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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자스의 유령 ㅣ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 10
존 발리 지음, 안태민 옮김 / 불새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불새 2기로 나와 부활을 알렸던 '최후의 성'은 재미있다. 재미는 있으나 폭력의 수위가 상당히 세고 이야기의 전제가 친절하지만은 않아 두번째 읽을 때 더 재미있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기 어려웠던 면이 없지 않다면, 두번째로 나왔던 '암흑을 저지하라' 는 로마시대로 타임슬립하는 대체역사물로 타임슬립은 많지만, '대체역사' 그것도 배경이 로마!라면 내가 환장할 요소가 충분하고, 이야기 또한 재미있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라면 강력추천하는 책이 되었다. 그리고 세번째로 나온 '캔자스의 유령' 은
존 발리의 단편집 '잔상'을 반으로 나눈(?) 첫번째 권이라고 한다. 나머지 반을 열렬히 기원한다.
이 책을 읽을 즈음에 어슐러 르 귄의 전집들을 읽고 있었는데, 어슐러 르 귄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특별하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슐러 르 귄같은 작가 전에 존 발리 같은 작가가 있었겠구나 싶다.
정말 재미있다. 단편 하나하나가 다 끝내준다. 나는 SF 책 번역되어 나오면 사기만 하는 라이트팬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나마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어슐러 르 귄과 존 스칼지, 조 홀드먼, 로버트 하인라인 정도겠다. 아, 로저 젤라즈니와 레이 브래드버리도. SF는 말그대로 과학소설이고, 뭔가 철학적이고 메세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전 어슐러 르 귄의 글중 '이야기는 포춘쿠키가 아니다. 메세지를 찾지 마라' 는 글을 읽고 느낀바, 부러 막 메세지. 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게 애매하긴 한데, 르 귄의 단편들도 그리고 존 발리의 단편들도 순수한 이야기의 즐거움이 있다. SF 라는 장르 아래 자유로운 설정으로 굳이 SF를 읽는다고 의식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관계와 배경을 설정으로 펼쳐지는 사람(?)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첫번째 이야기인 '캔자스의 유령'에서는 기억을 저장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의 직업은 '환경예술가'이다. 이 세계에서 사람은 웬만하면 죽지 않는다. 기억저장소에 기억을 저장하면, 죽더라도 그 기억을 토대로 다시 재생되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주인공은 상당히 예외적으로 계속 살해당한다. 자신에게 집착하며, 모든걸 무릅쓰고 자신을 죽이려는 존재와 맞선다. 주인공의 직업인 환경예술가란 날씨와 기상변화를 주제로 대지를 배경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이런 배경과 장치들도 재미있고, 결말까지 깔끔하다.
두번째로 나오는 '공습' , 이 이야기는 엄청난 박력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다른 단편들도 각기 나름의 포스가 대단하다. 근데 이 이야기는 더 박력있다고 말해도 아마 이견은 없을 것 같은데.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이므로 줄거리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박력있고 스피디하게 진행되면서 펼쳐지는 결말의 임팩트가 대단하다.
'역행하는 여름' 의 이야기도 굉장히 새롭다. 달에서 수성으로 온 누나와 동생의 이야기. 이야기마다 다르긴 하지만, 존 발리의 세계에서 우주인(?)들은 엄격한 산아제한으로 1명당 하나의 아이를 낳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여기서도 그런데, 주인공은 어떻게 누나가 있는 걸까. '수성'이 배경인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내 기억으로는 처음 읽는데, 이제'수성'하면, 어느 여름날. 과 같은 뜨겁고 아름다운 행성과 남매의 이야기가 떠오를 것 같다.
'블랙홀 지나가다' 는 만약 이 책의 표지를 만든다면, 이 이야기에서 따온 이미지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보는 내내 영화 '그래비티'가 떠올랐다. 조지 클루니와 산드라 블록이 연인사이였다면? 산드라 블록은 그 나름으로 씩씩한 서바이버이지만, 조지 클루니의 희생이 있었다면, '블랙홀 지나가다'에서는 여자가 더 주체적.
그러고보니 여기 나오는 단편들 모두가 여자가 주체적이고 주도적이다. 재미있어.
마지막 단편인 '화성의 왕궁에서' 는 표류하게 된 화성탐사단 이야기. 여기서는 존 스칼지 이야기들이 많이 떠올랐다.
현재의 SF 작가들이 영향 받고 빚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6-70년대의 SF들이라서 지금의 세련되고 유머러스한 작푸들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것 같다.
마지막 단편을 읽고 나면 근래 들어 가장 짠한 '불새출판사'의 발간후기와 '살아남기 게임' 에 대한 숙고와 결과가 나와있다. 누구도 이 사람이 열심히 하고, 몸을 불 살랐다는 것에 대해 이견을 낼 수 없을 것이다.
불새의 책들은 알맹이가 정말 괜찮다면, 그 외의 것들은(가격, 표지/편집디자인, 교정, 책만듦새 등) 모조리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는 좋은 예시이다. 삐까뻔쩍하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엄청 재미있으니깐,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