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 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프루스트 강의
유제프 차프스키 지음, 류재화 옮김 / 밤의책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차프스키가 '게르망트 쪽'부터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반가웠다. 도서관에 있는 앞의 권들이 대출 중이어서 나도 거기서부터 시작했었다. 시작한 부분이 흥미로웠던 덕분에 긴 작품을 끝까지 잘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강의 내용을 읽어가는 동안 오래 전에 읽었던 작품의 내용들이 생각나면서 중요한 포인트들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배경을 생각하면 더욱 감동적인 강의.

우리는 1939년 10월부터 1940년 봄까지 하리코프 근처, 10-15 헥타르에 이르는 스타로벨스크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폴란드 장교들이었다. 우리는 지적 노동을 해서라도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우리를 잠식하는 쇠약과 불안을 극복하고 뇌에 녹이 스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리하여 우리 중 몇 사람이 군사학과 역사학, 문학 강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강의들이 당시 윗선에 있던 이들에게는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쳤는지, 강의를 기획했던 몇몇 이는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로 보내졌다. 그러나 강의는 중단되지 않았고, 더욱 은밀하고 정교한 모의가 이루어졌다. - P10

1940년 4월, 스타로벨스크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이들이 몇 개의 무리로 나뉘어 북쪽으로 이송되었다. 같은 시기, 총 수용 인원이 1만 5000명에 이르는 두 대형 수용소인 코젤스크와 오스타시코프의 포로수용소가 모두 비워졌다. 결국 그 지역에 남은 포로는 1940-1941년에 볼로그다 근처 그라조베츠 수용소에 있던 400여 명의 장교와 군인들뿐이었다. 우리는 처음 스타로벨스크 수용소에 수용된 4000여 명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79명인 셈이었다. 스타로벨스크의 다른 동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P10

여러 차례의 탄원 끝에 우리가 공식적으로 강의할 수 있게 허락받은 장소는 식당뿐이었다. 여기에 조건이 붙었다. 사전 검열을 받듯이 강의록을 미리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작은 방이 동료 포로들로 가득찼고, 강사들은 각자 기억하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최대한 들려주었다. (중략) 에를리히 박사는 책의 역사를 강의했다. (중략) 영국의 역사와 여러 민족의 이주 역사에 대해서는 (중략) 카밀 칸타크 수사가 강의했다. 건축의 역사는 바르샤바 공고대학의 시엔느니츠키 교수가 맡았다. (중략) 오스트로프스키 중위는 남아메리카에 대한 강의를 맡아주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폴란드의 회화 및 프랑스 문학을 강의하기로 했다. - P11

영하 45도까지 떨어지는 추위 속 노역으로 완전히 녹초가 된 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초상화 밑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당시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제에 대한 강의를 열중해 듣던 동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나는 감동에 젖어 프루스트를 생각하곤 했다. 코르크 벽 탓에 난방이 조금 과하게 된 방에서 죽은 그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종일 일하고 돌아온 폴란드 포로들이 게르망트 공작 부인 이야기나 베르고트의 죽음, 또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그대로 전해주고자 했던 그 소중하고 아름다운 내면 묘사를 그토록 집중해서 듣고 있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놀라고 감격할까, 하고 말이다. - P12

이 에세이는 소련에서 보낸 몇 해 동안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준 프랑스 예술에 바치는, 내 소박한 감사의 공물(貢物)이다. 1944년, 유제프 차프스키. - P13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한 권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아마 ‘게르망트 쪽’이었던 것 같다.) 사교계에 입문하는 장면을 길게 묘사한 구절이 있었는데, 몇백 페이지는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프랑스어 실력은 그렇게 대단한 편은 못 되어서 이 작품의 정수를 맛보거나 이전에는 본 적 없는 특유의 형식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중략) 무한히 계속되는 지엽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문장들, 다양하고 서로 동떨어져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조합들, 얽히고설킨 주제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어떤 서열이나 체계없이 다루는 기묘한 방식들, 극도의 정밀함과 풍요로움... 나는 마침내 이런 스타일이 갖는 가치를 감지하기에 이르렀다. - P40

(사실주의의 마지막 단계라 할) 자연주의와 그 대척점에 있는 상징주의는 19세기 말에 무척 풍부하고도 미묘하며 다양한 예술운동을 만들어냈다. 둘은 서로 부딪고 얽히면서 깊이 상호 작용했디만, 교과서에는 이런 흐름이 너무 제한적인 분류로 도식화되어 있을 뿐이다. 말라르메는 자연주의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공쿠르 형제와 평생을 교유했으며, 졸라와도 가까이 지냈다. (중략) 화가 드가는 말라르메와 내밀하게 사귄 친구였다. 이른바 양립 불가능한 것들이 서로 얽혀서 짜여 있던 당시 예술의 형식을 훨씬 고양된 형태로 표현한 것이 바로 드가였다. 드가는 들라크루아와 앵그르를 함께 좋아하고 찬미했다. - P44

프루스트의 관점은 이런 19세기 말의 경향에서 나온 것이다. 19세기 말은 프랑스 예술이 최고의 순간을 맞았던 때로, 수많은 천재적 작가들을 배출한 시기다. 시대를 다 찢어발길 것처럼 뿌리 깊은 모순과 대치가 만연한 가운데 예술은 이를 모두 극복하고 마침내 어떤 종합의 단계에 이르렀다. ‘추상성’과 ‘실재 세계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정확한 감각’이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합’은 추상적이고 지적인 요소들로 만들어내는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 분석가의 매우 사적인, 못내 예민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 P46

문학에서는 상징주의로 대표되고 회화에서는 고갱으로 대표되는 非자연주의 운동은 그 충만하면서도 짧은 시기를 끝내고 1907년에 마침내 입체주의에 이른다. 다시 말해, 현실에 대한 연구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 예술이 탄생한 것이다. (중략) 입체주의는 이탈리에서 일어난 미래주의와 충돌했다. (중략) 하지만 개인적인 불행, 또는 강도 높은 노동, 아니 그의 병 탓에, 아니 그 덕분에 프루스트는 자신만의 세계에 유폐되어 있었다. 자기 작품에만 빠져 있던 프루스트는 당시의 예술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립적인 예술 세계를 추구할 수 있었다. - P47

세계대전 이후에는 입체주의와 미래주의, 또는 그로부터 파생한 사조들이 세력을 만방에 떨쳤다. (중략) 그런 그들이 보기에 프루스트의 작품은 첫눈에도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았다. 과장과 허식으로 가득했고, 옛 부르주아의 분위기를 풍겼으며, 낡아빠진 스노비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쟁 이후 파리는 물론 유럽 전역에 쇄도한 ‘야만족’에게 프루스트는 당황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든, 기묘한 무엇이었다. - P47

프루스트는 젊어서부터 파리에서 가장 우아하다고 알려진 유명 살롱에 출입했다. 알레비 태생의 스트라우스 부인은 당시 프랑스 상류층 부인들 가운데 가장 지적인 여성이라 할 만했는데, 그녀는 프루스트를 ‘나의 작은 시동’이라고 불렀다. 당시 검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열여덟 살 소년이었던 프루스트는 격주마다 열리는 이 모임에 참석해 항상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중에 그는 카이야베 부인과 아나톨 프랑스가 연 살롱의 단골이 되기도 했다. 프루스트는 카이야베 부인의 살롱에서 당시 정치계와 문학계 인사들을 여럿 만났다. 또한 포부르생제르맹의 가장 은밀하고 폐쇄적인 사교계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 P50

프루스트의 어머니는 1904-1905년 무렵에 사망했다. 프루스트가 최초로 겪은 큰 불행이자, 아픈 상처였다. 사교계에 드나들고, 예민한 데다 병약하며, 모든 게 미완이고 카오스 같았던 프루스트의 삶은 그의 글쓰기를 더 힘들게 만들었고 병세 또한 악화시켰다. (중략) 프루스트는 문학에 자신을 붙들어두기 위해 어마어마한 글쓰기 노동을 시작한다.
- P54

이와 유사한 여러 묘사들 속에서(인용자 주 – 할머니의 장례식 장면) 이 위대한 작가의 ‘괴물성’이 진가를 드러낸다. 정확하고 냉정하게 분석하는 능력. 아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을 텐데도 세세한 것들까지 극적이고 유머러스하게 묘사하는 가공할 능력. 나는 죽어가는 어머니의 침상에서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 모든 세세한 것, 그 모든 눈물 그리고 주변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비롯한 그 모든 결점을 다 보았을 프루스트를 상상해 본다. - P93

귀족 세계에 대한 그의 내밀한 지식에 감탄하다 보면 자연스레 톨스토이가 또다시 생각난다. 톨시토이도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에서 여러 페이지에 걸쳐 통찰력 있는 묘사를 하는데, 프루스트의 묘사보다는 조금 덜 사실적이다. 프루스트는 실명을 쓴 실제 역사 인물 마틸드 공주부터 시작하여, 게르망트 공작 부부와 공작의 동생 샤를뤼스 남작 등을 중심으로 ‘게르망트 부부라는 태양’ 주변을 선회하는 궤도의 2열 혹은 3열에 위치한 주요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와 친구들 이야기까지 아우르는 이른바 ‘귀족들의 갤러리’를 만들어 속물과 벼락부자와 여러 어리석은 자들이 가진 무한히 미묘한 면들을 속속들이 그려낸다. - P95

프루스트는 특유의 대단한 섬세함으로, 게르망트 공작 부부의 젊은 군인 조카가 지닌 자질을 짚어낸다. 음악과 문학에 광적으로 몰두하던 이 조카는 본능적인 충동 속에서도 고상한 성격을 간직한 채, 전장에서 영웅적으로 전사한다. - P100

코르크로 벽을 다 막은 방 안에서 그는 ‘살아 죽은’ 채로 묻힌다. (중략) 죽을 때까지 자신의 ‘절대’인 예술에 복무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은 기쁨의 눈물들로 뒤범벅되어 있으며, 이는 단 한 알의 소중한 진주를 사기 위해 전 재산을 팔아치운 사람이 부르는 승전가다. 하루살이처럼 덧없는 모든 것, 찢어지는 듯한 고통, 세상의 모든 기쁨과 청춘과 명성 그리고 에로티시즘의 공허함이 창조자의 기쁨과 비교된다. 한 문장 한 문장 직조하며 매 페이지를 만지고 또 만지는 이 존재는 결코 전적으로 닿을 수 없는, 닿는 것이 영영 불가능한 무언가를 찾아가고 있을 뿐이다. - P111

만일 우리가 삶과 죽음에 대한 프루스트의 마지막 생각을 알고 싶다면, 다시 말해 그토록 긴 경험이 한 존재 안에 축적되면서 생긴 생각을 알고 싶다면, 죽음이 실제로 그에게 다가왔을 때 쓴 글을 보면 될 것이다. 작중인물인 베르고트가 중요한 단서일 수 있다. - P120

스완과 베르고트가 모두 사랑한 네덜란드의 위대한 화가 베르메르의 전시회 기간 중 베르고트는 죽음을 맞는다. 프루스트가 죽기 몇 년 전에 그의 동료이자 친구인 장루이 보두아예가 네덜란드 회화전에 그를 데려갔다는 사실을 나는 우연히 알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그곳을 찾았다가 심장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음을 감지한다. - P123

베르고트가 마지막으로 작가 의식의 시험을 치르는 곳이 바료 여기다. "이 작은 황색 벽면, 이 작은 황색 벽면. 베르고트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책을 바로 이렇게 썼어야 하는데. 같은 문장을 다시 쓰고, 다시 쓰고, 그렇게 더 풍부하게 만들었어야 하는데. 이 벽면처럼 말이야. 이렇게 거듭 덧칠을 해서 말이야. 내 문장은 너무 건조해. 너무나 작업이 덜 됐어." - P124

열병에 가까운 그 어마어마한 노력이 결국에는 스스로의 죽음을 재촉하게 말 것이라는 걸 프루스트 역시 모르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나 그는 그러겠다고 결심했고, 더는 건강에 신경 쓰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죽음에 초연하게 되었다. 그렇게 무리를 했으니,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죽음이 찾아온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 그는 침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머리맡 탁자 위에는 약병이 쓰러져 있고 거기서 흘러나온 액체가 작은 종잇조각 하나를 검게 물들였는데, 전날 밤 쓴 것이 분명한 그 메묘에는 특유의 신경질적인 가는 글씨체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부차적 등장인물일지 모르는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은 ‘포르슈빌’이었다. - P1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