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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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세계사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길 위에서' 사이에 있던 간극을 메워준 책. 1차대전 후 벨 에포크가 종말을 고한 프랑스와 경제 공황으로 신분의 격차가 무너진 미국을 오가며, 자본 계급 출신 미국인들의 다양한 인생 행로를 보여준다. 노년에 이른 작가의 날카로운 인간 관찰과 세련된 유머 감각이 빛을 발한다. 최근에 서머싯 몸을 시리즈로 읽고 있는데, 이 책에 나온 엘리엇 템플턴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젊은 시절 유럽에 처음 왔을 때는 소개장을 들고 명사들을 찾아다니며 발판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후 그러한 발판은 프랑스와 영국의 가난한 귀족 집안들과 사업 관계를 맺으면서 더욱 튼튼해져 갔다. 그가 소개장을 들고 찾아간 상류층 미국계 부인들은 그의 출신을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 버지니아 주의 오래된 가문 출신인 데다 어머니 쪽 조상이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잘생긴 외모에 성격도 쾌활하며, 춤도 잘 추고 사격 솜씨도 훌륭하고 테니스 실력도 뛰어났다. (중략) 싹싹하고 사교적인 면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파티에 못 온다는 손님이 생겨서 파티 주최자가 마지막 순간에 그를 초대하더라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따분하기 그지없는 늙은 부인 옆에 앉혀 놓아도 붙임성 있게 굴며 즐거움을 선사했다. - P16

물론 그는 속물이었다. 대단한 속물, 부끄러움을 모르는 속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파티에 초대받기 위해서라면 또는 성질은 고약하나 명성이 자자한 귀부인과 사귀기 위해서라면 공공연한 모욕도 참아냈고, 딱지를 맞아도 개의치 않았으며, 어떤 무례함도 감수했다. (중략) 마치 진귀한 야생란을 찾기 위해서 홍수와 지진과 열병과 적대적인 원주민의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는 식물학자 같았다. 1914년에 일어난 전쟁은 그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주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야전 의무대에 들어가 처음에는 플랑드르에서, 나중에는 아르곤에서 복무했다. 1년 후에는 옷에 붉은색 훈장을 달고 돌아와 파리의 적십자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했다. (중략) 그는 파리에 있는 회원제 클럽 가운데 최고급 클럽 두 군데의 회원이었다. 그는 프랑스 상류층 부인들 사이에서 ‘스 셰르 엘리엇(경애하는 엘리엇)’으로 통했다. 마침내 목적을 이룬 것이다. - P17

"미국 사람들은 너무 경솔하게 소개장을 써요. 소개장을 들고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 친구들까지 귀찮게 만들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는 그들에게 커다란 장미 바구니나 초콜릿 상자를 보내는 것으로 보상을 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것으로 부족한 경우도 있었다. 바로 그럴 때 나한테 파티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럴 때 보면 나한테 투덜댔던 사실은 까맣게 잊은 사람 같았다. 그는 내가 우쭐해질 만한 듣기 좋은 말을 초대장에 썼다.
"다들 당신을 무척 뵙고 싶어 한답니다. 모모 부인은 굉장히 교양이 높으신 분으로, 당신 작품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으셨다는군요."
모모 부인을 만나 보면 그녀는 내 작품 ‘페린 씨와 트레일 씨’를 매우 감명 깊게 읽었다고 말했고 내 희곡 ‘연체동물’에 찬사를 보냈다. 앞의 것은 휴 월폴의 작품이고 뒤의 것은 허버트 헨리 데이비스의 작품이다. - P20

신부는 지혜로움과 인자함이 담긴 태도로 종교적 신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관대하고 아량이 넓으며 현대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또 가톨릭교회가 마치 교양 있고 점잖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입해야 하는 상류사회 클럽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엘리엇은 가톨릭에 귀의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또 성당의 자선 활동에 아낌없이 기부하면서, 그의 앞에는 이전까지 굳게 닫혀 있던 많은 문들이 열렸다. 그가 집안의 신앙을 버리게 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일단 개종한 다음에는 독실한 신앙심을 보였다. 그는 상류층 인사들이 다니는 교회 미사에 일요일마다 참석했고, 정기적으로 신부에게 고해했으며, 정기적으로 로마도 방문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는 교황의 수행인에 임명됨으로써 그러한 열성에 대해 보상받았다. - P24

"나는 별로 영향력이 없습니다. 그 애는 어렸을 적부터 늘 자기 마음대로였어요." (중략)
벌써 술을 상당히 마신 넬슨 박사는 약간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붉은 얼굴이 더 붉어져 있었다. "저는 대단히 바쁘게 지냈습니다. 제게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그 애가 마땅히 갈 곳도 없고, 또 애 아버지가 제 친구였기 때문에 맡은 겁니다. 다루기 힘든 아이였어요."
그러자 브래들리 부인이 톡 쏘듯이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마음씨는 아주 좋은 아이예요."
"말다툼을 하지는 않지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아이를 부인이라면 어떻게 다루시겠습니까? 무섭게 화를 내면,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해서 제 속을 뒤집어 놓는단 말입니다. 만약 내 자식이었으면 아마 두들겨 패 줬을 겁니다. 하지만 하늘 아래 혈육이라곤 없는 어린애한테 어떻게 손찌검을 하겠습니까. 잘 보살펴 줄 거라고 친구가 믿고 맡긴 아들인데 말입니다." - P49

브래들리 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성적 방종을 가능하게 해 주는 갖가지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결혼을 위한 길에는 장애물뿐인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오빠는 퍽 마음에 들 거예요."
"그럼 물론이지. 결혼은 가정의 무사함과 나라의 안정이 달린 중요한 문제야. 하지만 결혼이라는 것도, 혼외 관계가 용인될 뿐만 아니라 정당하게 인정되어야만 그 권위가 유지될수 있는 거야. 루이자, 매춘이라는 게 말이다..."
"그만해요. 지저분한 간통의 사회적, 도덕적 가치에 대한 오빠의 견해 같은 거 듣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그 다음에 엘리엇이 이사벨과 래리가 계속 만나는 것을 중단시킬 방법을 하나 제안했다. - P137

브래들리 부인은 나름대로 강한 소신과 상식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모름지기 관습을 따라야 하고 남들이 모두 하는 것을 혼자만 하지 않으면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또한 그녀의 소신에 따르면, 남자는 마땅히 일을 해야 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아내와 가족들이 그의 신분에 맞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또 자식들이 성년이 되어 웬만큼 안정적인 생활을 꾸릴 수 있을 만큼 좋은 교육을 시키고, 죽을 때는 아내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유산을 남겨 주는 것이 남자의 책무였다. - P145

지중해 연안에는 유럽 각지에서 온 왕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온화한 기후에 이끌려 온 사람도 있고, 망명해 온 사람도 있고, 어떤 불명예스러운 과거나 부적절한 결혼 때문에 외국에서 사는 것이 더 편해서 와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 지역에는 로마노프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스페인 부르봉가의 자손들, 시칠리아의 귀족 두 명과 파르마 귀족이 살고 있었다. 또 윈저 왕가 사람들, 브라간사 왕가의 공작들, 스웨덴이나 그리스의 왕족도 있었다. 엘리엇은 그들을 자주 초대했다. (중략) 내가 엘리엇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감탄한 점은, 그가 신분 높은 인사들을 대할 때 우아함과 예의를 한껏 갖추면서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가르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독립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P207

"교황께서 저를 위해 우리 가문의 옛 칭호를 부활시켜 주셨답니다. 미처 말씀드릴 기회가 없었군요."
"당신의 뭘요?"
나는 놀란 나머지 미처 정중하게 물어보질 못했다. 엘리엇은 기분이 약간 상했는지 눈썹을 추켜세웠다.
"모르셨습니까? 저는 외가 쪽으로 라우리아 백작의 후손입니다. 라우리아 백작은 스페인 펠리페 2세를 수행하여 영국에 가서 메리 1세의 시녀와 결혼했지요."
"그 피의 메리 여왕 말인가요?"
"그건 이교도들이 부르는 말이지요."
엘리엇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곧 다시 말을 이었다. - P216

나는 그에게 성 마틴의 훌륭한 행동과 그가 꼭 알맞은 때에 팔아치워서 번 돈을 마치 주식 중개인한테 수수료를 주듯 하느님께 바친 것 사이에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어쨌거나 나처럼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은 상징이란 것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 엘리엇은 계속했다.
"그 성당 사진을 교황께 보여 드렸더니, 자상하게도 교황께서는 한눈에 봐도 제 안목이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겠다고 하시면서, 지금처럼 타락한 시대에 저처럼 독실한 신앙심과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겸비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고 하시더군요. 저로서는 그야말로 평생 잊지 못할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저한테 귀족 작위를 내려 주시겠다고 하시기에 얼마나 놀랐던지요!" - P218

그리고 경제공황에 대응하는 미국인들의 태도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눈앞에 닥친 불행에 좀 더 침착하게 행동할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본래 남의 불행을 의연하게 보아 넘기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는 법이다. 나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부자가 되어 있는 엘리엇이 냉정하고 호되게 미국인들을 비판할 자격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P219

나는 여자의 직감을 믿는 편이 아니다. 여자의 직감은 그 여자가 믿고 싶어 하는 것과 너무도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이사벨과 나눈 오랜 대화의 결말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문득 수잔 루비에가 떠올랐다. 며칠 동안 만나지 못했다. 지금 무얼 하고 잇을까? 특별히 할 일이 없다면 나와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택시를 잡아서 그녀의 아파트로 가자고 했다. - P282

그레이가 말했다.
"소피, 정말 안됐어요."
이사벨이 차갑게 대꾸했다.
"난 아닌데. 물론 충격적인 일이죠. 저만큼 소피를 가엾게 여겼던 사람도 없을 거예요. 우린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였잖아요.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겪고도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구요. 소피가 그렇게 망가진 건 그런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천성적으로 불안정한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요. 밥에 대한 사랑도 좀 지나쳤잖아요. 만약 품성이 올바른 사람이었다면 제대로 된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는 얘기죠." - P327

"상류사회는 죽었습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미국이 유럽을 대신해서 서민들이 동경할 만한 귀족 사회를 만들어 낼 수도 잇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공황 때문에 이제는 그럴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가엾은 내 조국은 손도 못 쓰고 중산층 사회로 전락하고 있지요. 글쎄 지난번에 미국에 갔을 때는 택시 기사가 나한테 형제라도 되는 것처럼 말을 걸더군요. 믿어지십니까?"
리비에라 역시 1929년에 일어난 공황의 여파에서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지만, 엘리엇은 계속해서 파티를 열고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다. 게다가 예전에는 로트실트 가가 아닌 이상 유대인의 집에는 절대 드나들지 않았지만, 이제는 가장 성대한 파티들이 선민들, 즉 유대인들에 의해 열리고 있었고, 엘리엇은 파티가 열리면 참석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었다. (중략) 유배당한 왕족들도 그들의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게다가 영화배우를 만나 보는 것을 최대의 꿈으로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 P335

조제프는 40년 동안 엘리엇의 곁에서 그를 모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계층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슬픈 척 행동하는 그에게서 주인의 불행에 대해 내심 흡족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스 포브르 무슈(가엾은 주인 어른)."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좀 유별난 구석은 있지만 사실은 아주 좋은 분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실 날이 머지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는 엘리엇이 금방 죽기라도 할 것처럼 말했다.
"그동안 그분 덕분에 잘 먹고살았을 텐데, 조제프?"
내가 다소 험악하게 말했다.
"그렇게 보이겠지요."
그가 슬픈 목소리로 대꾸했다. - P373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엾은 엘리엇에게 그가 그토록 열망하는 초대장을 안겨주고 싶었다. 식사가 끝나자 에드나는 친구들을 정원으로 데리고 나갔다.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예전에 그 집에 며칠 동안 묵은 적이 있으므로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분명히 아직 초대장이 몇 장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비서실에 말이다. 나는 얼른 비서실로 갔다. 초대장 한 장을 슬쩍 빼내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엘리엇의 이름을 써서 보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건강 때문에 참석할 수 없을 테지만 초대장을 받는 것만으로도 무척 기뻐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문을 열어 보고 나는 움찔 놀랐다. 아직 점심 식사 중일 거라고 생각했던 에드나의 비서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스 부인이라 불리는 이 중년의 스코틀랜드 여자는 옅은 갈색 머리의 미혼 여성으로, 주근깨 난 얼굴에는 코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순결만큼은 지킬 것 같은, 그런 여자였다. - P382

"공작 부인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으셨으면 좀 더 현명하게 행동하셨겠죠. 부인이 운전수하고 자고 다닌다고 떠벌리진 않으셨을 거라고요. 그 운전수한텐 아내도 있고 아이들도 셋이나 되는데."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키스 부인은 코안경 너머로 나를 보았다.
"선생님, 저는 21년째 비서 일을 하면서, 제가 모시는 분들이 순결하고 정숙하다고 믿는 것을 규칙으로 삼아 왔어요. 사실, 예전에 모시던 분 중에 남편이 사자 사냥을 하려 6개월 동안 아프리카에 가 있는 사이에, 임신 3개월째라는 게 밝혀져서 믿음이 크게 흔들린 적도 있긴 했죠. 하지만 그 부인이 파리로 짧게, 그것도 아주 비싼 돈을 주고 여행을 다녀온 후로 모든 게 해결됐답니다. 그때 그 부인과 제가 얼마나 다행스러워했는지 아세요?" - P383

"그분은 신사예요. 제가 신사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몇 명 안 되거든요. 이 집에 와서 공작 부인의 돈으로 살찐 배를 채워 가는 신사들은 신사로 안 보죠."
원래 지체 높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귀가 되어 줄 충실한 부하를 두고 있는 법이다. 이런 부하들은 무시나 모욕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스스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 상대를 정확히 겨냥하여 주인에게 그 사람에 대한 혹평을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그렇게 해서 주인까지 그 사람을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과는 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엘리엇은 언제나 가난한 친척들과 늙은 하녀들, 충실한 비서들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고 진심 어린 미소를 보냈다. 틀림없이 키스 부인과도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고, 크리스마스에는 초콜릿 한 상자나 휴대용 화장품 케이스, 핸드백 등을 선물로 보냈을 것이다.
"키스 부인,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겁니다."
(아래에 계속) - P384

(위에서 계속)
키스 부인은 코안경을 올려 오뚝한 코에 똑바로 걸쳤다.
"저더러 주인을 배신하라는 건 아니겠죠, 몸 선생님? 게다가 제가 배신한 걸 알면 그 노인네는 당장 절 해고할 거예요. 초대장은 책상에 있어요. 봉투에 들어 있죠. 저는 그냥 창밖을 보고 풍경을 즐기고 있을게요.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다리가 저리니까요. 제가 등을 돌리고 있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저한테 책임을 묻지 못하겠죠."
키스가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을 때 초대장은 이미 내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키스 부인."
내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장무도회 때 무슨 옷을 입으실 겁니까?‘
"저는 목사의 딸이에요, 선생님. 그런 바보 같은 일은 상류층에게나 양보해야죠." - P385

중백의와 영대를 걸친 모습을 보니 키도 크고 체격도 우람했다 파티에서는 짓궂으면서도 다정한 웃음으로 주름져 있던 붉은 얼굴도 그날은 엄숙해 보였다. 예전에 기병 장교였지만 이제는 그런 흔적이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자신의 신분 그대로 성당의 고위 성직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조제프가 성호를 긋는 모습을 보고도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 P391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조제프와 하녀들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 세 명의 하녀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주교의 반지에 키스를 했다. 그는 두 손가락으로 그들을 축복했다. 조제프도 아내가 옆에서 쿡 찌르자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반지에 키스를 했다. 주교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넨 불가지론자라면서?"
조제프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습니다, 몽세녜르."
"걱정할 것 없네.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훌륭한 하인이었으니, 하느님도 그런 잘못된 생각쯤은 너그럽게 봐주실 거야."
나는 그와 함께 밖으로 나가 차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차에 올라타면서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의 가엾은 친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겉보기에는 결점도 많았지만, 본디 마음이 너그럽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친절하셨지요." - P394

"서재에 가면 메모판이 있을 겁니다. 그걸 갖고 와서 좀 받아 적어 주시죠." (중략)
그는 눈을 감고 잇었지만 입가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는 그가 뭐라고 할지 몹시 궁금해졌다.
"엘리엇 템플턴 씨는 하느님과의 선약 때문에 노베말리 공작 부인의 친절한 초대에 응할 수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는 유령처럼 희미하게 키득거렸다. (중략) 그는 여전히 내가 훔쳐 낸 초대장을 들고 있었다. 들고 있기가 힘든 것 같아서 그의 손에서 빼내려고 했지만 너무 꽉 쥐고 있어서 빼낼 수가 없었다. 뒤이어 들려온 그의 힘찬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더러운 할망구."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러고는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 P397

"현명한 우리 구교에서는 믿는 것처럼 행동하면 믿음을 갖게 되고, 의심이 생겨도 신실하게 기도하면 의심이 사라지며, 성찬의 아름다움에 빠지면 평화가 내려온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중략) 우리 수도원에서 2-3 주 지내보는 게 어떨까요?우리 평수사들과 함께 밭일을 해도 되고, 우리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숟 있습니다. 탄광이나 독일의 농장에서 일하는 것 못지않게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겁니다. (중략) 당신은 신앙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거리는 얇은 종잇장 두께에 불과합니다." (중략)
알자스 시골에 있는 수도원이었는데 경치가 참 예뻤어요. 엔스하임 신부는 수도원장에게 인사를 시킨 다음 제가 쓸 방을 보여줬죠. - P418

이사벨에게 칵테일을 건네다가 테이블에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 래리의 책이잖아."
내가 소리쳤다.
"오늘 아침에 왔는데, 너무 바빠서 들춰 보지도 못했어요. 오전 내내 수십 가지 일을 처리해 놓고 점심엔 밖에 나가서 밥을 먹고 오후에는 몰리뉴에 갔었거든요. 언제쯤이나 볼 시간이 날지 모르겠네요."
작가는 열과 성을 다해 몇 달에 걸쳐 책 한 권을 완성하는데, 독자는 이 세상에 할 일이 하나도 없어질 때까지 그 책을 아무 데나 놓아둔다고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 P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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