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시오미에게 우정을 느낀 데는 우리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다는 이유도 컸을 것이다. 다만 나는 외국 문학을 전공했고 그는 언어학과였기 때문에 그 당시부터 가까웠던 건 아니다. 하지만 같은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를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고, 같은 헌책방 서가 앞에서 나란히 책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우리를 아주 가까운 사이로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갖기 시작한 친밀한 정을, 그도 똑같이 내게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농담을 하기도 했고, 사람을 웃기기도 했다. 마음이 내키면 수다도 잘 떨었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의 주위에 어떤 종류의 고독을 두었다. 나와 친하게 이야기할 때도 그는 자신의 고독에 갇힌 채 마음을 열고 다가오지 않았다. 또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고독의 원인이 무엇인지, 나는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 - P24
"하지만 우정이란 건 상호적인 거야. 야나이가 낙제할 뻔했을 때 네가 걱정한 것처럼, 야나이는 후지키 때문에 널 걱정하는 거야. 그게 우정이겠지, 네 경우는 혼자서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것 같은 거야."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진짜 우정이란 건, 깊은 계곡 밑에 있는 샘물 같은 상대방의 영혼을, 그 사람의 내부에 잠들어 있는 그 샘물을 찾아내는 거야, 그리고 그걸 퍼 올리는 거야. 그건 그저 이해한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거야. 더 신비로운, 영혼의 공명 같은 거야. 내가 후지키한테서 바라는 건 바로 그거야. 그게 진짜 우정이라고 생각해." (아래에 계속) - P109
(위에서 계속) "역시, 그게 바로 시오미 시게시의 플라톤적 명상의 산물이지." 하고 핫토리가 놀리듯이 말했다. "그야, 후지키는 사랑스러운 소년이지. 그리스어의 에페보스라는 게 바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영혼이나 뭐니, 그건 너무 거창해." "그러니까 너희들은 모른다는 거야." "나도 영혼까지 말할 건 아니라고 생각해." 하고 기노시타가 조용히 말했다. "좋아한다는 건 육체적인 요소니까." "아냐.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소리쳤다. - P110
"난 말이야, 진짜 고독이란 그 무엇에도 상처받지 않는 것, 어떤 괴로운 사랑에도 견딜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건 영혼의 강하고 적극적인 상태라고 생각해. 예를 들면, 기도하고 있는 인간의 상태 같은 거지. 기도는 신 앞에서는 갈대처럼 나약한 모습이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뺏길 게 없는, 한계까지 다다른 강함을 보여주지. 고독이란 그런 게 아닐까?" - P116
"후지키, 우리는 남을 믿음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느끼는 게 아닐까?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비참해질까, 그렇게 싱각하지 않아?" "시오미 선배가 하는 말은 관념의 세계죠." "어째서? 고등학교의 기숙사 생활 따위, 거기에 우정이 없다면 뭐가 있다는 거지?" "전 모르겠어요. 고등학교의 우정 같은 건 관례적인 게 아닐까요? 서로 존중하고, 서로 상처 주지 않고, 그저 그게 전부인..." (아래에 계속) - P133
(위에서 계속) "그렇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정신적인 기쁨 같은 건 전혀 느낄 수 없지 않을까." "전 그걸로 충분해요. 야시로나 이시이 같은 친구가 있으면 그걸로 족해요. 저한텐 특별한 우정 따위 필요 없어요. 시오미 선배가 말하는 그런 아름다운 사랑 같은 것, 저한텐 불필요한 겁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죠? 우리는 이렇게 태어난 이상 그저 정해진 걸을 걷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발밑을 보면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에요." "그런 슬픈 말을... 넌 왜 별을 보지 않는 거지?" "전 못 해요." 후지키는 일어섰다. 어렴풋이 소나무 가지 사이로 흘러내린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만 갈까요." 하고 말했다. - P133
내가 죽을 때까지는, 후지키는 나와 함께 있고, 즐거운 음악처럼 나의 영혼 안에 울려 퍼질 것이다. 음악의 인상으로 남게 되는 인생, 비록 짧지만 그것은 비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게 아닐까. - P143
"난 현실이라는 걸 모르겠어. 지금 벌어지고 잇는 전쟁 같은 거에는 눈곱만큼의 감격도 없어. 언제 군대에 끌려갈까만 생각하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어. 하지만 나한텐 이 전쟁을 반대할 힘도, 그만두게 할 힘도 없어. 그렇다면 내 쪽에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적어도 내 안에서만큼은 전쟁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운 것 말고는 달리 어쩔 수가 없지 않을까. 그러니까 꿈만큼은 내 것이야. 난 고전의 세계로 들어가 시인들이 꾼 꿈을 내 눈으로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거야." "하지만 그건 비겁한 게 아닐까요?" 지에코가 찻잔 안을 스푼으로 천천히 저으면서 고개 숙인 채 말했다. - P190
그 무렵 제가 막연히 느꼈고 지금은 더더욱 분명히 느끼고 있는 것은, 시오미 씨는 이런 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저를 통해 어떤 영원한 것을, 어떤 순결한 것을, 어떤 여성적인 것을 사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입니다 어떤 영원한 것이란 그분이 끝내 믿으려 하지 않았던 하나님이고, 어떤 순결한 것이란 제 오빠이고, 어떤 여성적인 것이란 어쩌면 괴테의 구원의 여성처럼 그분에게 이상인 여성이었겠지요. 저는 가끔 시오미 씨가 제 오빠를 보던 눈으로 저를 보고, 저를 보면서 제 오빠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P295
나는 이 ‘풀꽃’의 마지막에 ‘에필로그’를 붙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것을 쓴 것 같기도 하지만, 원고를 찾을 수가 없다. 그 에필로그에서 시오미의 노트를 받은 ‘나’라는 인물은 후지키 지에코를 만난다. 그녀는 ‘나’에게, 그분은 저를 사랑했습니다. 저도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라고 한다. 그 말에 ‘나’는 당신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환영을 사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청춘이란 그런 게 아닐까요, 라고 묻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고, 그 눈에는 안 방울의 눈물이 빛나고 있었다, 라고 썼다. 이런 사족을 덧붙이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청춘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기적인 몽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청춘은 잃어가는 것이고, 잃어버리는 것 그 자체가 몽상의 특징이자 또 청춘의 특징이 아닐까. - P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