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볍게 스치는 바람에도 아린 피멍을 느낄까. 왜 덤덤하기만 한 저 가방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까. 왜 노래하는 저 파도가 내겐 울음 섞인 아우성으로 비칠까. 세상사 맘먹기 달렸다고? 그러니 뭐든지 담대하게 툭 털어버리라고? 그런 건 무책임한 말을 뱉고도 좋은 말을 했다는 뿌듯함을 얻고 싶은 자의 립 서비스일 뿐, 실제 소심하고 예민한 소시민인 우리는 그런 충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언제나 내가 처한 상황이 제일 힘겹고, 내가 당한 일들이 가장 분노할만하다고 단정 짓는다. 모든 것을 내 식으로 침소봉대한다. 자학하거나 피해를 자청함으로서 자기위안을 얻으려한다.
우리 일상은 두루마리 휴지 풀리듯 술술 풀리는 게 아니다. 실크 블라우스에 붙은 껌 딱지를 떼 내는 것처럼 성가시고 힘들 때가 더 잦다. 살아갈수록 금세 해결되는 일보다는 뭉근한 시간을 요하는 게 훨씬 많다. 이미 이어온 날들은 불만족스럽기만 하고, 앞으로 이을 날들 역시 두렵기만 하다. 산다는 것 자체가 망설임과 회한의 날들의 기록이다.
이런 이야기가 기억난다. 그다지 가난하지 않은 시골청년이 부모를 여의자 서울로 돈 벌기 위해 떠나기로 한다. 고향을 떠나 본 적 없는 청년은 앞일이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장에게 찾아가 덕담을 부탁한다. 그때 서예 연습을 하던 이장이 한 마디를 써준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비결은 단 두 마디면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나머지 한 마디는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서울에서 성공했고, 여유도 얻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원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걱정과 회한만 쌓여갔다. 결국 30년 전에 찾아갔던 이장을 다시 찾아갔다. 하지만 이장은 벌써 세상을 뜨고 가족 중 누군가가 청년에게 남긴 편지를 전해주었다. 조심스레 봉투를 뜯었다. 그 안에는 이장이 예전에 약속했던 나머지 한 마디 덕담이 쓰여 있었다. ‘후회하지 마라.’ 이미 중년이 되어버린 청년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두려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기. 이 두 마디만 새겨도 덜 피곤한 삶이 펼쳐진단다. 하지만 여린 바람에도 잿빛 피멍을 느끼고, 무던한 가방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고, 발랄한 파도가 울음 섞인 아우성으로 비치는 날들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저 짧은 두 마디는 여전히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일 뿐이다. 두려워 망설이고, 건너고선 후회하는 게 인생의 강물 아니던가. 그래도 삶이란 동네엔 이장의 저런 덕담이 필요한 거다. 상처 많은 인간을 위한 덕담의 효용은 실천에 있는 게 아니라 위무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