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 -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 체험기 그들이 본 우리 6
펠릭스 클레르 리델 지음, 유소연 옮김 / 살림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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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9

그날 저녁 서울서 내려온 포졸들이 진밭에 들이닥쳤습니다. 거기에 상주하는 서양인과 그 서양인 시중을 드는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라는 간명한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입니다. 여러 차례 은신처를 바꾸어 가면서 저와 동행한 신자들을 먹이느라 제가 지니고 있던 것을 다 쓰고 난 후에는 대부분의 신자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산속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어가 몸을 숨겼습니다. 저는 장티푸스를 앓고 있는 한 남자 곁에서 보름 간을 지냈는데, 아주 작은 소리만 나도, 제가 머물고 있는 집에 누군가 찾아오기만 해도 그때마다 장작더미 밑으로 몸을 숨기곤 하였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부활축일 내 화요일에 다블뤼 주교께서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 안드레아의 아이들이 저희끼리 이 슬픈 소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장녀인 12살짜리 안나가 남동생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곧 사람들이 신부님과 아빠와 엄마를 붙잡으러 올 거야. 그리고 우리도 붙잡아다가 ‘천주교를 버려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지를 자르겠다.’ 이렇게 말할 거야.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자 동생이 말했어요.
"난, 이렇게 말할 테야.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나도 아빠처럼 할 거고 하느님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내 목을 친다면 나는 하느님한테로 가겠죠."
막내가 덧붙였습니다.
"그럼 난, 사또에게 이렇게 말해야지. ‘나는 천국에 가고 싶어요, 나으리들이 신자라면 나으리들도 천국에 가겠지만, 나으리들은 신자들을 죽이니까 지옥에 갈 거예요.’"
그러자 안나는 두 남동생을 껴안고 이렇게 말했지요.
"그래, 우리 다 함께 죽는 거야, 그래서 아빠랑 엄마랑 신부님하고 같이 천국에 갈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하느님께 기도를 잘 해야 해. 그 사람들이 우리를 아프게 할 것이거든. 머리털이며 이를 뽑고, 팔을 빼고, 커다란 몽둥이로 때릴 테니까. 그리고 신부님도 그러셨어.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것을 견딜 수 없을 거라고."

80-83

내 집에서 압류한 이러저러한 궤짝들은 포졸 숙소로 가져다 놓았는데, 많은 물건이 이미 내 집을 약탈할 때 사라진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도 포졸 두목이 재미삼아 이 궤짝들을 열어 보곤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그 자리에 있던 포졸들이 자기네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집어 가곤 하였으며, 심지어는 이것은 무엇이냐, 저것은 무엇이냐, 이것은 어디에 쓰는 것이냐, 저것은 무엇에 소용되는 것이냐 하며 내게 묻기까지 하였다.
하루는 한 포졸이 작은 십자가를 가져와서는 그것이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이 주교가 가슴에 다는 십자가의 가로대로나느 것을 알아보았는데, 원래 가로대 안에는 성유골이 담겨 있었다. 그날 이후 도금한 그 은십자가를 다시는 볼 수가 없었으니, 그가 그것을 부러뜨려 모두 불에 넣어 녹였던 모양이다.
또 한번은 포졸들이 비누 한 조각을 가져와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들을 즐겁게 해 주기로 작정하였는데, 작정대로 꽤나 성공을 거두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거품을 일으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모두가 서로 앞을 다투어 해 보았던 것이다. 관장들도 이에 빠질세라 종이 대롱 안으로 힘껏 숨을 불어넣어 거품을 크게 부풀리고는 그것을 보며 놀라워하며 탄복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밖에 있는 친구들까지 데리고 와서 이 신기한 것을 구경시켜 주었다. 내 생각에는 그들이 각자 자기 몫의 비누 조각을 갖고 싶어하였던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내게 비누 조각을 요구하였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이, 내게는 비누가 없었다.
하루는 한 포졸이 내게 물었다.
"비누를 먹어도 되는 건가요?"
"안 돼요. 먹었다가는 탈이 날 수가 있어요."
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아이쿠."
그가 덧붙였다.
"열 살 난 아들놈한테 내가 비누 한 조각을 주었더니 거기서 나는 향내를 맡고 그것이 떡인 줄 알고 먹고는 실제로 심하게 앓았다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는데, 내 궤짝 안에 양약이 몇 개 들어 있는데 그 약의 용도를 잘 알고 잇을 때는 몸에 이로우나 만일 그것을 가져다가 분별없이 사용할 때면 탈이 날 수도 있고 심지어는 그로 인해 죽을 수도 있따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에, 하지만 포도주는... 오! 얼마나 맛있는데요! 우리도 그건 잘 알지요."
"얼마나 독한지!"
다른 한 명이 말을 받았다.
"그거 몇 잔을 마셨더니 어찌나 취하던지, 이튿날에야 술에서 깨어나더라니까."
실제로 그들이 교구의 미사주를 모두 마셨던 것이다.

86-87
그 즈음에 나는 처음으로 어떤 놀이에 대해서 듣게 되었는데, 그 놀이는 음력 설에 이어서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는 야만적인 놀이였다. 그러나 포졸들은 그 놀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경탄해마지 않았다. 그 놀이는 진짜 싸움이다. 200-300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저마다 60센티미터 길이의 굵은 몽둥이를 들고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가, 시작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대편을 향하여 돌격하여 몽둥이를 마구 휘두른다. 결국 한 팀이 항복을 선언하거나 도망가야 놀이가 끝난다. 이 놀이가 끝나면 턱과 어깨가 탈구되거나 머리, 다리 그리고 팔이 부러진 사람들이 다수 생기고 심지어는 사망자도 나온다. 그야말로 글래디에이터라고 말할 수 잇는데, 사람들은 그 놀이를 서울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볼거리라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내가 그런 싸움은 비도덕적이라고 지적하자, 그들은 "오! 그런 몽둥이질을 받아내며 승패에 용감히 맞설 용기를 지닌 사람은 오직 조선인들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싸움이 너무 격렬하여 한번은 정부가 그 놀이를 금지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인데, 그러자 이틀 후에 그들은 서울 성문 밖으로 나가 다른 구역에 가서 다시 시작하였던 것이다. "오! 만일 유럽인들이 이 놀이를 본다면 조선인들을 높이 평가할 텐데. 우리나라 백성 같은 백성은 없을걸." 그들은 여전히 내게 그렇게 말하였다.

113-117
죄수들은 주로 세 부류로 나뉜다. 도둑, 채무 죄소 그리고 우리 같은 신자들, 이렇게 세 부류인데, 옥 안에는 신자들이 대다수였다. 이 세 부류의 죄수들은 각각 다른 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 도둑들의 처지는 가장 비참하였다. 대략 30여 명이 있었는데, 밤이고 낮이고 발에 차꼬를 차고 있으니 모두 병에 걸린 상태였다. 옴이 온몸에 올라 상처 부위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고, 뼈와 가죽만 남아 있었으며, 몇 명은 뼈에 가죽을 입혀 놓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낮에 바깥에 나갈 수 있다는 허락이 떨어져도 그들은 간신히 몇 걸음 옮기는 게 고작이었다. 이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광경 중에 가장 끔찍한 광경이니, 그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라도 하려면 이러한 비참함을 일찍이 목격하였어야 한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그들을 정신적으로 지치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한다. 그들에게는 잠을 자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밤중에 옥졸들은 굵은 몽둥이를 들고 그들을 감시하는데, 만일 졸음과 피로에 빠져 누군가 졸기라도 하면 즉시 몽둥이로 등과 다리와 머리를 후려쳐서 그를 깨운다. 종종 술에 취해 있는 이 광포한 사람들이 불쌍하고 불행한 이 죄수들에게 가하는 몽둥이질 소리를 밤새 몇 차례나 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그 야만인들의 몽둥이질 아래 오직 한 오라기 붙어 있던 불행한 죄수들의 숨이 끊어지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죄수들은 밤낮으로 이유 없이 아주 작은 구실을 대서라도 심하게 두들겨 패기를 즐기는, 사람이라기보다 맹수에 가까운 이 존재들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맹수와 같은 존재들은 이런 경우에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받고 있었으니, 그들이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도둑 죄수 한 명이 죽으면 그가 병사하였다고 보고하고, 죽은 죄수를 시체실에 치워 둔다. 그러면 다음 날 밤에 쓰레기 담당자들이 시체를 들어다가 성곽 밖에 있는 숲 속에 내다 버린다.
도둑 죄수들이 갇혀 있는 감옥이야말로 지상에 존재하는 지옥의 상 가운데 가장 강한 인상을 풍기는 상일 것이다. 죄수들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거의 벌거벗고 있다. 어떤 이들은 거의 벌거숭이 상태이며 바깥출입을 해야 할 때면 다 썩은 헝겊 조각을 마치 허리띠처럼 둘러 허리와 엉덩이만 가리고 나간다. 감옥 안에서 어떤 수감자들은 겨울에도 여름처럼 알몸으로 지낸다.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옷을 걸치고 있던 사람들도 빨아 입을 수가 없다. 손과 얼굴을 씻을 물을 조금도 얻을 수가 없으니, 가끔 감옥 마당으로 나가는 기회가 있을 때 옥졸이 악취가 풍기는 썩은 물 웅덩이에 손을 담가도 된다고 허락하면 그것만으로도 좋아라 하고, 그 물로 얼굴과 가슴이며 다리를 씻었다가 온몸이 습진투성이가 되고 때로는 머리 피부병에 걸리기도 한다. 그들 중에는 중죄인도 있지만, 아무 가치도 없는 물건 좀 훔쳤다고 수감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만일 도둑질한 자들을 모두 체포한다면 대부분의 옥졸들부터 잡아들여야 할 것이니, 포졸들 가운데는 도둑들과 함께 감옥 안에 있어야 제자리인 자들이 많다! 이 아름다운 나라 조선에서의 인간의 정의란 얼마나 끔찍한가!
그들의 주식이라고는 작은 밥 사발에 아무런 간도 하지 않은 밥을 담아 아침저녁으로 먹는 게 전부이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들어올 때는 튼튼하고 건강이 좋았던 사람들도 20일이 지나면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 된다.
채무로 투옥된 죄수들이나 도둑질 외에 다른 동기로 잡혀 들어온 죄수들은 이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는다. 그들은 차칼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데, 이 명칭은 도둑 죄수들을 제외한 모든 죄수들에게 적용된다. 그들은 친지나 벗들과 서로 연락도 할 수 있고 밖에서 음식을 받아 먹으며(이들은 감옥에서 먹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굶주리고 있는 도둑 죄수들이 보는 앞에서 대향연을 벌이기도 한다. 내가 본 이들 중 대부분이 정부의 관원들이었고 그들은 마지막 채무를 다 지불할 때까지 갇혀 있게 된다.
신자들은 도둑 죄수들처럼 옥에서 음식을 받아 먹지만 외부인들과 연락을 취할 수 없다. 그리고 보통, 적어도 좌포청에서만큼은, 발레 차꼬를 차고 있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차칼에 속하나, 포졸들은 그들을 멸시하여 광방이(kouang-pang-i)라고 부른다.

122-125

옥졸 두목은 우리와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서 문을 잠그기 전에 종종 우리가 있는 곳에 와서 저녁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여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내면에는 좋은 성품을 지니고 잇었다. 그는 20년째 옥졸 두목으로 일을 해 오고 있었는데, 부하들을 호령하고 복종시키면서 그 자신도 상관의 명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였다. (중략) 포도 대장의 명령만 있다면, 그는 우리의 목에 끈을 매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에게 예전에도 신자들을 본 적이 있는지 물었더니, 그는 "본 적이 있느냐구요? 수백 명을 봤소. 사람들이 아주 조용하고 착합디다. 그 사람들은 세상 그 누구보다 평화롭고 온순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고 항상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입디다." 하고 대답하였다. 내가 다시 "이곳에서 신자들을 많이 죽였습니까?" 하고 묻자, "그 당시엔 감옥이 신자들로 가득 차 있어서 빈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매일 우리가 상당수를 교살했어요. 기껏해야 2~3일 정도밖에 가두어 두지 못하였지요." 라고 대답하였다.
다른 옥졸들이라고 해서 우리를 학대한 것은 아니나 그들은 성격이 교활하고 위선적이며 성마르고 증오에 차 있었다. 이러한 그들의 마음속에 간혹 동정심이 들어 있는 듯 보일 때는 반드시 그 뒤에 이해관계가 숨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웃으면서 형벌을 집행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사람을 교살하는 것이 한갓 심심풀이나 여흥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네가 우리의 친구라고 자칭한다! 어떻게 그들을 믿겠는가?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분노를 터뜨리며 도둑 죄수들을 때렸다. 대장이 몽둥이질 소리를 듣고 와서 그들의 행패를 막자, 그들은 그에 대한 분풀이로 몽둥이 끝에 바늘 모양의 뾰족한 쇠침을 박을 생각을 해 냈다. 그리고 그것을 불쌍한 죄수들을 찌르는 데 사용하였으니, 우리는 종종 죄수들의 신음과 숨넘어가는 듯한 비명을 들어야 했다. 한번은 한 신자가 고열에 시달리다가 물을 좀 달라고 청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래, 우리가 물을 주지!" 하며 쇠침을 박은 몽둥이로 그의 가슴을 죽도록 팼다. 그로 인해 결국 이 불쌍한 신자는 두 시간 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포졸은 그가 병사하였다고 보고하였고, 시체는 실려 나가 성곽 밖에 버려졌을 뿐, 그 누구도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감옥에서는 결코 죄수의 사망 원인에 대해 확인하는 법이 없어서, 옥졸들은 그렇게 살인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보장만큼은 받고 있었다. 그들보다 더 비천하고 사악하며 악질인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힘들 것 같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다! 바로 천민 고용인 혹은 정확한 명칭으로 말해서 망나니가 그들이다. 그들은 혐오감을 일으키는 용모와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그들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수형자를 패고 생피를 벗겨 내고 팔다리를 부러뜨리면서 수형자들의 비명을 희롱하고 수형자들에게 상스러운 농담을 퍼붓는다. 마치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그들이 감옥 안에 나타나면, 그것이 곧 고문이나 형 집행을 예고하는 듯하여 수감자들은 공포에 휩싸이거나 망연자실하였다. 사람이 어떻게 저 지경에 이르기까지 타락할 수 잇으며 악하고 잔인하고 교활할 수 있을까? 조선의 감옥들은 그야말로 지옥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곳이라고 한 요한 노인의 말이 옳지 않은가?

131
대개 조선인들은 우리가 전교하기 위해 조선에 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목적은 천주교를 전교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혹자는 "그들은 우리나라를 배우려고 왔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다른 이들이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를 침략하려고...."라고 맞장구를 친다.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은 장사를 해서 돈을 벌려고 왔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좀 더 신중한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만일 그들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려고 하였다면 군사를 이끌고 왔을 테지. 또 만일 돈을 벌자고 왔다면 한 번도 장사에 성공을 못 할 리가 있겠나. 왜냐하면 포졸들이 그 사람들 집에서 찾아낸 것이라고는 서양 물건들과 얼마 안 되는 돈뿐이라니까. 게다가 큰돈을 벌겠다고 죽을 위험까지 무릅쓰겠는가! 하긴 비옥한 평야와 수목이 울창한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정말 아름답고 부요한 나라이긴 하지." 그러면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 나라가 우리나라만큼 수려하지 못하다는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아시오? 어쨌든 양인들은 재주가 좋아. 그 사람들의 시계며 증기선들을 본 적 있소?"
"오! 재주로 말하자면 우리 조선인도 그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지. 우리도 그런 거 다 만들 수 있다고. 다만 그런 것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를 뿐이지."

181-182
6월 10일, 질이 나쁜 천으로 지은 새 옷 한 벌을 내게 주며 이튿날 서울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저녁에, 꽤 늦은 시간인데, 우포청의 포졸 몇 명이 자기네 상관 이와 함께 찾아왔다. 음흉하게 생긴 상관은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를 머금고 말하였다.
"네 나라로 곧 돌아가게 되었으니, 거기에 가면 조선 책들과 한문 책들은 가져가 봐야 아무도 읽을 줄 모를 터이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궤짝에 들어 있는 모든 책들을 꺼내 여기 네 앞에서 전부 태우라는 포도대장의 명을 받고 왔다."
나는 이에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절대로 의견을 바꾸지 않는 포도대장의 명령인 데다가 더군다나 결정권을 쥐고 있는 포도대장 본인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모든 궤짝을 열고 모든 책들을 검사하며 한문으로 씌어진 책들과 조선어로 씌어진 책들, 심지어는 유럽어로 된 책인데도 그 안에 한자나 조선어가 몇 글자라고 들어가 있으면 모두 골라내었다. 그러니 우리의 모둔 手稿本들, 언어에 관한 우리의 작업 원고들도 모두 검열에 걸리고 말았다.
(중략) 그들은 궤짝을 다시 닫고 봉인하고는 새끼줄로 묶었다. 마당에 불을 지피고는 궤짝에서 추려 낸 책들을 모두 불 속에 던졌다. 그리고 나보고 이 광경을 보러 오라고 하였다. 그것을 거절하고 방 한구석에 앉아 있었더니, 이자들이 방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웃고 떠들다가 밤이 깊어서야 물러갔다.

185
드디어 곧 출발한다는 소식이 왔다. 포도청 마당에는 나를 보기 위해서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였다. 내가 보교 위에 올라 앉으니 포졸들의 그 주위로 발을 빙 둘러 주어 길을 가는 내내 거리에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배려해 주었고, 나는 마치 작은 방 안에 갇혀 있는 듯하였다. 그리고 두 교꾼이 보교를 들어 드디어 출발을 하였다. 보교의 문으로 사용되는 발 틈 사이로 우리가 가는 大路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었는데, 그 길은 그야말로 까마득히 이어지는 장안 대로였다. 길 양쪽에는 초가지붕을 얹은 흙집들이 있었는데, 어찌나 작고 어찌나 낮은지 비버들castors이 사는 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89-191
그날 저녁 우리는 옛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송도 혹은 개성에 유숙하기로 되어 있었다. 조금 더 가니까 과연 거리의 풍경들이 우리가 유명한 곳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커다란 능들, 오래된 비석들, 어마어마한 공사였으리라고 짐작되는 다리들, 이러한 유적은 옛 수도의 영화를 증거하고 있었다. 지금도 송도는 조선에서 가장 큰 상업 도시이다. 이곳 주민들은 상업적인 재능이 뛰어난 것으로 평판이 나 있었고, 또한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그들의 정복자, 조선 왕조를 경멸하고 있었다. (중략) 이 도시의 사람들은 호기심은 있었지만 적의라고는 전혀 없었고, 주민들은 심지어 온순하고 조용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모두 차림새가 깨끗하였고 의복은 화려하기까지 하였다.

196
봉산을 지나고 나서 우리는 산 하나를 만났는데, 산길을 따라 빙빙 돌아서 산 정상에 닿았다. 그곳은 너무 위험해서 여행객 두세 명 정도로는 감히 들어설 만한 곳이 못 되었다. 그래서 여행객들은 그 산의 주인이며 그 산의 왕인 호랑이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무리를 지었다. 그 동네 어느 집을 가도 집집마다 호랑이 때문에 빚어진 불행한 이야기가 그치지 않고 들렸는데, 그곳에 횡행하는 호랑이들 때문에 많은 주민과 여행자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산 밑에서 여러 명의 여행객이 우리와 합류하니 산을 넘기에 충분한 인원이 되었다. 산 정상에는 주막으로 사용되는 작은 집 한 채와 호랑이 신령에게 바치는 작은 탑이 하나 있었다. 나는 한 남자가 탑으로 다가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면서 두 손을 비벼 가며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여행객 모두를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씩 빌어 주었고 나를 위해서도 빌었는데, "복명이가 이 산을 무사히 넘도록 해 주시고, 그를 호랑이에게서 보호해 주시어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여행하게 해 주시옵소서. 오! 여행자들의 보호자이시여. 그렇게 해 주시옵소서." 하며 비는 소리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8-200
평양 시민들은 다혈질이고 시끄러우며 대담하다. 강여울에 걸려 꼼짝 못 하고 있는 미국의 소형 스쿠너 선박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고 그 배의 승무원들을 모두 학살한 것이 바로 그들이며, 강화도의 프랑스인들을 내쫓겠다고 나선 것도 그들이다. 평양에서의 상업 활동은 규모가 크고 활발하며 도시는 항상 역동적이다. (중략) 내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었을 때는 사방에서 달려오는 사람들 소리가 마치 바다에서 파도가 몰려오는 소리 같더니, 금세 어찌나 빽빽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는지 교꾼들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중략) 이 전쟁이 족히 3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니, 하는 수 없이 나는 컴컴한 외딴 방에 갇혀 있어야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도 사람들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어째서 그자를 돌려보내는 거냐? 그자를 처형시켰어야 마땅하다! 도대체 조정에서는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거냐? 이제 서울에는 용기 있는 자들이 없는 게로군! 그자를 여기서라도 죽여야 해."
"무슨 소린가. 그자를 돌려보내라는 게 천자의 명이라네. 심지어 천자께서 그 자를 잘 모시라는 명령도 내렸다네. 그자는 자기네 나라나 중국에서 명성이 높은 인물인 모양이야. 대인인 모양일세."
"그래? 중국 황제의 명령이라구?"
"글세 그렇다니까. 황제가 그자를 돌려보내라고 특사를 보냈다니까>"
이 말에 소란스러움이 다소 누그러지니, 조선에서 중국 황제의 위력이 이 정도였다. 중국 황제라는 한 마디가 모든 걸 잠재우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포졸들 역시 정부로부터 나를 보호하라는 분명한 명을 받았기에, 군중들의 소란을 잠재우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이 도시에서는 포졸들과 정부 관리들이 제일 드셌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주민들은 유순하고 조용한 편이었다.

203-204
짐을 다시 정리한 후 교꾼 두 명이 보교를 들고 왔는데, 교꾼 네 명 중 다른 두 명은 힘들어하는 다른 일행에게 힘 좋은 자기네 일손을 보태 주러 갔기 때문이다. 보교 위에 앉으면 교꾼들과 이야기를 나누기가 아주 수월하였는데, 항상 명랑한 그들은 내게 이런저런 것을 물어 오기도 하였고 또 갖가지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 보통 포졸들도 대화에 끼어들었는데, 그렇게 해서 여행의 지루함을 덜기도 하였다.
호송 관리는 맨 뒤에서 작은 말을 타고 오면서 행렬을 감독하였다. 처음에는 차갑고 과묵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얼굴 표정이 밝아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대화의 내용을 들을 수 없었던 그는 간혹 교꾼들이 크게 웃는 소리를 들으면 "주교가 뭐라고 하였기에 웃나?" 하고 꼬박꼬박 물었다. 그러면 교꾼 한 명이 보교에서 손을 놓고 관리에게 가서 방금 나누었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전하였고, 그러면 다시 다 함께 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관리의 말 타는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자리를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조금 지나서 다시 묻기를, 내가 말을 타고 자기가 보교를 타고 가도 정말로 괜찮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조선의 작은 말 위에 오르니, 나는 마치 정부의 명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이 나라의 관장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깜짝 놀랐고, 교꾼들은 "양인이 말을 타니,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해서 구경꾼들도 훨씬 적다."라고 말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피곤해 보이는 관리에게 오랫동안 보교를 양보하고 싶었지만, 어느 정도 가다 보니 나도 아파서 보교를 더 양보할 수 없게 되었다.
"말을 타고 가는 게 피곤하지요?"
"아니오.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겁납니다."
그의 대답은 내가 들었던 조선의 속담과는 맞지 않았다. 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특성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 여자들은 미인인 것으로 유명하고) 조선은 남자들의 용맹으로 유명하고 일본은 일꾼들의 솜씨로 유명하다" 라는 속담을 길을 가는 내내 여러 차례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관인 우리의 호송 관리가 작은 말을 타는 게 겁이 나다니!

211-212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의주 가까이에 도착하였다. 여전히 나를 둘러싸고 작은 소동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우리는 가능한 한 쉽고 좀 더 민첩하게 이 큰 도시를 통과하여 반대쪽 끝에 위치한 관청으로 들어갈 만반의 조치를 취하였다. 우리는 아주 조용하게 성문 안으로 들어섰지만 곧 내 모습이 노출되었고, 사람들이 몰려들며 고함을 질러 댔다. 30명이 넘는 포교들이 인파를 진압하느라 온 힘을 쏟았다. 급기야는 우리가 들어간 관사 또한 인파에 포위를 당하고 말았으니, 이렇게 소란스러운 광경을 보면서 거의 1시간이나 지속되는 요란한 소리를 듣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굵직한 직함의 관리들이 모두 나를 방문하였다. 현지의 관장이 친히 와서 나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고는 조선인들은 재미있는 백성인데, 아무것도 본 것이 없는지라 별것도 아닌 일에 대단한 호기심을 보이며 단순한 행차 하나에 온 주민이 동요한다고 하면서, 내게 길에서 많이 고생하였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우리들도 여행하면서 사람들에게 많이 시달립니다." 라고 덧붙였다. 이에 나는 "모든 나라 백성들이 거의 다 그렇지요. 특히 조선에서는 유럽인을 볼 기회가 자주 있는게 아니니까요." 라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그가 다시 말을 받아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니지요. 모든 나라 백성들이 다 이렇지는 않습니다. 유독 우리 조선인들만 이렇게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도 북경에 가면 행렬이 이 마을 저 마을을 지나가게 되는게 그곳 주민들은 조용합니다. 우리의 행렬을 쳐다는 보지만 훨씬 조용하게 쳐다보고, 달려들거나 우리를 귀찮게 하지는 않지요! 아! 우리 백성들은 참으로 예의범절이 없어요! 그 나쁜 습성이 이 나라 백성의 몸에 배어 있고, 그게 그 사람들의 기질입니다!"

214-216
길을 나서자,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는지 전날처럼 군중들이 밀집하여 있었다. 내가 보니, 무장한 포졸들이 군중을 해산시키려는 사명감에 불타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나를 호송하는 관리에게 다급하게 말하였다.
"이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러 온 것이나 그냥 놔두시오. 제발 포졸들이 사람들을 때리지 못하게 해 주시오. 우리야 어떻게든 천천히 갈 수 있는데, 구렇게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자 관리가 외쳤다.
"대리지 마라. 양인이 사람을 때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를 에워싼 군중들 사이를 그렇게 무사히 지나서 강변을 통과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납작한 큰 배에 올랐다. 모래사장에 늘어서 있는 저 모든 군중들과, 나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우리 배를 에워싸고는 흰 이를 드러내며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아이들. 그것은 신기한 광경이었다. 또 다른 이들은 숲의 거목을 잘라서 통나무 속을 파 내어 만든 카누 속으로 뛰어들어, 고요하고 평화롭게 흐르는 이 아름다운 강 위를 우아하고 유연하게 노를 저어 갔다. 저 사람들이 모두 내 백성이고 내 자녀들인데, 우리 주님께서 교황 비오9세를 통해서 내게 맡기신 백성인데, 나는 그들을 버리고 가는구나!
우리는 무사히 강을 건너 첫 번째 섬에 닿았다. 그 섬 한쪽에서는 대형 조선 선박이 오르내리고 있었고, 섬의 다른 쪽, 즉 같은 강의 다른 지류 쪽으로는 수없이 많은 중국 배들의 돛이 강 위를 누비고 다니는 것이 보였다. 뭍으로 올라온 나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 이 아름다운 조선, 나의 사랑하는 포교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치인가!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전경인가! 그것은 마치 어쩔 수 없이 작별해야 하는 나에게 보내는 조선의 미소와도 같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선을 포옹하며, "잘 있거라! 곧 다시 보자!" 하며 조선을 향해 나의 가장 다정한 강복을 주었다!


226-229
이튿날 나는 우장으로 갔고, 나의 출현은 거기서도 신자 공동체 사목을 돌보고 있던 리파르 신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6일, 리파르 신부는 말을 타고 나는 수레를 타고 함께 길을 떠났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리파르 신부가 먼저 가서 내 도착 소식을 전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곳 신부들이 말을 타고 마중을 나왔다. 도시 안으로 들어서자 그 지역의 유럽 상인 몇 명이 이 기마 행렬에 합류하였다. 모두들 얼마나 놀라고 반가워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글로 옮기겠는가. 12년 전, 나의 주보성인이신 낭트의 펠릭스 성인 축일 전날인 7월 6일에, 나는 지금과 거의 똑같은 상황에 처해서 체푸 연안에 도착했었다. 저녁에, 만주 교구의 수석 대표인 뒤바이 신부가 나의 석방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장엄강복 미사를 봉헌하라고 알려 왔다. 우리의 거룩하신 구세주를 내 두 손에 모시고 나는 얼마나 행복에 겨워 미사에 참석한 이들을 강복하였던가. 그리고 나의 부모와 모든 친지들과 나의 모든 벗들을 얼마나 생각하였던가.
내 동료 신부들과 이 지역의 유럽인 거주민들 그리고 성영회를 운영하며 어린 고아들을 돌보며 다양한 사목 활동으로 널리 선업을 펼치고 있는 포르티유의 섭리회 수녀들이 잊지 않고 나에게 애정 어린 인사와 축하 인사를 전하였는데 내가 이것을 모두 여기에 적을 수는 없다. 나는 항구에 사흘을 머물고 나서 7월 10일, 뒤바이, 라귀, 라루에 세 신부와 함께 양관으로 가서 리샤 신부를 만났다. 그는 때마침 우장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 소식을 듣고 서둘러 나를 환영하는 잔치를 준비해 놓았다. 과연 마을로 들어서기 2킬로미터 전 지점에 이르자 나를 마중하러 나온 수레와 기마 행렬과 마주쳤는데, 수레에는 손에 깃발을 든 어린이들이 가득 타고 있었고, 말을 탄 기마병들은 어깨에 총을 메고 잇었다. 나를 위해 작은 수레를 준비해 왔기에 내가 그 수레에 오르니 음악에 맞춰 행렬이 다시 시작되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이 진풍경을 보러 달려 나오는 것을 보니, 분명 그 마을에서는 한 번도 이와 같은 축제를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마을 입구에서 나는 주교복으로 갈아입고 뮈텔 신부와 라우빌 신부가 주도하는 행렬을 따라 감사 찬송 테데움이 울려 퍼지는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는 깊이 머리를 숙이고 강복을 기다리는 미사 참여 신자들에게 강복을 주었다.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난다. 나는 조선에 남아 있는 나의 선교사들과 강압적으로 작별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곳에서 또 다른 세 명의 신부들, 주님의 섭리의 시간이 오면 형제들을 도우러 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는 신부들을 만났다. 비록 내가 있는 장소는 바뀌었으나 내 가족은 변함이 없으니, 하느님이 은총으로 조선 선교지에 속한 모든 선교사들은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모두 한 가족이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와 사랑으로 생활할 것이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영예와 영광과 사랑을 세세에 영원히 받으소서.
-조선 교구장 펠릭스 리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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