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의『도덕 감정론』을 펼치다 보면 그가 경제학자이기 전에 철학자라는 걸 알게 된다. 중등교육 과정을 거친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손’이란 시장 경제의 원리를 전파한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도덕 감정론』이나『국부론』에서 그것에 할애한 부분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 감정론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의 의미는 개인의 사익에 기초한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사회 공동의 이익으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말할 만큼 철학자로서 할 말이 더 많았던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인간이 지닌 도덕적 본성 및 감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도덕 감정론은 인간의 이기심이 공감이라는 사회구성의 합의를 획득할 때 공공선이 될 수 있다는 논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이 ‘오만과 허영’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바라본 오만한 사람은 표리부동하지 않다. 근거 없는 자기 우월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는 것만큼 타인도 자신을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자신의 우월함을 타인이 느끼게 하기 보다는 그 우월감 때문에 타인이 비굴함을 느끼게 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 한다. 예를 들면 그런 사람들에게 다정한 눈길은 스마트 폰에다 고정시키는 것이라서, 타인이 와도 시선 한 번 맞춰주지 않는다. 자신이 발언권을 행사할 때가 되었을 때야 유일한 다정한 눈길의 대상인 스마트 폰을 거두고 거들먹거림을 권위로 포장해 일갈을 해주신다. 불행하게도 그때의 청중은 그에게 비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약자들이란 점.
반면에 허영이 많은 사람은 표리부동하다. 자신의 우월성을 확신하진 않지만 타인이 그것을 인정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자들이다. 자신이 가진 색깔 이상으로 화려하게 타인이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 강하다. 이때 공정한 관찰자가 자신이 가진 본래의 색깔로 봐버리기라도 한다면 수치와 모욕을 느낀다. 예를 들면 각종 소셜 네트워크에다 어떤 날에는 누굴 만나고, 어딜 가서 뭘 먹고, 저기 가선 뭘 봤는데 매일매일 신나. 넌 이런 재미도 모르지? 하는 투로 필요 이상으로 키치적 도배를 하면서 그것을 봐주기를 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허영심의 노예일 가능성이 높다. 주례사 같은 인사용 댓글에 도취해 자신이 진짜 괜찮은 사람인줄 착각한다.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오만한 사람은 흔히 허영에 차 있으며, 허영에 찬 사람은 흔히 오만하단다. 오만과 허영이란 두 가지 결점은 동일한 캐릭터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확연히 구별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애덤 스미스로서는 허영의 천박한 과시욕구와, 오만이라는 가소로운 무례함이 결합되었을 때의 그 캐릭터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복합적인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론 오만과 허영의 캐릭터가 확연히 구분된다. 오만한 자는 안으로 들끓어 달뜨지 않고, 허영끼 있는 자는 밖으로 끓어 넘쳐 붕붕 떠다닌다. 다만 둘 다 청중들로부터 관심을 유도하는 것이 큰 목표 중 하나인데, 그것이 ‘가상의 공정한 관찰자’ (supposed impartial spectator), 또는 ‘가슴 속에 있는 이상적 인간’(ideal man within breast)의 눈에는 온당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애덤 스미스는 지나친 자기비하 보다는 지나친 오만이 낫다고 보았다. 과도한 것이 부족한 것보다는 스스로와 공정한 관찰자 모두에게 덜 불쾌하다고 보았다. 이 글이 쓰고 싶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오만하고 누구나 허영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비하하고 누구나 자책만 하는 사람에 비하면 허영과 오만이 있는 자가 더 솔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발전가능성만 보더라도 오만파가 자기비하파에 비하면 높지 않겠나. 잘난척하는 밉상보다는 짜증나는 진드기가 훨씬 더 견디기 힘들다는 걸 이백여 년 전 애담 스미스도 갈파한 것일까. 앞머리에서 말한 인간의 이기심이 공감이라는 합의를 획득할 때 공공선이 될 수 있다는 논지가 여기에도 적용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만과 허영과 자기비하와 자책이 뒤섞여 있는 캐릭터들이다. 하기야 그런 평범한 경우라면 애초부터 애덤 스미스의 눈길을 끌진 못했겠지. 이백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이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데 흥미로운 여러 정보들을 제공한다는 게 신선하기만 하다. 아울러 애덤 스미스 곁에서 여러 인간 군상의 모델이 되어 주었을 당대의 주변인들이 궁금해지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