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 청라언덕    <청라언덕 창작 오페라 및 선교사 집 이미지 컷>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 가곡 ‘동무생각’의 노랫말 시작 부분이다. 중학교 음악 교과서 맨 앞을 장식한 이 노래는 전 국민의 애창곡이라 할 만큼 친근하다. 이은상 작시, 박태준 작곡의 이 가곡은 언젠가부터 ‘청라언덕’이라는 지명 덕도 톡톡히 보고 있다.

 

학교 다닐 당시에는 청라언덕을 지척에 둔 채, 수없이 ‘동무생각’을 불렀어도 그것이 대구 동산동의 특정 지역을 지칭한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청라’라는 말이 그저 꾸밈새 정도의 관형어 기능을 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본격적인 근대 대구 문화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전이어서 청라언덕이 조명받기에는 일렀는지도 모른다.

 

시립도서관에서 마련한 ‘근대 대구 골목 투어’ 문학기행에 합류하면서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청라언덕을 둘러볼 수 있었다. 청라언덕은 구한말 대구의 기독교가 뿌리내린 중심지였다. 지난 100여 년간 지역 문화 변천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호흡 공간이다.

 

청라(靑蘿)란 ‘푸른 담쟁이’를 말한다. 담쟁이는 미국 선교사들이 대구의 더운 날씨를 극복하기 위해 손수 갖고 와 심었다. 담쟁이 넝쿨은 여전히 선교사가 살던 붉은 벽돌집 주위로 휘감아 돌고 있었다. 대구가 근거지였던 박태준 작곡가의 학창 시절 연애사를 이은상 시인이 노랫말로 다듬어 만든 곡이 ‘동무생각’이었다. 여기에 백합 피는 청라언덕이 나온다. 흰나리꽃 향내 머금은 백합은 근처 신명여학교 학생이었다고 해설사가 전해준다.

 

최근 이은상 시인의 고향인 마산에서도 청라 언덕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청라(靑羅) 즉, ‘푸른 비단’이라는 뜻의 이 언덕은 마산만이 보이는 노비산을 지칭한다는데 지켜보는 사람들로서는 자못 흥미롭다. 의미 부여만 제대로 한다면 대구인들 어떻고, 마산인들 어떠랴. 두 예술가의 정신만 오롯이 되살릴 수 있다면 문화 이미지로서 청라언덕은 둘이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지명의 소유권 보다 청라언덕이라는 고유한 문화 이미지로서의 스토리텔링이 더 중요하다.

 

문화 상품으로 재탄생되는 청라언덕을 두 예술가도 반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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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15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라언덕이 푸른 담쟁이 언덕이군요.^^
팜므느와르님, 댓글 반가워 답글 달다가 뭘 잘 못 눌렀는지 글 전체가 날아가버렸어요.
제가 요새 이래요. 손이 완전 엉뚱해요. 그 페이퍼 살려야하는데... 님의 댓글이랑
추천도 아깝고. 흑흑... 님 댓글 보고 아! 김훈!! 이러다 뭘 눌렀던지..ㅠㅠ

다크아이즈 2012-10-16 01:12   좋아요 0 | URL
아, 어쩌지요. 프레이야님은 페이퍼 성의껏 길게 쓰시는데 투자한 시간, 열정 아까워서 어쩌지요. 서재기기께서 살려주실 거라 믿으며. 저 댓글 때문에 생긴 일이라 마구 미안해지네요.
 
난 정말 JAVA를 공부한 적이 없다구요
윤성우 지음, 김문석 감수 / 오렌지미디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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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JAVA 입문서로 제일 괜찮다는 소식 듣고 부랴부랴 샀답니다. 대입 면접용 참고 도서입니다. 부담없이 책을 펼칠 수 있습니다. -아들 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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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5
마이크 마퀴스 지음, 김백리 옮김 / 실천문학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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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만이 아는 대답

 

올해 노벨 문학상은 중국 소설가 모옌(莫言)에게 돌아갔다.『홍까오량 가족』이 그의 대표작인데, 소설 앞부분은 영화 ‘붉은 수수밭’의 소재가 되었다. 동양권에서 수상자가 나오니 친근감과 동시에 질투가 인다. 수상자 못지않게 후보군에 자주 오르는 작가들에게 관심이 간다. 고은, 무라카미 하루키, 밥 딜런 등인데, 그 중 밥 딜런에게 귀와 눈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수로 알려진 사람이 문학상 후보로 오르내리니 생뚱맞으면서도 신선하다.

 

밥 딜런은 노래하는 시인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장식 어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6,70년대를 선도했던 저항 가수답게 메시지가 있는 노래를 부를 뿐이었다. 사회참여 및 반전에 관한 노래를 주로 불렀으니 노랫말이 자연스레 무겁고 의미심장하게 흘렀다. 그렇게 지은 여러 노랫말이 노벨상을 타도 좋을 만큼 문학성이 있으니 해마다 후보에 오를 것이다. 밥 딜런의 가사에 관한 평론이 발표될 정도이니 괜한 제스처는 아닌 모양이다.

 

몇몇 가사를 검색해봤다. 솔직히 문학성이 있는지 나로서는 판단이 서질 않는다. 비약과 은유가 심한데다, 정돈되지 않고 장황한 느낌이다. 영어 원문을 봐도, 번역된 우리말 가사를 봐도 그렇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외국인이 우리말 원문과 자국어로 번역된 것을 읽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문화와 언어가 다른 상태에서 ‘시적인 가사’를 제대로 짚어내기란 어렵다.

 

한데 그의 대표곡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들으면 왜 그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된다. 베트남 전쟁 참상 등을 겪은 세대답게 반전 메시지가 주는 노랫말이 시적이고 서늘하다. ‘얼마나 더 많이 머리 위를 날아야 포탄은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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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긍정의 에너지

 

    다양한 게 사람 캐릭터이다. 잇속만 챙기는 사람, 자기 것을 한없이 퍼주는 사람, 자신을 포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사람, 소견이 좁은 사람, 아량이 넓은 사람, 착한척하지만 의뭉스러운 사람, 냉정하게 보이지만 속 깊은 사람, 냉소적이고 경계가 있는 사람, 한없이 밝아 경계가 없는 사람 등 저마다의 주어진 개성으로 사람들은 사회적 한살이를 꾸려나간다.

 

  사람이란 동물은 오묘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에 위에 열거한 여러 캐릭터 중 어느 한 쪽만 가진 사람은 없다. 신이 인간을 이중인격자로 설계해놓고 그것을 즐기기 때문에 대체로 우리는 양면성을 지닌다. 하지만 유독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있다. 잇속만 챙기는 치는 아니지만 냉소적이고, 배려는 잘 하지만 소견이 좁고, 나사 몇 개씩 풀린 허점투성이 생활 패턴이지만 경계 또한 분명한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 그들은 신기하고 존경스럽기만 하다.

 

  인격이란 게 어느 정도는 훈련과 수련을 통해 연마할 수 있다. 하지만 보편성을 넘어선 천사표를 가슴에 단 사람들은 훈련과 수련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것 같다. 궂은일, 힘든 일을 자처하면서도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다. 안 해도 되는 일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놓고 생색조차 없다. 자연히 모임의 실질적 리더가 되는데, 사람 마음을 얻는 것보다 귀한 선물은 없기에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아무나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하루에도 열두 번 변덕이 끓었다 내렸다 하는 나 같은 이에게 그들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가만히 보면 그들은 제 맘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한다. 작은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고, 큰 짐이 밀려와도 의연하기만 하다. 맘 속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웃고, 베풀고, 배려한다. 괜히 그들에게 좋은 기를 얻기 위해 바람결을 빌려 옷소매 한 번 스쳐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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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시원한 글쓰기
오도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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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에 길이 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가끔은 책을 덮고 풍경 속으로 들어갈 때 그 길이 보인다.

 

  뜻 있는 사람끼리 모여 글공부를 한다. 잘 익은 밤처럼 토실토실한 남의 글을 읽기도 하고, 덜 말린 대추 같은 누글누글한 제 글을 다듬어도 본다. 남의 좋은 글을 읽을 땐 감탄하고 부러워할 입과 맘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자신의 글을 숙제로 내놓아야 할 날짜가 다가오면 안절부절못한다. 남보란 듯 합당한 이유가 생겨 떳떳이 결석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글 좀 잘 써보고자 모였는데 글이 제 발목을 잡아 버린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이 있을까?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훈련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글쓰기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만만하고 쉽다면 애초에 모임을 만들어 공부할 필요조차 없을 테니까. 결실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인 가을이 왔는데도 우리들의 쓰기는 지리멸렬하기만 하다. 수고 없이 좋은 글이 내 곁에 남을 리 없다. 그럴수록 책상 앞에 앉으면 압박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즐거워야 할 글쓰기가 괴로움이 된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무조건 쓰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글이 되지 않을 때는 글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게 맞다.

 

  활자 빽빽한 종이 대신 아름드리 소나무 솟고 늦은 민들레가 피는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이름 붙여 야외수업. 오늘 만큼은 숯불 삼겹살과 소주 한 잔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도 좋다. 밋밋한 평화보다야 울퉁불퉁한 들끓음이 글 소재로는 제격이 아니던가. 연필을 버려야 할 적당한 타이밍이었을까. 출석률이 좋은데다 여유가 넘친다. 유머가 길을 트니, 배려가 뒤따른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건, 반만 맞는 말이다. 때론 책을 버리고 풍경 속에 흠뻑 젖을 때 길이 보인다. 푸성귀 뜯고 씻던 시린 손, 쉴 자리 마련하려 굽히던 무릎, 연기 마셔가며 모닥불 피우던 잔기침 소리, 바람막이로 서서 따뜻한 물 끓여내던 환한 미소 이 모든 것들이 자연 속에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내고 있었다. 글은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풍경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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