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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 희랍어 원전 번역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단국대학교출판부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일리아스에는 모든 것이 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희랍 군의 최후 방어선이 뚫리고 트로이아 군에 의해 배가 불태워지기 시작하는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을 보라. 따뜻한 가족애?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이별 장면은 어떤가? 투구가 무서워 어린 아들이 울음을 터뜨리자 투구를 벗어두고 아이를 안아 어르는 트로이아 최고의 용사. 냉정한 현대인들도 눈시울이 붉어질 만하지 않은가? 음모와 암투? 제우스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아카이아 인들을 도와주려고 동분서주하는 헤라의 행보를 따라가 보라. 스캔들? 남편을 버리고 애인과 도망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의 화신 헬레네가 일리오스의 성안을 활보한다. 개그? 성스럽고 아름답고 우아한 여신들이 인간들의 전장까지 우르르 밀고 내려와 서로에서 '개파리야!'라고 욕설을 퍼붓는 장면은 어떤가? (개는 비겁함 파리는 무모함의 상징이란다. 외워서 경음화된 욕설 대신에 활용해보자. ^^) 로맨스? 플라톤도 칭찬했던 시대의 로맨스가 여기 있다! 희랍 최고의 용사답게 최고로 오만하던 우리의 미청년 아킬레우스가 연인의 사후에 보이는 격렬한 슬픔과 분노는 보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나니.
이제까지 세 종류 이상의 번역판 일리아스를 읽어보았지만, 번역의 충실함에 있어서나 감동의 깊이에 있어서나 이 책을 따라올 만한 번역은 없었다. 산문체 번역으로는 노래로 불리어진 원작의 느낌을 알기 어렵다는 점도 있지만, 우선 분량에 있어서도 차이가 확연하다. 비상시 적을 내리치는 무기로 사용해도 충분할 듯한 이 원전 번역이라면, 구석구석 숨어 있는 범상치 않은 재미들을 자칫 놓쳐버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희랍신화에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에게 특히 추천한다. 불핀치의 '줄거리만 간단한' 신화로는 채워지지 않던 갈증을 확실하게 풀어준다. 단, 너무 어린 독자에게 추천하기에는 다소 망설여지는데, 알고 보면 뜨거우므로 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