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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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보면 사람들에겐 조금 우스운 구석들이 있다. 심각하고 진지한 사람일수록 보이지 않는 뒷모습에는 허둥대는 옷깃이 비죽하게 나온다. 미처 닫지 못했어요, 보다는 닫았는데 옷자락이 문틈에 끼였어요, 가 더 웃음 터지게 한다. 재밌는 사람이 재담을 늘어놓는 것보다 재미없는 사람이 헛발질하는 게 더 우스운 법이니까.

이기호의 소설에는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려는데 자꾸만 헛스윙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백수니까 나름 인생이 고달픈데... 아르바이트도 짤려 사고나 칠까 하는데... 푼돈을 벌 요량에 좀도둑질이나 해보려는데... 어떻게든 주먹 센 놈들과 맞닥뜨리지 않으려는데... 결국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만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비극도 비극 나름, 구렁텅이도 가오 잡고 떨어지면 좋으련만 이건 영 인생 우스워지는 구렁텅이일 뿐이다.

그런데 그걸 지켜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지점이 꽤 절묘하다. 웃음을 쥐어짜려는 코미디와 웃음을 못 참고 새나가게 하는 코미디가 있는 것처럼, 그 사이에서 부유하는 희극은 절묘해야 한다. 소설에서 웃음을 유도하려면 제대로 짚어줘야 품위가 떨어지지 않는다. 이기호의 소설은 링 위에서 촐싹거리며 치고박고 쇼를 하다가 풀죽어 돌아서는 권투 선수를 떠올리게 한다. 링 위에서 폴짝폴짝 뛸 때는 우습고, 땡 소리에 돌아 들어가는 뒷모습에는 삶의 비감함에 젖는다.

이 사람, 어쩌다가 이런 시추에이션을 만들어냈을까, 자못 궁금하고 부러운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엉뚱하고 발랄한데다 비감하기까지 삶의 희비극을 두루 잡아내는 그는, 아마도 소설과 닮았을 것이다. (짐짓 근엄한 표정을 한 꺼풀 들어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각들이 여러 겹으로 훌렁 일어날지 몰라. 사실 나는 그가 진지한 사람인지 재밌는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이런 소릴 한다.) 어쨌거나 그는 자기 안의 것을 몇 겹으로 분리하여 풀어낼 줄 안다. 또 그 분리작업은 별안간 소설가의 존재이유를 흔드는 데에도 한몫을 한다. 글쓰기와 노동이 별개인가? 소설에도 성질이 우량한 것과 불량한 것으로 나뉘는가? 그는 하나의 휴지를 두 겹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나는 두 겹으로 읽어 하나의 휴지를 이해한다. 그가 어느 한쪽에 손을 번쩍 들어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학의 고상함과 단란주점의 유치함을 나란히 놓는 재주. 아니, 이렇게 써보니 이것도 뒤바꿔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의 유치함과 단란주점의 고상함, 혹은 문학의 형이하학과 단란주점의 형이상학을 주물럭거리며 빚어내는 재주. 그러니 쇳덩어리일 뿐인 국기게양대를 사랑할 수도 있으며, 죄책감으로 죽어가는 할머니의 환영 속에 덤벙거리며 뛰어들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차가운 국기게양대를 끌어안고 내 체온으로 끌어올려 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묵직한 철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세상의 그 무엇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연 사랑하고 또 용서할 수 있다는 말.

그러니 당신, 걱정하지 마시라.
갈팡질팡하다가 주저앉을 수도 있는 법.
땅밑으로 꺼져들어가듯이 주저앉았다가 슬그머니 일어설 수도 있는 법.
정 없으면 흙이라도 파먹지,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당신만의 지지고 볶는 요리법이 있지 않은가.
(어쩐지 배째라, 는 느낌이 든다면, 혹은 온갖 미묘한 맛들을 주먹밥으로 뭉뚱그렸다, 는 의혹이 든다면, 리뷰가 가오도 못 잡고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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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11-1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안님!!! 잘 지내셨어요? 전 그 사이 아이를 하나 더 낳았답니다.

반딧불,, 2006-11-1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락!!!!!!! 이게 얼마만인지요? 건강하신거죠?
그리고,여전히 리뷰는 쥑입니다^^

2006-11-19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6-11-19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이안님표 리뷰구나 싶군요. 조신인님 댓글을 읽고 이안님이 아이를 하나 더 낳았다는 걸로 잠시 착각했네요.^^

프레이야 2006-11-1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안님 반가워요. 오랜 만에 먹는 주먹밥 맛있어요.^^ 꾸욱..

urblue 2006-11-19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반갑습니다. ^^

내가없는 이 안 2006-11-20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조선인님, 방금 해람이 사진 보고 왔어요. 어우, 너무 잘생겼어요. 옆으로 슬쩍 웃는 얼굴은 다 큰 아이 같던데요.
> 여전히 반짝거리는 반딧불님, 잘 계셨죠? 저도 조만간 피터팬 읽을 거예요. ^^
> 속삭인님, 저 하나도 안 부지런한데. 관심있는 작가 소설은 좀 챙겨 읽으려는데 그것도 잘 안 돼요. 봇물 터지듯이 나오는 외국, 특히 일본 소설은 그러다보니까 정말 안 읽게 되더라고요. 읽을 틈이 있어야죠. 얼마나 금세 신간들이 나오는지요.
> 잉크냄새님, 농담 잘하시는 거 여전하세요. 엉뚱한 면도 여전히. 그래서 밤샘은 끝입니까? ^^
> 혜경님, 서재의 사진과 이름과 글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요. 잘 지내셨죠?
> 와~ 블루님, 저도 반가워요. 결혼도 축하드리고요. 지금 참 행복한 시간이죠? 전 얼마전에 신혼 때 살던 동네에 갈 일이 생겼는데 예전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생각 마무리엔 '그때 참 행복했어'라는 말도 덧붙였죠. 지금도 좋지만요. 이상하게도 별거 아닌 기억이 떠오르던데요. 귤 넣은 까만 비닐봉투 달랑거리면서 집에 들어가던 일, 천원어치 살까 이천원어치 살까, 도 생각했던 것 같아요. ^^ 행복하시길요.

2006-11-20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20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20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11-20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 정말 이상해요 제가 글 올라오시자 마자 댓글 남겼는데 지금 보니 없네요???
제가 댓글 저장을 안눌렀나봐요 이잉-
다시 쓰려니까 왠지 민망-
뵙고 싶었다구요 ㅠㅠ

icaru 2006-11-21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만의 지지고 볶는 요리법이 있지 않은가.
--> 이 말 대단히 위안을 주는데욤 ㅋㅋ 이안 님 참 근사한 리뷰로 등장하시네!!

2006-11-21 0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6-11-21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9:54> 피, 바람 새는 소리로 당황하게 하시다닛. 뒤돌아보니 그랬다는 거고요, 사실 그때 엄청 힘들었어요. 너네 결혼했냐, 하면서 갑자기 나라까지 흔들거려선. ^^
이 작가는 문단에서 주목하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겠고요, 저는 이 작가 책이 은근히 기다려지던데요. 최순덕성령충만기는 난데없는 재미를 느꼈다면, 이 소설집은 위로를 받았어요. 재치있게 페이소스를 번뜩이는 재주도 좋지만 저는 아무튼 위로해주는 소설이 좋거든요.
제대로 주저앉기, 도 참 어려워요. 우린 생각이 많거든요. 주저앉은 후엔...? 전 장정일의 이 말도 괜히 무섭더라고요. 이 사람은 시귀(,라고 했던가요,)가 잠시 머물렀다 나갔다, 는 표현을 썼는데요, 그렇다면 주저앉은 후에 도로 돌려받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설 순 있겠죠. 새로운 걸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에잇,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

13:26> 저도 넘넘 반가워요, 님! 그리고 부럽고요. 꾸준히 노력하는 님, 서재를 보면 그게 느껴져요. 제가 님보다 먼저 읽는 소설집이 있다니, 괜히 클클클.

체셔고양이님> 저도요, 반가워요. 여전히 예쁘신가 가봐야겠다. ^^

이카루님> 맞잖아요. 다들 지지고 볶는 자기만의 요리법이 있지 않던가요? 하긴 무슨 법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죠. 그냥 지지고 볶는 거니깐. ^^ 말은 이렇게 했지만 급하게 봉해놓은 거고요, 전 늘 심하게 흔들리면서 살아요...

2006-11-21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6-11-22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속삭인 님> 그것까지 챙겨 보셨어요? 약간의 그런 상황들이 있었지만 뭐 지금은 상태 좋은 편입니다. ^^ 저 같은 사람이 보통 장수를 한다는군요. (어떤 사람인지 쓰려니까 속이 다 보일 것 같군요. 헤헤.) 님도 건강하게 잘 계시는 거죠?

2006-11-22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6-11-24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 1학년이 되어요. ^^ 그럼 1단계가 되겠네요.

내가없는 이 안 2006-12-01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방금 이현의 연애 리뷰 읽고 오는 길이랍니다. 전체 스토리에 들어간 단편 몇을 이미 읽은 터라 어쩔까 했는데 단박에 읽고 싶어졌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