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발간되었을 때 나는 여러 대상에게서 공격을 받았다. 내가 토머스 하디를 모델로 에드워드 드리필드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의 의도가 아니었다. 나는 토머스 하디를 조지 메러디스나 아나톨 프랑스만큼이나 염두에 둔 적이 없다. (중략) 나는 열여덟 살 때 ‘테스’를 읽고 젖 짜는 아가씨와 결혼하리라 결심할 만큼 그것에 열광했지만, 대부분 의 동시대인들과 달리 하디의 다른 작품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문체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 P9
나는 토머스 하디를 딱 한 번 만났다. 장소는 레이디 세인트헬리어의 만찬 자리였다. (중략) 당시 나는 인기 있고 잘나가는 극작가였다. 그 자리는 전쟁 전 사람들이 열곤 했던 성대한 만찬 파티들 중 하나였다.(중략) 스물네 명의 참석자들은 모두 신분이나 정치적 입지, 혹은 예술적 성취도가 남다른 사람들이었다. 숙녀들이 응접실로 물러갔을 때 나는 우연히 토머스 하디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중략)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십오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것은 분명하다. 대화가 끝날 무렵 그는 나를 크게 칭찬하고 나서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내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 P10
듣자 하니 작가 두세 명이 앨로이 키어라는 인물이 본인을 겨냥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것은 그들이 오해다. 이 인물은 여러 가지가 복합된 초상이다. 외모는 한 작가에게서 따왔고, 상류 사회에 대한 집착은 다른 작가에게서, 활력은 세 번째 작가에게서, 운동 능력의 자긍심은 네 번째 작가에게서, 그 외에 많은 부분은 나 자신에게서 빌려 왔다. (중략)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는 작가를 표현할 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그러기에 이것은 너무나 흔한 관행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 P10
로이는 처음부터 유리한 고지에서 출발했다. 그는 오랫동안 홍콩에서 식민 장관을 지낸 뒤 자메이카 총독으로 퇴임한 공무원의 외아들이었다. (중략) 로이는 아무런 빚도 지지 않고 대학을 졸업했다. 이미 그때부터 검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쓸데없는 지출을 자제했다. 그는 좋은 아들이었다. 자기가 받은 값비싼 교육이 부모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16
그 집안의 섬세하고 허약한 외아들을 가르친 것이 로이에게는 젊은 나이에 큰 세상으로 진입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는 이 경험을 십분 활용했다. 주간지로 상류 사회를 엿본 작가의 작품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그런 결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공작들이 서로 어떻게 대화하는지, 국회의원과 대리인, 마권업자, 대리 주차원에게 각각 어떤 호칭으로 대우를 받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초기 소설에 등작하는 총독, 대사, 수상, 왕족, 귀부인의 경쾌한 면모에는 어떤 매력이 살아있다. (중략) 귀족들의 행위가 더 이상 진지한 소설의 적당한 소재가 될 수 없는 시류 탓에 언제나 시대의 흐름에 극도로 민감한 로이가 후반기 소설들을 사무 변호사, 공인 회계사, 농산물 브로커의 내적 갈등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나는 늘 애석하게 생각한다. - P17
많은 작가들이 단어에 심취해 있다 보니 대화 중에 단어를 지나치게 고르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너무 정성껏 문장을 만들어 의도하는 바를 가감 없이 정확하게 말한다. 그래서 어휘 구사력이 단순하고 민감한 욕구에 국한된 상류 사회 사람들은 이들과 의사소통에 다소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 결과 이들하고 어울리는 것을 망설이게 된다. 로이는 이러한 종류의 제약을 받은 적이 없었다. - P36
현자는 모름지기 상용구를 많이 쓰고 유행하는 형용사를 쓰며 그 상황에 딱 들어맞는 표현을 써서 환담에 소탈한 광채를 더하고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게끔 한다. 지구상에서 효율성을 가장 따지는 미국인들은 이러한 요령을 완벽의 경지로 끌어올려 방대한 범위에서 간결하고 진부한 문구들을 무수히 만들어 냈고, 그 덕분에 서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시도 생각하지 않고 즐겁고 활기찬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이성은 큰 사업과 간통 같은 더 중요한 문제의 몫으로 자유롭게 남겨둔다 - P37
"그럼 그때나 지금이나 대단하다고 생각한 건 무엇인가?" "글세, ‘트리스트럼 샌디’, ‘아멜리아’, ‘허영의 시장’, ‘마담 보바리’, ‘파르마의 수도원’,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워즈워스와 키츠, 베를렌."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독창적인 생각은 아닌 것 같군." "그렇게 말해도 무리는 아니지. 내가 봐도 독창적이지 않으니까." - P44
내 숙부는 교구 목사였다. 숙모는 독일인이었는데, 신분이 대단히 높았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어서 결혼할 때 가져온 것이 17세기 조상 중 한 분이 제작한 쪽매붙임 책상 하나와 컵 세트뿐이었다. 내가 그 집에 살 때는 컵들이 몇 개 남지 않아 응접실에서 장식품으로 쓰이고 있었다. 나는 전체적으로 웅장한 문장이 새겨진 그 컵들을 좋아했다. 컵에는 숙모가 점잖게 설명해 준 결합 문장이 무수히 많았는데 문장을 받치는 동물들이 정교하고 왕관에서 솟아난 투구는 굉장히 낭만적이었다. 숙모는 소박한 노부인으로 온화한 기독교인의 성향을 지녔지만, 봉급 외에 부수입이 거의 없는 평범한 목사와 결혼한 지 삼십 년이 넘은 처지에도 자신의 ‘고귀한 태생’을 결코 잊지 않았다. - P52
한번은 오늘날 금융계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런던의 부유한 은행가가 이웃집을 빌려 여름휴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숙부는 그를 찾아갔지만 (복자 협회의 기부금을 얻어 보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숙모는 그가 장사꾼이라는 이유로 방문하지 않았다. 아무도 숙모를 거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극히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그 은행가에게는 내 또래의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자세한 경위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 아이와 친해지게 되었다. 내가 그 아이를 목사관에 데려와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 이어졌던 대화가 아직도 기억난다. 망설임 끝에 허락이 떨어졌지만 그 아이의 집에는 가지 말라는 금지령이 내려졌다. 숙모는 나더러 다음에는 석탄 상인의 집에 가겠다고 하겠구나 했고, 숙부는 이렇게 말했다. "나쁜 언사를 행실을 망친단다." - P53
호드마시 부인은 초대한 작가들의 책을 읽은 적이 없었고 화가들의 그림 또한 본 적 없었지만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고 그 과정에서 예술계의 사정에 밝아지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던 중 그 자리에서 부인의 가장 유명한 이웃 에드워드 드리필드가 잠시 화제에 올랐고, 내가 한때 그와 잘 아는 사이였다고 말하자 부인은 많은 손님들이 런던으로 돌아가는 월요일에 그분 댁을 방문해 점심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난색을 표했다. 드리필드를 만난 것이 삽십오 년도 더 지난 일이라 그가 나를 기억할 리 만무했고, 기억한다 해도 (이 말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즐거운 기억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P64
하지만 그 자리에 문학열을 뜨겁게 불태우는 스캘리언 경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법률가의 소임에 충실하기보다 탐정 소설 창작에 기운을 빼는 자였다. 그는 드리필드를 만나고 싶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호드마시 부인이 말을 꺼내자마자 아주 훌륭한 제안이라고 나섰다. 파티의 주빈은 젊고 뚱뚱한 공작 부인이었는데, 그녀마저 그날 런던의 약속을 취소하고 오후에 출발하는 것을 감수할 만큼 그 유명한 작가를 열렬히 숭배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 넷이 되겠네요." 호드마시 부인이 말했다. "더 많으면 그들도 난처할 거예요. 드리필드 부인에게 즉시 전보를 보내죠." - P65
"대체 드리필드 부부가 뭘 잘못한 거야?" 나는 메리앤에게 물었다. 메리앤은 열여덟 살 때 목사관에 왔다. 어린 나를 목욕시켰고, 필요하면 자두잼에 가루 설탕을 뿌려 주었고, 학교에 갈 때 책가방을 싸 주었고, 아플 때는 병간호를 해 주었고, 심심할 때는 책을 읽어 주었고, 말썽을 부리면 꾸짖기도 했다. 하녀인 에밀리는 철부지 덜렁이라 메리앤은 에밀 리가 나를 돌보았ㅇ면 내가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중략) "도련님이 내 조카는 아니지만 나라도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게 가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도련님한테 자전거를 같이 타자고 했다니 원. 하여간 사람들이 별짓을 다하지." - P86
나는 조지 경을 알고 있었다. 이름은 조지 켐프였고, ‘경’이라는 말은 배포가 워낙 커서 붙은 별명이었다. 그는 이 고장 석탄 상인이었다. 부동산업에도 손을 댔고, 석탄선 한두 척에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땅에 지은 새 벽돌집에 살면서 자기 마차를 몰았다. 그는 뾰족한 턱수염을 기른 투실투실한 남자였다. 발그레한 혈색에 파란 눈은 부리부리했다. 돌이켜 보면 옛날 네덜란드 그림에 흔히 보이는 붉은 얼굴의 유쾌한 상인과 흡사했다. 복장은 언제나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 P90
마을 의사의 아내가 숙모를 만나러 왔을 때의 일이 기억난다. 에밀 리가 들어와서는 숙부에게 조지 켐프 씨가 와서 숙부를 뵙기를 청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관문 벨 소리가 났는데, 에밀리." 숙모가 말했다. "네, 그 사람이 현관문으로 왔어요."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모두들 뜻밖의 사건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난색이었다. 누구는 현관문으로 오고 누구는 옆문으로 오고 누구는 뒷문으로 와야 하는지 아는 에밀리마저도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심성이 착한 숙모는 누군가 잘못된 위치에 서는 일이 벌어져 진심으로 난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의사의 아내는 기가 차다는 듯 살짝 콧방귀를 꼈다. 마침내 숙부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내 서재로 안내해, 에밀리." 숙부가 말했다. "아를 마시는 대로 가볼 테니까." - P91
모두들 그랬듯 나도 조지 경을 조롱하고 깔보았다는 것을 덧붙여 둔다. 그가 거리에서 나를 붙잡아 세우고 내 이름을 불러 대면서 우리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없는 양 이야기할 때면 화가 났다. 그는 내게 아들들이 나랑 같은 또래라면서 같이 크리켓을 해 보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하버샴의 중등학교에 다녔고 당연히 나는 그 아이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 P92
메리앤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면서도 흥미진진했지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소설을 너무 읽은 데다 사랑을 알기에는 학교 공부가 너무 많아서 사랑이란 그저 젊은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막연히 알고 있었는데, 턱수염이 난 데다 내 또래의 아들들을 둔 남자가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니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그런 것은 결혼하면 끝나는 게 아니던가. 서른이 넘은 사람들이 사랑을 한다니 속이 좀 울렁거렸다. "그래도 두 사람이 실제로 무얼 한 건 아니지?" 나는 메리앤에게 물었다. "듣자 하니 그 로지 갠이라는 여자는 하지 않은 게 거의 없는 모양이던데요. 그리고 상대는 조지 경만이 아니었어요." - P92
"그런데 왜 그 여자는 아기가 안 생겼지?" 내가 읽은 소설에서는 예쁜 여자가 어리석은 짓에 휩쓸리면 반드시 아기를 낳았다. 원인이 되는 장면은 애매모호하게 설명되었고 가끔은 숨김표로 암시되었지만 그 결과는 불가피했다. "처신을 잘했다기보다 운이 좋았다고 봐야죠." 메리앤은 그렇게 말하고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바쁘게 접시를 닦던 손길을 멈추었다. "우리 도련님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걸 아네." "당연히 알지." 나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참 나, 나도 이제 다 컸어. 왜 이래?" - P93
마흔 살에 정치인이었던 사람이 일흔 살이 되면 정치 거물이 된다. 너무 늙어 점원도 정원사도 즉결 심판 치안 판사도 못 하는 나이가 되어서야 한 나라를 다스릴 만큼 성숙해진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예로부터 노인들은 그들이 젊은이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세뇌했고, 젊은이들은 그것이 허튼소리임을 깨달을 즈음엔 이미 늙은이가 되어 그 기만적 행태에 편승해 이익을 봐 왔다. 또한 정치인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치고 국가를 다스리는 데 별다른 지능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결과만 봐도 판단이 가능하다.) 하지만 작가들은 왜 나이가 들어 갈수록 존경을 받아야 하는지 나는 오랫동안 의구심을 품어 왔다. - P143
만약 이십 년째 주목할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하는 노작가라면 경쟁자로서 젊은 작가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므로 그의 가치를 극찬해도 괜찮다는 점에서 합리적 찬사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알다시피 두렵지 않은 경쟁자를 칭찬하는 것은 만만찮은 경쟁자를 견제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성을 너무 폄하하는 시각일 수 있고, 싸구려 냉소주의라는 비판을 자초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곰곰이 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 P144
평균 나이를 넘긴 노작가가 노년에 보편적으로 칭송받는 진짜 이유는 지식인들이 서른 살이 넘으면 글을 전혀 읽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젊었을 때 읽은 책들은 화려한 빛을 발하기 마련이니 그 책을 쓴 저자의 가치는 해마다 높아진다. 물론 계속 글을 쓰고 대중의 시선 안에 머무는 노작가여야 한다. 걸작을 한두 편 쓴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걸작들을 떠받칠 받침대로 변변찮은 작품을 사오십 편쯤 펴내야 한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매력으로 독자를 사로잡을 수 없다면 무게로 독자를 압도하겠다는 각오로 대량 생산을 해야 한다. 내 생각대로 긴 수명이 천재성이라면 당대에 에드워드 드리필드만큼 긴 수명을 오래도록 뚜렷하게 누린 작가는 드물다. - P144
"그 사람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로지의 시선이 벽에 걸린 사진으로 흘러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동안 내가 못 보고 지나친 사진이었다. 크게 확대된 조지 경의 사진이 조각된 도금 액자에 들어 있었다. (중략) 풍성한 콧수염은 끝에 왁스를 발랐고, 능청스러운 눈빛으로 으스대며 활보하는 걸음새였다. 한껏 차려입고 더비 경마장에 가는 펍 주인 같았다. "그건 말이지." 로지가 말했다. "그이는 언제나 완벽한 신사였거든."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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