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 유교 문명의 새로운 구상과 실천 ㅣ 창비 한국사상선 14
정약용 지음, 백민정 편저 / 창비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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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의 한국사상선 제14권 ‘정약용 – 유교 문명의 새로운 구상과 실천’은 다산 정약용이 쓴 많은 글들을 분석하고 발췌하여 (1)삶의 이력과 관료 활동, (2)지적 교류와 학문의 배경, (3)서학의 충격과 문제의식, (4)유교 인간학의 체계화, (5)정치사상과 국정운영론의 다섯 개 항목으로 나누어 소개하는 책이다. 책의 앞부분에서 정약용의 삶과 사상을 소개하고, 이어서 그의 중요한 저술들을 쉬운 현대어로 번역하여 제공한다. 풍부한 각주를 통한 보충 설명, 시대상을 곁들인 상세한 연보, 마지막의 찾아보기까지 독자를 위한 친절한 배려가 가득한 책이다. 만듦새가 아름답고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으며, 독서하는 동안 인물과 마주앉아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생생함이 느껴져서, 기회가 되면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책을 읽기 전에 내가 정약용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상은 ‘불우한 지식인’이라는 것이었다. 넘치는 재능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왕의 죽음 이후 반대 당파에 의해 죄인으로 몰려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유배지로 내쫓긴 불운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인상은 책을 읽고 나서 정반대로 바뀌었다. 부유하고 교육열 높은 가정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의 핵심에서 활동했던 것, 유배 후에도 유배지인 호남 지방에서 위세를 떨치던 외가의 비호를 받으며 교육과 학문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 모두 이 인물의 대단한 행운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이러한 행운 위에 그의 천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강렬한 성취 지향이 더해져, 정약용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라는 확고한 지위에 도달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현실순응적이고 출세지향적인 가치관은 그가 자손들에게 남긴 글에서 솔직하게 드러난다. 노년에 자신의 장례를 손수 준비하며 지은 ‘자찬묘지명’에는 출세 가도를 달렸던 젊은 시절의 업적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자신을 높여준 정조를 ‘성인’으로 추앙하는 태도가 대단히 인상적이고, 해배된 이후인 노년에 다시 등용될 기회가 왔을 때 이를 방해한 서용보에 대한 구구절절한 비난이 쓴웃음을 자아낸다. 벼슬길이 완전히 막혔다고 생각했던 유배기에는 유학 연구자로 이름을 떨치는 것과 자식들을 잘 되게 하는 것이 그의 주된 야망이었던 듯한데, 자식들이 문학이나 좋아하고 경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니, 이대로는 자신의 필생의 저작인 ‘주역’ 연구서와 ‘상례’ 연구서가 빛을 보지 못할까 두렵다고 꾸짖는 ‘시이자가계’를 통해 이를 들여다볼 수 있다. 시속을 비판하고 오직 주나라 이전 성인의 시대를 그리워하며, 정통 유학을 깊이 연구하던 그의 자세는 교조적 유교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의 상황에서는 누구나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태도였을 것이다.

 

관료로서나 학자로서나 세상에 드러나는 높은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단 몸부터 지켜야 했을 것이나, 원한에 찬 당쟁의 피바람이 몰아치던 헬조선에서 살아남는 것은 재능이 넘치는 정약용에게도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천주교 문제로 남인들이 죽어 나가던 위기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천주교를 비난하는 것으로 살 길을 도모했다. ‘변방사동부승지소’에서 “그 모발 하나라도 죄역이 되지 않는 것이 없고, 해괴하고 두려운 것이 조수가 사람 속에 있는 것같이 분명하여 하루도 구차하게 함께 거처할 수 없으니”라고 천주교를 비난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그가 말하는 사악한 이역 학문인 천주학이 조선이 멸망한 후에도 오래 살아남고, 그가 한사코 거리를 두려 한 순교자 친지들이 천주교의 성인으로 공경받고, 정약용 자신도 천주교 계열의 학자들에게 널리 연구되어, 가톨릭대학 교수의 손으로 쓰인 정약용에 대한 책을 내가 읽고 있는 아이러니가 재미있어진다.

 

정약용의 글 중에 일반 독자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고등학교 교과서와 참고서에 단골로 실리는 ‘여유당기’와 ‘수오재기’일 것이다. 마흔 전후, 정조가 죽고 인생이 극적 전환을 맞이하던 시기에 쓴 이 두 글에는 앞으로 험난한 삶을 헤쳐 나가야 할 자신에게 주는 중요한 지침이 담겨 있다. “맹자가 ‘지킴은 무엇이 큰 것인가? 자신을 지키는 것이 큰 것이다(守孰爲大 守身爲大).’ 라고 했으니 그 말씀이 진실하다.”, “내가 노자의 말을 살펴보니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의 이웃이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이 경계하라(猶).’고 했는데, 아, 이 두 마디 말은 나의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니겠는가.”라는 문장들은 헬조선의 어둠 속에서 목숨과 가문과 빛나는 명예를 지켜낸 승리자의 가르침으로 다시 한번 눈여겨볼 만하다.

 

*이 글은 출판사의 독서모임 이벤트에 참가하여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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