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아하는 꽃 중에 ‘데이지’가 있다. 색깔별로 키우던 데이지를 누군가의 창문 앞에 놓아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까만 플라스틱 모종 화분에 담긴 싸고 깔끔한 데이지꽃을 구경하기 위해 봄이면 화원 근처를 서성이곤 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창문 앞에 놓인 적 없는 나만의 데이지였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환상을 유지함으로써 실체를 맛보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 데이지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다시 못다한 혼자만의 데이지꽃 이야기를 만들어본다. 저 먼 언덕에 파수꾼이 있다. J·D 샐린저의 소설에서처럼 피비 같은 어린아이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도록 호밀밭 주변을 감시하는 파수꾼. 호밀밭 가장자리엔 데이지꽃 만발하겠지. 어린아이는 언제나 언덕을 향해 비행기를 날리곤 했어. 그런 뒤엔 해풍 부는 언덕을 향해 머릿결을 쓸어 올리거나, 덧니가 드러나도록 순진무구한 미소를 날리곤 했지. 파수꾼은 행복했지.
어느 날 지천으로 피어난 데이지꽃을 뜯어 꽃다발을 만들고선 언덕 아래로 내려와 어린아이에게 건넸지. 꺾인 데이지꽃을 보고 어린아이는 파랗게 질려 울음을 터뜨렸지. 어린아이가 종이비행기를 날린 대상은 파수꾼이 아니었어.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아득히 피어난 데이지꽃이 바람에 일렁일 때마다 그 잔물결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위로 비행기라도 날려 응원하고픈 맘 뿐이었어. 하지만 파수꾼은 어린아이의 작은 몸짓, 환한 미소가 자신을 향했던 거라고 착각했던 거지.
언제나 환상과 실체의 경계에서 우리 삶은 진행된다. 그 둘은 눈곱만큼 정도의 교집합도 이루지 않을 때에만 서로의 존재 가치가 인정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환상은 언젠가는 실체라는 자명한 괴물 앞에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 너머 어떤 것'은 내 식으로 존재해 줄 때만 우리는 믿음이란 활력소를 얻는다.
데이지꽃이라면 저 먼 언덕 끝에서 바람에 살랑일 때 가장 아름답고, 종이비행기를 날린 뒤 머리칼 사이로 스미는 손과 천진한 미소는 파수꾼 자신을 향한 것일 때 가장 행복하다. 데이지꽃이 꺾여 꽃다발로 다가오고, 어린아이의 손짓과 미소가 파수꾼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 우리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된다.
착각에 빠져 있으면 미욱한 일상이 따르고, 실체에 놀라면 피폐해진 영혼이 날을 세운다. 환상과 실체, 착각과 현상 그 경계를 넘나드느라 까진 무릎의 생채기가 오늘 따라 도드라져 보인다. 그래도 절망하지 않으련다. 데이지꽃이 전하는 말은 ‘희망과 평화’란 걸 억지로 기억해야 하는 뇌가 있으니.
선거는 끝났고, 어쩔 수 없이 나는 허무주의자로 돌아갈 뿐이다.
쇠고기 사무면 뭐하겠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