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의 연금술 - 생명과 죽음의 원소, 질소를 둘러싼 프리츠 하버와 카를 보슈 이야기
토머스 헤이거 지음, 홍경탁 옮김 / 반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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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중요한데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일들이 적혀 있는 책이다. 흥미진진했다. 

어색한 부분이 너무 많은 번역이 아쉽다. 한국어 문장이 이렇게 서툴러서야 좋은 원서가 아깝다. 시간을 가지고 문장을 다듬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대기에 질소가 아무리 많아도 식물이나 동물이 성장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활성적이고 무효한 무기물이다.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에 필요한 질소는 형태가 다르다. 학자들은 이를 고정 질소라고 부른다. 고정 질소를 얻을 수 있는지(보통은 얼마나 부족한지가 되겠지만) 여부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생물에게 제약으로 작용하며 식물계의 ‘제한 요소limiting factor‘가 된다.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모든 동물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초식동물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중략) 자연계에서 고정 질소를 얻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배나 콩 같은 식물의 뿌리에 사는 특정한 박테리아나 번개를 이용하는 것이다. 두 가지 방법 모두 고정 질소를 얻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고정 질소의 양은 적다. 그 결과 바다 한가운데서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처럼, 인간이 사용할 수 잇는 질소는 늘 부족했다.
- P3

중세 후반, 화약 제조법은 중동과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중동과 유럽에서도 똑같은 소금(차이나스노라고 부르던 질산칼륨이었다)이 있었는데 담벼락, 특히 지하실 벽에서 볼 수 있었다. 로마인들이 살 페트라이(sal petrae, 돌소금)라고 부르던 것이었다. 후에 중요한 소금을 통칭하는 이름, 초석(礎石)이 되었다. (중략) 1500년대 유럽에는 무기 경쟁의 바람이 불었다. 모든 나라가 화약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생산하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화약 한 통을 만들기 위해서는 초석 4분의 3통이 필요했다. 초석을 얼마나 구할 수 있느냐가 국가의 생존을 결정했다. 문제는 초석의 양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돌과 땅에서 한 번 긁어내더라도 다시 생겨났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렸다. 다시 채취할 정도가 되려면 몇 년이 걸렸다.
- P32

18세기에 이르러 ‘초석 농장’에서 초석을 재배하는 기술을 완성하게 되었다. 초석이 빠르게 형성되는 인공적인 환경을 조성하여 초석을 채취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얕게 판 여러 개의 도랑에 점토와 함께 흙과 거름, 음식물 찌꺼기, 재 등이 혼합물을 채운 다음, 긴 봉분 모양으로 쌓아 하수와 소변으로 수분을 공급했다. 몇 달 동안 햇빛으로 숙성시키면 딱딱한 초석 껍데기가 자라면서 작고 흰 꽃 모양의 미세한 결정체가 땅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농장을 제대로 운영하면 2년에 한 번씩 1세제곱미터의 흙에서 초석 2-4kg을 생산할 수 잇었다. 수고스럽고, 지저분하고 노동집약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국가의 생존에 필수적인 일이었다.
- P33

하지만 초석은 여전히 부족했다. 몇몇 동굴에서 천연 초석이 대량으로 발견되자, 전 세계를 찾아디니기 시작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이집트, 이란의 암석 지대에서 상당량의 초석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나라에서 필요한 화학 수요를 충당할 수 있을 만큼 초석이 엄청나게 많이 저장된 곳은 인도 갠지스 강의 진흙 밭이 유일했다. (갠지스 강의 강물과 높은 기온, 소의 배설물이 결합하여 엄청난 천연 초석 농장을 형성한 듯하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17세기 중반 화물선을 이용해 초석을 몇 톤씩 영국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초석은 동인도 회사의 가장 중요한 화물이었다. 인도는 초석이라는 피수적인 천연자원 때문에 유럽인들의 식민지 확장에 매우 중요한 표적이 되었다. 또한 초석은 영국이 인도를 침략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요인이었다.
- P34

세계에서 가장 좋은 구아노는 다연 친차 섬에서 채취한 것이었다. 당시 페루 정부는 매우 불안정했지만 (1824-1841년 동안 스무 번이 넘게 정권이 바뀌었다.), 구아노가 황금만큼 귀중한 것이라는 수세기 전 잉카인들의 지혜를 깨닫기 시작했다. 누가 정권을 쥐고 있든 해외 시장에 구아노를 수출하면 정권을 지원해줄 돈을 벌 수 있었다. (중략) 1859년 구아노 판매 수입은 페루 예산의 75퍼센트를 차지했다.
- P50

구아노 수요가 워낙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1856년 미국 의회는 구아노 제도 법Guano Islands Act을 통과시켰다. 미국 시민권자는 누구나 구아노 채취를 위해 전 세계 어느 무인도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고, 그곳을 미국 영토로 할 수 있다는 법안이었다. (중략) 수십 년 만에 미국은 이 법으로 하와이와 사모아 사이의 드넓은 태평양 여기저기에 흩어진 94군데의 섬, 암초, 산호초 등의 영토권을 차지했고, 나중에 이 지역은 아메리칸 폴리네시아로 알려진다. 카리브해에도 이런 지역이 있었다.
- P53

칠레의 완벽한 승리였다. 페루는 리마와 약간의 자존심을 얻는 대신, 승자에게 타라파카 등 질산염이 풍부한 사막 모두를 전리품으로 양도했다. 이 말은 1881년부터 칠레가 세계에서 가장 귀중한 천연자원이 매장된 유일한 곳을 독점했다는의미다. 요즘으로 생각하면 단일 국가가 전 세계 유전을 장악했다는 뜻이다. 칠레는 이제 막 부국이 되려 하고 있었다. (중략) 질산염은 칠레가 현대적인 국가로 진입하는 비용을 마련해 주었다.
- P75

19세기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들은 운이 좋았다. 다른 나라와는 다릴 유대인에게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열려 있었다. 훌륭한 독일 대학에도 지원할 수 있었고, 교편을 잡는 것도 가능했다. 하버의 아버지처럼 사업을 해서 성공할 수도 있었다. 변호사나 기자, 의사, 과학자가 되는 길도 열려 있었다. 유대인들은 독일의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예를 들어, 독일 과학자 중 20퍼센트가 유대인이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독일 장교나 고위 공무원 등 일부 직업에는 여전히 장벽이 존재했다. 숨어 있던 반유대주의 정서가 가끔 수면 위로 떠오르긴 했지만 야만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독일에는 집단 학살이 없었다.) 가난한 독일인들이 유대인의 성공을 시기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또한 군을 장악하고 잇던 프로이센 귀족을 비롯한 독일의 오랜 귀족사회에서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유독 깊어 보였다.
- P96

하버에게 신은 모세가 섬겼던 신도 아니었고, 베드로가 섬겼던 신도 아니었다. 과학이라는 신이었다. 합리성이야말로 오랜 편견에서 벗어나고 물질적으로 더 나은 삶으로 가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독일은 최상의 조건을 갖춘 나라였다. 전 세계에서 과학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독일의 대학에는 최고이 교수진이 있었고, 독일의 산업은 첨단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중요한 과학적 발견과 이론을 성취했고 노벨상 수상자도 가장 많았다. 따라서 하버에게 과학은 국민적 자부심만큼 중요했다. 이 둘이 더해져 하나의 삶의 방식을 이루었다.
- P100

그들은 다양한 촉매와 여러 조건을 바꾸어가며 실험했다. 세 가지 요인인 압력, 온도, 촉매를 바꿔가며 최적의 균형값을 찾았다. (중략) 1908년 초 하버와 르 로시뇰이 공기에서 추출한 암모니아의 양은 이전보다 몇 배 이상 많았다. 아직 업계에서 이용하기에는 조금 부족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고, 하버는 앵글러와 상업적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략) 앵글러는 하버에게 바스프로 가는 입장권을 주었다. 바스프의 수장 하인리히 폰 브룬크가 기꺼이 하버에게 승부수를 던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09

하버는 달렘이라는 과학의 에덴동산에 자리를 자보, 그곳에서 독일 황제의 이름을 걸고 자유롭게 탐구하고 위대한 개발에 매진하고 싶었다. 카이저빌헬름연구소(KWI)는 과학계에서 상당히 새로운 시도였다. 정부가 제공한(비록 대부분 개인들이 자금을 대긴 했지만) 땅에 최고의 인재들을 끌어모아 집을 제공하고 학계와 기업의 구속에서 벗어나 연구할 수 있게 지원하겠다는 의도였다. 미국의 카네기 연구소를 부분적으로 본보기 삼아 설립되었다. (중략) 하버 같은 유대인에게는 이 프로젝트가 장교로 군복무하는 것(유대인은 자요로 군복무를 할 수 없었다)의 대안이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보일 기회였다. (중략) 이곳 달렘의 과학계에서는 유대인이 독일의 문화와 발전에 이바지할 기회가 많았다. (중략) 하버의 가장 친한 친구에 따르면 그곳에서 "프리츠 하버는 위대한 과학자에서 위대한 독일인으로 완벽히 변신했다."
- P162

1911년 5월 7일, 보슈가 공장 건축의 책임을 맡은 오파우 공장 건설이 시작되었다. 보슈는 설계와 건축을 전부 감독했다. 복잡한 프로젝트의 여러 부분을 처음부터 끝가지 꿰어 맞추는 종합 계획 시스템total planning을 도입했다. (중략) 완공된 건물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었다. 1911년에 나온 디자인이라기보다는 1950년대 산업디자인에 가까웠다. 단순하고 깔끔한 선과 넓고 개방적인 공간에, 자연 조명과 환기를 위해 커다란 창문을 냈다. 오파우에서 공사가 시작한 지 16개월 만인 1913년 9월, 공장이 완공되었다. 시운전 기간 동안 고장과 지연을 테스트했지만, 숙련된 보슈의 팀원들이 처리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지난 3년 동안 그들이 발견한 개선점이 모두 적용된 대형 오븐이 제대로 작동하는 모습은 아름다울 지경이었다. 1년 후, 오파우에서는 암모니아로 만든 비료가 매 시간마다 수 톤씩 생산되었고, 칠레산 비료에 비해 경쟁력 있는 가격에 판매되었다. 생산이 최고조에 이르자, 수익은 엄청났다.
- P166

1925년 가을, 공식적인 이름은 Interessen-Gemeinsxhaft Farbenindustrie AG (염료 산업 이익 공동체 주식회사)로 했고, 간단히 줄여 이게파르벤(IG Farben) 혹은 파르벤으로 정했다. 파르벤은 창립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기업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화학기업이었으며, 모든 회사를 통틀어 직원 수로는 (US스틸과 제너럴모터스와 함께) 세계 3대 기업에 포함되었다. 보슈는 회장에 임명되었다.
- P262

보슈는 화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었다. "리더십에 대한 신뢰는 줄어들고, 일을 바로잡을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을 찾는 목소리만 들려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은 것이 있다면, 거대한 도전을 앞두고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절대 그에게 걸린 기대감을 충족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반대로 공산주의자가 개인을 국가의 복지 다음으로 대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저는 개인이 스스로 자신을 공익보다 덜 중요하다고 여기거나 그렇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그러한 욕망이 인간의 본성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P286

(1933년-인용자) 9월이 지나 10월이 되었고, 달렘에서 공식적으로 떠나기로 한 날짜가 지나갔다. 게시판에 붙은 하버의 쪽지만이 그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이 쪽지를 남기며, 저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를 떠납니다. ......제가 이끌었던 지난 22년 동안 평화시에는 인류를 위해, 전시에는 조국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저 스스로 평가해도 된다면, 저는 과학계와 국방에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 P305

플랑크는 개인적으로 초대장을 보냈고, 행사는 1935년 1월 29일 하버가 사망한 지 1년이 되는 날 달렘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중략) 행사일이 되자 플랑크는 행사장에 서서 누가 나타나는지 보며 기다렸다. 나치당원들은 문 옆에서 서서 참석자들의 이름을 적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나치당원들은 문 옆에 서서 참석자들의 이름을 적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여성으로, 정부의 금지 조치로 직접 참가하지 못하는 남자의 아내들이었다. 남편의 마음을 대변하려고 참석한 것이었다. 일부 군인들이 줄을 지어 입장했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하버의 동료들로 몇몇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행사장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카를 보슈를 필두로 이게파르벤의 대규모 대표단이 도착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중략) 하버 추모 기념식은 혁명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단지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후 독일 과학자와 그들의 대표가 나치의 비위를 거스르면서도 공개적으로 모였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 P314

독일 군수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가 말했듯이 콘크리트와 폭탄의 대결이었다. 로이나 전투로 불리게 된 이 전투는 거의 1년 동안 계속되었다. 날씨가 허락하는 한 폭격기들은 계속해서 이 지역을 폭격했다. (중략) 전쟁이 끝난 후 슈페어는 연합군이 로이나를 비롯한 합성연료 공장들만 밤낮으로 폭격했다면 전쟁은 8주 만에 끝났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 연합군은 로이나에 22번의 대규모 공습을 가했고, 그 공습에서 폭격기 6000여 대가 1만 80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 P325

보슈가 만든 꿈의 기계는 마침내 세 번째 독일에 대한 희망과 함께 박살이 났다. 하지만 그 기계는 다시 살아나 전 세계로 퍼져나가, 로이나보다 훨씬 생산적이고 보슈가 상상했던 것보다 효율적인 공장이 되었다. 보슈의 고압 기술은 군사용 목적이 아닌 보슈가 원래 의도했던 대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데 이용되었다.
- P327

1961년까지 중국인 3천만 명이 영양실조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대약진 운동 대신, 마오는 역사상 최악의 대규모 아사 사건인 중국의 대기근을 촉발했다. (중략) 1970년대 초까지 중국의 평균적인 식단은 한 세대 전보다 나빠졌다. 그 사이에 있었던 사건은 큰 홍수 한 번, 긴 가뭄 한 번이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를 대규모 기근에 빠트렸다. 바로 35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오늘날 중국은 심각한 비만 증가와 싸우고 있다. 그때와의 차이점은 하버-보슈 공법이다. 중국 정부가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베이징 방문 이후 체결한 첫 번째 중대한 상업적인 거래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최신의 현대적인 하버-보슈 고정 질소 공장 13곳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 P330

더 직접적으로 하버-보슈 공정의 영향을 가늠하고 싶다면 자기 몸을 보면 된다. 내 몸 안의 질소 중 절반가량이 하버-보슈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질소는 질소일 뿐이다. 하버-보슈 암모니아에 존재하는 원자들은 최상의 천연비료에 존재하는 원자들과 정확히 똑같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어떻게든 내가 숨쉬는 공기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내 피와 피부, 머리칼, 단백질, DNA에 존재하는 질소의 절반은 인간이 합성한 것이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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