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한 장 저 먼 강을 건넜다. 아직 한창 피워도 좋을 꽃잎이었다. 강 건넜다는 그 꽃잎 소식에 가만 속울음만 내었다. 저 먼 강을 아주 건너기 전, 그 꽃잎의 숙명은 마을마다 웃음꽃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웃음보란 깃발을 단 나룻배가 강어귀마다 정박할 때 많은 들꽃들은 그 꽃잎이 오늘은 무슨 웃음보따리를 내려놓고 갈까 호기심서린 꽃밭을 만들곤 했다. 단 한 번도 잘 웃지 않던 꽃들도 그 꽃잎이 머무는 동안엔 콧잔등에 실팍한 주름 하나 불린 채 어금니가 보이도록 입술꼬리를 눈쪽으로 올리곤 했다. 모두 꽃잎 한 장이 뿜어내는 웃음 바이러스에 감염된 덕이었다. 그 꽃잎 이름은 황수관이다.
오늘 한 방송에서 황수관 박사의 특집 추모 강연을 보여주었다. 웃기 위해 천만 번쯤은 노력했을 안면 근육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는데 이제 더 이상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신바람 지수가 높아지면 가끔씩 호흡이 달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 것조차 물에 젖은 토란잎 같은 목소리가 되어 시청자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느낌이었다. 에너지, 정신력, 활기, 유머, 해학, 진솔함 그 어떤 것도 빠지지 않고 사람들의 감성 밑바닥을 두레박질해주던 분이라 보는 내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평소처럼 웃다울다 하다 보니 특집 방송은 끝나고 있었다.
오해를 세 번만 생각하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를 두 번만 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심오한 철학을 주는 강연이 아니라 생활 속의 발견을 할 수 있는 이런 강연이 평범하고 지쳐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겐 무척 도움이 된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컴맹인 나는 사진 한 장을 올리려고 해도 어려워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식구들에게 너무 많이 물었지만 그 때마다 원점이니 일찌감치 남편은 지쳐 나가 떨어졌고, 딸내미는 내 눈빛에 연민이 이는지 꾹 참고 침착하게 다시 가르쳐 준다.
황 박사가 말했다. 늙은 부모가 까치란 새의 이름을 잊어버려 아들에게 자꾸만 물었다. 세 번 물었을 뿐인데 아들은 ‘까치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돼요?’ 라고 쏘아 붙였다. 그 때 늙은 아버지가 오래된 일기장을 가져와서 펼쳐보였다. 그 일기장엔 세 살 먹은 아들이 까치의 이름을 물었을 때 무려 스물 세 번이나 군말 없이 가르쳐준 아버지의 기록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적혀 있었다. 부모와 자식의 차이점에 대한 비유인데 가슴에 팍 와닿는다.
황수관 박사의 촌철살인하는 위트와 유머가 하늘나라에서만 빛을 발할 걸 생각하니 왠지 아쉽고 서럽다. 때론 자식 보다 남편 보다 내 편일 것만 같은 소박하고 아름다운 웃음 전도사를 새해부터 추모해야 한다는 게 무척 가슴 아프다. 문태준 시인의 말처럼 ‘나 혼자 꽃 진 자리에 남아 시원스레 잊지도 못하고’ 며칠을 앓을지도 모른다.
강을 건너가는 꽃잎처럼
강을 건너가는 꽃잎들을 보았네
옛 거울을 들여다보듯 보았네
휘어져 돌아나가는 모롱이들
울고 울어도 토란잎처럼 젖지 않는 눈썹들
안 잊혀지는 사랑들
어느 강마을에도 닿지 않을 소식들
나 혼자 꽃 진 자리에 남아
시원스레 잊지도 못하고
앓다가 귀를 잃고
강을 건너가는 꽃잎들을 보았네
강을 건너가는 꽃잎 꽃잎들
찬비에 젖은 머루 같은 눈망울들
『맨발』, 문태준, 창비 77쪽
멀쩡한 사과를 반으로 잘랐더니 이렇다. 누가 건강을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