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의 시대 -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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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종교, 인간의 마음과 사회의 작동 방식에 대한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모아 놓은 종합 선물세트 같은 책.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지만, 해박한 이야기꾼과 함께하는 독서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꼈다. 

나는 우리가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arl Jspers, 1883-1969)가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부른 시기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중략)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에 세계의 네 지역에서 이후 계속해서 인류의 정신에 자양분이 될 위대한 전통이 탄생했다.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이스라엘의 유일신교, 그리스의 철학적 합리주의가 그것이다. 축의 시대는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레미아, "우파니샤드"의 신비주의자들, 맹자, 에우리피데스의 시대였다.
- P6

축의 시대의 영성(정신성, spirituality)을 처음 시도한 이들은 러시아 남부의 초원 지대에 산 목축민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아리아인’이라고 불렀다. 아리아인은 별도의 인종 집단이 아니었으며, 아리아인이라는 말은 인종적인 용어가 아니라 자부심의 표현으로서 ‘고귀하다’거나 ‘명예롭다’ 같은 의미였다. 아리아인은 공통의 문화를 지닌 부족들의 느슨한 네트워크였다. 이들이 아시아와 유럽의 몇 개 언어의 기초를 이루게 될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인도-유럽어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P23

하나라 이전에 중국을 통치하며 평원을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들었던 시화 시대의 전설적 왕들에 관한 이야기는 남아 있다. 황제(黃帝)는 괴물과 싸워 해, 달, 별의 길을 바로잡았다. 신농(神農)을 발명했으며, 기원전 23세기에 지혜로운 두 임금 요(堯)와 순(舜)은 평화와 번영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순의 시대에 큰 홍수가 일어나자 순은 토목을 책임지던 우(禹)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맡겼다. (중략) 우의 엄청난 노력 덕분에 백성은 벼와 기장을 재배할 수 있었다. 순은 이 치적에 큰 감명을 받아 우에게 자신의 뒤를 잇게 했다. 이렇게 해서 우는 하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 P59

결국 학자들은 이집트 대탈출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대체로 합의를 보았다. 성경의 이야기는 기원전 13세기가 아니라, 이 텍스트들 대부분이 기록된 기원전 7세기나 기원전 6세기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중략) 이스라엘인이 사실 가나안 원주민이었다면 왜 자신들의 외지인이라고 주장했을까? (중략) 이 집단과 부족들은 계약에 의해 서로 묶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 모두 숙고 끝에 가나안의 오래된 도시 문화에 등을 돌리겠다는 용감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진실로 외부인들이었으며, 주변부에서 산 경험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외부 기원설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반(反) 가나안 논쟁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 P78

기원전 13세기의 위기는 낡은 신앙을 박살냈다. 그리스인은 자신들의 세계가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그 트라우마가 그들을 바꾸어 놓았다. (중략) 기원전 9세기에 이르면 그리스 종교는 염세적이고 음산하게 변한다. 그 종교의 신들은 위험하고 잔인하고 자의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인은 눈부시게 찬란한 문명에 이르렀지만, 결코 비극의 감각을 잃지 않았으며, 이것이 그들이 축의 시대에 종교적으로 가장 크게 기여한 점으로 꼽히게 되었다.
- P101

야훼는 전사신이었다. 그는 농업이나 다산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풍년을 보장받으려고 당연하게 바알과 아나타의 고대 제의를 거행했다. 바알은 땅을 비옥하게 하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의 예언자들은 야훼만 섬기고 싶어했으며, 야훼가 그의 민족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 P117

시온 신앙에서 예루살렘은 ‘가난한 자’의 도시였다. 그러나 가난은 물질적 궁핍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난’의 반대말은 ‘부유함’이 아니라 ‘오만’이다.
- P177

기원전 8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전은 작고 독립적인 도시국가 폴리스의 창조였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자치의 기술을 배웠다. (중략) 폴리스는 평등한 사회였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 농부들은 오래된 귀족에게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굴종적인 역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노예와 여자를 제외한 모두가 시민이 될 수 있었다. 폴리스는 호전적이고 남성적인 국가였다. (중략)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알 수 있듯이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 귀족들에게 대중 연설은 군사적 위용만큼이나 중요했다.
- P181

"일리아스"는 죽음에 관한 시다. 등장인물은 죽이거나 죽임을 당한다는 강박에 지배당한다. 이야기는 무자비하게 불가피한 소멸을 향해 움직여 간다. 파트로클로스가 죽고, 헥토르가 죽고, 아킬레우스도 죽고, 아름다운 도시 트로이도 죽는다.
- P191

모든 그리스 신에게는 어둡고 위험한 측면이 있었다. 누구도 전적으로 선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누구도 도덕성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역설을 회피하거나 세계의 어떤 부분도 부정하지 않고 함께 삶의 풍요로운 다양성과 복잡성을 표현했다. 그리스인은 새로운 종교 형식을 개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과거의 믿음에 만족했다. 이 믿음은 축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700년 동안 살아남았다.
- P200

헤시오도스는 호메로스와는 다른 종류의 시인이었으며, 위기를 평가할 만한 완벽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전사 귀족 출신이 아니라 보이오티아의 농부였으며, 동방의 많은 새로운 사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가 소아시아에서 그리스 본토로 이주해서인지 헤시오도스는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의 영웅적 전통보다는 근동, 후르리, 히타이트의 신화에 더 친근감을 느꼈다. 헤시오도스는 물론 자신을 그리스의 음유 시인으로 여겼으며, 심지어 시로 상을 탄 적도 있었다. 그는 영웅적 공식을 사용하는 데 서툴렀으며, 시도 노래로 부르기보다는 글로 썼을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시를 쓰고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단 첫 그리스 시인이었다. 어떤 면에서 헤시오도스는 호메로스적 음유 시인보다는 헤브라이의 예언자에 더 가까웠다. 그는 아모스처럼 ‘양을 치다가’ 처음으로 신이 보내준 영감이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느꼈다.
- P241

경전의 정통성이라는 관념을 앞장서 제기한 "신명기" 저자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도입하려고 물려받은 텍스트를 이용했다. 그들은 기원전 9세기의 언약 법전의 낡은 법을 다시 썼다. 민간의 도살, 중앙의 성전, 종교력과 관련된 새로운 법을 뒷받침하려고 구절을 집어넣고 단어를 바꾸었던 것이다. 그들은 낡은 법, 구전되는 전설, 신앙 관습으로부터 방해나 구속을 받는 대신, 이런 전승을 창조적으로 이용했다. 과거의 전승은 절대적인 것이아니었다. "신명기" 저자들은 과거의 전승을 현재 상황에 빛을 던져줄 수 있는 자원으로 보았다.
- P279

고전적인 요가는 오늘날 서구에서 가르치는 요가와 많이 달랐다. 요가는 에어로빅 운동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긴장을 풀거나 과도한 불안을 누르거나 자기 삶에 편안함을 느끼도록 돕지도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요가는 에고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수행자에게 정상적인 의식과 더불어 그 의식의 잘못과 미망까지 없애버리고, 대신 푸루샤 발견의 환희를 채우도록 가르치는 가혹한 수련법이었다.
- P333

‘요가’라는 말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멍에를 맨다’는 뜻이다. 이 말은 베다 시대 아리아인이 습격 전에 전차를 끌 짐승을 매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하던 말이었다. 전사들은 요가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데바와 같아, 늘 움직이고 항상 전투적인 활동에 참여했다. 반면 게으른 아수라들은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기원적 6세기가 되자 새로운 요가의 남자들은 내적 공간 정복에 나섰다. 그들은 전쟁을 하는 대신 비폭력에 헌신했다. 요가는 우리가 겪는 많은 고통의 근본 원인인 무의식적 정신에 대한 습격이나 다름없었다.
- P334

요가 수행자들의 성취에 놀라 약간 기가 죽은 뒤에 공자를 보면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그가 제시하는 도는 제대로만 이해하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친절하고 차분하고 다정한 공자는 결코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긴 강연이나 설교도 없었다. 설사 제자들과 의견이 다르다 해도, 대개 제자들의 관점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는 요 임금이나 순 임금처럼 성스러운 영감을 받은 현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계시나 전망이 없었다. 그의 유일한 장점은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學而不厭 誨人不倦)."라는 것이었다.
- P349

축의 시대 중국의 다른 철학자들은 중국의 많은 문제에 더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그들이 늘 공자만큼 야심이 컸던 것은 아니다. 공자는 법과 질서 이상의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인간의 존엄한, 고귀함, 신성함을 원했으며, 이것은 서(恕)라는 덕을 얻으려고 매일 노력할 때만 얻을 수 있음을 알았다. 실로 대담한 계획이었다. 공자는 사람들에게 강압 대신 고양된 인간성의 힘을 신뢰할 것을 요구했다. 실제로 자기 중심주의를 버리고 싶어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러나 공자의 도를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삶을 바꾼다는 것을 알았다.
- P359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 시민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500인회는 한 달에 세 번 모였기 때문에 일반 농부나 상인은 500인회에서 일하는 동안 자기 시간의 10분의 1 정도를 정치에 바쳐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열의를 잃지 않았으며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기원전 5세기에 중간 계급은 회의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아테네에서 가장 지성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실험은 시민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고 동기 부여를 받기만 하면, 정부가 야만적인 힘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며, 오래된 제도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개혁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 P376

살라미스 해전은 그리스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무너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태어났다. 그리스인은 훈련받은 대로 이성을 활용하여 엄청난 제국을 물리쳤다. 만일 아테네 시민이 오랜 세월에 걸쳐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의 힘으로 감정을 제어하는 훈련을 하지 않았다면, 테미스토클레스는 결코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전략은 축의 시대의 여러 가치를 보여주었다. 그리스인은 과거에 등을 돌리고, 실험적인 길에 나서야 했다. 그의 계획은 자기 희생을 요구했다. 중무장 보병의 밀집 대형은 그리스인의 정체성에서 핵심이었지만, 살라미스에서 그들은 이 ‘자아’를 버리고, 영웅적 전통에 도전하여 페르시아가 자신들의 도시와 성소를 파괴하는 것을 허용해야 했다.
- P383

무엇보다도 비극은 고난을 무대에 올려놓았다. 비극은 관객에게 삶이 두카라는 것, 고통스럽고, 불만스럽고, 비틀린 것임을 잊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기원전 5세기의 비극 작가들은 폴리스보다 고통받는 개인을 앞세우고, 그 사람의 고통을 분석하고, 관객이 그에게 공감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축의 시대 영성의 핵심에 이르렀다.
- P386

안티고네는 여동생 이스메네처럼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고통을 손에 쥐고 말 그대로 무덤 안으로 "외로운 자부심 속에서 걸어 들어간다." 소포클레스는 폴리스를 향해 깨달음의 꿈이 착각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인간은 툭별한 문화적, 지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압도적인 고통에 직면해 있다. (중략) 그들은 안티고네처럼 비극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노력을 할 만큼 한 뒤에는 당당하게, 용기를 내어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소포클레스는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암시한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깨달음의 꿈이 죽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손에 쥘 수 있는 현실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 P395

이스라엘에서는 축의 시대가 끝이 나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예루살렘은 페르시에 제국의 눈에 띄지도 않는 모퉁이에 있는 망가진 작은 도시였다. 위대한 변화는 보통 변화와 발전의 선두에 선 지역에서 일어났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제국의 힘 때문에 큰 고난을 겪었지만, 이 제국들은 더 넓은 지평과 더 큰 세계를 보게 해 주었다.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는 이 지역의 수도인 바빌론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추방을 당했다가 옐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이제 세계사의 중심에 있기는커녕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서 살았다.
- P419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중국 역사에서 결정적인 이행기였다. 기원전 453년 세 가문이 晉의 제후에게 대항하여 일어나서, 진의 영토에 韓, 魏, 趙의 세 나라를 만들었다. (중략) 주요한 경쟁자들로는 우선 남쪽의 楚를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반만 중국인이었다. 秦은 서쪽 山西에 자리잡은 거칠고 호전적이 국가였다. 齊는 부유한 해양 왕국이었다. 새로 생긴 한, 위, 조는 3晉이라고 불렸다. 燕은 북부 초원 지대 근처에 있었다.
- P454

전국시대에 묵자는 전반적으로 공자보다 더 숭배받았다. 자신이 살던 시대의 공포와 폭력에 관해 직접 발언했기 때문이다. 묵자는 중국 전체가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인간들이 곧 지상에서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인간들이 이기심과 탐욕을 억제하지 않으면 서로 파괴할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감정적인 동일시가 아니라, 적이라도 나와 똑같은 요구, 욕망, 공포를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이해에 기초한 가없는 공감을 게발하는 것이었다.
- P466

"내가 이 모든 굴레로부터 태어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는 최고의 자유를 찾기 시작한다고 생각해보라." 고타마는 이런 행복한 해방을 니르바나(불어서 끄다. 필리어로는 닙바나 한자로는 열반涅槃)라고 불렀다. 그를 묶고 있는 열정과 욕망이 불처럼 꺼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P468

니르바나는 각 사람의 내적 존재 안에서 발견되며, 완전히 자연스러운 상태다. 니르바나는 삶에 의미를 주는 고요한 중심이다. 이 내부의 고요한 곳과 접촉이 끊어진 사람들은 무너져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고요한 오아시스에 다가가게 되면, 더는 서로 갈등하는 공포와 욕망에 내몰리지 않고 어떤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이 힘은 이기심을 넘어서는 데서, 올바르게 중심을 잡고 있는 데서 온다.
- P478

기원전 3세기 중반이 되자 모두들 또 하나의 신비한 통치 교본 이야기를 했다. 이 책은 곧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한비 같은 법가들이 이 새로운 텍스트에 공감했다. "도덕경"은 원래 개인이 아니라 작은 나라의 제후들을 위해 쓴 것임에도 서구에서는 개인의 수양을 위한 인기 있는 고저이 되었다. 우리는 사실 노자라고 불리는 이 책을 쓴 저자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 P578

노자는 우리가 축의 시대 중국에서 만나는 마지가 현자이다. (중략) 노자는 맹자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시대의 공포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비한 경향을 가진 통치자에게 끌릴 것이라는 일종의 메시아적 희망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전국시대의 폭력을 끝장내고 제국을 통일한 것은 도자의 현자가 아니라 秦이라는 법가의 나라였다. 이 놀라운 성공은 군사적 힘에 의존하지 않으면 왕권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처럼 보였다. 이로써 일종의 평화가 찾아오기는 했지만, 도덕성, 자비, 비폭력을 향한 축의 시대의 희망에는 조종이 울렸다.
- P588

쾌락은 호색과 자기 방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타락시아(ataraxia,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모든 정신적 혼란을 피했다. 폴리스 생활은 워낙 긴장되고 예측불가능했기 때문에 자산이 있는 사람들은 공무에서 물러나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평화로운 삶을 누려야 했다. 불운한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 변덕스러운 신들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을 비롯하여 번민을 일으키는 모든 것을 피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죽을 운명이 마음의 독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말아야 했다. (중략) 죽음을 걱정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올바른 이해는 무한한 시간을 보태주는 것이 아니라 불멸을 향한 욕망을 없애줌으로써 유한한 삶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 P596

서양에서는 사람들이 과학과 로고스를 향해 모여들었으며, 인도나 중국의 현자들에 비해 영적 야망이 크지 않았다. 헬레니즘 철학자들은 내부에서 초월적 평화의 영역을 발견하려고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고요한 생활에 만족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정신의 직관적 능력을 훈련하는 대신 과학적 로고스에 의지했다. 서양은 신비한 깨달음을 얻는 대신 세속적인 계몽에 더 흥분했다. 서양의 과학적 소질은 결국 세계를 바꾸며, 16세기의 과학 혁명은 새로운 축의 시대를 출범시켰다. 이것은 인류에게 큰 혜택을 주지만, 과거와는 다른 종류의 정신에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제2의 축의 시대의 영웅들은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가 아니라 뉴턴,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 P602

축의 시대의 영적 혁명은 혼란, 이주, 정복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하나의 제국이 망하고 다른 제국이 일어서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에서 축의 시대는 주 왕조의 붕괴와 더불어 마침내 시작되었으며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면서 끝을 맺었다. 인도이 축의 시대는 하라파 문명이 해체된 후에 일어나 마우리아 제국과 더불어 끝을 맺었다. 그리스의 변화는 미케네 왕국과 마케도니아 제국 사이에 이루어졌다. (중략) 유대인마저도 조국의 붕괴와 그에 뒤이은 추방이라는 트라우마로 인해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 시작해야만 하는 무시무시한 자유를 얻게 되면서 축의 시대로 밀려 들어갔다.
- P623

기독교는 유대인이 되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자 했던 서기 1세기 운동 가운데 하나로서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서기 30년경 로마인에게 십자가형을 당한 갈릴리의 한 신앙 요법사의 삶과 죽음이 중심이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나사렛 예수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유대인 메시아이며, 그가 곧 영광 속에 다시 돌아와 지상에 신의 왕국을 열 것이라고 믿었다. (중략)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 의도가 없었으며 뿌리 깊은 유대교도였다. 복음에 기록된 그의 많은 말은 바리사이파의 가르침과 비슷했다. (중략) 기독교를 이방인의 종교로 만든 사람은 최초의 기독교 저술가 바울로였다.
- P647

축의 시대의 모든 종교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높은 이상에 맞추어 살지 못했다. 이 모든 종교에서 사람들은 배타성, 잔혹성, 미신, 심지어 잔혹 행위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축의 시대 종교들은 그 핵심에서 자비, 존중, 보편적 관심이라는 이상을 공유한다. 이 시대 현자들은 모두 우리 시대와 다를 바 없는 폭력적 사회에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타고난 인간적 에너지를 활용하여 이 공격에 맞서는 영적 기술을 창조했다.
- P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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