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혼란스럽다.

   책 읽는 자로서 나는  별종에다 까탈스러운가?  써야할 리뷰 대상이 된 책에 대해서는 될 수 있으면 타인의 리뷰를 미리 들춰보지 않는다는 게 그간의 내 소신이었다.  혹여 타인의 생각을 훔쳐보는데서 생길지도 모를 선입견이나 영향력을 우려하는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예외이다. 리뷰를 올린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어떤 이유로 사람들은 이 책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렸는가? 정말로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 리뷰들을 읽고 나서도 진정한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내가 잘못 읽고 있는가? 읽히는 소설이긴 하지만 열광할만한 근거는 찾지 못하겠다.  딴지는 아니고,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면서도  소수의 취향에 해당하는  나같은 인간은 깊은 의문에 쌓인다. 소설을 읽을 때(책을 읽을 때) 내가 지향해온 소박한 철학(철칙이라 해두자)을 이제 거두어 들일 때가 되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프로 작가가 쓴 모든 읽을 거리는 될 수 있으면(될 수 있으면에 방점이다) 완벽한 문장을 지향해야 한다는 게 독자로서의 내  생각이다.  어떤 시인이 말했다.  시는 은유이기 때문에 말이 좀 안 되고, 비문을 써도 용서가 된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시인을 마음 속 깊이 신뢰하지는 않는다.  어디선가 읽은 이런 말이 떠오른다.  '어떤 시인이 진정 시인인가, 아닌가는 그가 쓴 산문으로 판가름 난다. 산문이 되지 않는 시인은 더 이상 시인이 아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호흡 긴 문장을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헐거운 문장력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를 쓰는 행위를 경계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시든 소설이든, 모든 활자화된 것의 기본 예의는 문장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 과민한 걸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푸른숲, 2005)을 읽는 동안 유쾌했고, 동시에 짜증이 났다. 남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다는데 원래 냉혈한 기질이 있는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우선, 유쾌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구성은 빼어났고, 스토리라인은 선명했다.  작가는 목 좋은 자리를 선점해 단골을 유치한 포장마차 주인처럼 민첩하고 유연한 방식(호기심을 자아내는 구성과 적당히 신파가 섞인 서사)으로 대중성 확보에 성공한 듯 보인다.   이것이 작가 공지영의 힘이다.   쉽고 감성적인 언어로 작가와 독자가 동시에 원하는 목표점인 자연스런 감동과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낸 것은 분명 장점이다. 부럽고 본받을 일이긴 하다.  이것이 곧 대중소설의 존재 이유가 아니겠냐고 누군가가 목놓아 외친다면  이 리뷰를 쓰는 의미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작가는 프로이고 프로는 책임있는 문장들을 뱉어낼 의무가 있다. 물론 모든 작가들이 김훈이나 천운영처럼 미려하면서도 적확하고, 섬뜩하면서도 정교한 문장을 구사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위에 방점 찍은 것처럼 될, 수, 있, 으, 면,  제대로 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감동과 공감만이 목적이라면 굳이 소설에서 그것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학이 예술의 고매한 범주 중 하나라고  볼 때, 그 예술성은 독자에게 전달되는 정서적 감동 외에 감동을 전달하는 문체적 특성에서도 발견되어야만 한다. 

  공지영 소설이  대중적, 외연적 확장을 하면 할수록 그 문체적(더 확실하게는 문장력) 결함의 아킬레스 건이 도드라져 보일 것이라는 우려는 나만의 생각일까.  나는 공지영 작가를 존경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다만, 좋은 문장을 만나기 위한 독자로서의 신경증적 강박이 있다는 것은 고백해야겠다. 물론, 독자로서 문학이 예술이 아니라 그저 오락이나 휴식에만 머물러도 좋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면  이 강박은 자연스레 없어질 것이다.

  읽기에 껄끄러웠던 첫 도입부의 몇 개 문장만 인용해본다.

 

   비는 저 불빛들 속에서만 내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젖게 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를 테니까. (9쪽)

   이 겨울비처럼 어두워져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이도 있었다. 그를 만난 후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10쪽)

 --- 도입부의 문장 일부이다. 어둠 속 비오는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도무지 나로서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젖게 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를' 이유가 없다.  사족이다.  뒤쪽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이 어둠 속에서 우리를 젖게 하는 것의 정체가 비라는 것쯤은 비를 맞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지 않겠는가. '불빛들 속에서만 내리고' 있는 비의 선명한 이미지를 묘사하다 보니,  '어둠 속'의 비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엷은 운무처럼 뿌연 빗속에서 달리던 차들 위로 태양처럼 붉은 신호등이 켜졌다. (10쪽)

--- 딱히 비문은 아니지만 이런 앞뒤 문맥상 불분명한 비유를 왜 써야하나? '뿌연 빗속'에  '태양'이라...

 

  어머니는 왜 자신의 친구였던 고모를 미워했을까. 그러니 나도 어머니를 미워한 것이 먼저였을까, 아니면 고모를 닮아버리겠다고 결심한 것이 먼저였을까. (14쪽) 

  그러나 그것은 미개지에 들어선 점령군이 부르는 승전가 같은 종류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건드리기만 하면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오래되고 내밀한 상처였으며 설사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언제나 피를 흘리는 그런 종류의 아픔이이고 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반역에 실패한 패잔병들이 부르는 악에 받친 풍자가 같은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다, 다른 점도 물론 많다. 고모는 나보다 우리 집안사람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어떤 물질적 향응도 자신을 위해 쓴 적이 없었다. (15쪽)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온 은하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야만 성이 차던 존재, 술에 취한 날이면, 닫힌 문들을 발길로 차면서 나는 진실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발음해본 적은 없지만 그 때 누군가 내 심장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었다면 아마도 이런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15쪽)

  나는 위스키에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발견된, (21쪽)

---앞 뒤 연결이 생뚱맞고, 대구가 맞지 않아 부자연스러운 문장들.  도대체 왜 작가는 이런 부주의함들을  도처에 깔아놓아야만 했을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11-2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 하나 제대로 써보지도, 책 하나 제대로 내지도 못한 독자입니다만, 책 한 권이 있으면 열심히 읽는 독자로서 말하고 싶어요. 종종 공지영같은 수준미달을 보면 그의 책을 위해 베어지는 나무들이 아깝다고. `고등어' 이후에는 같은 말을 하고 또 하고, 되풀이해 하는 반복 재생 녹음기 같아요.

marine 2006-12-04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체 문제, 저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공지영에 대해서는 읽은 책이 별로 없어 왈가왈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문체는 작가의 기본적인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크아이즈 2006-12-04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드님, 블루마린님 동지를 만난 것 같기는 한데 작가에게는 좀 미안하네요. 부주의한 문장들, 예민한 독자들은 자꾸 신경 쓰이는 것 맞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