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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과 회사의 본질 - 재산권과 계약권의 이종교배
김종철 지음 / 개마고원 / 2019년 2월
평점 :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표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단연 가오나시(顔無し)다. 이름 그대로 얼굴 없는 요괴인 가오나시는 반투명한 검은 몸 위에 표정 없는 가면 하나를 덩그러니 달고 있는데, 누군가를 삼켜 목소리를 빌려야만 말을 할 수 있다. 영화에서 가오나시는 가짜 사금으로 주인공 치히로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만, 물욕이 없는 치히로는 이를 거절한다. 분노한 가오나시는 여관 종업원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며 폭주한다. 결국 치히로가 건넨 쓴 경단을 먹고서야 가오나시는 모두를 토해내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자, 이제 영화를 약간 비틀어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자. 치히로는 가오나시에게 여관의 물질적 피해와 종업원들이 겪을 트라우마에 대한 보상을 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글쎄 가오나시가 쓰고 있던 가면을 툭 던지면서 모든 건 이 가면이 한 일이라고 발뺌하는 게 아닌가! (아, 가오나시는 말을 못 하니깐 손가락으로 가면을 가리키기만 했을 것이다.) 치히로의 얼빠진 표정이 스크린에 비치는 순간 관객들은 그대로 극장을 빠져나왔을 것이고, 스튜디오 지브리가 문을 닫는 시점은 10년 정도 앞당겨졌을 것이다. 가면한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다니,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그런데, 영화 시나리오로도 써먹을 수 없는 이 얼토당토않은 일이 현실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면 믿겠는가? 청해진해운의 대주주인 유병언 일가, 60여 명의 직원들이 백혈병림프종 등의 암으로 사망했지만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는 삼성가 등, 대기업의 대주주는 매우 적은 지분으로 막대한 권한을 누리지만 사회적 책임으로부터는 사실상 자유롭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주위의 모든 걸 게걸스레 집어삼키면서 필요할 땐 가면을 내세워 교묘히 책망을 피해가는 가오나시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인 것이다.
김종철의 『금융과 회사의 본질』은 회사(정확히는 유한책임 주식회사)라는 이름의 가오나시에게 가차없이 매스를 들이대며 그 기원과 본질을 탐구하는 역작이다. 영미권의 ‘정통’ 정치사상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저자는 회사의 본질이란 다름 아닌 “재산권과 계약권의 이종교배”라고 이야기한다. 재산권과 계약권의 이종교배라니, 관념에 불과한 권리를 어떻게 생물처럼 교배할 수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만큼 회사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한 표현은 없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칠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동서고금 어디에나 존재해왔던 계약권과 달리, 재산권은 로마법 이외의 법체계에서 찾기 어려운 독특한 권리다.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던 로마제국은 정복지의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는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마련된 법적 권리가 바로 Dominium이다. 이후 로마의 노예경제가 발전하며 Dominium은 ‘노예의 주인에서’ 재산 일반에 대한 권리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그 기원에서 알 수 있듯 Dominium은 소유물을 마치 노예를 부리듯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며, 소유에 대한 사회의 인정을 필요치 않는다는 점에서 허구적이다.
로마의 지배계급은 이 재산권을 국가기구를 통해 법적으로 정당함으로써 막대한 토지와 노예를 손에 넣었고, 심지어는 세금마저 사적으로 갈취했다. 그러나 이토록 탐욕적인 로마사회에서도 한 사람이 재산권과 계약권을 동시에 누릴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내가 계약을 통해 누군가에게 재산을 양도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재산을 남에게 넘겼으면서도 여전히 그것이 내 것인 양 행세한다면 이는 횡령으로 간주되었다. 현대인이 보기에도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니라니, 무슨 슈뢰딩거의 재산도 아니고!
그러나 이 상식은 13세기 잉글랜드에서 처음으로 뒤집히기 시작한다. 원래부터 잉글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중앙집권적인 국가였고, ‘분권적인’ 봉건제조차 잉글랜드에선 노르만 정복왕조의 국가재편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같은 봉건제라 해도 이웃 프랑스와 달리 잉글랜드의 모든 땅은 원칙적으로 왕의 것이었다. 당연히 영주에겐 이런 저런 제약과 의무가 따라붙었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을 경우 사후 토지를 왕에게 반환해야 했다.
토지에 대한 재산권은 누리면서도 이에 따른 사회적 의무는 지고 싶지 않았던 잉글랜드의 영주들은 토지를 제삼자에게 파는 것도 아니고 안파는 것도 아닌 기묘한 방법을 고안한다. 바로 재산권을 양도하되 매달 배당금을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동의 없이는 토지를 함부로 처분할 수 없게끔 합의하는 것이다. 이를 신탁(trust)이라고 한다. 신탁을 통해 재산권과 계약권은 융합의 토대를 마련했다. 있는 자들에겐 무한한 권리를 누리되 책임은 0에 수렴하게끔 살아갈 길이 열렸고 말이다. (역시 세상의 온갖 추악한 협잡질은 영길리 놈들이!!)
토지라는 인큐베이터를 거쳐, 재산권과 계약권은 17세기 런던의 금세공업자들 손에서 보다 세련된 융합을 시작한다. 금세공업자들은 자신에게 금을 맡기는 사람에게 약속어음을 발행해 주었다. 이는 예금주가 금에 대한 소유권을 금세공업자에게 넘기는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동시에 금세공업자는 약속어음을 받은 사람에게 언제나 돈을 찾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줬다.(요구불 지급) 그렇다면 금세공업자는 소유권을 넘겨받은 게 아니라 그저 남의 재산을 보관해줄 뿐이라고 볼 수도 있게 된다.
이러한 이종교배를 통해 금세공업자들은 하나의 예금에 대해 이중의 재산권을 창조해냈다. 금은 금세공업자의 것인 동시에 예금주의 것이기에, 같은 돈을 금세공업자도 쓰고 예금주도 쓴다. 게다가 금세공업자들이 발행한 은행권은 이를 지참한 누구든 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뻥튀기된 돈은 더 넓은 곳에서, 더 수월하게 퍼져나간다. 현대 금융과 화폐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17세기 말에 이르러, 재산권과 계약권의 이종교배를 위한 단단하고 영구적인 토대로서 근대적 인격(Person) 개념이 탄생한다. 영어의 Person은 한국어에는 없는 말인데, 본래 무대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뜻하던 그리스어 Persona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인격이란 인간 그 자체라기보다는, 텅 빈 가면과도 같은 추상적 관념이다. 흥미로운 점은 17세기 잉글랜드의 자유주의자들이 사람을 인격과 재산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파악했다는 사실이다.
근대 자유주의의 기틀을 다진 로크는 『통치론』에서 “Every man has a property in his own person”이라고 자신의 주장을 간명히 요약했다. 그간 이 문장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체/일신/인신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다”라고 번역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모든 사람은 그의 인격 안에 어떤 재산이 있다”야말로 올바른 해석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로크는 “사람=인격+재산”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 때 재산은 비단 물질 뿐 아니라 사람의 신체와 재능, 심지어는 자유와 생명까지 포괄한다.
재산의 범주에 사실상 유·무형의 모든 것들이 들어간다고 했을 때, 그럼 인격은 무엇인가? 인격이란 이들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며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 행위자다. 행위자로서의 인격은 자신의 노동을 섞는 행위를 통해 무제한으로 재산을 불려갈 수도 있지만, ‘합법적인’ 계약을 거친다면 그 어떤 재산도 처분할 수 있다. 심지어는 신체와 생명까지 말이다! 인격의 결정아래 재산으로서의 자유를 팔아치우는 노예제는 이렇게 정당화된다. 노예에게 남겨진 페르소나는 사실 행위자는커녕 존재하지도 않는 텅 빈 가면에 불과함에도.
잉글랜드의 자유주의자들은 사람에게서 추출해낸 페르소나라는 인공물을 이제 공동체에게까지 덧씌우기 시작한다. 그 결과로서 탄생한 게 바로 근대 은행과 주식회사, 그리고 대의제이다. 공동체는 단순히 사람들의 집합을 넘어선 불멸의 인격(法人)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이 인격은 권력자들이 유사시에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방패막이에 불과하다. 주식회사의 대주주는 평소에는 회사라는 가면을 쓰고 지극히 ‘주인답게’ 행동한다. 하지만 회사가 망하면 대주주는 재빨리 가면을 벗어버리고 자신은 저 가면과 그저 계약을 맺었을 뿐이라고 발뺌한다.
대의제 의회의 국회의원 역시 자신이 곧 국가 자체인 양 거들먹거리면서도, 뭔 일만 터졌다하면 자긴 국민의 뜻을 ‘대표했을’ 뿐이라며 징징댄다. 게다가 이제 국가는 왕 개인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인격이기 때문에, 과거라면 왕의 죽음과 함께 탕감되었을 부채 역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는 불멸의 빚쟁이, 불멸의 액받이 무녀로 전락한다.
강자는 인격이란 가면을 필요에 따라 썼다 벗었다하며 끊임없이 재산을 불려가고, 약자는 인격 하나 덩그러니 손에 쥔 채 모든 걸 빼앗긴다. 이 비정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저자는 “기본자산제”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인격뿐 아니라 최소한의 자산 역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개인의 일부로 남겨두자는 것이다. 마치 팔과 다리, 장기와 같은 신체처럼 말이다. 기본자산은 어떠한 채무변제 의무로부터도 자유롭지만, 동시에 개인 역시 이를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비생산적으로 소비할 수 없다.
저자가 내건 기본자산제라는 대안은 근대 영미 정치사상에 대한 그의 비판만큼이나 급진적이다. 그렇기에 글을 읽으며 그 신박함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과연 이를 실현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비관적으로 본다면, 기본자산제의 미래는 결국 21세기 판 정전제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23세기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에서 200년 전의 극심한 양극화를 설명할 때 양념처럼 끼워 넣는, 실현되지 못한 대안 중 하나로 치부될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그 때도 학교라는 제도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남아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많은 책들이 현실을 탁월하게 분석, 비판해놓고 정작 해법에 대해선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생각했을 때, 기본자산제라는 대안은 매우 소중하다. 일단은 이러한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다. 200년 뒤 고등학생들이 저자를 실패한 개혁가 조광조로 기억할지, 새 체제의 설계자 정도전으로 기억할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운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책의 제목과 디자인이 너무나 구리다! 작년 《국민일보》 기사에선 『페르소나와 정치』란 제목으로 소개되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밍숭맹숭한 제목을 달고 나온 걸까? 표지도 너무 평범하다. 이래서야 그저 그런 영미권 경제학자가 쓴 그저 그런 자본주의 비판서의 그저 그런 번역서 같지 않은가! 나였다면 제목은 『페르소나와 정치』로 그대로 밀고 가고, 표지에는 텅 빈 가면 뒤 불온한 그림자가 우글거리는 그림을 실었을 거다. 지난 3월에 나온 이 책에 대한 서평이 고작해야 세 개(그나마도 한 개는 출판사에서 쓴 거다!)밖에 안 되는 건 전적으로 출판사 탓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2쇄부터는 다른 제목과 표지를 달고 나오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