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여자들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5
박문영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8년 12월
평점 :
품절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이 명제 찬성일세. 

왜 신청했는지도 잊고 있을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도서관에 책이 들어왔다. 희망도서 신청할때만큼은 심혈을 다하므로, 좋은 책이겠지.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나니, 짧지만 아주 좋은 꿈을 꾼 것만 같다.


시골도시 구주, 구주에서 남자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여자를 때리려다, 여자를 죽이려다, 여자에게 소리지르다 남자가 사라진다. 

목격정보들이 쌓이면서 판이 벌어진다. 


너무 현실적이지만,  너무 바라는 바여서 꿈 같고, 웃기고, 씁쓸하고, 그랬다. 


시골에 와서 더 실감나는 부분도 있지만, 도시에서 더 많은 1호선 광인같은 사람들을 마주치고 살아야해서 더 실감나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일단 시골에는 사람이 없으니깐. 매일, 무례한 개할저씨들을 볼 확률도 좀 줄어든다. 타인일 경우에는 그런데, 개할저씨가 가족이라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꾸준히 무시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여자는 출산 직후에 더 자주 생각했다. 그러나 엎질러진 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그것들을 일일이 반추하며 되돌려 놓는 작업을 하려면 아예 다시 태어나는 게 나았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더 예뻐지셨네요. 과장된 인사엔 항상 비교와 판단이 들어 있었다. 복도에서 누군가를 맞마주칠 때마다 그의 시선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주여성들은 한국인들이 원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게 편의를 보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멍하고 무해한 얼굴로 집안과 거리를 돌아다녔다." 


" 언제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환경을 꾸려 놓고 태평히 지내는 이곳 사람들이 기이하게 낙관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양상은 치밀하고 계산적인 평소 행태와 괴리가 있었다. 한국에 들어왔을 때 여자는 많은 이들이 사고사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의식적인 자살 욕구가 강해 보였다. 하루하루에 연연했지만, 정작 긴 인생을 얼버무리는 이들이 곁에 너무 많았다." 


짤막짤막한 장면으로 이루어진 73개의 챕터가 있다. 챕터 들어가는 첫문장이 시같다. 


성연은 형근의 손을 

놓았다. 이를 


안고 남자를 쫓아가는 여자가 길바닥에 떨어뜨린 게 있었다. 


이런식으로 모든 챕터가 시작됨. 이 책의 실험 하나 더. '그'만 존재한다. '그'에 '녀'를 덧붙인 그녀는 없다. 읽는 동안 계속 사기하게 됨. 그렇다고 이 책이 막 되게 실험소설같고 그렇지는 않다. 내용은 픽션인데, 너무 논픽션 같아서 읽는 내내 조금씩 입꼬리 올라가다가 나중에는 파안대소 하며 읽다가 씁쓸하게 웃다가 그러지만, 좋은 이야기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개할저씨 없는 유토피아. 여자가 안전하고, 여자가 사람인 유토피아. 


" 형근이 타인의 은근한 간섭과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 습성에 변화가 생길 것 같지도 ㅇ낳았다. 그의 입가를 닦아내고, 머물렀던 자리의 부스러기를 치우고, 다음 끼니를 만들어내는 것은 거의 매번 성연의 몫이었다. 성연은 그가 어제의 불찰과 오늘의 불찰을 똑같이 이어가는 까닭이 궁금했다. 답은 가까이 있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시중을 들고 있는 자신 때문이었다. 성연이 쇠똥구리처럼 그들의 일상을 궁글리고 있었다. 그러나 형근에게 뻗어 나가는 손은 반성보다 빨랐다. 가루, 티끌, 먼지를 털어내는 성연의 손은 독립된 기관처럼 움직여 그들 생활의 크고 작은 균열과 무질서를 무서운 속도로 정돈시켰다." 


형근과 성연은 부부, 형근이 다른 지방으로 긴 출장을 간 사이에 구주 분조장남 실종 사건이 시작되고, 출장간 지방이 본가 근처라 본가에 머무르던 형근을 시모가 구주로 못 가게 잡는다. 구주의 여자들이 주인공이고, 주요 인물은 성연, 형근, 성연과 친구이자 연인인 희수, 희수의 딸 선미 


"치료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선미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곳은 특별히 야만적이고 권태로운 장소가 아니었다. 집, 학교, 거거리,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첫 밥벌이의 곤혹은 충분히 예상했다. 그러나 불꽃이 튀는 콘센트에 잭을 꽂고, 청소기를 돌리고, 스펀지를 빨고, 습기 찬 부항을 닦고, 수건을 개키고, 물리치료기 전선을 연ㄱ결하고, 피 묻은 솜과 침을 버리고, 가습기를 조절하고, 밥을 차리고 치우고, 침구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떼고, 침대 밑의 침을 줍고, 쑤쑥뜸을 만들고, 라디오 주파수를 바꾸고, 은행에서 잔돈을 찾아오고, 환자복을 수거해오는 일을 도맡아 하는 동안 선미는 벌어지는 입을 닫을 수도, 도리질을 멈출 수도 없었다." 


이 책은 분명 SF인데, 픽션으로 읽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막 사회문제, 사회파 소설! 이런 느낌도 아니다. 글이 피부에 와닿는다.책의 핵심 이야기는 사이다 중에 사이다인데, 그런 느낌이 강한 것도 아니다. 뉴스 볼 때마다, 다 죽어버렸으면. 이를 악무는데, 죽는것보다 나은 결말인데도 말이다. 그냥 깨끗하게 사라져버리니 더 해피엔딩이지. 그런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가상의 상황임에도, 너무 그럴 것 같아서 웃겼다. 


" 실종을 지켜봤다고

말하는 여자들이 늘었다.

남자들이 화를 내다 


사라졌다는 목격담이 쌓였다. 진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주민들은 적었다. 화가 왜 나쁜지 묻는 사람들도 드물었다. 부당한 처사라고 따져 물을 곳이 없었다. 그러나 화를 어디까지 낼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일은 위험천만한 시도로 여겨졌다. 닥친 사고 앞엣에서 생각은 걸리적거렸고, 거듭한 생각은 비효율적이었다." 




" '요새, 보루, 유토피아' 같은 단어가  

구주 앞에 붙었다. 구주는 


여성들이 살고 싶은 도시로 불리기 시작했다. " 




"실종 외에도 사건, 사고는 연일 쏟아졌다. 수사는 진전이 없었다. 거실, 안방, 부엌,많은 이들이 CCTV와 블랙박스가 설치되지 않은 곳에서 사라졌다. 가정폭력 현장이 다수였다. 거리에 즐비한 카메라는 소용이 없었다. 서류철엔 여자들의 진술만 쌓였다. 부서진 빵가루처럼, 미미한 말이었다. 


나오는 에피소드들도, 작가의 실험도, 소재도, 주제도 결말도, 마지막의 저자의 말까지도 다 좋았다.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지만,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 소설이 소설로 읽히는 날이 올 수도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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