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2
박지향.김일영.이영훈 외 지음 / 책세상 / 2006년 2월
절판


(미군 책임자) 하지의 정치 고문 베닝호프는 (1945년) 9월 15일자 보고서에서 남한을 '점화되기만 하면 즉각 폭발할 화약통'으로 묘사하면서 한국은 완전히 선동의 무대로 화했으며 수백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유일하게 고무적인 요소라고 지적했다. 이들 보수주의자들 중 많은 수가 일제에 협력했지만 그러한 오명은 점차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 섞인 판단도 덧붙였다. (중략) 하지는 1948년 2월 유엔 한국 임시위원회에서 "남한에 도착한 후 미군은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지도하에 활동하고 있는 인민위원회를 보게 되었는데, 그들은 완전히 조직화되어 있고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중략)1945년 10월 10일 (미군정청 장관) 아널드는 인민공화국(1945년 9월 6일 서울에서 선포.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의 구성원은 "고관대작을 참칭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흥행적 가치조차 의심할 만한 괴뢰극"을 즉시 "폐막해야 마땅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은 인용자주]
- 이완범 <해방 직후 국내 정치 세력과 미국의 관계, 1945-1948>-82쪽

하지를 비롯한 강경론자들은 좌익이 곧 공산주의자라는 단순 공식에 따라 행동한 것이 사실이지만 미 국무부와 군정 내 자유주의자들은 한국에서 중도 좌파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군정은 1946년 여름에 이르러 그러한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중략) 전평도 초기에는 비판적 협력 노선을 표명하며 미군정과의 관계에 조심했으나 1946년 8월 조선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한 뒤 과격하고 정치적인 행동에 경도하게 됐다. 이로써 둘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 박지향 <한국의 노동 운동과 미국, 1945-1950>-104-105쪽

해방된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한 일간지는 '긴 휴일' 동안의 '화려한 축제'를 그만 끝내고 생업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아 시내 전차가 움직이지 못하고, 청소부가 일하지 않아 변소와 쓰레기가 엉망인 점을 지적한 이 사설은 "이제 월여를 지나 그만하면 놀기도 많이 놀았고 흥분에 뛰논 것도 그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제 시대에 있었던 방화 훈련이 사라진 결과로 추정되는바, 서울 시내에서 화재 발생이 급증했는가 하면, 해방 직후 절도나 강도, 살인 등의 죄목으로 수감되는 죄수의 수도 해방 직전에 비해 두 배 가량 늘었다.
- 전상인 <해방 공간의 사회사>-151쪽

미군정이 쌀의 수급을 시장 기능에 맡기자마자 시중에서는 '풍년 기근'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풍년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위시한 도시에서 쌀을 구경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에 미군정 당국은 한 달도 못 가 국가적 비상 사태를 선언했고, 11월 19일에는 미곡에 대한 최고 소매 가격을 지정, 고시함으로써 쌀을 농촌 산지에서 도시 시장으로 유인하고자 했다. 그러나 쌀은 여전히 시장을 외면했다. 일반 농민의 처지에서는 다른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는 상황에서 쌀을 낮은 가격에 팔 리 만무했다. (중략)
1945년 연말에 이르러 미군정 관계자 스스로 남한 사회는 "투기와 매점매석, 밀매, 과소비, 인플레이션, 그리고 기아에 따른 난장판"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과연 1945-1946년 겨울, 서울을 위시한 대도시에서는 쌀이 거의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한겨울 혹한기 서울 한복판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으며, 밤거리에는 강도들이 횡행했다. 급기야 미군정 당국은 1946년 1월 25일, 과거 일제시대의 미곡수집령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1945년의 추곡 강제 공출 계획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중략) 1946년 남한은 보통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관하여 대단히 '잔인한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학교와 직장의 정상 운영이 어려울 정도로 결식자들이 많았고,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이 되면 기차역 주변에서 미곡 밀매상을 둘러싸고 살인적인 쟁탈전이 벌어지곤 했을 뿐 아니라, 한강 마포 연안에서는 해적선이 출현해 지방에서 들어오는 쌀을 강탈하는 일까지 생겼다. (중략)
1946년도 전체 하곡 수집이 목표량의 48.7퍼센트에 불과했던 데 비해 추곡 수집이 83.5퍼센트로 비약한 것은 무엇보다도 식량 수집 과정에서의 행정 관료 및 경찰 조직의 열성적 과잉 개입 탓이었다. (중략) 마침내 1946년 가을, 혁명에 가까운 농민 봉기가 경북 일원에서 시작되어 그해 연말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 전상인 <해방 공간의 사회사>-159-164쪽

p272
마침내 미국은 이승만에게서 '휴전협전 체결 이전에 중공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반면에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한국내와 그 부근 in and around Korea'에 미군이 주둔할 것이며 방위조약을 신속하게 비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p273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방한한 덜레스에게 이승만은 일본이 여전히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국 국민은 소련보다도 일본을 더욱 두려워한다고 말하면서, 미국이 일본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며 일본의 한국 '재점령'야욕을 반드시 분쇄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p280
(1953년 12월 아이젠하워는) 주한미군 2개 사단의 조기 철수를 발표했다. '협상'이 아니라 '무력'에 의한 통일을 주장해온 이승만은 라오스와 인도차이나 반도에 한국군을 파병할 것을 제의하면서, 육군 15-20개 사단의 추가 증강을 포함한 한국군의 대폭적인 강화를 미국에 강력히 요구했다.

p283
(1954년 7월 이승만은) 전쟁 재개를 통한 한국의 통일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는 한국을 포함한 분단국가들의 통일을 위하여 미국이 개입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덜레스는 분단국가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고의적인 전쟁의 시작은 곧바로 대전으로 이어지며,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정도의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이젠하워도 미소간의 핵전쟁은 인류 문명 전체를 파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지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이승만으로서는 자신의 북진통일을 위한 의지를 결국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차상철 <이승만과 1950년대의 한미동맹>-272-283쪽

대다수의 지주들은 농지를 매수당한 대가로 1년 소출량의 15할을 5년 동안 나누어 보상받았는데, 그것으로는 생활비를 대기에도 벅찼다. (중략)원래 1955년 말까지 지가 보상이 끝나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때까지의 보상 실적은 전체의 28퍼센트에 불과할 정도로 보상의 진행 속도가 느렸다. (중략)지주들은 제때에 보상을 받은 경우에도 큰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지가증권이란 보상받을 석수를 기입하고 그것을 5년으로 나누어 지급하되 그 방식에 있어서는 각 연도의 법정 미가로 환산한 현금으로 지급할 것을 규정한 증권이었다. 그런데 전시 중 법정 미가는 시중의 실제 미가의 30-40퍼센트에 불과했으며, 매년 인플레율은 서울의 도매물가 지수를 기준으로 보아 거의 1000퍼센트를 상회했다. 이를 생각할 때 지주들이 현금으로 보상받는 금액의 가치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중략)
==뒤에 계속==-332-335쪽

농민에게서 현물로 거두어들여 지주에게 법정 미가로 보상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커다란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더구나 인플레이션이 심한 상황에서 보상을 지연시킴으로써 정부가 얻는 이익도 만만치 않았다. (중략)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재정 안정을 꾀한다는 명분으로도 지주들에 대한 보상을 가급적 미루었다. 정부가 월별 보상금 지불 정책, 관재국수납분 지가증권 우선보상 정책, 지가증권담보 융자금지 정책을 시행한 것은 재정 안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이렇게 정부가 지주들에 대한 보상을 의도적으로 천연시키는 가운데 대부분의 지주들은 피난처에서 생계비 조달을 위해 지가증권을 헐값으로 팔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지가증권은 액면가의 20-70퍼센트 정도의 값에 방매되었다. (중략)
600석 이상을 보상받는 대지주 중 귀속 기업체를 불하받은 사람은 1.7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1958년까지 불입된 귀속 재산 분납금 중 약 40퍼센트가 지가증권의 형태였다. 이것은 결국 지주의 재산이 전쟁 중에 거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가격으로 자본가들에게 이전되었음을 뜻한다. 당시 국가는 이러한 자본 이전을 방조 내지는 조장했다.
- 김일영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

지주 계급의 몰락은 행정부에 대한 의회 약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중략)민국당의 약화는 곧 원내에서의 반이승만 세력의 약화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의회의 약화로 연결될 수 있었다.(중략)이승만이 스스로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일으킨 부산정치파동이 성공하면서 민국당을 비롯한 반이승만 세력은 결정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 파동의 결과 이루어진 발췌 개헌에서 의회가 대통령 선출권을 빼앗긴 것이 한국 정치에서 의회 약화의 결정적 계기였다.(중략)
한국에서의 자본가들의 부상은 철저히 국가 내지 정치 의존적이었다. 당시 자본가들이 지주가 몰락한 틈을 비집고 들어오기는 했지만, (중략)그들은 국가나 정치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 의존해야만 클 수 있는 정치적 자본가들이었다.
농지개혁과 전쟁을 거치면서 보수화, 탈정치화되기 시작한 농민들은 1950년대 내내 이승만의 수동적 지지 기반을 형성했다. (중략)노동 계급의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당시 조건에서 이러한 농민의 탈정치화는 결국 기층 계급 전체의 침묵을 의미했다.
요컨대 농지개혁이 전쟁과 어우러지면서 지주가 몰락하고, 자본가가 국가에 의존적이 되고, 기층 사회 계급이 숨을 죽이고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사회 세력의 전반적 약화는 한국의 국가를 사회에 대해 상대적으로 높은 자율성을 지닌 존재로 만들었다. 이로써 이미 살펴본 의회에 대한 행정부의 우위에 덧붙여 사회에 대한 국가의 우위도 나타나게 되었다. 1960년대의 발전 국가는 바로 이러한 조건 위에서 등장한 것이다.
- 김일영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342-344쪽

p484
한때 이승만은 형편없는 패를 들고도 공갈로 이기는 노름꾼 같다는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다. 덜레스는 그를 "동양의 협상가", "기만의 대가"라고 불렀다. 아이젠하워도 화가 나서 이승만이 "공갈 협박"을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핵심은 이승만이 한국의 안보를 지탱하고 재건 비용을 조달하며 강력한 국가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매년 10억 달러씩 미국의 혈세를 우려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pp516-517
1950년대의 한국은 금융 억압의 교과서적인 사례였다.(중략) 정부는 재정 지출과 금융 대출을 장악하는 데 집착했다. 사회적 지지 기반이 협소한 이승만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핵심 기구였던 군대와 경찰에는 대규모 자금 지원이 이루어졌다. 또 일부 선택된 신생 기업들에 대출이 집중되었고, 그 기업들은 다시 집권당의 금고를 채워 주었다. 이승만의 프로그램에는 또 하나의 핵심 요소가 있었다. 외국의 자금줄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pp524-525
박흥식도 이병철도, 그리고 작게 시작해서 하루아침에 거부가 된 다른 다수의 기업인들도 국가와 그 정력적이면서도 고도로 정치 지향적인 대통령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국가를 통해 매우 희소한 자본에 접근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 즉 현금을 바쳤다. (중략)1956년 대통령 선거 때 상업은행은 12개 기업에 1700만원을 대출해 주었는데, 그 금액이 고스란히 이승만의 자유당 금고로 들어갔다. 1960년에는 더 심해서, 재무부 장관과 부통령이 과연 무엇이 이승만의 재집권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최선의 방법인지를 놓고 설전을 벌일 정도였다. 국가-재벌-자유당으로 이어지는 1956년의 구조를 답습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 자산을 일부 추가 매각하는, 좀더 안전한 방법을 쓸 것인가? 결국 두 방법을 모두 쓴다는 것으로 결론 났다.

- 우정은 <비합리성 이면의 합리성을 찾아서-이승만 시대 수입대체산업화의 정치경제학>-484-525쪽

1945-1960년 사이에는 국가가 마치 보물창고라도 되는 양 기업인들이 무작정 달라붙는 형국이었다. 첫 번째 보물은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으로,(중략) 국부의 85퍼센트에 달했으며, 3551개 공장 및 회사, 토지, 사회 기반 시설, 재고품을 포함하고 있었다. (중략)정부와 연줄이 닿았던 소규모 기업인들은 인플레이션으로 가격이 땅에 떨어진 대형 공장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중략)정부 및 미군이 발주하는 재건 사업에 대한 비경쟁적 입찰 같은 노다지가 계속 쏟아졌다.(중략) 초인플레이션 상태(도매 가격은 1947-1954년 사이 7000퍼센트 상승했다.)에서 정부가 은행 대출을 중개함으로써 또 하나의 특혜가 이루어졌다. (중략)생산 쪽에서는 공식 환율로 구호원조계획(CRIK)에 따른 원조금을 통해 원료를 구입하고, 그 이익을 독점을 통해 더욱 불릴 수 있었다. (중략)
- 우정은 <비합리성 이면의 합리성을 찾아서-이승만 시대 수입대체산업화의 정치경제학>-526쪽

바로 이것이 이병철의 삼성이 1950년대에 자산을 모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이병철은 작은 쌀 방앗간과 약간의 부동산, 그리고 무역회사 한 곳을 소유한 것이 전부였는데, 이것은 모두 대구에 있었다. 1950년대가 되자 그는 앞서 설명한 메커니즘에 따라 대형 제당업체(제일제당)과 방직업체(제일모직)을 손에 넣었고, 1950년대 말에는 이미 대표적인 재벌 반열에 올라 있었다.이러한 이병철이 나중에 6400만원을 자유당에 기부한 혐의로 고소당한 일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정부 및 미군 용품 조달에 대한 비경쟁적인 계약은 정주영의 현대가 일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작은 자동차 정비업소를 운영했던 그는 전시에 부산에 피난 가 있으면서 황금 시대를 만났다. 도쿄의 아오야마학원대학을 졸업하고 영어에 능통했던 그의 동생이 미군 병영과 비행장 활주로 건설 계약을 따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정씨 형제는 1960년대에 베트남과 태국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국가 및 미군과의 사이가 한진만큼이나 가까웠던 기업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1945년에 조중훈이 가지고 있던 재산이란 고물 트럭 한 대와 약간의 영어 실력이 전부였는데, 그 후로 운이 트이기 시작해 한국전쟁 도중에는 그의 비행기들이 미군 물자를 싣고 한반도 상공을 오가게 되었다.(중략) 1961년에는 미공군이 조중훈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80대의 잉여 군용 버스를 저가로 매각했는데, 그것이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최초의 '고속버스'가 되었다.
- 우정은 <비합리성 이면의 합리성을 찾아서-이승만 시대 수입대체산업화의 정치경제학>-527-530쪽

미국은 3.15 부정선거가 자행되고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4.19라는 정치 위기가 발생하자 다울링이나 파슨스가 지적한 대로 한국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이 극단적인 해결책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이승만 정권과의 절연 정책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이제 이승만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이승만에게 압력을 가함으로써 그의 하야를 이끌어내는 데 신임 주한 미국 대사 매카나기가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매카나기는 4.19가 발생하자 세 차례에 걸쳐 이승만을 면담하고 압력을 가했다.(중략) 제3차 면담은 이승만의 하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승만의 하야는 학생 대표단과의 면담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그 전에 이미 미국이 이승만에게 압력을 넣고 김정렬 국방부 장관을 통해서도 압력을 가한 터였다. 그 내용에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학생 대표단을 만나게 하라는 것도 들어 있었다.(중략)
미국은 이와 같이 이승만에 대한 지지 철회, 즉 절연 정책을 취함으로써 4.19 이전부터 우려해 온 대중의 미국에 대한 환멸, 즉 반미 감정을 피할 수 있었다. 4월 26일 매카나기가 경무대를 향날 때 시위 군중은 박수를 치며 그를 환영했고, 그가 나올 때는 '미국 만세'와 '매카나기 만세'를 외치며 그의 차를 따라 미국 대사관까지 행진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기붕의 집에 들어가 가재도구를 꺼내던 학생들이 대형 성조기를 발견하고는, 마침 취재 중이던 미국 기자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미국 대사관의 보고는 한국 국민들이 4.19 당시 미국의 역할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뒤에 계속=-601-604쪽

"어제 시위가 절정에 달했을 때, 서울에 있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에 감사의 메시지가 담긴 커다란 화환이 놓였다. 그것은 쌍안경을 들고 있는 그의 손에 걸려 있었다. 서울 시민들에 의한 이러한 자발적인 행동은 미국인에 대한 한국의 태도를 상징한다." (중략)
국가 보안법 파동 이후의 정치 위기 기간 중 조봉암이 사형된 7월말 이후의 미국의 정책은 로버트 패스토가 말하는 미국의 "혁명의 선점 전략Preempting Revolutions"과 유사하다. 혁명의 선점이란 미국에 우호적인 제3세계 독재 정부가 혁명적인 세력의 도전에 직면하여 권력 승계 위기에 처했을 때 처했을 때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하여 그 후계 정부가 미국에 적대적인 정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취하는 전략이다. (중략)미국은 처음에 독재자를 미국과 동일시하다가 승계 위기가 발생하면 독재자와 절연하며 그 이후 혁명 세력도 독재자도 아닌 온건한 제3세력을 구축하여 혁명을 선점하게 된다.
- 이철순 <1950년대 후반 미국의 대한 정책>

(제국주의 지배가)왜 억압적이지 않았겠습니까? 근대 국가 체제 자체가 억압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중략) 근 40년에 걸친 식민지의 시공간이 지배와 억와 피지배, 억압과 저항, 가해와 피해.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눠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수천만 명의 조선인들이 식민지에 태어나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이건 사람의 한평생에 해당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수천만 명의 수십 년에 걸친 삶을 간단하게 설명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도식이나 잣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것이 폭력의 시작입니다. 이 단순 도식에 입각한 시각을 바꾸지 않는 한, 식민지의 실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일제의 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비난당하고 매도당하는 것이 현재 한국 사회의 현실입니다. 또 한편, 1945년 8월 15일에 제국의 지배가 끝나고 그야말로 해방의 공간이 열린 것인가, 오히려 식민지의 구조와 의식은 더욱더 연속되고 심화되었던 것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들에 우리가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대담 중 김철의 말-618-619쪽

냉전 시대에 김일성만큼 강역한 '공공의 적'이 없었죠. 반공주의 체제에서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시킨 '공공의 적'은 다들 아시다시피 "빨갱이"였습니다. 빨갱이로 낙인찍힌 자에 대해서는 무슨 모욕을 가해도 좋고 어떤 인권 탄압을 해도 괜찮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집권당의 총무라는 자가 '간첩인데 고문 좀 하면 어떠냐'는 말을 공공연히 태연하게 한 적도 있습니다. 이 '공공의 적'을 통한 포섭과 배제의 메커니즘은 우리 모두가 경험했듯이 대단히 강력하고 공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민주화 운동 세대는 반공주의와 국가 보안법 등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반인권적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앞장서서 반공주의의 폐해를 일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제가 보기에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의 '빨갱이'라는 기표를 단지 '친일파'라는 기표로 대체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사회에서 '친일파'로 낙인찍힌다는 것은 과거에 '빨갱이'로 몰리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연좌제까지 그대로 똑같습니다. 다만 다른 점은 공권력의 직접적 물리적인 폭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포퓰리즘적 선동을 통해서 가해진다는 것이고, 그것이 더 무서운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반공주의의 작동 방식이 그 상대만을 바꾼 채 재연되고 있다는 사실, 저는 여기에서 참으로 비극적인 역사의 아이러니, 혹은 미워하면서도 어느새 적의 모습을 닮아버린 반공 교육 세대의 참담한 자화상을 봅니다. 이 메커니즘이 지속되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일 청산이란 공염불에 불과할 것입니다.
- 대담 중 김철의 말-671-672쪽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과거사와 관련하여 한국인들은 어떤 주어진 '이미지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대사든 일제시대 역사든 해방 이후의 역사든 간에 많은 사람들이 지닌 어떤 특정한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지의 힘은 사실보다 강해서, 사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에 이미 주어진 특정한 이미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규명하고 그 과오를 극복한다는 것은 이 주어진 이미지를 벗어나 사실과 마주 서는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이 사람들에게 그런 용기를 갖게 하는 데 일조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한국의 학교 교육과 사회 교육이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학교 교육, 사회 교육은 '증오와 원한의 철학'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증오와 원한은 잠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조만간 자기 자신을 부수는 독이 되고 맙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깊은 증오는 결국에는 그 대상에 대한 전적인 의존, 즉 그 대상이 없으면 자신의 존재 이유 자체가 사라지는 그런 결과를 낳ㅎ습니다. 반공, 반일, 반미 등의 증오의 철학에는 어김없이 그런 역설이 존재합니다. 해방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 사회는 학교와 가정, 사회에서 그러한 철학에 바탕을 둔 교육을 행해왔고, 그것을 사회 통합의 핵심적인 기제로 삼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목격하듯, 만인의 만인에 대한 증오와 원한으로 가득 찬 한국 사회의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한국 사회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하고 절망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증오와 원한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에서 '평화 교육'으로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 대담 중 김철의 말-683-684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zuaki 2006-08-2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지향, 김일영, 김철, 이영훈의 대담은 그야말로 4인4색이라 재미있다. 이영훈은 국사학계와 언론에 너덜너덜 얻어맞은 일로 PTSD 증세를 보이고, 박지향은 기존 "상식"들도 부드럽게 수용하는 편이다. 김일영은 담백하고 명쾌하며, 김철은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한다. 강요된 복종과 강요된 증오의 폭력성에 대한 기본적 문제 의식 뿐 아니라 <1984>의 증오시간을 말하는 세부 전략조차도 나와 너무 비슷해서 나르시스트인 나는 이 사람한테 첫눈에 반했는데...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연대 국문과 따위의 교수인 거냐고... T_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