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흡혈귀’라고 말하면 정말 귀신의 일족인 것 같으니까, 뱀파이어로 말하는 게 왠지 더 나은 기분이 드는 그런 종족(!)이 있죠. 나라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역사와 성향, 성격을 가졌지만, 어쩌거나 마력과 같은 매력이 넘치고, 별 일 없으면 영원히 살고, 늙거나 병들지도 않아서 어찌보면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게 아닌가 싶은 무리가 있는데, 이들이 바로 뱀파이어입니다. 완벽해보이는 사람일수록 완벽하지 않을 때 폭발적인 매력이 상승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런 이유로 뱀파이어는 치명적인 단점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어떤 지역의 뱀파이어는 별로 영향을 안 받긴 하지만, 햇빛에 타죽는 경우도 있고, 흡혈을 하지 않으면 시들시들해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영생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는 경우도 있어요.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인간은 시간에 따라 죽는데, 뱀파이어는 그러지 않으니까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는 거거든요. 아이고, 써보니 이렇게 낭만적인 이별이 또 어디있겠나 싶습니다. 이별은 이별인데 사랑은 영원한 거잖아요.

 

문학작품에서 이런 어마어마한 캐릭터를 가만 두고 볼 수 없겠죠. 같은 인간이라도 극적, 예술적 성과를 위해 극단으로 몰아부치는 판에 인간과 닿아있는 뱀파이어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나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살펴봅니다. 뱀파이어 캐릭터는 어떻게 문학작품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시대를 지나면서 뱀파이어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차지했고, 또 시대에 따라 어떻게 옵션을 바꿔가며 살아남았는지 등등.

 

저자는 작품을 중심으로 뱀파이어를 설명해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는데, 생각보다 뱀파이어를 다루는 작품이 많아서 놀라기도 했고,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캐릭터와 전개를 보이고 있어서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에겐 약간 지루한 작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건 줄글에서 강조점없이 뱀파이어의 성격이나 변화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분명 작품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뱀파이어에게 흡혈을 당하면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이 처음 시작했다’ 정도의 설명이 나오는 거죠. 생각없이 읽다가는 그대로 흘려버리겠다 싶은 부분들이어서 정독의 욕심이 없다면, 일렬로 서 있는 뱀파이어 작품 목록 해제를 읽은 기분만 들고 끝날 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재미있었던 건, 뱀파이어라는 캐릭터가 어느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서 갑자기 톡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거였죠. 유럽을 관통했던 수많은 전염병 때문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여럿이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갖게 된 두려움.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것이란 공포와 식육과 식육을 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그 형체를 갖게 된 것이죠. 파묻은 시체를 파내어 뜯어먹는 구울이란 캐릭터도 사람의 피를 마셔 생기를 띄는 뱀파이어도 그렇게 조금씩 자신만의 캐릭터를 구축해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거에요.

역으로 생각해보면 유럽인들의 상상력의 산물이긴 하지만 뱀파이어를 통해 유럽인이 가진 두려움과 잔인함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는 거죠. 뭐랄까요. 처녀귀신이나 박수무당처럼 우리가 전설의 고향 류의 드라마를 통해 만나는 한국형 귀신과 괴물(?)을 생각해보면 쉽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한번 태어난 캐릭터는 소멸하지 않고 세련미를 갖추어갈 뿐 아니라 특화됩니다. 드라큘라 백작이 마늘과 십자가에 무력해진 것과는 달리 최근에 등장한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 종족은 완벽에 가깝지요. 렛미인에 등장하는 북유럽형 뱀파이어는 또 어땠나요. 초대받지 않으면 남의 집에 들어갈 수 없지만, 초대를 받은 후에는 모든 게 가능해지죠. 피는 필요하지만 자신이 피를 보는 수고는 덜합니다. 빛을 피해 잠을 청하지만,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여럿을 죽여버릴 정도의 괴력을 행사할 수 있죠.

이런 뱀파이어 캐릭터는 이제 그 뱀파이어 역사가 전무한 한국까지 진출합니다. 박찬욱의 <박쥐>가 그렇죠. 성직자와 뱀파이어의 조합이 주는 긴장이 송강호와 겹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뱀파이어가 등장한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더욱 앞으로 나타날 뱀파이어를 상상하게 됩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지도 모를 어떤 뱀파이어, 인간이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인간이란 이름으로 해낼 지도 모를 또 어떤 뱀파이어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죠. 뱀파이어의 영생만큼이나 뱀파이어의 이야기 또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직장인이 꼭 알아야 할 노동법 - 입사부터 퇴사까지
권정임 지음 / 생각비행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아마도 “법대로 하자”는 말 때문인지, 법 얘기를 들먹이면, 으레 어디 한 번 제대로 싸워보자는 말처럼 들린다. 어쩌면 ‘노동법’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 자체가 직장에서는 제대로 싸우기 위한 전초전같이 보일 수도 있겠다.

노동법 자체가 불리할 수 있는 근로자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도록 최저의 기준을 세워놓은 것이라서 노동법을 제대로 알아놓고 회사에 조금이나마 어깨에 힘 주고 다닐 수 있도록, 쫄지 않도록 화력을 불어넣어줄 책은 아닌가, 기대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어떻게 하면 회사에 맞서 잘 싸울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입사에서부터 퇴사까지, 어찌보면 사소할 수도 있고 중차대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한 근로자들의 다양한 질문에 대해 법조항과 판례까지 알려주며 되도록이면 이해하기 쉽고 적용하기 편하도록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있다. ‘을’일 수밖에 없는 근로자에게 법을 잘 이용하여 백전백승하길 바란다기 보다는, 문제가 더 커지지 않도록 잘 해결해서 되도록이면 노무사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까. 노무사가 자기 일감 떨어지는 글을 왜 쓰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쩌면, 굳이 싸우려 들지 않아도 노무사가 필요한 상황은 지금 이시간에도 엄청나게 일어나기 때문은 아닐까? 

 

근로자도 근로자지만, 노동을 사용하는 사용자(그러니까 회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라 모르고 지나간 일이 알고보면 불법이라는 걸 알게 되어 이래저래 민망한 경우가 많을 것 같아서 그렇다. 사용자 입장에서야 어떻게든 불법도 무지도 아니었다고 해야하니까 더욱 힘써 법을 알려들테고, 그럴수록 근로자는 모르고 당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니까.  

 

책을 한 번 읽은 걸 가지고, 노동법을 정복했다고 말할 순 없고. 책을 다시 펼치지 않더라도 꼭 기억하고 있어야겠다 마음 먹은 것, 새로 배운 것이 있다.

하나, 그게 무엇이든 문서로 남길 것. 대부분이 큰 사고 없이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이는 것들이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 들이밀 수 있는 건 문서밖에 없다.

둘, 어떻게든 원만하게 합의를 보기 위해 노력할 것. 싸우자고 달려들어봤자, 손해는 언제나 '을'이 더 본다. '을'을 벗어나고 싶은가? 다시 태어나라. ㅠㅠ

셋, 관대한 사용자를 기대하지 말 것. 기대했단 발등 찍혀도 아무도 불쌍히 여겨주지 않는다. 항상 원만한(사이 좋은) 긴장상태를 유지할 것. 특히나 내 마음을 다 알아줄 것만 같은 상사라고 해서 무장해제 상태로 대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디서 '사용자'로 변신할 지 모른다. 또한, 회사가 내 사정을 봐줄 거라는 기대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 퇴직이든 이직이든 그게 뭐가 되었든, 회사가 먼저 신경쓰는 건 내가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라는 걸 잊지 말자.

넷, 결국 ‘나’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나’밖에 없으므로, 근로자의 권익을 위해 ‘나’들이 뭉쳐야만 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잘 꾸려져야 하고, 잘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법대로 하자’인 걸 생각하면, ‘(노동)법’을 들먹이는 순간, 분위기가 냉랭해질 걸 떠올리면 아직도 갈 길이 구만리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은 '모르는 게 약'과 '아는 게 힘' 사이에서 지혜로운 줄타기를 해야 한다. '안다'는 건 그런 거더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이어령 교수의 딸, 이민아 목사의 소천으로 기독교계가 술렁였다. 많은 사람이 빈소를 찾아 이어령 교수의 표정을 살폈고, 이민아 목사가 남긴 유고는 두 권의 책으로 묶여 독자를 만났다.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고 비교문화와 문학 분야의 석학이라고는 하지만 이어령에게 과도한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아닌지 조금은 회의가 들기도 했다. 돌아보니 이어령의 회심도 크게 회자되었다. 고령의 무신론자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나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인지 그마저도 유별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도 양 한 마리에 돌아오면 기뻐 잔치를 연다고 하시니, 하나님의 마음이야 이해해볼 수 있다. 그래도 기독교계가 떠들썩할 것까지 있을까?

그랬다. 역시 사람이든 무엇이든 만나야만, 알아봐야만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뒤늦게 이어령의 책을 읽고 나서야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기뻐하고 또 집중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렇게 귀한 사람을 하나님은 오래도록 인내하시며 기다리셨고 끝내 손을 잡아주셨던 것이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데 70년 이상의 세월은 기다린 주님의 끈기, 그 인애하심이 느껴졌다. 이 책을 통해 또 한 명의 영혼을 만나시고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났다. 삶에 지쳐 퍽퍽해진 내 마음에 단비 같은 시간을 허락하신 주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하나님의 자취가 보인다

역사에 관하여 들은 말이 하나 있다.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누구는 승자의 이야기라고도 말하는 역사는 사실이 그렇다. 이긴 사람이 지난 일을 정리하다 보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록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사건이 혁명도 쿠데타도 될 수 있는 것은 후대의 사람이 어떻게 그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달려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무신론자로 살아온 긴 시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전혀 다르게 보인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시간이었는데, 돌아보니 그 시간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교토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와이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글은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렇더라는 결론이다. 교토에서 지낸 그 시간에는 아마도 극한 외로움과의 싸움에 집중했을 것이고, 그 기간에 쓴 시를 무신론자의 기도란 제목으로 엮어낸 이유는 책을 낼 때만 해도 무신론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상황이 달라졌다.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말은 반어적인 말이 되었고, 기도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되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신은 없다고 하며 살아온 시간이 오늘, 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고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된다. 아마도 나의 삶 또한 그렇지 않을까. 현재의 내 삶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둑어둑하지만 뒤돌아보면 삶의 순간마다 주님이 함께 하셨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뒤돌아보며 그 어디쯤 서 계셨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에 나온 그림 속 군중 사이에서 후광조차 없이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자꾸만 머리에 남아 말을 건다. 이렇게 네 옆에 서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란다. 하나님이 내게서 사라진 것만 같을 때, 달음질치지 않으면 멀어지는 것 같아 불안할 때에도 하나님은 곁에 계신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진리가 남의 말을 통해 내 귀에 머문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경험이 줄을 이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옮겨간다는 주위 사람의 말에 겸손하게 아직 영성에 대해서는 무지하며, 지성에 대해서도 잘은 모르나 자신은 지성에서 영성으로 건너가는 문지방에 서 있다는 이어령의 고백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어디쯤을 서성이고 있을까, 지성의 극한으로 달려본 적도 없고 영성의 깊은 가운데 있어 본 것 같지도 않은데……. 그래서 먼저 나의 자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명확해질수록 영성을 향한 걸음의 방향도 조금은 더 명확해질 거란 믿음으로.

 

지금, 포도원의 품삯을 흥정할 때가 아니다

예수님께 병을 고쳐달라고 달려온 백부장이 있었다.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는데, 예수께서 고쳐주려고 하시니까, 이런다. 주님, 저도 제가 부리는 사람이 있어 압니다. 제가 이리 하라 하면 이리 하고 저리 하라 하면 저리 합니다. 예수님도 왕이시니, 직접 행차하지 마시고 명령만 해주세요. 그러면 딸이 낫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크게 칭찬하셨다. 책을 읽으며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이 아는 만큼 보이게 마련이다. 하나님을 알아보는 눈이 나와는 분명히 달랐다.

이어령은 줄곧 무신론자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던 젊은 시절을 돌아보는 한편, 뒤늦게 하나님을 만난 자신에게도 같은 은혜와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대한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그때마다 언급하는 것이 바로 포도원 품삯 비유이다. 포도원의 주인이 아침에 나가 정한 품삯을 알리고 일꾼을 데려온다. 저녁에도 포도원 주인은 밖에 나가 같은 품삯을 알리고 일꾼을 데려온다. 하루의 일을 마감하고 품삯을 주는 시간, 늦게 일에 합류한 일꾼에게 품삯을 주는 것을 보며 아침부터 일한 일꾼은 품삯을 조금 더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다. 그러나 품삯은 같았다. 왜일까, 주인이 처음 약속한 품삯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해 들었던 나에게도 하나님은 같은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나는 먼저 믿었으니 조금이라도 더 달라는 떼를 쓸 수 없다. 이어령의 감사는 내게 무거운 짐으로 돌아온다. 하나님을 먼저 알았던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으로 위안을 삼고 감사를 돌리는 이어령의 글이 가시가 되어 눈에 박혔다. 품삯을 더 받겠다는 흥정은커녕,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쫓겨나면 어쩌나 두려웠다. 매주 교회에 가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 나는 왜 조금이라도 더 깊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애쓰지 못했을까. 삶 속에서 만나는 순간순간의 기적을 난 왜 예민하게 감지하지 못했을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성경을 풀어내는 이어령의 예민한 감수성과 깊은 문학적 지식에 감탄만 흘러나왔다. 짙은 외로움 때문에 기숙사의 방을 환히 밝히고 먼 데서 돌아오는 길과 무거운 짐을 지고 별처럼 보이는 등불을 바라보며 걷는 걸음이 푯대를 향하여 걸어가는 순례자의 여정과 겹칠 때, 비슷한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늘 가까이 있어서 그 소중함을 몰랐던 것이라고 변명을 둘러대고 괜찮은 것일까?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기어 깃발에 다다랐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거북이가 도착하든지 말든지 제 흥에 겨워 한숨이 늘어지게 자는 토끼를 떠올렸다. 아마도 나는 먼저 달려나간 토끼일 것이다. 내가 끝내 도착해야 할 곳이 분명하게 있는데도, 경쟁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나의 오만이 하나님으로 향하는 걸음을 자꾸만 멈추게 하였다. 그러다 결국, 결승선을 넘지도 못하고 저 멀리 기쁨을 면류관을 상으로 받는 거북이를 지켜보게 된 것이다. 아차!


더 사랑할 때 더욱 드러나는 기적

토끼가 거북이를 보며 흠칫 놀란 데에는, 무엇보다 기적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우리가 흔히 초심자의 믿음을 말할 때에는 십자가의 고난이나 성화의 과정과는 달리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새로 돋은 순처럼 여려서 거센 바람에 쉽게 시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할 때가 잦다. 그러다 보니 복만 바라게 되는 단편적인 신앙을 가지게 될 때도 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딸과 손자의 병이 낫는 기적 같은 소식을 접했을 때 이어령이 보여준 모습은 놀라웠다.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여 폴짝폴짝 뛰며 자랑해도 모자랄 판인데 오히려 잠잠히 있으며 예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예수를 더욱 따르려고 힘썼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보며 기뻐하셨을까? 진리를 말할 때에는 눈멀고 귀먹었던 자들이 먹을 것을 해결해주니 마음을 열었다면 그 자체로 절망과 슬픔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병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먹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을 주로 이야기하며 사랑한다고 말해왔다. 예수님이 받고 싶은 사랑은 좀 더 깊은 것이었을 텐데도 우리는 그런 사랑을 드릴 수 없었다. 인간의 나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를 보며 그저 눈물지으셨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들고 다니면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에만 온 정신이 팔려있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 당장 내 먹을 것, 내 쓸 것을 해결해주시지 않는 예수님의 의중만 궁금한 사람이었다. 기복신앙이 나쁘다고 하니까 티를 내지 않은 거지, 속마음은 별다를 게 없었다.

이어령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기적의 본래 모습을 본다. 딸을 사랑하기에 딸에게 일어난 일을 기적이라 여길 수 있었다며,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사랑이 적었기 때문이라 고백한다. 조금 더 깊고 넓은 사랑으로 사람을 대했다면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일상의 기적을 발견했을 거라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매일같이 바라는 나의 모습이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결국 이런 자리였다. 주 안에 서라는 바울의 말이 무색하게, 나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과 닿은 줄을 낚시하듯 잡아당기며 내가 원하는 것만을 요구하고 있는 철없는 아이였다. 놀라운 것은 이런 나마저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70년도 기다리시는 분인데 아무렴! 얕은 내 경험도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은 풍부하신 분이다.

집에서 기르고 있는 두 마리 고양이를 떠올린다. 집에 들어와도 반기지 않고, 머리 한 번 쓰다듬기도 쉽지 않은 고양이. 털은 무수히 날려 방바닥을 뒹굴고, 발톱은 날카로워 스치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입을 때가 잦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고양이를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 고양이 존재 자체로 고양이는 사랑스럽다. 하나님은 어떠실까? 당신이 직접 빚으시고 생명을 불어넣은 존재인 인간은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울 테다. 그래, 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한없이 작아져 외로울 때에도 하나님은 군중 틈에서 사랑의 눈빛으로 나를 지켜 보호하고 계셨던 것이다.

더욱 감사하게 된 것은, 어리기만 한 내 나이다. 일흔의 나이에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느끼는데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내가 못할 것이 뭐가 있을까. 물론, 이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내 나이 일흔이 되어 이어령과 같은 깊이를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내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는 지도 지금은 또렷하게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에 대해서 전혀 감이 없다. 그래도 품삯도 제대로 못 받고 걷어차이는 일꾼이 되고 싶지는 않다. 늘어지게 자고 있던 낮잠에서 깨어나야겠다. 늦었더라도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푯대를 향해 뛰어가는 토끼, 설령 알고 보니 내 모습이 거북이도 못 되는 달팽이라 할지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차근히 걸어가고 싶다. 하나님은 저기서 나를 보며 응원하고 계실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삼국사기, 삼국유사 엮어 읽기

김부식과 일연은 왜

정출헌│한겨레출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비슷한 시기를 다룬 역사서지만, 기록한 역사학자의 역사관에 따라 한 사건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도 있고, 선별한 사건사고가 각각 다르기도 하다지요. 아마도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슬쩍 배우고 넘어갔을텐데요. 여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어떻게 왜 다른지 정리해둔 책이 나왔습니다. 다양한 관점의 글을 통해 삼국시대를 되짚어보는 것도 재미이겠으나, 하나의 사건이 사회와 개인의 사관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읽히는지 살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가 되지 않을까요? 군사정변과 쿠데타, 혁명. 한 가지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용어사용에 큰 차이가 나니 말이에요. 그러니, 제목에서 다루고 있는 ‘왜’가 더욱 궁금해질 밖에요.

 

입사부터 퇴사까지

직장인이 꼭 알아야 할 노동법

권정임│생각비행

 

5월 1일, 여러분은 쉬셨는지요?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5월 1일 휴무여부를 생각하게 되지요. 노동자의 날이라고 말하면서요. 그러나, 5월 1일의 정확한 명칭은 ‘근로자의 날’이라고 합니다. 노동자와 근로자, 도대체 뭐가 다른 걸까요? 취직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요즘이라 일단 취직하고보자는 생각에 취직 이후 근로자의 권리를 생각하는 건 불가능하죠. 하지만 직장인이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다면 사용자인 기업은 구렁이 담 넘듯, 스리슬쩍 넘어가고도 모르쇠할 수 있거든요! 근로계약서부터 임금을 거쳐 퇴직까지, 우리가 궁금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요목조목, 되도록 쉽게 설명해주는 이 책을 읽으며 조금이나마 근로자의 권리를 찾아나가도록 해보자구요!

 

함성호의 반反하고 반惑하는 건축 이야기

반하는 건축

함성호│문예중앙

 

건축. 딱히 앉아서 할 일도 없으면서 작업실을 갖고 싶어하는 저는 작업실을 겸할 수 있는 나만의 방이나 집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나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곳, 집이 아닐까요? 차에 공을 들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자신만의 장소에 대한 로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거겠지요. 내가 들어가 살 수 있는 곳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이어서, 전층이 똑같은 디자인이던 아파트도 개인에 맞게 변형을 할 수 있게 나오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건축의 재미있는 지점은 또 여기에 있습니다. 한번, 결정해서 지어버리고 나면 뜯어고치기 전에는, 내부를 뜯어고치더라도 그 건축물이 정해놓은 공간에 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내 입맛대로 지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건축이 제시하는 방향에 따라 살게 된다는 것이죠. 이 건축의 양면성에 대해 고민해볼만한 책이 나온 것만 같습니다. 이중의 의미를 지닌 ‘반’하는 건축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궤도를 벗어난 사물의 일상

내 곁의 키치

오창섭│홍시

 

키치. 우리는 쉽게 키치적이라는 말을 쓰지만, 정작 ‘키치’에 대해 깊게 고민해본 적은 없지 않았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오래전 이 키치에 관한 책을 한 권 읽은 적이 있었는데, 제 삶의 대부분, 특히 예술감상의 주를 이루는, 이를 테면, 저의 감흥점이란 것이 상당히 키치적인 것이어서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살짝 부끄럽기도 했어요. 키치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나면 왠지 저급하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놈의 키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다지 친해지고 싶지는 않은, 그 키치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만한 책이 나왔군요. 1999년에 나온 책이 새단장하여 나왔다고 하는데, 10년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 키치는 또 얼마나 넓고도 깊게 우리 곁으로 다가와 있을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읽고, 쓰고, 고쳐 읽고, 쓰고, 또 읽자.

 

자칭 오독의 여왕이라 말하고 다닙니다만,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여왕이란 칭호는 꽤 거슬리네요. 오독의... 무엇이라고 해야할까요? 어쩌거나 저는 책을 제 멋대로 읽는 데 선수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자주 책을 오해하고, 책과는 상관없이 토라지거나 책이 말하고자 하는 큰 줄기와는 상관없이 지엽적인 어느 부분에서 혼자 크게 감동받고 가슴 벅차할 때도 많습니다.

난독증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다른 데 있었군요.

 

책을 읽는 것이 주는 무게가 상당하고, 책(텍스트)을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라, 무의식의 검열이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는 거였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물론, 이 것도 서문에서 다룬 것이니 책의 전체적인 주제와는 조금 다를 수 있겠습니다. 네, 저 같은 사람도 하나 정도 있어줘야, 책을 완벽히 이해해야만 한다는 압박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텍스트가 주는 혁명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데, 읽어서는 혁명이 일어나는 군요. 그동안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했던 제 속의 놀라운 의식의 변화를 더듬어 봅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어른들이 싫어하는 곳엔 가지 않고, 싫어하는 일은 찾아서 하지 않던, 재미라고는 TV보고 영화보고 책 읽는 게 다 였던 학생시절의 저와 지금의 저는 정말이지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해도 거짓은 아닐 정도로 다른 생각을 합니다. 그 가운데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하니, 네, 그래요. 책이 있었습니다.

 

들입다 외우는 게 중요하다고 배웠던 때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책을 쓴 사람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애쓰던 때가 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먼저 책을 읽어온 선배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더 깊이 책을 읽고 책과 씨름하는 법을 배운 게 아닌가 해요.

 

혁명사라고 해야겠지요. 사사키 아타루가 자분자분하게 설명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문장을 따라 사사키 아타루의 세계로 들어가보니, 유혈이 낭자한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보다 훨씬 더 변혁적인 혁명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새롭다는 생각을 하며 그저 따라갔을 뿐인데, 이제는 저더러 저만의 혁명을 생각하라고 등 떠밉니다.

 

큰 학문을 가르친다는 대학조차 직업준비학교로 변신하여 학생들에게 외우고 써먹으라 가르치는 요즘. 하루에도 몇 권씩 쏟아져나오는 모든 책을 읽어버리겠다는 불가능한 다짐은 접어두고 한 권의 책을 진득하게 읽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조심스럽게 펼쳐보길 바랍니다. 뭔소리지 모르겠다, 졸리다,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도 오히려 좋은 적수를 만났다 생각하며 한 문장 한 문장 눈으로 밟아보는 거예요. 거칠다 싶으면 자리에 앉아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좋겠지요. 조금씩 자라가는 우리 안의 혁명의 씨앗이 언젠가는 우리를 변화시킬 겁니다.

글은 힘이 있습니다. 있더라구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