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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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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들고다닌 책
바르트의 문장은 어려워서 읽다가 종종 딴생각을 해서 옆길로 새긴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서 멈춰서서 생각하게 만드는 울림이 있다. 사랑에 대한 말마따나 그 ‘단상’들이 읽는 날동안 꽤 오래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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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소문 - 믿음의 경계지대에 선 회의자를 위한 안내서
필립 얀시 지음, 홍종락 옮김 / 포이에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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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선배로 자신의 신앙 여정을 드러내며 자신이 마주했던 고민과 깨달음을 나누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게 돕는 것은 귀하고 고마운 일이다. <수상한 소문>은 원제/부제가 말하는 것처럼 믿음의 경계지대에 선 회의자를 위한 안내서로 필립 얀시가 근본주의 기독교 환경에서 자라면서 회의했다가 회복하는 과정을 거친 후, 이후 삶에서 깨닫고 느낀 것을 나누며 한쪽으로 쏠리기 쉬운 두 세계의 균형을 맞춰 가길 바라는 글이다.

먼저, 오늘날 환원주의자가 만들어 놓은 신을 지워버린 세계가 어떻게 황폐해졌는지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초월성, 신성을 덜어낸 빈자리를 역시 보이지 않는 강렬한 감각과 중독으로 메워가며 이전의 만족을 되찾고자 애쓰는 현대인의 병폐를 나열하고, 그 혼란한 세계에 물든 기독교를 살핀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마련한 진수성찬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균형 잡힌 시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보이는 세계에서 온전하게 삶을 즐긴 예수처럼 사는 것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의 뜻이다.

한국 교회의 잘못을 따져 물으며 회의했던 나는, 나도 결국 한국 교회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삶을 즐기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여전히 하나님은 두려운 심판자이고, 세상은 언제 닥칠지 모를 범죄와 사고로 두렵기만 하다. 잡혀갈 죄를 짓지 않았을 뿐, 불평과 험담은 남들 못지않아 선량한 척 분란을 조장하기도 여러 번이며, 책 좀 읽었다고 잘난 척은 또 얼마나 해댔는지! 그리하여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 <수상한 소문>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그러나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현실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p.276있다거나 좌로나 우로나 떨어질 위험이 있는 말타기의 스릴p.90이 있는 균형 잡힌 삶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이분법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다. 그리스도인과 환원주의자 사이에 선을 그으려다 보니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경계에 서 있다기보다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혼재된 공간에 머무르며 사는 것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분법적 사고는 보이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 엘리펀트맨을 선택한 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극명하게 가르기 위한 극단적이고 그리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고난에서 벗어나길 기도하는 미국 기독교인에게 다른 나라는 그렇지 않다p.317’며 고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나라를 소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더 염려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인데, ‘운동선수의 기예, 슈퍼모델의 아름다움, 성공한 사람들의 재능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는p.297것은 자칫 또 다른 면에서 선수나 슈퍼모델의 보이지 않는땀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죄를 악에 의한 것으로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려다 스스로 세계를 양분해버린 셈이다.

기부금 영수증이 없는 곳에 기부하면서도 다음 달 약정금액을 맞추지 못할까 걱정을 하고, 가난한 것이 부끄럽지 않다고는 하지만 빚과 빚질 것들 때문에 한숨 쉬는 가족을 보면서도 하늘의 것만을 바라보며 살기는 쉽지 않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걸 기뻐해야 한다지만, 거대한 악은 영악해져서 이제는 핍박하기를 멈추고 스스로 죄에 빠지도록 내버려두니 어느 지점에서 기뻐해야 할지 알 도리가 없다. 이런 문제는 다음 세대인 우리의 몫으로 여기고, 겹쳐있는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도록 정진하며 더 세밀한 이야기로 나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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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이 꼭 알아야 할 노동법 - 입사부터 퇴사까지
권정임 지음 / 생각비행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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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마도 “법대로 하자”는 말 때문인지, 법 얘기를 들먹이면, 으레 어디 한 번 제대로 싸워보자는 말처럼 들린다. 어쩌면 ‘노동법’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 자체가 직장에서는 제대로 싸우기 위한 전초전같이 보일 수도 있겠다.

노동법 자체가 불리할 수 있는 근로자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도록 최저의 기준을 세워놓은 것이라서 노동법을 제대로 알아놓고 회사에 조금이나마 어깨에 힘 주고 다닐 수 있도록, 쫄지 않도록 화력을 불어넣어줄 책은 아닌가, 기대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어떻게 하면 회사에 맞서 잘 싸울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입사에서부터 퇴사까지, 어찌보면 사소할 수도 있고 중차대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한 근로자들의 다양한 질문에 대해 법조항과 판례까지 알려주며 되도록이면 이해하기 쉽고 적용하기 편하도록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있다. ‘을’일 수밖에 없는 근로자에게 법을 잘 이용하여 백전백승하길 바란다기 보다는, 문제가 더 커지지 않도록 잘 해결해서 되도록이면 노무사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까. 노무사가 자기 일감 떨어지는 글을 왜 쓰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쩌면, 굳이 싸우려 들지 않아도 노무사가 필요한 상황은 지금 이시간에도 엄청나게 일어나기 때문은 아닐까? 

 

근로자도 근로자지만, 노동을 사용하는 사용자(그러니까 회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라 모르고 지나간 일이 알고보면 불법이라는 걸 알게 되어 이래저래 민망한 경우가 많을 것 같아서 그렇다. 사용자 입장에서야 어떻게든 불법도 무지도 아니었다고 해야하니까 더욱 힘써 법을 알려들테고, 그럴수록 근로자는 모르고 당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니까.  

 

책을 한 번 읽은 걸 가지고, 노동법을 정복했다고 말할 순 없고. 책을 다시 펼치지 않더라도 꼭 기억하고 있어야겠다 마음 먹은 것, 새로 배운 것이 있다.

하나, 그게 무엇이든 문서로 남길 것. 대부분이 큰 사고 없이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이는 것들이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 들이밀 수 있는 건 문서밖에 없다.

둘, 어떻게든 원만하게 합의를 보기 위해 노력할 것. 싸우자고 달려들어봤자, 손해는 언제나 '을'이 더 본다. '을'을 벗어나고 싶은가? 다시 태어나라. ㅠㅠ

셋, 관대한 사용자를 기대하지 말 것. 기대했단 발등 찍혀도 아무도 불쌍히 여겨주지 않는다. 항상 원만한(사이 좋은) 긴장상태를 유지할 것. 특히나 내 마음을 다 알아줄 것만 같은 상사라고 해서 무장해제 상태로 대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디서 '사용자'로 변신할 지 모른다. 또한, 회사가 내 사정을 봐줄 거라는 기대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 퇴직이든 이직이든 그게 뭐가 되었든, 회사가 먼저 신경쓰는 건 내가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라는 걸 잊지 말자.

넷, 결국 ‘나’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나’밖에 없으므로, 근로자의 권익을 위해 ‘나’들이 뭉쳐야만 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잘 꾸려져야 하고, 잘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법대로 하자’인 걸 생각하면, ‘(노동)법’을 들먹이는 순간, 분위기가 냉랭해질 걸 떠올리면 아직도 갈 길이 구만리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은 '모르는 게 약'과 '아는 게 힘' 사이에서 지혜로운 줄타기를 해야 한다. '안다'는 건 그런 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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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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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이어령 교수의 딸, 이민아 목사의 소천으로 기독교계가 술렁였다. 많은 사람이 빈소를 찾아 이어령 교수의 표정을 살폈고, 이민아 목사가 남긴 유고는 두 권의 책으로 묶여 독자를 만났다.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고 비교문화와 문학 분야의 석학이라고는 하지만 이어령에게 과도한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아닌지 조금은 회의가 들기도 했다. 돌아보니 이어령의 회심도 크게 회자되었다. 고령의 무신론자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나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인지 그마저도 유별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도 양 한 마리에 돌아오면 기뻐 잔치를 연다고 하시니, 하나님의 마음이야 이해해볼 수 있다. 그래도 기독교계가 떠들썩할 것까지 있을까?

그랬다. 역시 사람이든 무엇이든 만나야만, 알아봐야만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뒤늦게 이어령의 책을 읽고 나서야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기뻐하고 또 집중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렇게 귀한 사람을 하나님은 오래도록 인내하시며 기다리셨고 끝내 손을 잡아주셨던 것이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데 70년 이상의 세월은 기다린 주님의 끈기, 그 인애하심이 느껴졌다. 이 책을 통해 또 한 명의 영혼을 만나시고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났다. 삶에 지쳐 퍽퍽해진 내 마음에 단비 같은 시간을 허락하신 주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하나님의 자취가 보인다

역사에 관하여 들은 말이 하나 있다.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누구는 승자의 이야기라고도 말하는 역사는 사실이 그렇다. 이긴 사람이 지난 일을 정리하다 보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록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사건이 혁명도 쿠데타도 될 수 있는 것은 후대의 사람이 어떻게 그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달려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무신론자로 살아온 긴 시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전혀 다르게 보인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시간이었는데, 돌아보니 그 시간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교토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와이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글은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렇더라는 결론이다. 교토에서 지낸 그 시간에는 아마도 극한 외로움과의 싸움에 집중했을 것이고, 그 기간에 쓴 시를 무신론자의 기도란 제목으로 엮어낸 이유는 책을 낼 때만 해도 무신론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상황이 달라졌다.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말은 반어적인 말이 되었고, 기도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되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신은 없다고 하며 살아온 시간이 오늘, 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고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된다. 아마도 나의 삶 또한 그렇지 않을까. 현재의 내 삶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둑어둑하지만 뒤돌아보면 삶의 순간마다 주님이 함께 하셨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뒤돌아보며 그 어디쯤 서 계셨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에 나온 그림 속 군중 사이에서 후광조차 없이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자꾸만 머리에 남아 말을 건다. 이렇게 네 옆에 서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란다. 하나님이 내게서 사라진 것만 같을 때, 달음질치지 않으면 멀어지는 것 같아 불안할 때에도 하나님은 곁에 계신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진리가 남의 말을 통해 내 귀에 머문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경험이 줄을 이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옮겨간다는 주위 사람의 말에 겸손하게 아직 영성에 대해서는 무지하며, 지성에 대해서도 잘은 모르나 자신은 지성에서 영성으로 건너가는 문지방에 서 있다는 이어령의 고백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어디쯤을 서성이고 있을까, 지성의 극한으로 달려본 적도 없고 영성의 깊은 가운데 있어 본 것 같지도 않은데……. 그래서 먼저 나의 자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명확해질수록 영성을 향한 걸음의 방향도 조금은 더 명확해질 거란 믿음으로.

 

지금, 포도원의 품삯을 흥정할 때가 아니다

예수님께 병을 고쳐달라고 달려온 백부장이 있었다.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는데, 예수께서 고쳐주려고 하시니까, 이런다. 주님, 저도 제가 부리는 사람이 있어 압니다. 제가 이리 하라 하면 이리 하고 저리 하라 하면 저리 합니다. 예수님도 왕이시니, 직접 행차하지 마시고 명령만 해주세요. 그러면 딸이 낫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크게 칭찬하셨다. 책을 읽으며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이 아는 만큼 보이게 마련이다. 하나님을 알아보는 눈이 나와는 분명히 달랐다.

이어령은 줄곧 무신론자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던 젊은 시절을 돌아보는 한편, 뒤늦게 하나님을 만난 자신에게도 같은 은혜와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대한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그때마다 언급하는 것이 바로 포도원 품삯 비유이다. 포도원의 주인이 아침에 나가 정한 품삯을 알리고 일꾼을 데려온다. 저녁에도 포도원 주인은 밖에 나가 같은 품삯을 알리고 일꾼을 데려온다. 하루의 일을 마감하고 품삯을 주는 시간, 늦게 일에 합류한 일꾼에게 품삯을 주는 것을 보며 아침부터 일한 일꾼은 품삯을 조금 더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다. 그러나 품삯은 같았다. 왜일까, 주인이 처음 약속한 품삯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해 들었던 나에게도 하나님은 같은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나는 먼저 믿었으니 조금이라도 더 달라는 떼를 쓸 수 없다. 이어령의 감사는 내게 무거운 짐으로 돌아온다. 하나님을 먼저 알았던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으로 위안을 삼고 감사를 돌리는 이어령의 글이 가시가 되어 눈에 박혔다. 품삯을 더 받겠다는 흥정은커녕,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쫓겨나면 어쩌나 두려웠다. 매주 교회에 가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 나는 왜 조금이라도 더 깊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애쓰지 못했을까. 삶 속에서 만나는 순간순간의 기적을 난 왜 예민하게 감지하지 못했을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성경을 풀어내는 이어령의 예민한 감수성과 깊은 문학적 지식에 감탄만 흘러나왔다. 짙은 외로움 때문에 기숙사의 방을 환히 밝히고 먼 데서 돌아오는 길과 무거운 짐을 지고 별처럼 보이는 등불을 바라보며 걷는 걸음이 푯대를 향하여 걸어가는 순례자의 여정과 겹칠 때, 비슷한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늘 가까이 있어서 그 소중함을 몰랐던 것이라고 변명을 둘러대고 괜찮은 것일까?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기어 깃발에 다다랐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거북이가 도착하든지 말든지 제 흥에 겨워 한숨이 늘어지게 자는 토끼를 떠올렸다. 아마도 나는 먼저 달려나간 토끼일 것이다. 내가 끝내 도착해야 할 곳이 분명하게 있는데도, 경쟁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나의 오만이 하나님으로 향하는 걸음을 자꾸만 멈추게 하였다. 그러다 결국, 결승선을 넘지도 못하고 저 멀리 기쁨을 면류관을 상으로 받는 거북이를 지켜보게 된 것이다. 아차!


더 사랑할 때 더욱 드러나는 기적

토끼가 거북이를 보며 흠칫 놀란 데에는, 무엇보다 기적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우리가 흔히 초심자의 믿음을 말할 때에는 십자가의 고난이나 성화의 과정과는 달리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새로 돋은 순처럼 여려서 거센 바람에 쉽게 시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할 때가 잦다. 그러다 보니 복만 바라게 되는 단편적인 신앙을 가지게 될 때도 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딸과 손자의 병이 낫는 기적 같은 소식을 접했을 때 이어령이 보여준 모습은 놀라웠다.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여 폴짝폴짝 뛰며 자랑해도 모자랄 판인데 오히려 잠잠히 있으며 예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예수를 더욱 따르려고 힘썼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보며 기뻐하셨을까? 진리를 말할 때에는 눈멀고 귀먹었던 자들이 먹을 것을 해결해주니 마음을 열었다면 그 자체로 절망과 슬픔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병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먹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을 주로 이야기하며 사랑한다고 말해왔다. 예수님이 받고 싶은 사랑은 좀 더 깊은 것이었을 텐데도 우리는 그런 사랑을 드릴 수 없었다. 인간의 나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를 보며 그저 눈물지으셨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들고 다니면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에만 온 정신이 팔려있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 당장 내 먹을 것, 내 쓸 것을 해결해주시지 않는 예수님의 의중만 궁금한 사람이었다. 기복신앙이 나쁘다고 하니까 티를 내지 않은 거지, 속마음은 별다를 게 없었다.

이어령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기적의 본래 모습을 본다. 딸을 사랑하기에 딸에게 일어난 일을 기적이라 여길 수 있었다며,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사랑이 적었기 때문이라 고백한다. 조금 더 깊고 넓은 사랑으로 사람을 대했다면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일상의 기적을 발견했을 거라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매일같이 바라는 나의 모습이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결국 이런 자리였다. 주 안에 서라는 바울의 말이 무색하게, 나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과 닿은 줄을 낚시하듯 잡아당기며 내가 원하는 것만을 요구하고 있는 철없는 아이였다. 놀라운 것은 이런 나마저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70년도 기다리시는 분인데 아무렴! 얕은 내 경험도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은 풍부하신 분이다.

집에서 기르고 있는 두 마리 고양이를 떠올린다. 집에 들어와도 반기지 않고, 머리 한 번 쓰다듬기도 쉽지 않은 고양이. 털은 무수히 날려 방바닥을 뒹굴고, 발톱은 날카로워 스치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입을 때가 잦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고양이를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 고양이 존재 자체로 고양이는 사랑스럽다. 하나님은 어떠실까? 당신이 직접 빚으시고 생명을 불어넣은 존재인 인간은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울 테다. 그래, 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한없이 작아져 외로울 때에도 하나님은 군중 틈에서 사랑의 눈빛으로 나를 지켜 보호하고 계셨던 것이다.

더욱 감사하게 된 것은, 어리기만 한 내 나이다. 일흔의 나이에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느끼는데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내가 못할 것이 뭐가 있을까. 물론, 이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내 나이 일흔이 되어 이어령과 같은 깊이를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내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는 지도 지금은 또렷하게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에 대해서 전혀 감이 없다. 그래도 품삯도 제대로 못 받고 걷어차이는 일꾼이 되고 싶지는 않다. 늘어지게 자고 있던 낮잠에서 깨어나야겠다. 늦었더라도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푯대를 향해 뛰어가는 토끼, 설령 알고 보니 내 모습이 거북이도 못 되는 달팽이라 할지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차근히 걸어가고 싶다. 하나님은 저기서 나를 보며 응원하고 계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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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까지는 연습이다 - 세계 명카피에서 배우는 내 앞길 여는 법
노진희 지음 / 알투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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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언니가 있다고 해도, 옆에 끼고 하루 종일 붙잡고 앉아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바에는 이 책이 필요하다. 그랬다, 먼저 겪은 일을 듣는 것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위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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