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 2 - 석양에 빛나는 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장세연 옮김 / 손안의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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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가 전속신청서를 냈어. 자네, 모리에게 뭔가 들었나? 전속 희망처는 오오시마(大島), 니이지마(新島), 미야케지마(三宅島), 하치조지마(八丈島), 오가사와라(小笠原)...."
고다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역시’라는 생각이었다. 몇 달 전이었다면 화가 났겠지만, 동료의 심정을 헤아려 줄 마음의 여유가 지금 자신에게 없다는 것이 먼저 절절히 느껴졌다. 그러나 ‘역시’라는 생각 주변을 별다른 형태도 없는 분한 마음이 느릿느릿 소용돌이쳤다. 원래라면 전속신청서는 주임인 고다나 아즈마에게 제출해야 하는데, 모리가 직접 하야시에게 건넸다는 것도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자신보다 어린 부하가 조직 내에서 자신의 몸을 둘 방향을 한 벌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충격이었다. 저 상승지향 덩어리 같았던 모리가 조직의 현재와 자신의 능력이며 성격을 생각하고, 생활의 검소한 안정을 생각하고, 누구와 의논하는 일도 없이 혼자서 고민한 끝에 미래의 승진이라는 길을 버렸다는 건가. 그런가, 저 모리가 섬으로 간다는 건가? 그럼 나는, 히노데 부두에서 종이테이프나 던지며 배웅하는 것인가?-177-179쪽

집이 있는 38동에 도착하니 1층 우편함에 있어야 할 하루치 조간과 석간이 보이지 않아 가노 유스케가 들렀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께 미토에서 본 옛 처남이 일부러 걸음을 했다면, 짐작 가는 용건은 하나였다. 하치오지 서에 들어온 불시 감사에서 들킨 관련조회 부정이, 또다시 전광석화처럼 그의 귀에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전화로 호통을 치면 끝날 것을 옛 처남은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존재 때문에 기요코와 옛 매제의 관계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이미 사라졌을 촛불을 고다가 없는 사이에 다시 피워 올리기 위해서 걸음을 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용건은 전부 그것의 구실이었다. 그것은 이미, 어느 정도는 쌍둥이 중 다른 한쪽이라는 입장에서 발현하는 특별한 심상이라고 해도 태반은 가노 유스케라는 남자의 감정이 어떠한가의 문제였기에, 단적으로는 여자보다 다루기 ‘번거로운’이라는 데서, 고다 자신의 머리도 정지해 버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중략) 불을 켜니 주방 테이블 위에 신문과 복사용지 한 장이 있었다.
(아래에 계속)-181-189쪽

(위에서 계속)
B4사이즈의 용지는 하치오지 서 형사과의 문서건 명부를 복사한 것이었다. 어제 아침, 고다가 거짓 번호를 매긴 문건 중 다이요 정공의 총무부장에 관한 조회처가 실려 있는 부분의 옆에는 "모처로부터 입수. 할 거면 좀더 능숙하게 해"라는 옛 처남의 갈겨쓴 글이 있었다. ‘모처’는 불시 감사를 담당한 1계의, 경찰청과 이어져 있는 누군가인가? 복사물은 하야시에게 전해진 것과는 다른 경로로, 눈짓 한 번으로 몇 군데의 손을 거친 후 봉투에라도 넣어져, 검찰합동청사의 옛 처남의 책상으로 전해졌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고다는 정관계의 거대한 그물망이 쳐진 권력기구의 한 구석에서, 먼 친척의 사소한 죄를 왈가왈부하는 괴문서가 날아다닌다는 시시함에 감명을 받고, 그곳에 있는 가노 대신 어이없어했을 뿐이었다. 확실히 그가 남긴 말대로 ‘할 거면 좀더 능숙하게’ 해야 했다. 준법정신과 함께 지금까지 살았을 남자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빈정거림도 실망도 힘없이 끊었다가는 이내 진흙 같은 한숨에 녹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래에 계속)-181-189쪽

(위에서 계속)
아니, 아무리 가노 유스케라도 역시 화가 났을 거라고 잠시 생각을 고쳐 보기도 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제는 교정도 할 수 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과, 그 타인이 자신의 감정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거듭 실망을 해도 여전히 끊어내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여동생 기요코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그런 불분명함을 타인인 남자에게 말하려다 못했던 자신의 그런 불분명함을 타인인 남자에게 말하려다 이루지 못한 것, 그것을 유스케는 화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直裁인지 韜晦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소유자와 지금도 만남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라 생각하자, 마지막에는 또 여자보다 ‘번거로운’ 이라는 것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뭔가 실망하고, 단념하고, 어느 날 결단하더니 냉큼 남자 둘을 버리고 간 기요코에 비하면, 남겨진 남자 둘의 미련이나 집착은 눈뜨고 봐줄 수 없다는 얘기일 뿐이다.
(아래에 계속)-181-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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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고다는 차례차례 떠오르는 기요코의 모습이 굉장히 흐릿해졌다는 사실에 새삼 큰 충격을 받으며, 위스키의 힘을 빌려 계속해 생각했다. 자신은 왜 결혼을 한 것인가? 왜 기요코였나? 왜 파탄이 난 건가? 11년 전 봄, 갑자기 수식이라도 하나 풀렸다는 얼굴로, 우리들 결혼해요 하고 기요코가 말을 꺼냈다. 그때 고다는 너와 난 어울리지 않아 하고 대답했는데, 그것은 본심에 충실한 것이었다. 또한, 신중함이 어느 정도 결여된 기요코의 돌진에는 오빠 유스케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밀착된 관계로부터 도망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상대는 꼭 자신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고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튼 스물셋의 남자가 보는 인생의 모습에는 한계가 있었고, 친형제도 없는 고독을 메우는 데 결혼은 가장 가까운 선택지였다. 뭔가가 일그러졌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결국 알지 못한 채, 마지막에는 결혼하면 매일 기요코를 안을 수 있다는 정도의 애매한 희망이 이긴 것이다.
(아래에 계속)-181-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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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형사과에 배속된 지 얼마 안 된 신참 형사와 석사논문과 박사논문 준비로 바쁜 학생의 조합은, 3일에 한 번 얼굴을 마주칠 수 있을까 말까 한 현실이었고, 거의 생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중략) 아니, 실제로는 사소한 충돌은 몇 가지나 있었고, 그 하나하나가 서로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더했던 점만은 세상 사람들과 비슷했다고 고다는 생각을 바꾼다. 어떤 계기로 싸움을 하게 되었을 때, 어두운 주방 의자에 돌처럼 앉아있던 기요코의 등. 혹은 며칠 만인가 돌아왔는데 기요코가 없던 한밤의 집의 오싹한 어두움. 부부가 모두 집을 비우기만 해서 곰팡이가 핀 욕실. 거둬들이지 않고 발코니에서 젖어 있던 세탁물. 아니, 어느 순간 자신은 기요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마음이 끓어오른 그 순간의 구토감이야말로 ‘절정’이었던가. 아니, 절정은 그후 기요코에게 연구자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찾아온 역겨운 안도감 쪽인가. 아니면, 이미 처음부터 무리였다는 술회가 들어갈 여지도 없던, 자신의 냉혹감 쪽인가.
(아래에 계속)-181-189쪽

(위에서 계속)
아니, 냉혹할 뿐이라면 그나마 나았다. 한 여자에 대한 감정이 육체에서 태어나 육체로 끝난 것은 결국 자신이 그것을 바랐다는 얘기라며 고다는 더욱 생각해 보았다. 사실 자신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가장 잔혹한 것을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소극적인 듯이 굴며 자신의 욕정만을 채우고, 그 이상의 것은 거부하며 받아들이지도 베풀지도 않앗다. 그저 자신의 자의식을 지킴으로써 간신히 상식적인 사회인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나라는 남자였다. 그렇다면, 기요코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고, 기요코 도한 빠른 시간에 그렇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어느 순간 스스로 단념하고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181-189쪽

요즘 무료하게 <신곡>을 다시 읽으며, 생각한 것이 있어. 단테를 이끄는 것은 베르길리우스이지만, 자네가 어두운 숲에ㅔ서 눈을 떳을 때 만난 것은 사노 미호코였어. 단테가 "당신이 사람이든 그림자이든, 나를 도와주십시오"하고 베르길리우스를 부른 것처럼, 자네는 정신없이 그녀에게 말을 건 거야. 그리고 그 이후부터 그동안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방황해 왔던 자네가 지금, 淨化에 대한 의지의 출발로써 통한과 공포의 단계가지 온 것이라면, 거기까지 인도해 준 것은 사노 미호코이자 노다 다쓰오였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그건 그렇고, 나도 인생의 중반에, 이미 오래 전부터 어두운 숲을 헤매고 있지만, 아직 불러 세울 만한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네.
10월 15일. 가노 유스케(加納祐介).-360-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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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3-01-28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리야.... ㅠㅠ. 난 모리도 되게 좋았는데, 섬으로 가다니 쇼크. 그래, 수사1과 수라장에서 고생하느니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출세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자연 속에서 맘편히 살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