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의병은 대부분 군사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실제 전투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의병 항쟁 당시 60세 환갑이었던 고경명은 적병과 무모한 전면전을 펴다가 패배해 목숨을 잃고, '군사의 행진에 기율이 없고 이르는 곳에 진영의 설비가 없어 마침내 패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개별 전투의 승리 여부에 상관없이 이들 의병의 활동은 왜군들에게 커다란 부담을 안겨 주었으며 조선군 전체의 사기 진작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 때문에 지봉 이수광은 왜란에서 국가를 지켜낸 것은 오로지 의병들이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의병의 공로를 부각시켰다. "명령이 통하지 않아서 거의 나라가 없어진 지 달이 넘었을 때에 영남의 곽재우, 김면, 호남의 김천일, 고경명, 호서의 조헌 등이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키고 원근에 격문을 전하니 이로부터 백성들이 비로소 나라를 받들려는 마음이 있게 되었고 고을의 사자들은 곳곳에서 군사를 모집하였다. 의병장으로 칭호하는 자가 무려 백 명이나 되었는데 왜군을 초멸하고 국가를 회복한 것은 오로지 의병의 힘이었다. - 지봉유설 "-51쪽
선조는 공신들의 공을 평가하는 자리에서도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나라 장사(將士)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당의 머리를 얻었을 뿐 제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으며 그나마 이순신과 권율 정도가 조금 나은 편이라고 지적하였다. (중략) 그래도 선조에게서 약간의 공적을 평가받았으며 전장에서 명예롭게 전사한 이순신은 오히려 행복한 편에 속한다. 의병장들의 실제 운명은 더욱 비참하였다. 의병들의 공이 컸다는 것은 관군의 역할이 미미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것은 정권 담당자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 백성들의 큰 신망을 받고 있던 이들이 혹시 어수선한 시국과 전란을 틈타 모반을 꾸미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실제로 전란 중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모반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들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이름난 의병장들의 이름을 파는 경우가 있어 정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여기에 의병장들의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의 입김까지 작용함으로써 적지 않은 전쟁 영웅들이 희생을 당하였다.-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