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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이어령 교수의 딸, 이민아 목사의 소천으로 기독교계가 술렁였다. 많은 사람이 빈소를 찾아 이어령 교수의 표정을 살폈고, 이민아 목사가 남긴 유고는 두 권의 책으로 묶여 독자를 만났다.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고 비교문화와 문학 분야의 석학이라고는 하지만 이어령에게 과도한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아닌지 조금은 회의가 들기도 했다. 돌아보니 이어령의 회심도 크게 회자되었다. 고령의 무신론자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나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인지 그마저도 유별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도 양 한 마리에 돌아오면 기뻐 잔치를 연다고 하시니, 하나님의 마음이야 이해해볼 수 있다. 그래도 기독교계가 떠들썩할 것까지 있을까?
그랬다. 역시 사람이든 무엇이든 만나야만, ‘알아봐야만’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뒤늦게 이어령의 책을 읽고 나서야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기뻐하고 또 집중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렇게 귀한 사람을 하나님은 오래도록 인내하시며 기다리셨고 끝내 손을 잡아주셨던 것이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데 70년 이상의 세월은 기다린 주님의 끈기, 그 인애하심이 느껴졌다. 이 책을 통해 또 한 명의 영혼을 만나시고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났다. 삶에 지쳐 퍽퍽해진 내 마음에 단비 같은 시간을 허락하신 주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하나님의 자취가 보인다
역사에 관하여 들은 말이 하나 있다.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누구는 승자의 이야기라고도 말하는 역사는 사실이 그렇다. 이긴 사람이 지난 일을 정리하다 보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록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사건이 혁명도 쿠데타도 될 수 있는 것은 후대의 사람이 어떻게 그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달려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무신론자로 살아온 긴 시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전혀 다르게 보인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시간이었는데, 돌아보니 그 시간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교토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와이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글은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렇더라”는 결론이다. 교토에서 지낸 그 시간에는 아마도 극한 외로움과의 싸움에 집중했을 것이고, 그 기간에 쓴 시를 ‘무신론자의 기도’란 제목으로 엮어낸 이유는 책을 낼 때만 해도 ‘무신론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상황이 달라졌다.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말은 반어적인 말이 되었고, 기도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되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신은 없다고 하며 살아온 시간이 오늘, 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고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된다. 아마도 나의 삶 또한 그렇지 않을까. 현재의 내 삶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둑어둑하지만 뒤돌아보면 삶의 순간마다 주님이 함께 하셨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뒤돌아보며 그 어디쯤 서 계셨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에 나온 그림 속 군중 사이에서 후광조차 없이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자꾸만 머리에 남아 말을 건다. “이렇게 네 옆에 서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란다.” 하나님이 내게서 사라진 것만 같을 때, 달음질치지 않으면 멀어지는 것 같아 불안할 때에도 하나님은 곁에 계신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진리가 남의 말을 통해 내 귀에 머문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경험이 줄을 이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옮겨간다는 주위 사람의 말에 겸손하게 아직 영성에 대해서는 무지하며, 지성에 대해서도 잘은 모르나 자신은 지성에서 영성으로 건너가는 문지방에 서 있다는 이어령의 고백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어디쯤을 서성이고 있을까, 지성의 극한으로 달려본 적도 없고 영성의 깊은 가운데 있어 본 것 같지도 않은데……. 그래서 먼저 나의 자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명확해질수록 영성을 향한 걸음의 방향도 조금은 더 명확해질 거란 믿음으로.
지금, 포도원의 품삯을 흥정할 때가 아니다
예수님께 병을 고쳐달라고 달려온 백부장이 있었다.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는데, 예수께서 고쳐주려고 하시니까, 이런다. “주님, 저도 제가 부리는 사람이 있어 압니다. 제가 이리 하라 하면 이리 하고 저리 하라 하면 저리 합니다. 예수님도 왕이시니, 직접 행차하지 마시고 명령만 해주세요. 그러면 딸이 낫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크게 칭찬하셨다. 책을 읽으며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이 아는 만큼 보이게 마련이다. 하나님을 ‘알아보는’ 눈이 나와는 분명히 달랐다.
이어령은 줄곧 무신론자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던 젊은 시절을 돌아보는 한편, 뒤늦게 하나님을 만난 자신에게도 같은 은혜와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대한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그때마다 언급하는 것이 바로 포도원 품삯 비유이다. 포도원의 주인이 아침에 나가 정한 품삯을 알리고 일꾼을 데려온다. 저녁에도 포도원 주인은 밖에 나가 같은 품삯을 알리고 일꾼을 데려온다. 하루의 일을 마감하고 품삯을 주는 시간, 늦게 일에 합류한 일꾼에게 품삯을 주는 것을 보며 아침부터 일한 일꾼은 품삯을 조금 더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다. 그러나 품삯은 같았다. 왜일까, 주인이 처음 약속한 품삯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해 들었던 나에게도 하나님은 같은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나는 먼저 믿었으니 조금이라도 더 달라는 떼를 쓸 수 없다. 이어령의 감사는 내게 무거운 짐으로 돌아온다. 하나님을 먼저 알았던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으로 위안을 삼고 감사를 돌리는 이어령의 글이 가시가 되어 눈에 박혔다. 품삯을 더 받겠다는 흥정은커녕,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쫓겨나면 어쩌나 두려웠다. 매주 교회에 가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 나는 왜 조금이라도 더 깊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애쓰지 못했을까. 삶 속에서 만나는 순간순간의 기적을 난 왜 예민하게 감지하지 못했을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성경을 풀어내는 이어령의 예민한 감수성과 깊은 문학적 지식에 감탄만 흘러나왔다. 짙은 외로움 때문에 기숙사의 방을 환히 밝히고 먼 데서 돌아오는 길과 무거운 짐을 지고 별처럼 보이는 등불을 바라보며 걷는 걸음이 푯대를 향하여 걸어가는 순례자의 여정과 겹칠 때, 비슷한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늘 가까이 있어서 그 소중함을 몰랐던 것이라고 변명을 둘러대고 괜찮은 것일까?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기어 깃발에 다다랐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거북이가 도착하든지 말든지 제 흥에 겨워 한숨이 늘어지게 자는 토끼를 떠올렸다. 아마도 나는 먼저 달려나간 토끼일 것이다. 내가 끝내 도착해야 할 곳이 분명하게 있는데도, 경쟁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나의 오만이 하나님으로 향하는 걸음을 자꾸만 멈추게 하였다. 그러다 결국, 결승선을 넘지도 못하고 저 멀리 기쁨을 면류관을 상으로 받는 거북이를 지켜보게 된 것이다. 아차!
더 사랑할 때 더욱 드러나는 기적
토끼가 거북이를 보며 흠칫 놀란 데에는, 무엇보다 기적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우리가 흔히 ‘초심자’의 믿음을 말할 때에는 십자가의 고난이나 성화의 과정과는 달리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새로 돋은 순처럼 여려서 거센 바람에 쉽게 시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할 때가 잦다. 그러다 보니 복만 바라게 되는 단편적인 신앙을 가지게 될 때도 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딸과 손자의 병이 낫는 기적 같은 소식을 접했을 때 이어령이 보여준 모습은 놀라웠다.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여 폴짝폴짝 뛰며 자랑해도 모자랄 판인데 오히려 잠잠히 있으며 예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예수를 더욱 따르려고 힘썼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보며 기뻐하셨을까? 진리를 말할 때에는 눈멀고 귀먹었던 자들이 먹을 것을 해결해주니 마음을 열었다면 그 자체로 절망과 슬픔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병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먹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을 주로 이야기하며 사랑한다고 말해왔다. 예수님이 받고 싶은 사랑은 좀 더 깊은 것이었을 텐데도 우리는 그런 사랑을 드릴 수 없었다. 인간의 나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를 보며 그저 눈물지으셨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들고 다니면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에만 온 정신이 팔려있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 당장 내 먹을 것, 내 쓸 것을 해결해주시지 않는 예수님의 의중만 궁금한 사람이었다. 기복신앙이 나쁘다고 하니까 티를 내지 않은 거지, 속마음은 별다를 게 없었다.
이어령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기적의 본래 모습을 본다. 딸을 사랑하기에 딸에게 일어난 일을 기적이라 여길 수 있었다며,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사랑이 적었기 때문이라 고백한다. 조금 더 깊고 넓은 사랑으로 사람을 대했다면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일상의 기적을 발견했을 거라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매일같이 바라는 나의 모습이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결국 이런 자리였다. ‘주 안에 서라’는 바울의 말이 무색하게, 나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과 닿은 줄을 낚시하듯 잡아당기며 내가 원하는 것만을 요구하고 있는 철없는 아이였다. 놀라운 것은 이런 나마저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70년도 기다리시는 분인데 아무렴! 얕은 내 경험도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은 풍부하신 분이다.
집에서 기르고 있는 두 마리 고양이를 떠올린다. 집에 들어와도 반기지 않고, 머리 한 번 쓰다듬기도 쉽지 않은 고양이. 털은 무수히 날려 방바닥을 뒹굴고, 발톱은 날카로워 스치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입을 때가 잦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고양이를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 고양이 존재 자체로 고양이는 사랑스럽다. 하나님은 어떠실까? 당신이 직접 빚으시고 생명을 불어넣은 존재인 인간은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울 테다. 그래, 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한없이 작아져 외로울 때에도 하나님은 군중 틈에서 사랑의 눈빛으로 나를 지켜 보호하고 계셨던 것이다.
더욱 감사하게 된 것은, 어리기만 한 내 나이다. 일흔의 나이에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느끼는데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내가 못할 것이 뭐가 있을까. 물론, 이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내 나이 일흔이 되어 이어령과 같은 깊이를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내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는 지도 지금은 또렷하게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에 대해서 전혀 감이 없다. 그래도 품삯도 제대로 못 받고 걷어차이는 일꾼이 되고 싶지는 않다. 늘어지게 자고 있던 낮잠에서 깨어나야겠다. 늦었더라도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푯대를 향해 뛰어가는 토끼, 설령 알고 보니 내 모습이 거북이도 못 되는 달팽이라 할지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차근히 걸어가고 싶다. 하나님은 저기서 나를 보며 응원하고 계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