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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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처음 쓰여졌을 당시, 파시즘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회 집단'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이상'을 조직하여 대표하는 '정당'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판단에 따르면, 파시스트당이 폭력을 ㅇ용하거나 '정치적 책략'을 통하여 파시즘을 도입한 것이 된다.
그러나 나는 많은 계층, 인종, 민족의 사람들과 다양한 종교의 추종자들을 치료한 의사로서의 경험을 통해 '파시즘'이 단지 특정 인종이나 국가 또는 특정 정당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국제적인 평범한 인간의 성격구조가 조직화되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성격적 의미에서 보면 파시즘은 권위적인 기계문명과 이 문명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인생관의 억압을 받은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인 감정적 태도이다.
우리 시대 인간들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격이 파시스트당을 만든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잘못된 정치적 생각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파시즘은 독일인이나 일본인의 민족적 특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최초의 오류들로부터 다른 모든 잘못된 해석들이 나오게 된다.
(아래에 계속)-12-13쪽

(위에서 계속)
파시즘은 자유를 성취하려는 진정한 노력에 해를 끼치는 작은 반동적 당파의 독재로 인식되었고, 여전히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 이런 오류에 끈질기게 집착하는 것은 실제 사태를 인식하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파시즘은 사실 국제적인 현상이며, 인간 사회의 모든 신체와 국가에 퍼져 있는 현상이다. 이 결론은 지난 15년간의 국제적 현상들과 일치한다.
오히려 나는 자신의 성격구조 속에 파시스트적 감정과 생각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성격분석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적 운동으로서 파시즘은 그것이 인민대중에 의해 탄생되고 대변되었기 때문에 다른 반동적 정당과는 다르다.-12-13쪽

얼마나 많은 중산계층들이 좌파 정당에 투표를 했든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우파 정당에 투표를 했든지 간에 우리가 산출한 '이데올로기적 분포'가 1932년의 선거수치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은 눈길을 끈다. 즉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1천2백만에서 1천3백만표를 획득한 반면 나치당과 독일국가인민당은 약 1천9백만에서 2천만표를 획득했다. 이는 시렞 정치가 경제적 분포가 안라 이데올로기적 분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44-45쪽

대중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군국주의의 효과는 본질적으로 리비도적인 매커니즘에 의존한다. 제복의 성적 효과, 성적 흥분을 유발시키는 리드미컬한 군대식 걸음걸이의 효과, 군국주의적 의식의 전시효과적 특성 등은 학식 있는 정치가보다는 상점의 여성 종업원이나 평범한 회사원에 의해 더 실제적으로 이해되었다. 정치적 반동세력은 이런 성적 관점을 오히려 의식적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남자들을 위하여 공작 깃털 같은 산뜻한 제복을 디자인했을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여인들로 하여금 병사를 모으는 일을 담당하게 했다. (중략)
자유를 향한 의지를 억압하는 성적 도덕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적 이해에 순응하는 힘 역시 그 에너지를 억압된 성욕에서 얻는다. 이제 우리는 '경제적 토대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반작용'이라는 과정의 핵심부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성의 억압은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인간을 자신의 구조적인 물질적 이해관계에 반(反)하여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변화시킨다.-68-69쪽

히틀러의 성격구조와 생애는 민족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사상의 소시민적 기원이 자신들의 성격구조와 대체로 일치했기에 대중들이 그 사상을 열렬히 받아들였다는 것은 흥미롭다. 모든 반동적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히틀러 역시 소시민 계층에 그 지지 기반을 두고 있었다. 민족사회주의는 소시민계층의 대중심리를 특징짓는 총체적 모순을 보여주고 있었다.-75쪽

경제적 상황과 구조적 상황 사이의 이러한 상호작용에서 권위적 가족은 모든 종류의 반동적 사유를 가장 우선적이고 근본적으로 재생산하는 장소이다. 가족은 반동적 이데올로기와 반동적 구조를 생산하는 공장인 것이다. 따라서 '가족의 보호', 즉 권위적이고 자녀가 많은 가족을 보호하는 것이 모든 반동적 문화정책의 첫번째 계울이다. '국가, 문화, 문명의 보호'라는 구절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105쪽

대중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민족주의적인 지도자는 민족의 화신을 의미한다. 지도자가 대중들의 민족감정에 조응하여 실제로 민족의 화신이 될 때만 그에 대한 개인적 유대가 생성될 수 있다. 또한 그 지도자가 대중들 개개인에게 정서적인 가족적 유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이해했을 때만, 그는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상을 획득할 수 있다. 그 지도자는 엄격하지만 보호를 제공하는, (아이들이 보기에) 품위 있는 예전의 아버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정서적 태도를 끌어낸다. 매우 모순적인 나치당 강령의 이행불가능성에 대하여 열성적인 민족사회주의자와 토론하다보면, 히틀러는 모든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보호를 바라는 아이의 태도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사회적 현실에서, 독재자에게 '모든 것을 할' 권력을 주는 것은 바로 보호를 받으려는 국민 대중들의 이러한 태도와 지도자에 대한 신뢰감이다. (아래에 계속)-107-109쪽

(위에서 계속)국민 대중들의 이러한 태도는 사회적 자주관리, 즉 합리적인 독립성과 협동을 방해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러한 대중들의 태도에 그 토대를 둘 수 없으며, 두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대중들 개개인이 '지도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대중들 개개인이 무력해지도록 양육되면 지도자와의 동일시는 더 뚜렷이 나타나며, 보호에 대한 아이와도 같은 욕구는 지도자와 하나가 된다는 감정의 형태로 더욱 위장된다. 이런 동일시 경향이 민족적 나르시시즘, 즉 각 개인들이 '민족의 위대함'에서 빌려온 자존심의 심리적 토대이다. 반동적인 소시민계층은 지도자와 권위주의적 국가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동일시에 기반하여 그는 자신이 '민족성'과 '민족'의 방어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느낌은 그가 '대중들'을 경멸하고 대중들과 개인적으로 맞서는 것을 제지하지 않는데, 이 역시 지도자와의 동일시에 기반한 것이다. (아래에 계속)-107-109쪽

(위에서 계속)물질적, 성적으로 비참한 그의 상황은 자신이 지배인종에 속해 있으며 훌륭한 지도자를 가지고 있다는 고양된 사상으로 완전히 가려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무의미하고 맹목적인 충성 속으로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빠져버렸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자신의 전문성을 의식하고 있는 노동자, 즉 자신의 순종적인 성격구조가 작동하지 못하게 막아낸 노동자는 자신을 지도자와 동일시하는 대신에 자신의 일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자신을 민족적 고향과 동일시하는 대신에 전세계의 노동하는 대중들과 동일시한다. 지도자와의 동일시라는 토대가 아니라 사회적인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의식을 토대로 해서 그는 자신이 지도자라고 느끼는 것이다. -107-109쪽

만약 소시민계층이 산업노동자와 상류계층 중간의 경제적 지위를 상실하듯이 성도덕적인 태도마저 상실하게 된다면, 이것은 독재자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소시민계층 속에도 '커다란 뱀'의 속성이 잠복해 있어서 속박을 분쇄하고 반동적 경향을 뛰어넘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독재 권력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도덕성'과 '결혼과 가족의 결속 강화'를 위한 선전을 보완하는 것이다. 소시민계층의 비참한 사회적 상황과 반동적 이데올로기를 연결시키는 다리는 바로 권위주의적 가족이다.-151-152쪽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지 못한 채 당연하고 경건하게 굴종을 견뎌내는 인도나 중국의 쿨리는 견디기 힘든 만물의 질서를 알고 있는, 즉 노예제도에 의식적으로 반발하는 쿨리보다 내적으로 덜 고통을 겪는다. 인도적인 이유에서 쿨리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진실을 모르게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신비주의자, 쿨리의 파시스트적인 고용주 그리고 중국의 사회위생 교수 몇 사람만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 이러한 '인도주의'는 비인간성을 영속화하는 동시에 은폐하는 것이다.-275쪽

노동하는 거대한 대중에 속하는 사람이 비정치적이 되면 될수록 정치적 반동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기는 더욱 쉬워진다. 비정치적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수동적인 심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단히 능동적인 태도로서 사회적 책임의식에 대한 방어를 말하는 것이다. (중략) 만약 이런 사람이 깊은 믿음과 신비주의적 수단을 가진, 즉 성적이고 리비도적인 수단을 가지고 일하는 파시스트를 만나게 되면, 그는 파시스트에게 완전히 빠져들게 된다. 그것은 파시스트의 계획이 자유주의의 계획보다 더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지도자와 지도자 이데올로기에 헌신함으로써 순간적으로나마 영속적인 내적 긴장에서의 해방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293-295쪽

수천 년 동안 생동하는 삶이 억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남의 뜻대로 움직이고, 비판능력이 없고, 생물학적으로 병들고, 노예상태에 빠져버린 대중들을 위에서 '이끌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모든 억압을 즉시 감지하고 적시에, 최종적으로, 돌이킬 수 없도록 그 억압을 떨쳐버리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 운동의 과업이다.-316쪽

대중들에게 자유의 공간은 부여될지 몰라도, 실제적인 사회적 과제는 여전히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국민 대중들이 오늘날의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적인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나중의) 사회적 직무 역시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은 언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국가-정치 사상은 원래 대중에 반하는 위계적인 국가대의제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 우리가 아무리 '민주주의'에 관해 외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와 로마 노예제 국가의 사유체계에 고착되어 있다. -357쪽

자연스러운 사랑, 삶에 필수적인 노동, 그리고 자연과학은 합리적인 삶 기능이다. 이것들은 그 속성상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모든 형태의 비합리주의에 가장 큰 적이 된다. 진정한 정신의학의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삶을 오염시키고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정치적 비합리주의는 사회적 삶을 규제하고 결정하는 데에 있어 자연스러운 삶의 기능을 인식하지 못하고 배제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삶의 도착인 것이다.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적-권위적 통치는 인민대중들의 습성이 되어버린 비합리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모든 독재적 정치의 관점은 불구대천의 원수인 사랑, 노동, 그리고 지식의 기능을 그것을 누가 대표하든 상관없이 증오하고 두려워한다. 이것들은 공존할 수 없다. 독재는 자연스러운 삶의 기능을 단지 억압하거나 자신의 지배목적을 위하여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독재는 결코 자연스러운 삶의 기능을 촉진, 보호하거나 스스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독재는 몰락하게 된다.-430쪽

파시스트 독재자는 인민대중들이 생물학적으로 열등하고 권위를 갈망하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노예근성을 타고났다고 주장한다. 다라서 전체주의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정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 세상을 고통 속으로 빠뜨리고 있는 모든 독재자들이 억압받는 인민대중 출신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인민대중들의 이런 질병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자연적인 사건과 발전에 대한 통찰력, 긔고 진실과 연구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사실들을 변화시키려는 생각 역시 결코 떠오르지 않는다.
반면 형식적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인민대중들의 자유로워질 능력을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보다 환상적인 것으로 가정했으며, 따라서 권력을 장악한 동안 인민대중들의 내면에서 자유로워질 능력과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확립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해 버렸다. 그들은 재앙에 빠져버렸고 결코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446쪽

정치가들의 영향을 받는 인민대주들은 각각의 권력자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경향이 있다. 즉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군수산업가에게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죄가 있다고 알려진 정신질환에 걸린 장군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이것은 책임 전가이다. 전쟁에 대한 책임은 바로 전쟁을 저지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손에 쥐고 있던 인민대중들에게 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는 무관심으로 부분적으로는 수동성으로 또 부분적으로는 능동적으로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든 대재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인민대중들의 이러한 잘못을 강조하는 것은 또한 그들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것은 그들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인민대중들에 대한 동정은 그들을 초라하고 무기력한 어린아이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진정한 자유투쟁가가 지니고 있는 태도이며 후자는 권력을 갈구하는 정치가들이 지니는 태도이다.-472쪽

인간이라는 동물이 아무리 가학적이고 신비적이고 수다스럽고 양심이 없고 무절제하고 허위적이고 피상적이고 쓸모없는 잡담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노동기능에서 합리적이 되 수 있는 성향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다. 비합리주의가 이데올로기적 과정과 신비주의를 가지고 자신을 발산하고 전파하듯이 인간의 합리성은 노동과정을 통해서 활동하고 전파된다.-5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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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12-04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자가 말하는 '성의 해방'을 너무 좁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자신의 욕구를 솔직히 인정하는 태도, 인간성의 긍정... 그런 것들이 결국 책임 있는 자유와 진정한 해방을 불러오게 되고, 타인의 노예가 되는 운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닐까? 달리 말하면 자신과 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기쁨이야말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파시스트로의 추락을 막는 안전장치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의견 중에 노동을 통한 인간의 해방이라든지 민중의 각성을 유도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대안인지 의심스럽다. 아이들의 성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도 지나친 이상화가 아닌가 싶고. 십대 아이들과 드잡이질하며 보낸 요 몇년, 과연 인간이 다른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