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통사 1 (제4판) - 원시문학 ~ 중세 전기문학
조동일 지음 / 지식산업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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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언어예술이며, 예술은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이다. 문학은 형상이라는 점에서는 일상에서 쓰는 실용적인 말과 구별되고, 인식이라는 점에서는 재미있기만 한 말장난과도 다르다. 무엇을 만들어서 내보이면 형상이다. 형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 또는 현실에서 일단 떠나는 즐거움을 누리게 한다. 모르고 있던 진실을 알아차리는 행위가 인식이다. 인식은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 또는 현실과 만나 무엇을 발견하는 보람을 찾게 한다. 형상이면서 인식인 문학은 현실을 떠나면서 현실로 되돌아오고, 떠나는 즐거움과 발견하는 보람을 함께 경험하게 한다.-21쪽

민족은 혈통, 언어, 생활영역 등의 객관적 조건에 의해 형성되어 불변의 실체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식이라는 내면적인 조건이 더욱 긴요한 작용을 해서 객관적 조건들의 가치를 평가하고, 기능을 통합하고 확대해야 민족이 민족다울 수 있다. 그 점을 살펴 시대에 따라서 민족의식이 달라지고 민족의 성격 또한 바뀐 양상을 이해해야 한다. (중략)
민족은 단일체여야 한다는 것이 근대의 이념이다. 그 때문에 이질적인 요소들이 무시되거나 평가절하되었다. 이제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고, 민족은 복합체임을 인식해야 한다.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살아온 내력을 되돌아보고, 귀화인의 기여를 인정해야 한다. 제주도는 물론 본토의 여러 지역에서도 서로 다르게 이룩해온 문화유산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문학사 이해의 관점도 달라져야 한다.
근대는 역사의 종점이 아니다. 근대를 넘어선 다음 시대가 온다. 그 때는 민족의 성격이 어떻게 되고, 민족끼리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이나 미리 예견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 문학사가 적극 기여해야 한다. (아래에 계속)-60-63쪽

(위에서 계속) 민족의 갈등을 넘어서 문명권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인류가 화합하는 것이 근대를 넘어선 다음 시대에 이룩해야 할 과제이다.-60-63쪽

고대의 이념은 중세의 보편주의와는 많이 다른 자기중심주의였다. 후대의 개념을 들어 말한다면 자기중심주의를 주체성이라 할 수 있으나, 피지배층에 대한 멸시가 대외적인 적대감과 표리를 이루고 있는 그 내부구조를 알면 평가가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중세보편주의를 배격하고 근대민족주의를 지향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고대자기중심주의를 주체성의 원천으로 이해해 크게 찬양한 것은 전환의 논리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역사의 실상에 대한 재인식은 아니다.-68쪽

후밯ㄹ주자인 고구려, 백제, 신라는 불린한 조건에서 어렵게 성장하다가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해 삼국시대를 열었다. 한문을 받아들여 사용하고자 하는 열의가 서로 달라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고대의 선진이었던 부여, 마한, 가야는 한문을 시험하다가 말아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기까지만 나아갔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는 뒤떨어진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세화를 서둘러 한문 사용을 국력 향상의 방법으로 삼아야 했다고 생각된다. 그런 것이 선진이 후진이 되고 후진이 선진이 되는 이치이다.-98쪽

자아와 세계의 신화적 동질성이 흔들리자, 세계의 전설적 횡포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전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을 세계의 우위에 입각해서 다루어 자아의 패배를 귀결로 삼으며, 합리성을 추구하다가 감당할 수 없이 커다란 불합리에 부딪히고 마는 이야기이다. 탁월한 능력을 가지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시대는 갔다. 영웅의 능력을 가져도 원통하게 죽고 마는 사태가 벌어졌다.-102-103쪽

(광개토왕릉비는) 위엄 있는 무력을 사해에 떨친 것을 그 자체로 자랑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베푸는 은덕을 널리 폈다고 했다. 나라를 가멸케 하고, 백성이 잘살도록 한 것이 이룬 공적이라고 했다. 온갖 곡식이 풍성하게 익은 평화로운 광경을 들어 가장 큰 찬사로 삼았다.
살벌한 정복을 일삼으며 승리에 도취하는 고대영웅이 아닌 중세제왕의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평화, 백성, 농업을 새로운 가치로 제시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중세의 이념이다. 중세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방해자들과 싸웠다. 광개토왕이 정복자이기만 하고, 고대자기중심주의의 화신인 듯이 칭송해마지 않는 근대인은 사실 판단을 잘못하고 진정한 가치를 훼손시킨다.-120-121쪽

발해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우리 민족의 나라여서 우리 역사에 포함된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은 지배층이었을 따름이고, 말갈인이 주민 다수를 이루었다. 거란족 요나라의 침공을 받고 멸망하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해 발해의 강토와 주민은 중국의 판도 안에 들어갔다. 고려로 온 사람들도 있었으나 많지 않았다. 오랫동안 발해를 잊고 있다가 최근에 되찾으려고 한다.
주민 구성과 계승 관계에서 발해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라고 하는 주장이 부정될 수는 없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뒤에 발해의 옛 터전을 줄곧 수준이 낮은 민족들이 지배해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이용하지 못했지만, 생활의 역사는 그쪽으로 이어졌다고 인정해야 한다. 발해는 우리가 중국보다 더 많은 지분을 가진 공유영역이라고 하는 것이 최상의 결론이다.
중세국가는 근대국가와 주민이나 강역이 일치하지 않아, 둘 이상의 근대국가 공유영역이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 예사이다. 우리 역사는 중세사와 근대사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이상스럽게 여겨지는 발해의 경우가 오히려 정상이다.-246-247쪽

발해문학의 작품이 국내에 남은 것은 없던 것 같더니, 1949년에 비문이 하나 발견되었다. <정혜공주묘비>라는 것이다. (중략) 감각과 표현을 최대한 세련되게 갖춘 귀족문학의 기풍을 아주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1980년에 묘비가 하나 더 발견되었다. 정혜공주의 동생, 문왕의 넷째 딸 무덤에 세운 <정효공주묘비>이다. 두 비에 새긴 글은 고유명사나 숫자 따위만 다르고, 다른 대목은 거의 같다. 고정된 격식을 마련해두고 필요한 대목만 고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정혜공주묘비>에서 판독할 수 없었던 글자를 <정효공주묘비>를 보고 알아낼 수 있다.
그런 사실은 발해의 한문학에 대한 지나친 평가를 시정하게 한다. 한 번 보고 마음이 움직인 글을 다른 데서 다시 만나면 처음의 감동마저 의심스럽게 된다. 발해문학에는 아름답게 표현하는 격식을 너무 존중하다가 창의력을 잃은 폐단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문화 발전이 극한에 이르러 쇠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증거이다. 같은 시기 신라에서는 그런 폐단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비판세력이 있었는데 발해는 어떠했는지 의문이다.-251-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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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02-25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민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문학사의 역할에 대한 부분은 언젠가 써먹어야겠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아직은 있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그게 어딘가?
발해묘비에 대한 일화는 저자의 인간적인 면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부분. 그냥 재미있어서 옮겨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