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과좋은 처방전
내 하루는 언제나 다짐으로 시작해 결국 후회로 끝나지. 오늘 당신이 없는 사이, 누군가에게 당신에 대해 이야기할 것만 같았어. 그러고 싶지 않았어. 한 호흡만 참을 수 있다면 누군가의 온당한 말은 세상이 먼저 알고 수용하게 되어 있거든.
역시나 당신이 모르게 나는 당신을 아프게 했어. 당신을 아프게 해서 치욕스런 나의 하루가 지났어. 젊은 시인 박준은 이렇게 말하지.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대를 아프게 한 죄로 나는 내 어깨뼈마디마디가 쑤실 정도로 아파야 했어.
후회할 일은 언제나 한 호흡 사이에 일어나지. 물 한 모금 들이켜거나, 침 한 번 삼키거나, 하늘 한 번 쳐다보거나, 입술 한 번 앙다물거나……. 그 짧은 시간을 제 것으로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후회하게 되는 거야. 오늘도 집을 나서면서 우리는 몇 가지 스스로에게 다짐하지. ‘유쾌한 대화는 즐기되 쓸 데 없는 말은 삼가자, 의견은 말하되 논쟁은 피하자, 비겁한 자기변명 따위는 하지말자, 말해서 허망할 일이라면 차라리 침묵하자’ 등 숱한 일상의 경험이 가르쳐준 자기만의 어록을 새기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지.
하지만 순간이야. 물 위에 뿌린 말처럼, 하늘에 새기는 글씨처럼 이 모든 다짐들은 너무 쉽게 사라지고 마는 걸. 아무리 결연한 다짐도 그 영속성을 담보하지는 않아. 애초에 다짐이란 건 밧줄처럼 길고 단단한 게 아니라서 그래. 장난기 가득한 신은 다짐이란 말에 ‘잠재적 휘발성’이란 속성을 부여해놓았어. 당연히 다짐은 까먹기 위해 있는 것이고, 그것은 후회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되고 말지.
한 호흡만 참으면 되는 마음의 평화가 찰나에 흐트러지는 건 그 한 호흡보다 반 박자 빠른 악마의 유혹 때문이야. 그 반 박자 빠른 호흡을 한 호흡으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만이 제 안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어. 천성이든, 훈련이든 그 한 호흡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스승이야.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 라는 시인의 한 호흡을 얻기까지 나는 아직 멀었어. 나는 오늘도 당신을 아프게 했고, 당신을 아프게 해서 비열한 내 하루가 가고 있어. 무서운 건, 내일 하루도 변함없이 다짐하겠지만 속절없이 후회로 마감하는 하루가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거야.
용산 가는 길 - 청파동 1
박준
청파동에서 그대는 햇빛만 못하다 나는 매일 병을 얻었지만
이마가 더럽혀질 만큼 깊지는 않았다 신열도 오래되면 적막이
되었다 빛은 적막으로 드나들고 바람도 먼지도 나도 그 길을 따라
걸어 나왔다 청파동에서 한 마장 정도 가면 불에 타 죽은 친구가
살던 집이 나오고 선지를 잘하는 식당이 있고 어린 아가씨가
약을 지어준다는 약방도 하나 있다 그러면 나는 친구를 죽인 사람을
찾아가 패를 좀 부리다 오고 싶기도 하고 잔술을 마실까
하는 마음도 들고 어린 아가씨의 흰 손에 맥이나 한 번 잡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는 해를 따라서 돌아가던 중에는 그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