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패자 - 6.25 국군포로 체험기
박진홍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6월
품절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삶을 마친다고 생각해도 왠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멀리 남쪽에서 계시는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엄마와 단둘이서 온갖 역경을 견디며 소학교,중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구의과대학에 입학했을 때 엄마는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른다. 그런데 곧 6.25전쟁이 터졌다. 나는 학도병에 지원 입대했다. 이제 아무도 모르는 산속에서 엄마에게 죽음조차 알려주지 못한 채, 적진 속에서 중국군의 총에 맞아 죽게 되다니. (중략) 하느님이 계신다면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나쁜 일도 안하고 학교 공부만 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묻고 싶었다. 총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사람을 죽여본 일도 없었다. [저자는 위생병이었다. - 인용자주]-14쪽

"야 진홍이, 살았구나."
허군은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허군의 손을 잡자마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허군은 우리와는 달리 대구 근교의 농촌 출신이었다. 우리와 같이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살아서인지 그는 나약하지 않고 참을성이 있어서 이곳에서도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년배로 대구의과대학에 같이 입학했을 때도, 그는 어딘가 어른스러운 데가 있었다. (중략)
"임마, 니 울보 아니가. 울지 마."
허군이 울지 말라고 했는데도 나는 울고만 있었다. 그 후에도 나는 허군을 만났다 하면 울곤 해서, 허군이 내 별명을 '울보'라고 지어주었다. 의사가 된 지금도 만나면, 허군은 나를 '울보'라고 부른다. -84-85쪽

우리는 인민군이 우리를 어떻게 사상교육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사실 사회주의 사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중략) 우리는 사상교육 시간에 무슨 거창한 말이 나올 줄 알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인민군 대위가 나와 자기는 정치부 장교라고 우선 소개했다. 그는 함경도 사투리의 억센 악센트가 특색이었다. 나이는 마흔이 넘을까 말까 했다. 교육 내용은, 여기에서 '강냉이' 몇 알 먹고 배고프게 있지 말고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인민군에 자원 입대하면,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준다는 게 사상교육의 요지였다. 선동조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민군에 입대할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는 등의 반 강요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설득조로 이야기했다. (중략) 학습이 끝난 후에는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모여 인민군 지원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대부분 여기에서 배고픔과 발진티푸스로 죽는 것보다는 인민군에 입대하여 살고봐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논들이 지배적이었다.
우리가 포로교환되기 위해서 기차로 사리원역에 도착했을 때였다. 한 인민군 이등병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나는 전에 같은 포로였으나 인민군에 입대하여 집에 못 가게 되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이나 가족에게 전해달라"며 남쪽 주소를 적어주었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던 옛 포로 동료 한 사람을 잊지 못한다. -99-100쪽

사리원 비행장 복구대에 있을 때 대장실에서 조군에게 출두 명령이 내려왔다. 인민군 대장이 일개 포로병을 출두시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조군은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가 생각하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군이 대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인민군 대위가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조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장은 조군을 한참 쳐다보더니 말했다.
"나를 모르겠는가?"
"모르겠습니다."
"나는 너보다도 2년 선배다. 너는 조교장 선생님의 아들이 아닌가?"
경북중학교의 선후배가 인민군 대위와 포로병으로 다시 만나다니, 조군은 할 말을 잊었다. (중략)그때 묵시적으로 조군에게 탈출을 암시해준 선배 인민군 대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두 명이나 탈주를 했으니, 어떤 문책을 받았을까. 학연은 남북을 초월한다.(중략)
조군과 인민군 대위가 이같이 남북으로 서로 갈리게 된 것은, 내가 중학교 4학년 때 일어난 10.1사건 때문이었다. 10.1 사건에 적극 가담했던 그 인민군 대위는 경찰이 사건의 주동자 검거에 나서자 구속을 피하기 위해 월북했던 것이다.-119-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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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6-08-21 0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받았던 저자의 포로 생활을 보며,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에게 포로가 된 일본군의 삶을 다룬 오오카 쇼헤이의 소설 <포로기>를 생각했다. 그쪽은 반대로 포로가 되는 순간 굶주림과 고통이 끝났었는데. 한국전쟁 때도 미군에 잡힌 인민군 포로들은 먹고 입는 문제는 없었던 듯하고. 포로가 됐을 때의 처우를 생각한다면, 전쟁은 역시 돈 많은 나라하고 해야 할 듯. -_-;;
어쨌든, 전쟁이라는 제 정신이 아닌 상황을 무사히 살아서 넘겼다는 것만으로도 저자는 "패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임전무퇴"는 전쟁을 일으키고 아까운 목숨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자들의 기만적인 구호일 뿐, 기다리는 사람들한텐 그저 몸 성히 살아돌아오는 게 최고지. 전쟁의 희생자에 대해 국가가 바쳐야 할 것은 '감사'가 아니라 '사죄'라는 믿음이 좀 더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