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이라면 이쯤 되어야 한다. 말꼬리가 이어져 번잡하나, 솔직한 자기 성찰로 가득 찬 사르트르식 자서전. 성공한 이후의 주변 이야기가 없어 아쉬울 수도 있지만, 유소년 시절의 회고만으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했으므로 사르트르의 한 생을 돌아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웬만한 자서전을 만나더라도 한동안 사르트르의 말이 지나간 언덕을 대신하진 못할 것 같다. 모계 혈통으로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닿아 있음을 수다스레 설명하는 첫 부분부터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한다. 가계도를 그리면서 읽어야 할 정도로 구구절절 자신의 피 안에 슈바이처가 맴돌고 있음을 자랑(?)한다.
어린 사르트르를 구원해 준 것은 할아버지의 서재이다. 그에게 그곳은 엄숙한 신전이자 신기한 놀이터이다. 좌충우돌 독학으로 글을 깨친 사르트르에게 그곳은 신세계이자 인식의 기틀을 마련하는 운동장이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라는 면에서는 재미를 선사하지만 사건 위주가 아니라 사유 위주의 자서라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사르트르 특유의 해학을 지나 은유와 모순 상징을 지날 때는 바짝 긴장하며 읽게 된다. 완벽하게 읽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라는 그의 철학적 명제를 그의 삶 속에서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자신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주변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삿됨을 스스로에게 질타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전이시키는 마력을 맛보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유년의 연극적 삶의 우스꽝스러움을 고백함으로써 어른들의 부조리가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이양되는 과정 앞에서는 화끈거리는 공감의 여운을 애써 감춰야만 했다.
가족에 대한 냉정하고도 가차 없는 붓질. 왜곡과 기만과 과장으로 가득한 자서전에 신물이 난 독자들에게 그가 왜 사상가이고 문학가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무서울 정도의 자기 솔직함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성년 이후의 자서를 포함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이야기에 솔직할 수는 있어도 타인(교류한 숱한 명사들)과 연루된 이야기라면 천하의 사르트르도 부담을 느끼지 않았을까.
유소년 시절 이야기만으로도 사르트르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것은 안심이나, 자기애에서 나오는 지루한 묘사나 독특한 자신의 사상이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분석적이긴 하나 인간미가 있는 스타일은 아니다. 빛나는 통찰이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고나 할까. 통찰에 적당함이란 건 있을 수 없지만 유쾌하고 발랄한 어떤 지점을 지나 뭐든 지나치면 무서워지는 느낌이랄까.
1964년 그가 노벨 문학상에 거론될 때 가장 먼저 언급된 책이 바로 이 <<말>>이었다나. 외견상 노벨상의 서양 편중과 작가의 독립성 침해, 문학의 제도권 편입 반대 등의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지만 그 속내는 사르트르만이 알 일. 어쨌든 노벨상을 거부한 이 최초의 사건으로 그의 명성과 지성은 한층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또한 사르트르가 원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읽기와 쓰기와 관련된 어린 사르트르의 좌충우돌 인간적인 매력과 그의 철학적, 문학적 씨앗의 시절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약간 지루하면서도 어려운 감이 없지 않지만 생각보다 재미가 장착된 책.
<등장인물>
*알자스 초등 교사 출신 식료품상 (샤를, 오귀스트, 루이:목사, 루이 아들 알베르 슈바이체르)
**샤를 -교직, 책 내고 연설, 루이즈 기유맹과 결혼, 부인을 돌보지 않음. 장남 조르주, 에밀 독일어 선생(독신이면서 아버지 가장 닮음, 고독사), 둘째딸 안마리(미인이었지만 환경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음. 사르트르의 어머니가 됨)
*사르트르네 의사의 장남 장바티스트가 해군 장교 시절 안마리 슈바이체를 알게 되어 낳은 아이가 장폴 사르트르, 열병으로 죽음. 어머니인 안마리의 삼촌이 알베르 슈바이체르. 사르트르의 외할아버지 동생의 아들이 슈바이체르 - 휴, 가족 관계 어렵다.)
*칼레마미 -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독일식으로 부르는 애칭
*뤼세트 모로 - 이웃 소녀
*마리 루이즈 - 내가 다닌 학원 선생이자 개인 교사
*시모노 씨 - 할아버지의 공저자
*디발도스 신부 - 할아버지가 존경한 신부
*베르나르 - 연극에서 나보다 주목 받은 친구, 내가 수염을 끌어당김.
*피카르 부인 - 이웃 노파, 문답지 수첩을 선물로 줌.
*(폴 이브) 니장 - 사르트르 고등사범 친구, 사팔뜨기, 악의 베나르 화신, 냉소적이고 경망한 객관적 관찰자, 철학자이자 소설가, 2차 대전 초기 전사
*올리베에 - 고등 초년 시절 담임, 깡마르고 대머리
*베르코 - 고등 시절 친구, 장폴처럼 과부의 아들, 형제애 느낌.
*베나르 - 고교 친구, 병아리 닮은 소년, 모범생, 반기숙생, 온순하고 예민함. 바느질하는 엄마, 가난, 연약
*뒤리 선생 - 고교 베나르와의 우정 시절 선생님
<스포일러성 줄거리>
1부 - 나는 해군 장교인 아버지와 아인슈타인 가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한 살 때 열병으로 죽었다. 나는 엄마와 외가살이를 한다. 아버지와 추억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덩치 큰 엄마는 누나 같다. 경제력 없는 엄마는 순종적이다. 나는 순한 아기 노릇을 잘했다. 훌륭한 행동으로만 남을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네댓 살 때 눈병을 앓아 애꾸눈에 사시가 되었다. 그런 징조가 있기 전에 내 사진은 다소곳한 공경심에 위선적인 교만이 서려 있다. 자신의 값어치를 알고 있다는 듯. 할아버지는 죽음의 문턱에서 나에게 황홀경의 의미를 부여해 불안과 싸우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들들에게는 고약했지만 손자인 나에게는 사족을 못 썼다. 그것은 노인이 개에 환장하는 것과 같다.
나는 어른들 앞에서 사랑 받는 법을 알고 최대한 이용한다. 나는 나 자신을 베풀어 할아버지를 기쁘게 할 줄 안다. 배 고픈 것도 착한 것이 될 정도로 나 자신을 창조해나간다. 환심을 살 줄 안다. 엄마는 여전히 헌신적이지만 그것은 묵과되기 일쑤였다. 나는 권력보다는 박애와 진보를 실천하고 따르려했다.
충분한 칭찬을 해주지 않는 할머니 앞에서 나는 불안했다. 부정적인 루이즈는 가면극하는 내 속을 꿰뚫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 편이 되어 할머니 루이즈를 무시했다. 알자스에 프로이센이 주둔하면서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한다. 파리에서 할아버지는 독일인을 상대로 프랑스어를 가르쳐 가족을 건사한다. 알자스를 못 찾아도 평화가 지속되어야 학원이 잘 되니 할아버지는 평화를 지지한다.
할아버지의 서재는 신전이었다. 거기서 기본 소양을 키웠다. 할아버지의 <독일어독본>이 판을 거듭했지만 출판사는 마땅한 보수를 쳐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는 교직을 성직으로 문학을 수난으로 여기게 되었다. 엄마 안마리가 책을 읽어줬는데 나중에는 그 행위에 질투을 느끼고 스스로 책을 읽는 시늉을 한다. 그러다가 글을 깨친다. 어렵고 생경한 낱말들을 접하지만 그 뜻을 알기까지는 십 년 이상의 일이 된다. 나로서는 사물보다도 관념이 한결 현실적이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관념이 먼저 주어졌고, 그것도 사물로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서 나는 세계를 만났다. 이 관념론을 청산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책은 내게 종교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존재가 분명한 작가들을 싫어했지만 나는 그 속에서 오히려 나의 다른 면을 발견하는 것 같아 신이 났다. 책으로 변신한 작가들은 죽은 게 아니었다. 코르네유, 플로베르, 위고, 샤토브리앙 등 내 놀이동무는 넘쳐났다. 동무들이 위대하지만 찬양하지는 않았다. 번역가로서 할아버지는 그에 맞게 작가들을 각색했다. 실리주의 할아버지가 보는 작가와 내가 보는 작가들의 세계는 달랐다. 나는 작가들에 대해서 비교적 솔직하다. 친구에게나 할 수 있는 나쁜 습관처럼 솔직한 견해를 밝힌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 때문에 남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영웅의 특권을 원래 상태로 내려놓는 일도 내 일이다.
어른의 책으로 어른 행세를 하지만 여전히 나는 어린애다. 나의 탐험과 사냥은 집안 연극의 일부였고 모두 그 연극을 좋아했다. 나는 날마다 신동이 되어 할아버지를 자극하는 존재가 되었다. 책으로서 어른들의 환심을 사는, 연극을 하는 아이는 이제 혼자 있어도 그것이 자연스런 일이 되었다. 나는 교양의 물 속에 흠뻑 젖게 되었다. 나는 내 나이에 맞는 진짜 독서(잡지, 모험소설 등)도 하게 되었다. 어머니만 그 사실을 알고 있고, 할아버지에게는 그거싱 떳떳한 독서가 아니었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이 사실이 들켜서 혼줄이 났지만,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었으므로 상심했지만 관용을 택했다. 나는 편히 이중생활을 할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비트켄슈타인보다는 추리 소설을 더 즐겨 읽는다.
정규 학교에 편입하지만 철자법 사건으로 그곳에 다니지 않고 고독한 일상으로 되돌아 온다. 여전히 신동인 것은 변함이 없다. 개인교습을 받지만 선생은 나를 멍청한 아이로 여긴다. 공립초등학교에 들어가 할아버지 바짓바람으로 선생님께 편애를 받는다. 선생의 역한 냄새까지도 참을 만큼 나는 위선으로 단련되어 있다. 선생을 욕하는 담벼락의 낙서를 보고 충격을 먹을 만큼 나는 착한 척하는 것에 단련되어 있다. 나 역시 욕 당사자가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8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대우 받지 못하는 학원 선생 마리루이즈에게 연민을 느낀다. 할아버지는 그녀가 못 생겨서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세상의 불공정과 무질서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다.
나는 열 살이 될 때까지 한 늙은이와 두 여인 사이에 끼어 홀로 지냈다. 내가 확신하는 건 내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이었다. 연극하고 있다는 의식 없이 어찌 연극을 하겠는가. 내 존재의 결핍 때문에 나는 거짓 순진성을 내보이고 어른들에게 의지했고 내 스스로 속임수에 빠졌다. 나쁜 것은 어른들 역시 연극을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의심했다는 것. 어른들은 자기들이 하는 말과 내게 하는 말투가 달랐다. 어렴풋하나마 내 존재 이유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의기소침은 나를 추상적인 존재로 머물게 했다. 시모노 씨 같은 존재감을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카톨릭 세례도 받는다. 이는 신앙이란 달콤한 프랑스 식 자유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다. 집안으로서는 자유롭고 정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이지 신실한 믿음 때문에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의 총애를 받는 것과 동시에 개개인에게는 따돌림을 받는 존재가 나였다. 일곱 살 내 나이에 기댈 곳이라고는 나 자신 밖에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애정으로 여성화되고, 아버지가 없어 생기가 없으며, 할아버지의 총애 덕에 우쭐했다. 가족 간의 연극을 갈파할 만큼 나는 조금 커버렸다. 귀엽다고 쓰다듬고 만지는 것이 지겨운 나이가 되었다. 남의 환심을 사는 것보다 남을 위압하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칼레마미도 안마리도 내 환상극에서 배제되었다. “이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이 잇다. 그건 바로 사르트르다.”라고 생각할 만큼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된다. 동시에 여분의 존재라는 것도 자각한다. 동년배 아이들을 공원에서 만났을 때 그들은 내게 무관심했다. 그들의 눈을 통해 나는 신동도 해파리도 아니고 아무의 관심도 끌지 않는 일개 꼬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내 굴욕감을 할아버지는 새로운 속임수(글쓰기?)로 나를 끌어들인다.
2부 - 외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체르는 프랑스어 언어유희를 즐겼다. 아르카숑으로 잠시 떠나 있는 동안에도 할아버지와 나는 시를 주고 받았다. 어른인 척 흉내내는 시에서 공상과 모험의 산물인 산문으로 갈아탔다. 비록 표절 글이긴 하지만 여덟살 무렵에 벌써 작가로서의 영감을 맛보았다. 엄마와 지인들의 칭찬에 열심히 쓰는 척했다. 개수작 같은 글을 보고 할아버지는 실망한다. 내 창작 활동은 묵인되었을 뿐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끈질기게 썼다. 소설이 복잡해지면서 앞뒤 맞추려니 표절도 줄어들었다. 모험소설에 지나지 않지만 3인칭을 써가며 글이 원격화 되는 매혹을 맛보기도 했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냉혹한 이야기를 욕하면서도 흉내 냈다. 기괴망칙한 모험 소설들은 언제나 미완성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 기록들이 지금은 없어서 아깝기만 하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가짜 연기에서는 벗어나게 되었다. 나는 오직 글쓰기 위해서만 존재했다. 사적인 글쓰기 영역은 곧잘 어른들의 관심 때문에 방해를 받기도 한다. 직업 문인들에 대해 경멸적인 할아버지는 글 쓰는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나는 고등사범에 들어가 문학 교수가 되고 싶어진다. 할아버지는 타협안으로 밥 굶지 않게 교수를 하면서 글을 쓰라고 한다. 할아버지 속에는 나와 놀아주는 어릿광대와 권위를 누릴 줄 아는 카리스마 두 개의 세계가 있다.
글짓기에 명수는 없다. 입말도 글로 쓰면 외국어가 된다. 작가들 모두 그렇게 여길 것이다. 쓴다는 게 너무 중요해서 펜을 들기가 겁났다. 모범적이었던 복종할 데까지 복종하다 겨우 반항한 것에 불과한 글쓰기. 저격병 군인무리에게 하듯 사람들은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작가들은 인류를 위해 특출한 봉사를 해야 한다. 글쓰기 위해 태어난 나도 그래야 한다. 하지만 내 최초의 소설(구토)은 1935년 이후에나 나온다. 그만큼 나는 쓴다는 것의 불안에 시달린다.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프티부르주아 지식인이었다.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계급이 무의미한 사회에서 작가를 실직자로 만들어버린 이 세상에 나는 갑갑증을 느낀다. 나는 사제의 마음으로 작가가 되려 한다. 이웃이나 신이 아닌 내 이웃을 살린다는 목적으로 신을 위해 쓰고 싶다. 내가 바란 건 독자가 아니라 나를 은인으로 받들어줄 사람들이다. 그때가 겨우 아홉 살이었다.
나는 매순간 죽음의 세계를 생각했으므로 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등사범 시절 친구들이 그 문제에 괴로워할 때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였다. 책 만드는 데 필요한 만큼의 희망과 욕망을 지니고서 내 종말을 향해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이미 죽어 있기에 나는 자신이 흡족하지 않았다. 그건 겸손한 게 아니라 간사한 것이었다. 아홉 살과 열 살 사이 나는 죽음 뒤의 인물이 될 정도로 조숙한 아이였다.
유명 작가가 되어 내 이름이 붙은 거리를 상상하면서도 나는 내 실체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었다. 나는 왕인 동시에 구두직공인 셈이었다. 1914년 7월 독일과 전쟁이 났다. 전쟁이 내 독서를 망쳤다. 판매대의 책자들이 자취를 감춘 것. 글 쓰겠다는 열망도 수그러들었다. 그래서 1914년 전후가 어린 시절 중 가장 행복한 때였다.
엄마와 나는 정신연령이 비슷해 같이 붙어 다녔다. 엄마에게 말로 변신한 나의 세계를 읊어준다. 엄마와 밀착함으로써 엄마를 통해서 남성의 냄새를 맡고 남성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웠다. 나는 엄마의 단단한 근위병이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원한을 누르고 내가 고등 초년부 통학생이 되도록 해주었다. 첫 작문 실력은 꼴찌였다. 개인 교습만 받던 나는 강단으 싸늘한 민주주의적 원칙에 어리둥절했다. 남과 비교 당하는 시스템에서 나의 우월성은 달아나버렸다. 나보다 더 잘 대답하고 더 빨리 대답하는 놈이 있었다. 너무나 사랑받으며 자란 나는 순진했기에 급우들에게 탄복하거나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고통 없는 추락이 온 셈이다. 할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엄마가 학교에 찾아간 이후로 선생님의 관심을 느꼈고, 5학급(중2)이 되자 민주주의에 익숙해져 있었다.
학교 생활 때문에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교우 관계가 시작되자 글 쓸 욕망도 사라졌다. 따돌림 당하던 어린 시절에 비하면 친구들의 환대에 황송할 지경이었다. 집에서는 어른 흉내, 학교에서는 진짜 어른이 되어 놀았다. 가족 사이에 있던 광대 놀이를 청산하게 되었다. 나를 찾아가게 되니 시모노 씨도 부럽지 않게 되었다. 집안의 관심이 품위 있는 우정에 걸림돌이 되긴 했지만 그 둘을 잘 조율할 줄도 알았다. 통학생인 우리 우정에 진정한 방해꾼은 기숙생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불한당 무리였다. 얼마나 못 돼 먹었으면 가족조차 그들을 버렸을까.
조심스런 우정은 식기 쉬운 법이다. 방학이면 헤어지지만 나는 베르코를 좋아했다. 잘생긴 데다 온순했고 독서광이었다. 결핵환자는 그는 18살에 죽었다. 베나르는 모범생에 효자에다 연약했기 때문에 우리들의 존경을 받았다. 유리 상자 속의 그, 실체 없는 그를 우리는 멀리서 사랑했다. 전쟁에 차출 된 아비를 대신한 모성 사회의 덕성이 반영된 베나르는 겨울 끝에 죽었다. 우리의 덕성은 한 단계 높아졌다. 바느질품팔이 베나르 엄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었다. 이 사건은 나에게 악의 존재, 신의 부재와 부조리를 엿보게 했다. 그렇지 않고야 어째서 베나르의 모습만 이렇게 괴롭도록 선명하게 남아 있을까. 뒤이은 니장은 베나르의 악의 화신 같은 친구였다. 냉소적이고 비판적 관찰자인 그는 베나르만큼 우수한 성적을 내지는 않았다. 글을 쓰고 독서를 하고 싶어했다. 맹목의 신뢰와 당치 않은 불신 사이에서 헤매다가 오랜 뒤 나는 그와 진정한 친구가 된다.
열 살 때, 방문에 부딪혀 이가 부러졌는데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종말의 질서를 미리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죽음을 통해 내 삶을 바라보았다. 최악이 최선의 조건이라고 여겼고, 잘못조차 유익하다고 생각했으므로 결국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것과 같았다. 겸손했지만 자신만만한 아이였다. 내 실패가 사후 승리의 조건이라 믿었다.
나는 내 계급과 내 세대의 신화 즉 기득권을 이용하고 과거의 영광이 현재의 풍요라는 신화를 따르는 척했지만 혼자 있을 때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 자신이 나의 잿더미에서 소생하면서 부단히 다시 시작하는 창조를 통해서 나의 기억을 무로부터 건져냈다. 내 영혼의 혁명을 꿈꿨다. 과거와 현재의 동거를 바라지 않는 나는 내 유년기도 지웠다. 그래서 이 책을 쓸 즈음에는 그 흔적을 해독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죽음에게, 가면을 쓴 종교에게 내 인생을 우연에서 구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30세에 <구토>를 썼다. 내 종족의 정당화될 수 없는 씁쓸한 존재를 묘사했고, 나 자신의 존재는 시비의 대상에서 제외해버렸다. 나는 로캉댕이었다.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냈다. 나는 우리들의 불행한 조건에 관해 신나게 썼다. 못생겼다는 자의식은 나의 부정적 성분이었다. 무신론은 가혹하지만 끝까지 밀고 간 작업이라 생각한다.
한 줄이라도 쓰지 않은 날이 없도다. 이것이 내 습성이요 본업이다. 어린 시절의 특징은 50대인 내게 그대로 남아 있다가 기회를 노리고 고개를 쳐든다. 현재 나는 내 명성이 짜증스럽다. 살아 있는 한 그 명성은 영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신을 믿지도 않고,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가끔 지는 자가 이기는 자 되는 놀이를 한다. 할머니의 말이 생각난다.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 가라, 힘껏 딛지 말아라. 나는 내가 엘리트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걸 자부한다. 노력과 믿음으로 나 자신을 구해왔다. 불가능한 구원만 버린다면 사람마다 가치가 있고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