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 : 오치제를 바른 소녀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7
은네디 오코라포르 지음, 이지연 옮김, 구현성 / 알마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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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열여섯 살이고 우리 고향 도시 밖에 나와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이착륙항에야. 나는 혼자였고 이제 막 가족을 떠나왔다. 내가 결혼할 가망은 100퍼센트였다가 이제 0퍼센트가 됐다. 도망갔던 여자를 원할 남자는 없었다. 그래도, 평범한 삶을 살 전망이야 무너졌다지만, 나는 성간 수학 시엄에서 아주 높은 점수를 받아서 움자 대학교에 합격했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 필요한 비용 일체를 대기로 약속해줬다. 어떤 선택을 했든 간에 평범하게 살 팔자는 아니었다. " 


멋부림 없이 강한 텐션과 높은 밀도로 완성한 중편. 휴고상과 네불러상 동시 수상. 3부작으로 나온다고 하는데, 빈티는 정말 오래오래 기억될 캐릭터일 것 같다. 


사막 도시에서 우주인들이 사용하는 천문의를 만들어내는 종족, 가장 오래된 가문을 계승할 예정이었던 조율사(천문의를 만들어내는) 빈티는  움자 대학교에 합격해서 온 집안의 반대와 무시를 뒤로 하고, 가출을 하고, 움자대학행성으로 가는 우주선에 타게 된다. 천문의라는 것이 지금으로 말하면 무엇과 비슷할까? 뭔가, 평생을 함께 하는 스마트폰, 아이패드 같은 느낌. 별계측, 생애기록, 통신등이 가능한 미래형 첨단기기이다.  


빈티가 종종 빠져드는 트랜스 상태, 트리되기 상태는 몰입의 상태, 혹은 명상의 상태인 것 같다. 


흙으로 목욕을 하는 종족. 오지체라는 사막의 붉은 흙과 특정 기름 등을 조합하여 만들어내고, 온 몸과 머리에 바른다. 

흑인여성 머리에 대한 것과 같은 이야기가 메인으로 나온다. 후에 만나게 되는 메두스들 이야기도. 


날것의 살아있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캐릭터, 빈티. 그녀의 지력과 능력, 조율사라는 직업, 사막에 거의 은둔하다시피하는 종족성, 등을 가지고 펼쳐지는 일들이 현란하다. 


우주에서 메두스 종족을 만나 겪게 되는 갈등과 그것이 진행되는 이야기가 계속 예상을 깬다. 예상을 깨는 독서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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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이 깨어나는 마을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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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아주 예쁘잖아?" 로저가 가까이 다가서며 휘파람을 불었다. 환한 곳에서 다른 사람의 손에 안전하게 붙잡혀 있는 뱀은 아름다웠다. 은색이라기에는 검고 암회색보다는 밝은 몸뚱이에 번득이는 구릿빛 줄무늬가 길게 뻗어 있었다. 눈은 살아 있는 황옥 같았는데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가 길쭉하게 째진 다른 뱀들의 눈보다 훨씬 매력적이었다. 


 

리뷰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 바로 도서관에 가서 빌려왔다. 2015년에 나왔다고? 아니, 나 2015년에 뭐 했길래, 이걸 이제 알고 이제 읽었지. 샤론 볼턴의 '희생자의 섬'도 재미있게 읽긴 했는데, '뱀이 깨어나는 마을'은 더 더 재미있고,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잔뜩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동물 학대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안 덮고, 끝까지 단숨에 읽었다. 


클래라는 영국 시골의 야생동물 수의사다. 얼굴 한 쪽을 뒤덮는 흉터가 있다. 사람들로부터의 불편하고 불쾌한 시선들을 피하기 위해 시골로 와서 가능한 사람을 기피하고 살고 있다. 


"한때는 그랬어요. 체스터 동물원에서 이랬죠. 내가 전시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피곤해졌고요." (..) 

대단해. 내가 일하는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위인에게 결례를 범하다니.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내가 고슴도치, 토끼를 돌보는 일을 선택한 이유가 정말 궁금할까? 야생동물들에게는 뻔뻔하거나 호의를 품은 주인이 없으며, 수많은 방문객이 야생동물을 멍하니 구경하러 오지 않았다. 내게는 야생동물들을 돌보는 일이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도록 보장해주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이렇듯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척 서투르니까. 


어느날, 마을에 뱀이 나타난다. 전공이 파충류이고, 뱀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많은 그녀는 뱀을 잡고, 뱀을 구하고, 사람을 구하고, 뱀을 조사한다. 


세상에 나쁜 사람들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사람이 아주 많더라도 나쁜 한 사람 때문에 입은 상처가 더 클 수도 있는데, 상처를 주는 나쁜 사람들은 많고, 좋은 사람은 아주 적더라도 그 중간의 평범한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충분히 두껍고 단단한 방패를 세울만했던 클래라는 작은 마을에서 그녀가 가장 잘 아는 그녀의 분야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해결하며, 소수의 좋은 사람과 몇몇의 보통 사람들을 만나며 마음을 조금씩 열게 된다. 


이건 진짜 시리즈 1에 나오는 소개인데! 왜 뒤에 이야기 더 없는지! 


6백페이지가 넘는 책은 충분히 완결로 재미있지만, 역시, 클래라의 이야기를 더 봐야 한다는 절박감이 들 정도이다. 


뭐만 하면 나가서 달리기 하는 클래라 덕분에 나도 책 읽다가 비 오는데, 달리기하러 나갈뻔. 클래라는 진짜 멋있는데, 야생동물 수의사라는 것도 멋있고, 주기적으로 야간 구조 요청 받고 충동하는 덕분에 캄캄한 시골에서도 빠르고 조용하게 길ㅇ르 헤쳐가고, 후각도 청각도 뛰어난 동물적인 감각을 지녔다. 


"비결은 온전한 집중이다. 주위의 모든 것을 감지하고 수용하며 그 순간의 환경에 완전히 빠져들어야 한다. 왼쪽 어깨 위로 다가오는 퍼덕이는 소리, 발아래에서 부스럭대는 작은 생명체들의 움직임, 수여우의 냄새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하한다. 언젠가 시도해보시라. 마음을 비우고 감각에 모든 것을 내맡겨보라. 밤의 생물이 되어본다면 대단히 흥분분되며 아주 차분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가재가 노래부르는 곳에' 의 카야 생각도 좀 났고. 


책 읽는 내내 클래라가 얼마나 꿋꿋하고, 용감하게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슈퍼히어로가 아니라도, 자신의 전문분야로 무장하고, 공포를 이겨내고 한 발 내딛는 용기 있는 클래라. 가장 어렵다는 자신과의 싸움에마저 이겨내는 클래라. 클래라가 새로운 도전을 한 다음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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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트,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 - 그림과 원리로 읽는 건축학 수업
로마 아그라왈 지음, 윤신영 외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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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학진흥회(AAAS)2019 올해의 과학책이라고 했는데, 내게는 올해의 책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책이었다.


이 책의 지은이인 로마 아그라왈은 물리학자이자 구조공학자이다. 아버지는 전기공학자였고, 어머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고 한다. 저자의 평범하지 않은 어린시절과 환경을 보고 그래서 구조공학자가 되었나 잠깐 생각했는데, 모두가 부모 직업덕 본다면, 나는 운동 좋아하는 스포츠소녀였겠지! 하는 생각이 바로 따라 들었다. 


이 책의 원제 빌트(Build)에 덧붙인 부제는 빌트,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 그림과 원리로 읽는 건축학 수업이다. 


정말 좋다는 과학책, 건축책을 사기만 하고, 읽지 못했었는데, 이 책은 정말 순식간에 감탄하며 읽었다. 

아는 만큼 본다고 한다. 이 책을 읽고 알게 된 것으로 내가 사는 세상이 달리 보인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단단히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저자는 현재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더 샤드(The Shard)를 포함해 다리와 터널, 기차역과 마천루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설계하고 만드는 가장 중요한 구조공학자 중 한명이다. 


전문가일수록 초등학생한테도 설명해줄 수 있을만큼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하고, 전문가는 전문가답게 어렵고 학문적인 말로 정확히 설명해야 한다고도 한다. 이 책은 전자에 따른다. 


저자가 만들어내는 커다란 것들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건, 높은 건물이나 다리는 좀 흔들려야 안전한거래. 수준이었는데, 무지하고 생소한 분야이지만, 가장 밀접한 분야였던 것들에 대한 원리를 알게 되는 경험은 짜릿했다. 


이 책의 좋은 점이 너무 많다. 


14챕터로 나누어져 있는데, 목차부터 천재만재다. 

1. 층  우리가 지어올린 모든 것들에 대하여.

2. 힘  중력, 바람,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건물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3. 화재  수많은 재난으로부터 얻은 교훈

4. 벽돌  라미드부터 피렌체 대성당까지 그리고 우리집에도 


이런식으로 인프라 필수 요소들을 하나씩 나열해간다. 뒤로 가면 금속, 바위, 하늘, 땅, 지하, 물, 하수도, 우상, 다리, 꿈 이렇게 나오는데, '우상', '다리', '꿈'  이야기는 감동적이고, 로맨틱하고, 존경스럽다. 완벽해!


싱가폴이 심각한 물부족 국가여서 어떻게 그것을 공학으로 해결해 나갔는지, 9.11때 쌍둥이 빌딩이 왜 무너졌는지, 무너지고 나서 어떤 교훈을 얻고, 반영하게 되었는지, 멕시코의 가라앉는 성당을 어떻게 안전하게 가라앉히며 보강하고 있는지 


로마시대 건물과 건축가들이 나오는 부분들도 굉장히 재미있었고, 저자가 이 모든 것을 쉽고, 재치 있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까지만도 너무 좋은 책인데, 별 다른 잡생각 없이 자신의 일에 대한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남초 집단의 거의 유일한 여자로 일하면서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선배 엔지니어들에게 받은 것들, 후배 엔지니어들에게 넘겨줘야 하는 것들과 현재 자신의 자리까지 확실하게 자각하고 포지셔닝하고 있다는 점이 정말 대단했다. 


공학자들 대단해. 공학이 세상을 만들고, 만들어나갈거야. 라는 저자의 신념에 공감하게 된다. 


저자가  과거로 부터 배우고, 보완하고, 발전시켜 나가고, 당장 해결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방법을 찾아나게 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볼 때마다 반짝반짝 빛이 난다.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막 유일부심 이런 것도 아니고, 한계 또한 알고, 동시에 경계도 하고 있다. 이렇게 좋은 것들을 한 권의 책에서 한꺼번에 보는 것은 정말 흔하지 않은 일인 것이다. 


저자는 초고층 빌딩들과 길고 긴 다리등을 만들며 유명해졌지만, 이런 이야기도 한다. 


"물론 랜드마크가 될 건물은 계속 지어질 것이고 세계 최고의 기록도 계속 깨질 것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의 본성이 우리를 초고층 건물에서 다시 지상으로 내려놓을 것이다. 사람들은 집 안으로 흘러드는 햇빛과 바람을 좋한다. 땅과 우리의 뿌리에 연결되고 싶어한다. 우리는 위를 쳐다보며 우리가 지은 건물에 경이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느낌 역시 필요하다."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짓고, 그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잘나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구조공학자가 이런 말을 한다. 


공학자들이 자연에서 배워 활용하는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강 아래 지하터널을 만들어야 하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다가 브루넬이라는 공학자가 좀조개가 움직이는 걸 보고 힌트를 얻어 터널을 만드는 것, 그리고, 당시에는 구현하기 힘들었던 것을 당대에 전기의 힘으로 구현해내는 것.

 

'공학' 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실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다는 것. 


"도시에서 관광객들이 건물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면 짜릿다. 스스로 깨닫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공학을 사랑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부러진 캐노피와 다란 실루엣 그고 독특한 파사드 등 설계에 투영된 야망과 상상력에 감탄하고 반응하여 셀카봉에 장착한 휴대전화 속의 수많은 사진에 드라마틱한 배경으로 남겨둔다. 이것은 건축학적 드라마로, 공학이 얼마나 낭만적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니 좀 놀랍고, 그런가 싶고. 


번역되기 전부터 열렬한 소문들이 많았던 책인데, 나만 이제 읽고 좋다고 뒷북인거 아닌지 모르겠지만, 정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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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9-11-15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전부터 소문이 돌 정도로 좋은 책이었군요. 저도 여러 경로를 통해 추천만 받고 안 읽었는데 님의 리뷰를 읽으니 주말 목표가 생겼어요

하이드 2019-11-16 08:49   좋아요 1 | URL
네, 좋은거 좋다고 하는 보람이 있습니다. ^^
 
지상의 여자들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5
박문영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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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이 명제 찬성일세. 

왜 신청했는지도 잊고 있을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도서관에 책이 들어왔다. 희망도서 신청할때만큼은 심혈을 다하므로, 좋은 책이겠지.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나니, 짧지만 아주 좋은 꿈을 꾼 것만 같다.


시골도시 구주, 구주에서 남자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여자를 때리려다, 여자를 죽이려다, 여자에게 소리지르다 남자가 사라진다. 

목격정보들이 쌓이면서 판이 벌어진다. 


너무 현실적이지만,  너무 바라는 바여서 꿈 같고, 웃기고, 씁쓸하고, 그랬다. 


시골에 와서 더 실감나는 부분도 있지만, 도시에서 더 많은 1호선 광인같은 사람들을 마주치고 살아야해서 더 실감나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일단 시골에는 사람이 없으니깐. 매일, 무례한 개할저씨들을 볼 확률도 좀 줄어든다. 타인일 경우에는 그런데, 개할저씨가 가족이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꾸준히 무시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여자는 출산 직후에 더 자주 생각했다. 그러나 엎질러진 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그것들을 일일이 반추하며 되돌려 놓는 작업을 하려면 아예 다시 태어나는 게 나았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더 예뻐지셨네요. 과장된 인사엔 항상 비교와 판단이 들어 있었다. 복도에서 누군가를 맞마주칠 때마다 그의 시선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주여성들은 한국인들이 원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게 편의를 보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멍하고 무해한 얼굴로 집안과 거리를 돌아다녔다." 


" 언제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환경을 꾸려 놓고 태평히 지내는 이곳 사람들이 기이하게 낙관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양상은 치밀하고 계산적인 평소 행태와 괴리가 있었다. 한국에 들어왔을 때 여자는 많은 이들이 사고사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의식적인 자살 욕구가 강해 보였다. 하루하루에 연연했지만, 정작 긴 인생을 얼버무리는 이들이 곁에 너무 많았다." 


짤막짤막한 장면으로 이루어진 73개의 챕터가 있다. 챕터 들어가는 첫문장이 시같다. 


성연은 형근의 손을 

놓았다. 이를 


안고 남자를 쫓아가는 여자가 길바닥에 떨어뜨린 게 있었다. 


이런식으로 모든 챕터가 시작됨. 이 책의 실험 하나 더. '그'만 존재한다. '그'에 '녀'를 덧붙인 그녀는 없다. 읽는 동안 계속 사기하게 됨. 그렇다고 이 책이 막 되게 실험소설같고 그렇지는 않다. 내용은 픽션인데, 너무 논픽션 같아서 읽는 내내 조금씩 입꼬리 올라가다가 나중에는 파안대소 하며 읽다가 씁쓸하게 웃다가 그러지만, 좋은 이야기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개할저씨 없는 유토피아. 여자가 안전하고, 여자가 사람인 유토피아. 


" 형근이 타인의 은근한 간섭과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 습성에 변화가 생길 것 같지도 ㅇ낳았다. 그의 입가를 닦아내고, 머물렀던 자리의 부스러기를 치우고, 다음 끼니를 만들어내는 것은 거의 매번 성연의 몫이었다. 성연은 그가 어제의 불찰과 오늘의 불찰을 똑같이 이어가는 까닭이 궁금했다. 답은 가까이 있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시중을 들고 있는 자신 때문이었다. 성연이 쇠똥구리처럼 그들의 일상을 궁글리고 있었다. 그러나 형근에게 뻗어 나가는 손은 반성보다 빨랐다. 가루, 티끌, 먼지를 털어내는 성연의 손은 독립된 기관처럼 움직여 그들 생활의 크고 작은 균열과 무질서를 무서운 속도로 정돈시켰다." 


형근과 성연은 부부, 형근이 다른 지방으로 긴 출장을 간 사이에 구주 분조장남 실종 사건이 시작되고, 출장간 지방이 본가 근처라 본가에 머무르던 형근을 시모가 구주로 못 가게 잡는다. 구주의 여자들이 주인공이고, 주요 인물은 성연, 형근, 성연과 친구이자 연인인 희수, 희수의 딸 선미 


"치료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선미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곳은 특별히 야만적이고 권태로운 장소가 아니었다. 집, 학교, 거거리,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첫 밥벌이의 곤혹은 충분히 예상했다. 그러나 불꽃이 튀는 콘센트에 잭을 꽂고, 청소기를 돌리고, 스펀지를 빨고, 습기 찬 부항을 닦고, 수건을 개키고, 물리치료기 전선을 연ㄱ결하고, 피 묻은 솜과 침을 버리고, 가습기를 조절하고, 밥을 차리고 치우고, 침구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떼고, 침대 밑의 침을 줍고, 쑤쑥뜸을 만들고, 라디오 주파수를 바꾸고, 은행에서 잔돈을 찾아오고, 환자복을 수거해오는 일을 도맡아 하는 동안 선미는 벌어지는 입을 닫을 수도, 도리질을 멈출 수도 없었다." 


이 책은 분명 SF인데, 픽션으로 읽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막 사회문제, 사회파 소설! 이런 느낌도 아니다. 글이 피부에 와닿는다.책의 핵심 이야기는 사이다 중에 사이다인데, 그런 느낌이 강한 것도 아니다. 뉴스 볼 때마다, 다 죽어버렸으면. 이를 악무는데, 죽는것보다 나은 결말인데도 말이다. 그냥 깨끗하게 사라져버리니 더 해피엔딩이지. 그런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가상의 상황임에도, 너무 그럴 것 같아서 웃겼다. 


" 실종을 지켜봤다고

말하는 여자들이 늘었다.

남자들이 화를 내다 


사라졌다는 목격담이 쌓였다. 진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주민들은 적었다. 화가 왜 나쁜지 묻는 사람들도 드물었다. 부당한 처사라고 따져 물을 곳이 없었다. 그러나 화를 어디까지 낼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일은 위험천만한 시도로 여겨졌다. 닥친 사고 앞엣에서 생각은 걸리적거렸고, 거듭한 생각은 비효율적이었다." 




" '요새, 보루, 유토피아' 같은 단어가  

구주 앞에 붙었다. 구주는 


여성들이 살고 싶은 도시로 불리기 시작했다. " 




"실종 외에도 사건, 사고는 연일 쏟아졌다. 수사는 진전이 없었다. 거실, 안방, 부엌,많은 이들이 CCTV와 블랙박스가 설치되지 않은 곳에서 사라졌다. 가정폭력 현장이 다수였다. 거리에 즐비한 카메라는 소용이 없었다. 서류철엔 여자들의 진술만 쌓였다. 부서진 빵가루처럼, 미미한 말이었다. 


나오는 에피소드들도, 작가의 실험도, 소재도, 주제도 결말도, 마지막의 저자의 말까지도 다 좋았다.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지만,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 소설이 소설로 읽히는 날이 올 수도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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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눈의 고양이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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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을 듣는 미시야마 가의 이야기. 이 시리즈를 본지 몇 년이나 된 것 같은데, 가장 좋았고, 

한동안 이 책의 에도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단편들은 나쁘지 않은 정도였는데, 내가 변했는지, 이 단편집이 유독 좋았는지. 첫 단편인 '열어서는 안되는 방' 의 가차 없음에 좀 놀라다가, 두번째 단편 '벙어리 아씨' 가 정말 좋았다. 동화 같고, 신화 같고. 살아 있는 사람도 죽은 사람도 선한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가면의 집'은 유럽 판타지 같았고,  '기이한 이야기책'은 환상특급 같았다. 

표제작인 '금빛 눈의 고양이'는 좀 실망스러웠는데, (픽션 고양이 이야기로 심금 울리기 쉽지 않지) 시간 좀 지나고 나서는 계속 생각나. 털뭉치가 고양이가 되는 거. 여전히 고양이가 죽거나 고양이 싫어하는 사람 나오는 이야기는 전혀 보고 싶지 않지만. 


소설 읽는 뇌세포가 다 죽어버린 거 같다. 소설 못 읽겠던 차에 읽어 내 소설세포를 부활 시켜 준, 역시 미미여사. 


이 책에서 미시야마 가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같아서 이야기가 더 나올지, 아님 2시즌으로 가게 될지 모르겠다만, 

마무리도 아주 좋았다. 서책방 주인, 이 시대의 서점주인인거잖아. 아, 생각할수록 좋네. '기이한 이야기책'의 오치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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