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개 막연히 ‘나’라는 생각을 갖는다. 이 ‘나라는 생각’을 불교에서는 아상(我相)이라 부른다. 심리학에서는 이고(Ego)라는 말도 쓰고 자아(自我)라는 말도 쓴다. 이 ‘나’라는 생각은 실로 일반적인 삶에서 겪는 거의 모든 심리적 고통의 근원이다. 그러나 막상 ‘이 “나”란 도대체 뭔가’ 라고 묻기 시작하면 참으로 곤란해 진다. 그 답을 찾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물 새 나가 듯 뚜렷이 잡히는 것이 없다. 이 ‘나’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매우 막연히 갖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약 두 살쯤에 이르면 서서히 자아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때 까지는 어린아이는 천지와 하나이다. 도와, 존재와, 전체와 하나이다. 개체로서 존재하되 스스로를 전체로부터 구분할 줄 모르고, ‘나’와 남을 달리 알지 못하며, 자신을 주장하거나 세상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개별적 존재로 의식하지도 아니한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들이나 이 단계의 어린아이는 무아지경(無我之境) 물아일체(物我一體) 그 자체이되 스스로 그러한 줄은 모른다. 그 의식이 아직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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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자리 잡는 데는 대개 몇 가지 과정을 거친다. 의식이 조금씩 발달됨에 따라 어린아이는 주변과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신체가 다른 사물과 분리되어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다치거나 뜨거운 것에 닿으면 고통스러움을 알게 되며, 단것을 먹거나 좋은 음악을 들으면 즐겁고 흥겨움을 느끼게 된다. 하여 ‘나’와 ‘나 바깥에 있는 것’을 분별하게 된다.
거울에 비치는 모양은 매일 같아 보여서 몸과 ‘나’를 하나로 동일시(同一視) 하기 시작한다. 부모나 형제 등 다른 사람들도 매일 같은 이름으로 ‘나’를 부르기 시작하고, 일관된 방식으로 ‘나’를 대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름과 ‘나’를 하나로 동일시 하기 시작한다. 의식이 좀 더 발달함에 따라서 생각도 점차 복잡해 진다. 타고난 개성에 따라 스스로의 생각과 생각의 방식이 틀을 잡기 시작하고, 의견이나 주장도 생겨난다. 생각 의견 주장 따위를 복합적으로 마음이라 부른다. 이에 따라 마음과 ‘나’를 하나로 동일시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나는 무엇 무엇이다’라고 스스로 한정 짓게 나면, 나의 존재는 단순한 개체를 벗어나 개체성(個體性)을 띠게 된다. 이렇게 하여 몸과 마음, 즉 모양과 이름을 ‘나’로 아는 생각이 일단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되면 대개 다시는 그 진위(眞僞)를 의심하는 법이 없이 그런 줄만 알고 평생을 지내고 만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라도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의 존재가 어찌 한낱 임의로 붙여진 이름이나, 한 줌 흙으로 변하고 말 몸뚱이의 모양새나, 허망히 떠도는 잡된 마음의 생각따위로 한정 지어질 수 있겠는가? 이름, 몸, 마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유용하게 쓰이는 것들이지만 이를 ‘나’로 알고 있으면 진정한 나의 존재에 대한 모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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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 ‘나’라는 생각은 대단한 즐거움의 원천이 되어서, 두세 살 때에는 ‘나’ 밖에 모른다. “나 좀 봐”, “나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내가 만든 것 좀 봐”, “이건 내 거야” … 그야 말로 나, 나, 나, 내 것, 내 것, 내 것 뿐이다. 이를 유치(幼稚)하다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심리 발달상 매우 중요하고 또 반드시 필요하다. 이 시기에는 어른들도 이런 유치함을 이해하고 다 받아주고 또 칭찬도 해 준다. 이 받아줌이 어린아이의 자신감 형성에 도움을 주며 심리적으로 성숙한 개인으로 성장하는 데 매우 필요한 영양분이 된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이르면 이 ‘나’에 대한 집착과 자아 중심적 태도가 점차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대여섯 살이 되도록 이렇게 ‘나, 나, 나, 내 것, 내 것, 내 것’ 하고 있으면 어른들도 더 이상 잘 받아주지 아니할 뿐더러 칭찬은커녕 꾸중을 듣기 일수다. 대부분의 사람에 있어서,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이 ‘나’에 대한 집착과 자아 중심적 태도는 평생을 지속하고 죽음을 맞이 하도록 그 이상의 실존적 가능성을 모른 채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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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나’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단지 모양과 이름에 그 바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모양은 몸이고 이름은 마음이다. 몸과 마음에 한정된 ‘나’만을 나로 알고 있으면 삶은 끊임없는 추구(追求)와 득실(得失)로 고단해질 수 밖에 없다. 처음에는 세상에서 분리되어 나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내’가, ‘나’의 개체성이, 재미있고 즐거웠으나, 어린 시절이 지나고, 청년기도 지나고, 점차 죽음을 의식하게 되면 이 개체성은 마침내 큰 짐이 되고 만다. 여태까지 모든 즐거움과 기쁨의 원천이었던 바로 그 개체성이 영원히 사라질 것임을 알게 된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이 개체성의 존재가치를 정당화 해야 하고, 유치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또는 충족되지 않아서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몸과 마음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게 마련이어서 늘 어딘가 모자람을 느끼게 되고, 무언가를 구하고 얻고자 하는 마음이 쉬지를 못한다. 또, 늘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려 노력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눈길 마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견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얼마나 이루고 못 이루었느냐 또는 얼마나 이름을 얻었느냐 하는 등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고 인정 받는 정도에 따라서 스스로의 존재가치가 결정된다. 따라서 누가 칭찬하고 알아주면 우쭐해지고 누가 비난하고 냉대하면 풀이 죽는 데, 평생을 이렇게 이리 저리 쓸려 다니고 나도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어딘가 모자라는 것 같고 참된 평화와 깊은 만족을 알 수가 없다. 자아 혹은 아상이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생각으로 지어낸 허구(虛構)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이 아닌 욕구의 충족은 일시적인 즐거움은 가져올지 모르나 깊은 정신적 만족을 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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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큼만이라도 알게 된 사람은 이제 이고(Ego)를 없애고자 노력한다. 삶의 온갖 마음 고생이 이 아상에서 비롯함을 보니 어찌 이를 없애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고나 아상이란 떨쳐버리거나 없애야 하는 것도 아니고, 떨쳐 버리거나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를 잘못 이해하여 ‘나를 없애야 한다’ 혹은 ‘나를 죽여야 한다’ 하는 따위의 말들도 하지만 이런 생각들을 믿고 따라 하려 하면 참으로 고달파질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좋을 수가 없다.
아상이 아상을 없애려 하니, 없애려 하면 할수록 아상에 대한 믿음만 강해질 뿐이다. 아상이 실재(實在)한다고 믿는 한 무슨 노력을 어떻게 기울여도 아상을 벗어날 수가 없다. 단지 억지로 애써 겸손한 태도만을 좀 얻어가질 수 있을 뿐이나, 겸손이란 그 자체가 아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런 겸손은 사실은 짓고 꾸미는 일이어서 거만(倨慢)함과 다르지 않다. 참된 겸손은 겸손하고자 노력할 줄도 모르고, 겸손해도 스스로 그런 줄을 모른다.
아상이란 단순한 생각 뿐이어서 그 실체(實體)가 없다. 실체가 없으니 떨쳐버릴 수도 없앨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다. 이를 직시하여 바로 알면 그것이 곧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 이 ‘나라는 생각’으로부터의 자유가 곧 해탈(解脫)의 시작이다.
참된 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짓고 꾸미기에 마음을 바삐 한 것은 공맹(孔孟)의 허물이고, 이 간단한 도의 진리를 들고 구름 위로 넘어가 버린 것은 노장(老莊)의 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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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고자 하는 마음은 아상을 넘어선 어떤 것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깨닫고자 하는 마음도 처음에는 아상으로 시작한다. ‘내’가 깨닫고자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나’, 혹은 ‘천지와 하나가 된 나’ 따위의 생각은 사실 아상의 극치(極致)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패기에 찬 젊은이가 산사(山寺)를 찾아와서 스승을 만나고는 제자 되기를 청하였다. 젊은이의 진지함을 보고는 노승(老僧)은 흔쾌히 허락했다. 젊은이는 참으로 열심히 수련하였다. 많은 경전을 읽고 좌선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염불이나 의식(儀式)에도 열심이었다. 이렇게 몇 해가 지나자 스승은 제자에게 숙제를 주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마음 공부가 어찌 되어가는지 보고서를 한 장씩 써올리게 한 것이다. 제자는 드디어 스승이 자기를 알아주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여 매우 기뻤다. 첫 보고서를 쓰는 날이다. 열심히 먹을 갈고 붓을 적셔 다음과 같이 써 올렸다.
“그 동안 읽은 여러 경전에 의해서 좌선을 계속한 덕에 지난 달에는 마음을 완전히 비우는 경험을 했습니다. 마음을 비우자 밝은 빛이 머리 속을 채우는 듯 하였고 지혜가 샘솟는 듯 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스승은 별 말도 없이 그저 마지 못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칭찬을 기대했던 젊은이는 좀 실망을 했지만 아무 말 못하고 물러났다. 또 한 달이 지났다. 젊은이는 다시 붓을 들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계속 염불과 좌선으로 정진(精進)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삼 주가 지나자, ‘나’라는 생각을 잊었고, ‘나’라는 생각을 잊자 천지가 제몸 같이 느껴지고 우주가 제 마음 같이 느껴졌습니다.”
젊은이는 이 정도면 스승께서 감탄을 하겠지 하고는 얼굴에 웃음을 띄면서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스승은 한번 슬쩍 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는 돌아 앉았다. 제자는 실망이 대단히 컸다. 또 한 달을 열심히 수련을 한다. 그 동안 계속한 참선 수련으로 그 경지를 높인 젊은이는 이번에는 자신 있게 다음 달 보고서를 이렇게 올렸다.
“식음도 잊고 취침도 잊은 채 명상에 전념 했습니다. 그러자 아상(我相)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 우주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의식은 태초(太初)의 무극(無極)과 하나가 되었고, 제 몸은 음양의 조화와 하나가 되었으며, 제 마음은 텅 비어 오갈 곳을 몰랐습니다. 이만 하면 깨달음을 얻었다 하겠습니까?”
스승은 이를 보자 슬픈 얼굴을 감추고자 그만 눈을 지긋이 감더니 못내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는 다시 돌아 앉았다.
“그만 물러가라.”
젊은이는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뭘 잘못하는 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몇 달이 지나도록 스승은 그 제자로부터 보고서를 받지 못했다. 거의 일년이나 지나서 궁금해진 스승은 사람을 시켜 젊은 제자가 어찌 수련을 하고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하였다. 제자는 그 사람을 통해 보고서를 또 하나 적어 보냈다.
“깨달음이고 뭐고 누가 알게 뭡니까?”
편히 누워 있던 스승은 이를 보자 스승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 앉더니, 비로서 입가에 그윽한 환희의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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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상의 허구를 본 마음은 온 천하가 칭찬을 하여도 거만하지 아니하며, 세상이 비난을 하여도 아랑곳 하지 않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려 억지로 일을 꾸미지 않고 비난을 피하려 뜻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도 않는다. 얻음과 잃음을 하나로 알아, 재물과 명성이 찾아 오면 기꺼이 수용하여 옳게 쓰고, 떠나가도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편하게 두어 제 본성대로 살게 하여 정신을 어지럽히지 아니할 뿐이다.
원글 출처 - http://www.dodam.org/ko/tao/understanding/i_story.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