘어 얄미울 지경이다. 세계를 재패한 대영제국은 편법을 동원해 페낭을 사들이고는, 정작 방치에 가까울 정도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 ‘해골정부’의 살과 근육을 채워간 건, 복건과 광동에서 온 중국계 이주민들이었다. 아시아의 바다를 주름잡은 중국계 네트워크의 화려한 역사로도, 중국과 영국, 말레이시아라는 삼중의 정체성 사이를 오고간 화인들의 ‘트랜스내셔널’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물론, 어느 쪽이든 무척이나 흥미롭다. 혹 책을 읽고 한반도에는 이들 화인의 입김이 닿지 않았는지 궁금해진다면, 강진아의 『이주와 유통으로 본 근대 동아시아 경제사』를 엮어 읽기를 권한다.
10. 『열세 살의 여름』
다 큰 어른들이 초등학교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때는 아무런 고민 없이 그저 순수하고 행복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아름다운 과거를 추억하고픈 마음에 애써 외면해서 그렇지, 그때도 우리는 이런저런 문제로 고민하고, 다투고, 설레여도 하며 지냈다. 이윤희의 만화 『열세 살의 여름』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선하지만 소심한 여자 주인공, 조용하고 비밀스런 남자 주인공, 깨방정이어도 속은 깊은 주인공의 단짝, 딱 축구 좋아하는 남자애지만 의외로 섬세한 면이 있는 서브남주까지, 등장인물들은 연애만화의 클리셰 그 자체다. 하지만 그렇게 빚어낸 인물들이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무엇보다 따뜻한 선과 색으로 아이들의 미묘한 감정을 탁월하게 그려내기에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된다. 1998년 여름이 배경이지만 응답하다 시리즈처럼 ‘추억팔이’에 치중하지 않고, 첫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에 집중한 점도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