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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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리히가 히믈러와 함께 만들어 가는 팀워크에서 하이드리히는 SS의 두뇌 역할을 한다 (SS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HHhH'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는 듯이다).


하이드리히가 그 잔인한 히틀러의 애정하는 부하였던건 맞는데, 제목의 HHhH의 H는 책소개에서처럼 히틀러가 아니라 히믈러이다.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


요즘 미국발 뉴스를 보면서 얼마전에 읽은 이 책이 계속 생각났다. 지금까지 히틀러와 나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들은 가장 극적인 학살 부분에 대해서만 영화나 책으로 접했고, 2차대전은 교과서에서 본 지식이 다라는 걸 이 책을 읽고 깨달았다. 이 책을 읽고서야 정말 심각하게 '어떻게 이런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를 고민해보게 되었다. 


트럼프가 이슬람 7개국을 그들이 미국 국적이건 아니건간에, 미국에서 어떻게 일상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미국 비자를 가지고 있던 말던 상관없이 '출신 국가'를 이유로 급작스럽게 입국금지 조치를 취한 것은 나치와 똑같다. 나치가 이렇게 시작했고, 처음부터 가스실에 유대인들을 밀어넣고 학살한 것이 아니었다. 독일인들도, 그리고, 주변국들도(당시 주변국들의 지도자들이 특히 더 한심하긴 했지만) 어, 어, 하는 사이에, 이런 엄청난 비극의 역사를 낳은 것이었다.  


이 책은 프랑스의 소설가가 히틀러의 오른손과 같았던 하이드리히의 암살사건을 소설로 쓰는 이야기이다. 250여개의 단문으로 이루어진 '소설 쓰는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인데, 독특한 형식과 역사적 사실, 중간중간 작가의 소회가 끼어들며 이미 결말을 아는 그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단문이 이렇게 길게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이하다. 잔인한 이야기들이 건조하게 서술되어 그 임팩트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책 속의 저자는 책을 쓰며 작가가 겪는 드라마도 함께 쓰고 있어서 현실과 과거를 오가는 이야기로 과거가 현재까지 기억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이드리히가 있고, 하이드리히 암살 임무를 담당한 체코의 낙하병 둘이 있다. 책 속의 저자는 그 둘이 영웅이라고 충분히 칭송하고, 나비효과처럼 그들의 암살 시도가 히틀러를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책은 하이드리히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따라가는 이야기라 어쨌든 하이드리히가 메인이다. 


독일인의 효율성이라는 것이 몇 번인가 나온다. 끔찍하다.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사피엔스의 미래' 에서 과학자파 스티븐 핑커와 매트 리들리, 그리고 인문사회학/저널리스트인 알랭 드 보통과 말콤 글래드웰이 각각 인류의 미래는 긍정적일 것인가에 대한 토론을 했다. 참석자들은 '긍정적일 것이다' 라고 주장한 스티븐 핑커와 매트 리들리의 손을 들어줬다. 그들이 요즘의 뉴스를 봤다면, 트럼프를 일주일이라도 겪어 봤다면 좀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 같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독일 제3제국의 정책, 특히 끔찍한 정책이 중심에는 언제나 하이드리히가 있다. 정말 놀라울 뿐이다. 1939년 9월 21일 하이드리히는 직접 서명한 『점령지의 유대인 문제』공문을 관련 부서들에 전달한다. 유대인들을 게토에 몰아넣기로 결정했으며 유대인 평의회 '유덴라트'를 창설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다. 제국보안부 직속 기관인 악명 높은 유덴라트는 아이히만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하이드리히는 이 아이디어가 오스트리아에서 사용된 것을 본 적이 있다. 피해자들이 살기 위해 나치에 협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이디어의 핵심이다. 어제는 약탈, 내일은 파괴.

하이드리히가 자신이 만든 가장 악랄한 부대, 아인자치그루펜을 처음 사용한 곳이 폴란드다. 나치스 친위대 보안방첩부와 게슈타포 대원들로 이루어진 이들 SS 특별 부대는 독일 국방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인간 청소'임무를 담당한다. 팀마다 작은 소책자를 받는다. 얇디얇은 종이로 된 소책자에는 필요한 모든 정보가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다. 그 정보란 점령된 지역에서 제거해야 할 모든 사람의 목록이다. 즉, 공산주의자, 교사, 작가, 기자, 사제, 기업가, 금융가, 공무원, 상인, 부유한 농부... 조금 유명하다 싶은 사람은 다 있다. 수천 명의 이름이 적혀 있고 이들의 주소와 전화번호도 적혀 있다. 그리고 이들 불순분자들이 친척이나 친구의 집으로 피신할 경우에 대비해 이들의 주변 인물 목록도 적혀 있다. 이름마다 옆에 인상착의가 적혀 있고 사진이 붙어 있을 때도 있다. 하이드리히의 정보국은 이미 우수한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치밀한 준비는 조금 과한 면이 잇는 듯하다. 실제로 현장에 투입된 부대들은 무턱대고 아무나 쏘아 댔다. 폴란드 시골에서 제일 먼저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12~16세의 보이 스카우트들도 있다. 시장 광장에서 벽에 일렬로 선 채 총살을 당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과 마지막 예배를 한 사제들도 총살된다. 아인자츠그루펜이 상인, 지역 명사 들을 총살시키는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바로 일어난 일이다. 아인자츠그루펜의 활동을 자세히 기록한다면 보고서는 수천 페이지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 일 이후로 그들이 처리한 일은 '기타'라는 두 글자로 요약되게 된다. 심지어 무수한 '기타'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을 소비에트 연방에서까지.

1942년 5월, 아인자츠그루펜이 추진하는 학살 임무에 투입된 병사들은 심각한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한다. 학살하는 대신 점차 이동식 가스실을 쓰기로 한다. 이 새로운 시스템은 매우 간편하고 기발하다. 유대인들을 태운 트럭에 배기가스 호스를 연결해 일산화탄소로 질식시키는 방법이다. 장점은 두 가지다. 첫째, 학살에 참여하는 병사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겪지 않고도 유대인들을 한 번에 더 많이 죽일 수 있다. 두 번째, 학살 담당자들이 재미있게 생각하는 특이한 현상이 발견된다. 시신이 핑크색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단점은 사람이 가스에 질식되어 죽는 과정에서 변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 독가스 사살 후 매번 트럭 바닥에 널린 변을 치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드리히는 이동식 가스실의 기술이 아직 부족하다고 설명한다. 하이드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좀 더 탄탄하고 완벽하며 효율적인 방법이 나올 겁니다." 그리고 갑자기 하이드리히는 경청하고 있는 장교들에게 불쑥 한마디를 덧붙인다. "유럽의 유대인들에게는 전부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아인자츠그루펜이 이미 유대인 100만명 이상을 처형했으니 참석자 중 하이드리히의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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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라이프 아이디어 55 - 일상이 심플해지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미쉘 지음, 김수정 옮김 / 즐거운상상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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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미니멀라이프 책이었는데, 기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 이상 얻고, 멋지고 동경하는(모든 미니멀라이프 수행자, 살림과 청소에 재주 있는 이들을 동경합니다) 사람들의 글과 사진들을 보니 보는 동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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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7-01-31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년 봄이 되면 미모사로 드라이플라워를 만듭니다. 드라이 플라워로 만들면 선명한 미모사의 노랑색이 약간 바래지는데 저는 이 느낌을 무척 좋아합니다.

꽃은 나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꽃을 중심으로 인테리어를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새 물건을 사고 싶다는 충동이 사라집니다. 생화를 즐긴 후 그대로 드라이플라워를 만들기도 합니다. 봄에는 미모사, 여름에는 수국, 가을과 겨울은 장미나 유칼립투스 등. 가지 끝을 끈으로 묶어서 거꾸로 매달아 둡니다.

하이드 2017-01-3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기하게도 집 안에 하나의 심플한 공간이 생기면 그 영향은 다른 방으로 조금씩 전염되어 갑니다. 거실에서 현관으로, 부엌으로 , 침실로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심플한 공간의 선순환은 언제나 하나의 작은 공간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현관이어도 좋고 화장실이어도 좋습니다. 우선 한곳만 심플하게 만들기. 꼭 시도해보세요.

하이드 2017-01-31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소중하게 쓰고 싶은 시간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생활을 심플하게 만들면 그만큼 여유가 생겨서 자신에게 소중한 시간과 충분히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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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나를 선택했는지 궁금했어요. 서로 많이 알지도 못하는데요."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질문. 각자의 오랜 인생 파트너를 떠나 보내고, 함께 밤을 보내기로 한 남자와 여자. 

한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살면서 이런 사랑의 시작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 더 놀라울 정도로 그들은 그렇게 그녀의 침대에서 '밤에' 사랑을 시작한다. 사랑이었을까, 호기심이었을까, 밑져야 본전이었을까.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그것은 사랑 비슷한 것이긴 했을 것이다. 아니, 사랑의 한 모습이었겠지. 백만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만가지의 사랑이 있을테니깐.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가 하는 사랑 또한 같은 사랑이 아닐테니. 


거절 당할까 두려워하지만, 괜찮다고 생각한다.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이 수근거릴 것이 두렵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더 이상 사람들 평판 따위 신경쓰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신경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경쓰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안쓰러운 부분. 내 보기에 남자의 시작은 가벼웠고, 여자의 끝은 용기 없음이었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는데, 그 강요받은 선택이 아들놈새끼한테 왔다는 것이 화나고 답답한 부분. 


"토요일 정오 직전, 그는 그녀의 집 앞에 왔다. 그녀는 등이 파인 노란 여름 원피스를, 그는 빨강과 초록이 섞인 웨스턴 풍의 반소매 셔츠를 입었다." 


이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그들은 남들의 평판에 신경쓰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오기 부리듯이 차려입고 가장 사람 많을 시간을 골라 마을의 카페 정중앙 자리에 앉는다. 예쁜 드레스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 드레스들을 입은 모습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숨어 다른 도시로 음악회를 보러 다녔던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등이 파인 노란 여름 원피스를 입고, 자신감도 함께 입어지기를 바라며, 자신이 선택한 이와 함께 마을로 나선다. 


둘 다 사별하고, 만나는데, 뭐가 문젠데..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답답했지만, 완벽한 사랑이 어디 있으랴. 아니, 흠 있는 사랑조차 완벽할지도 모르겠다. 


"아주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요. 좀 신기해요. 여기 깃든 우정이 좋아요. 함께 하는 시간이 좋고요. 밤의 어둠 속에서 이렇게 함께 있는 것.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잠이 깼을 때 당신이 내 옆에서 숨쉬는 소리를 듣는 것." 


애인과 함께 하는 밤은 나에게 '어둠'이다. 그 외의 나의 모든 밤은 형광등 불빛이다. 혹은 스텐드의 노란 불빛(이었는데, 전구 나가고 새로 못 사고 있어). 나는 24시간 불을 켜 놓고 사는 사람이다. 아주 가끔 불을 끈다. 그 때의 나는 무척 지친 상태이다. 하지만 애인과 함께 하는 밤은 나에게 편안하고 안심되는 '어둠'이다. 어느 날인가, 늦은 오후, 커튼까지 친 방안은 무척 깜깜했다. 집에 돌아가야 하는 나는 문득 무서워졌다. 애인이 이 큰 집에 혼자 깜깜한 방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이 들었고, '괜찮아?' 물었다. 내가 24시간 불을 켜 놓고 산다면, 이 사람은 전기가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이 불을 끄고 사는 사람인데, 당연히 '괜찮다' 고 한다. '그래, 그럼 됐어' 라고 말하지만, 애인과 함께 있을 때만 느끼는 편안한 어둠, 밤을 절절하게 깨닫는다. 형광등 불빛 아래 홀로 고양이 둘과 있는 나의 밤과 애인과 함께 하는 깜깜한 밤은 다른 밤 같다. 수면장애가 일상인 나의 영혼도 그 밤들만큼은 깊은 수면을 취한다. 

 

"아직도 이해를 못하네요. 나는 당신처럼 혼자 앉아 생각에 잠기고 문제를 정리하고 그러기가 싫어요. 당신이 와주기를. 나와 이야기 해주기를 원해요." 


이건 꼭 나같네. 

하지만 절대 원하지 않는 결말. 식어버린 사랑. 우정이나 의리나 동료애나 뭐라도, 좋은 그 무엇으로도 변하지 못하고 식어서 재가 되어 흩어지는 사랑. 원하지 않는다. 절대. 네버. 


차츰 루이스가 오지 않는 날이 생겼고 애디 또한 루이스와 함께 누워 있기보다는 혼자서 책을 보고 싶은 밤이 늘었다. 그녀는 옷을 벗고 그를 기다리기를 멈췄다. 그가 오는 날이면 아직도 손을 잡긴 했지만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습관과 쓸쓸함, 그리고 예감된 외로움과 낙심 때문이었다. 마치 다가올 무엇에 대비하여 이런 순간들을 비축해두려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깨어 말없이 함께 누워 잇을 뿐 이젠 사랑을 나누지도 않았다. 


"왜 나를 선택했는지 궁금했어요. 서로 많이 알지도 못하는데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친절한 사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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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을 팝니다 - 사회학자의 오롯한 일인 생활법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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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 아마 우에노 치즈코의 싱글 시리즈로 알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우에노 치즈코가 이런 말랑말랑해 '보이는' 에세이를? 싶었지만, 시리즈라고 하니, 뭐, 그럴수도.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지만

무엇을 하고 싶지 않은지는 분명히 알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가능하면 늦은 오후에 



두개의 문장으로 들어간다. 책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우에노 치즈코의 이야기들이라 공감할 때도, 공감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들어가는 문장들에 고개를 깊이 끄덕거린건 내가 '싱글의 오후' 를 느껴서 일까? 


좋아하는 일은 아니잖아,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해보고 싶고,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라고 말하는 여행사 하는 동생에게, 일이란게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면 좋겠지만,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좋은거지.라고 대답했다. 


일뿐만 아니라, 이 나이가 되니, 이 나이가 되어도,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모호하지만, 무엇을 하고 싶지 않은지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것이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면서 점점 분명해지는 걸까? 


나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내 사전에 없는 것은 '불면', '심심함', '외로움' 등이다. 

혼자서도 시간 너무 잘 가는걸. 책이 있으면 더욱 더. 책을 읽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떤 모습이 되어갈 것이라는 것에 대한 구체적 상상이 거의 없었는데, 어제 문득 어떤 분을 보고, 아, 나이 들어 지금처럼 책을 읽는 모습 멋진걸, 싶었다. 여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잘 지내. 늦은 오후, 아직 밝은 시간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차나 홀짝이며 책 읽다가 낮잠 자는 것을 좋아해. 인생의 오후로 다가가는 시간, 나는 고양이들이 있고, 애인이 있는 '싱글'이다. 


'생각나는 것', '좋아하는 것', '나이를 먹는다는 것', '싱글의 현재' 

네가지 챕터로 나누어 여러가지 주제들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자의 다른 책들처럼 무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막 말랑말랑하고 .. 그런걸 기대하지는 않겠지? 

읽으면서 전혀 그런 기분은 아니었다. 싱글?여자 노년의 또 다른 에세이, 사노 요코와도 다르다. 유머 없고, 생각보다? 친절하다? 


세상은 나를 '공격적인 남성혐오자'로 여기는 듯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나는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관용적이며 성을 내는 일도 드물다. 왜냐하면 남자에 대한 기대수준을 낮게 잡고 있기 때문에 개개인의 남자에게서는 기대 이상의 미덕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마음이 선뜻했다. 관혼상제 중 유일하게 장례식을 챙긴다고 하는데, 이승에서의 이별을 똑바로 하고 나아가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희미하다고. 그렇지. '장례식'은 남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이별의식.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주제이기도 하고, 개인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 개인이 우에노 치즈코이다보니 '여성'의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귀중하게 건진 이야기가 두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에이지즘을 고발하는 페미니스트 바버라 맥도널드의 대사를 옮겨 놓은 것이다. 그녀는 칠십대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다른 노인과 달리 건강하고 기운이 넘친다는 말을 늙은 여성에게 하면서 그것을 칭찬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 여자가 칭찬으로 받아들였다면 당신은 늙은 여성을 거부하는 일에 일조한 것이 됩니다. 

늙은 여성에게 나이보다 훨씬 젊으시군요, 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당신들의 오만에서 나온 말일 뿐만 아니라 외모에서 나이가 드러나는 것을 나쁘게 보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늙은 여성은 당신들 젊은 여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당신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늙은 여성이 옛날부터 나이가 많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들은 70세, 80세, 90세가 어떤 것인지를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늙은 여성을 부정하는 사회에 사는 우리는, 늙은 여성이 이 경험에 대해서 말하면 말할수록 그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일인지 알게 됩니다. 


이어지는 글도 맘에 든다. 역시 바버라 맥도널드가 썼던 글 중 


젊은 여자들은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려달라며 늙은 여자의 라이프 히스토리를 인터뷰하러 찾아온다. 내가 매일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물어보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 그녀들은 나의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만 관심이 있다. 나는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매일을 살아가는, 그저 나이가 많을 뿐인 여자인데도 말이다. 노인은 과거의 껍질이 아니다. 반대로 누구도 경험한 적이 없는 연령'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


나이에 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나온다. 나야 '현재'주의자라 늘 지금이 나이가 제일 좋다. 막 최고야, 좋아, 짜릿해, 그런건 아니지만, 만족하고, 불만 없다. 오오, 나이 드니깐 PMS가 생겼어. 막 이러고 살고 있고, 대충 '나이 들어서 그래'가 몸의 모든 증상에 맞아 떨어지기 시작하는 그러면서 '운동 해야 해!'를 끌어내는 뭐 그런 현재. 


'젊음'에 대한 과도한 선망은, 특히 여자의 젊음에 대한 집착에 대해 인지하고, 격파할 필요가 있다. '나'에 관해서도 그렇고, '타인'을 대할 때도 그렇다. 


시간과 경험이 이 사람이 '현재'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사귀어야 하는 것은 이 사람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여야 한다. 


이 이야기가 좋다. 우에노 치즈코의 책에서도 몇번이나 반복되는 이야기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모여 만들어진 나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내 안의 여성 콤플렉스>인데, 1장에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는 추동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듯 근본적으로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는 추동력은 어느 한쪽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여성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 다양한 만큼 수많은 길을 열어 둔 채 서로 지지하고 격려하는 일이 필요하다. 20세기 여성들이 여성으로 길들여지기를 거부했다면, 21세기 여성들은 서로의 격려 속에서 저마다 '자기 자신'으로 길들여 가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명한 지도자에 의한 조직의 통합이 아니라 여성 자신의 삶을 변혁하는 것"이라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은 유효하다. 표면적인 성평등 사회에서 여성의 삶을 여전히 지배하는 전통적 여성성 혹은 남성성에서 벗어나는 첫 관문은 '가면 벗기기'다.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일, 즉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삶을 제어해 온 콤플렉스와 마주하는 일 말이다. 


평소 콤플렉스에 대해 나쁜 뉘앙스만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책을 읽고 느끼게 되었다. 콤플렉스에 대해 조금만 더 덧붙이면 


콤플렉스는 무의식적이고 제어하기 어렵다.  콤플렉스는 타고난 기질과 사회경제적 현실 속에서 개인이 체험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내면화되면서 만들어지는데, 일단 콤플렉스에 빠지면 어떤 것에 강하게 집착하는 성격이 나타난다. 콤플렉스는 세계관과 가치관뿐 아니라 어떤 대상이나 행위에 대한 흥미와 동기 등에도 영향을 주고, 행동을 지시하며 성격 형성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콤플렉스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자신에게 어떤 콤플렉스가 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자신의 삶이 콤플렉스의 통제를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힘들다. 보수적인 사회일수록 새로운 사상, 학설, 유행에 두려워하듯이,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낯선 것, 새로운 것, 이상한 것 등을 두려워해 없애거나 외면하려고 든다. 


콤플렉스는 개인적인 것이자 사회적인 것. 


우에노 치즈코의 에세이를 막 찾아서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미 고민과 경험을 거치고 현재의 모습인 그의 모습은 좋은 롤모델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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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7-01-27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이든 여자에 관심이 많아요^^
요즘 사노 요코를 재밌게 읽고 있어요. 우에노 치즈코도 찾아볼께요~

하이드 2017-01-31 11:15   좋아요 0 | URL
네, 사노 요코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여성노년 롤모델 이야기가 나오죠. 우에노 치즈코의 책들도 재미있습니다.
 
사피엔스의 미래
알랭 드 보통 외 지음, 전병근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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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스티브 핑커,매트 미들리,알랭 드보통,말콤 글래드웰 둘씩 편먹고 ‘인류의 미래는 긍정적인가?‘를 토론한다.과학자 둘과 인문/사회학자 둘의 대결로 과학 vs.인문학으로도 볼 수 있겠다. 가장 똑똑한 사람들끼리 엄청나게 비꼬고 갈구며 토론해서 웃었다.찬/반 둘 다 공감,내 표는 말콤 글래드웰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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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7-01-25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캐나다의 앞날에는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가?‘ 이것 역시 확실히 그럴 겁니다. 여러분, 캐나다인들은 최근에 국가 지도자를 뽑는 과정에서 엄청난 진전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가 모두 캐나다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만 해도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의 공화당 대선 후보 토론을 5분만 지켜봐도 캐나다 국경 남쪽 저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낙관적인 명제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