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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님의 서재는 트랙백 기능이 없어서 이렇게 첨부합니다. 



 1.여왕마고-성바르톨로메오의 학살

1572년 8월 프랑스에서 가톨릭과 위그노(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전쟁에서 위그노들이 학살된 사건.

콜리니(Coligny) 장군은 내란의 재발을 막기 위해 에스파냐에 대항해 일어난 전쟁을 지원하고자 하였고, 샤를 9세도 이를 승인할 계획이었다. 샤를 9세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는 왕에 대한 위그노인 콜리니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가톨릭교도인 기즈가(家)가 계획한 콜리니의 암살을 승인하였다. 1572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 마르그리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위그노들은 파리로 몰려들었다. 이 기회를 노려 콜리니를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왕이 이를 조사하자 암살 음모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파리에 모인 위그노 지도자들의 암살계획을 꾸몄다. 마침내 8월 24일 새벽, 가톨릭교도들의 위그노들에 대한 무차별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왕이 학살 금지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10월까지 유혈사태는 지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수천 명의 위그노들이 학살되었다고 전한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2,라스트 킹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아민(재임 중 30만의 우간다인 학살)

이디 아민(Idi Amin Dada Oumee, 1928년 5월 27일 ~ 2003년 8월 16일)은 우간다의 독재자이다.

집권 전
농부의 아들로, 문맹이었던 이디 아민은 193cm의 거구였으며, 권투 챔피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디 아민은 버마 전투에 참가하고, 1946년 영국 식민지 군에 입대하고,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케냐에서 대장으로 영국군으로 마우-마우 저항진압에 가담했다. 1961년 아민은 우간다 최초의 유색 장교가 되었다.

1962년 우간다가 독립하고, 1966년에 아민은 대통령 무테사를 축출하는데 동참한다. 1967년에는 군 통수권자가 되었다.

쿠테타와 집권
1971년 1월 25일 밀턴 오보테가 싱가포르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무혈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다. 서구 국가들에게 이 쿠테타는 안도를 주었으며, 영국과 이스라엘은 아민 정권을 바로 인정했다. 그러나 쿠데타 며칠 후, 우간다의 지식인, 장교, 법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오보테를 지지했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고, 주민들은 살해당했다. 이러한 국가폭력으로 이디 아민은 잔인한 아프리카의 폭군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가 권력에 있던 8년간, 1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희생자가 있었을 것으로 인권단체는 추정하고 있다. 아랍권의 국가들과 경제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아민은 이스라엘의 적임을 자처했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미화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1972년 아프리카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아시아인들을 내쫓고, 외국인 소유의 기업들을 국영화하였는데, 그로 인해 우간다는 중산층과 상류층을 잃게 되었다. 1975년 그는 OAU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76년에는 자신을 종신대통령으로 선언했다.

몰락

1978년 군 내부의 반역음모를 무마하기 위해, 탄자니아 침공을 명령했다. 그러나, 1979년 4월 11일 반격으로 수도 캄팔라가 탄자니아 군과 망명 우간다인들에게 점령당했다. 아민은 우선 리비아로 도망치고, 나중엔 이라크로 향했다. 결국 사우디 아라비아를 마지막 망명지로 택하였는데,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다에 살 빌라를 내어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고혈압과, 신경마비로 인한 혼수 상태에 빠져있다가, 2003년 8월 16일 생을 마쳤다
<출처:위키피아>
 



3.킬링필드 - 크메르루주에 의한 캄보디아 학살사건

크메르루주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左翼) 무장단체

‘붉은 크메르’라는 뜻이다. 1967년에 결성된 크메르루주는 시아누크가 1970년 론놀의 우익(右翼) 군사쿠데타로 전복되자 농촌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세력확장을 통해 마침내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장악함으로써 정권장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폴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정권의 4년간에 걸친 통치기간은 20세기 어느 좌파정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함과 무자비한 보복으로 얼룩졌다. 150만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학살되었고, 전문지식인층과 기술자층이 기회주의라는 죄명으로 죽어갔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야만(野蠻)과 살상(殺傷)은 서방에서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전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1979년 베트남군대와 이를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의 공격으로 크메르루주는 전복되었고 이후 캄보디아에는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헹삼린정부가 들어섰다. 크메르루주는 이후 타이 국경 근처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중국의 지원하에 무장 게릴라전을 전개했으며, 이로 인해 캄보디아내전은 계속되었다. 그후 유엔의 중재로 캄보디아내전 당사자들이 휴전에 동의하고, 1993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으나 크메르루주는 1993년 4월 선거불참을 선언하였다. 총선의 결과로 1993년 9월 캄보디아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여, 제1당인 민족연합전선의 지도자 노로돔 라나리드(시아누크의 아들)가 제1총리로, 그리고 프놈펜정권의 총리였던 훈센이 제2총리로 선출되어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1994년 7월 그들의 지도자인 키우삼판을 총리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캄보디아의 평화정착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과거의 악명과 계속되는 좌경(左傾) 모험주의의 채택으로 그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캄보디아 출신 행.s.응고르란 배우는 1996년 2월 25일 LA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살해되었습니다. 크메루루즈의 소행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4.블러디 선데이 - 북아일랜드 비무장 시위 군중에게 행한 영국군의 무차별 학살 사건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은 1972년 1월 30일 북 아일랜드 데리에서 공민권 운동중이던 비무장 카톨릭 교도에게 영국군이 발포하여 14명의 사망자와 13명의 중상자를 낸 유혈사건이다. 현대 "트러블"(북아일랜드 분쟁)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중 하나로 IRA의 재무장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위키피아>  




5.카틴 - 폴란드 정규군 장교들을 색출해 학살한 카틴 숲 사건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이 자행한 폴란드군 포로 대량학살사건

1943년 4월 13일 독일은 러시아의 스몰렌스크 근교에 있는 카틴 숲에서 소련 비밀경찰에 의하여 학살된 1만 명의 폴란드군 장교의 시체를 발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학살현장은 우연히 발견되었으나 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에서 패배한 후, 국민에게 총력전을 호소하고 있던 선전상(宣傳相) P.J.괴벨스는 이것을 반소(反蘇) 선전자료로 이용, 연합군측을 분열시키려고 획책하였다. 소련은 1941년 가을에 독일군이 학살한 것이라고 우겼으나, 독일측의 조사로 1940년 봄 소련에 의하여 저질러졌음이 입증되었다.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전부터 독 ·소 양국에 의한 1939년의 폴란드 분할 결과, 소련측에 억류된 폴란드군 포로의 행방에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었으므로 국제적십자사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소련은 폴란드 망명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소련과의 분열을 피하려고 사건에 말려들지 않았다. 또 폴란드의 저항세력도 아우슈비츠에서 대량학살을 계속하는 독일에 대한 저항을 늦추지 않아, 괴벨스의 선전공작은 실패하였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1∼1952년 미국의회에서도 조사한 일이 있으며, 1989년 소련비밀경찰의 소행이었음이 소련당국에 의해 확인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 



6.전쟁의 사상자들 -베트남 전에서 벌어진 민간인 강간학살사건

베트남 전선의 수색 중대 신참 고참들의 비인간적 행위에 환멸을 느끼고, 소대원들을 군법 회의에 고발하는 한 병사의 악몽을 통해 전쟁의 고통을 다룬, 4대 월남전 영화 중 한 편. 1969년 10월 18일 다이엘 랭(Daniel Lang)이 '더 뉴욕커'(The New Yorker)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토대로 태국 올로케로 촬영된 이 영화는 베트남전의 실상을 피하지 않고 대면했다는 찬사와 함께 비극적 카타르시스를 배제했다는 혹평도 받았다. 마이클 J. 폭스가 다른 이미지로 연기 변신을 했으며, 숀 펜의 악역 연기도 훌륭하다.

 죽고 죽이는 극한 상황 속에 내동댕이 쳐진 심리적인 반응이 한 사건을 놓고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극명하게 묘사했으며, 군대라는 사회에 적응하게 되는 입대 초기의 심리 상태와 제대 말기의 심리 상태를 대조적으로 보여줬다. 적을 죽이는게 임무인 군인들이 죽음에 너무도 익숙해서 인간성 마저 마비증세를 나타내는 과정을 통해 전쟁은 인간의 생명은 물론 인간의 마음까지 파괴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 홍성진의 영화해설>

  

7.호텔 르완다- 부족 간의 학살사건이 일어난 르완다 내전

르완다 내전이란 1959~96년까지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벌어진 후투족과 투치족의 종족전쟁으로 르완다 사태라고도 불린다. 수십 년간의 끔찍한 학살과 질병, 기아 등으로 수백 만명이 사망했다.

배경
당시 르완다는 이 지역에 진출한 소수 14%의 투치족이 왕국을 세워 토착부족인 85%의 후투족을 지배했다. 그 후 1916년 벨기에가 르완다를 지배하고 투치족에 대한 차별정책으로 종족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벨기에는 투치족 출신 왕들을 내세워 다스렸으나 벨기에가 물러간 후 후투족과 투치족의 갈등으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전쟁 과정
1959년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자 국왕 므와미 키게리 5세는 망명을 하고 1961년 1월 르완다는 공화국을 선포했다.

독립 후에 많은 투치족이 쫓겨나자 1963년 이웃나라 부룬디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 공격하여 이에 대한 복수로 르완다의 투치족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결국 1973년 투치족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후투족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이에 후투족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살아남은 투치족들이 이웃 나라 우간다로 도망쳐 1990년 우간다로 망명한 사람들 5,000명이 르완다애국전선(RPF)를 결성해 르완다를 침략했다. 1992년 후투족 정부와 RPF와의 협상으로 1993년 8월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아루샤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루샤 조약은 범과도정부를 요구했으나 과도 정부는 성립되지 않았고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 주베날 하비야마라나와 부룬디 대통령 키프리엔 은타리아미라가 비행기 요격 사고로 수도 키갈리 근처에서 살해당했다. 이 사고는 르완다 대통령 경호대의 소행으로 밝혀져 이튿날 1994년 4월 7일 대통령직을 대행하던 수상과 많은 온건파 후투족 지도자들이 RPF에게 살해당하고 그 후 수개월 동안 군대와 대통령 경호대, 극단적 후투족 민명대가 20~50만 명에 달하는 투치족 민간인을 살해했다.

1994년 7월 4일부터 투치족이 반격을 하여 수도 키갈리를 함락시키고 RPF는 키갈리에서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차단했다. 이에 수도 키갈리에 갇힌 6만 명의 후투족 민간인들이 반군의 보복이 두려워 탈출하기 시작했고 RPF가 르완다 제2의 도시인 부타레와 후투족 최후 거점인 기세니까지 진격하자 후투족들이 피란을 떠났다. 후투족들은 키갈리에서 서남쪽으로 30km 떨어진 임시정부의 잠정 수도 기타라마시로 가거나 서북부의 국경을 넘어 콩고민주공화국 등지로 피란을 갔다. 피란 중 300만 명의 후투족 난민이 발생했고 식량 부족과 콜레라 등의 전염병으로 많은 피란민이 사망했다.

한편 RPF는 7월 말에 전투 중지를 선언했고 후투족 난민은 1996년 말과 1997년 초에 다시 르완다로 돌아왔다. <출처 : 위키피아> 

(군이 아닌 민간인들에 의해 자행된 학살사건입니다. 물론 군과 정부가 선동과 세뇌로 배후 조정했습니다.) 



8.에너미 라인스 - 보스니아 내전 중에 일어난 세르비아 군에 의한 보스니아인 학살사건

구 유고 연방이 해체될 즈음인 1992년 3월 3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독립의 선포는 곧 분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립을 주도한 세력은 회교도가 중심을 이룬 보스니아 이슬람 정부와 이들 세력에 협조하는 보스니아내 크로아티아인들이었다. 그러나 보스니아내 약 30%를 차지하는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에서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유고연방에서 독립의 가부를 묻는 선거에 불참하면서 보스니아 독립선언 다음날인 3월 4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1992년 4월 6일 EU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승인하자 보스니아는 본격적인 내전상태에 돌입하였다. 유고연방군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계는 내전 초기 보스니아 영토의 약 70%를 일거에 장악하는 기세를 올렸다.

보스니아 사태가 위험 수위를 넘자 UN은 동년 5월 신유고연방에 대한 전면적인 금수조치, 항공봉쇄, 자산동결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신유고연방군은 곧 휴전에 합의하였지만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는 휴전에 동의하지 않은 채 전쟁을 계속하여 갔다. 냉전이 종식된 후의 유럽에서 냉전 시에도 없었던 민족간의 유혈사태가 내전으로 발전했음에도 UN은 군사행동의 가능성을 시사할 뿐 직접적인 군사행동은 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내전중 세르비아계는 소위 '인종청소'라 불리는 만행을 저지르자 여태껏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온 UN도 1992년 8월 군사개입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3만 여명의 평화유지군이 보스니아에 파견되었으나 평화유지군의 역할은 미미하기만 하였다. 내전은 휴전과 재확전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상황아래 러시아는 1995년 3월 보스니아사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세르비아계를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러시아는 세르비아공화국이 보스니아 회교정부와 크로아티아정부를 승인하는 대가로 세르비아에 대한 UN의 제재를 해제하자는 것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미국의 주도하에 보스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내전 당사국들과 미국, EU, 러시아 등 중재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5년 11월 1일 미국의 데이턴에서 평화협상이 개최되었다. 난항을 거듭하던 평화협정은 1995년 12월 데이턴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보스니아에 평화가 정착되는 시금석을 마련하였다. 이로써 2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230만 명의 난민을 발생시킨 보스니아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평화협정 체결후 미국과 독일이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제재 및 무기금수해제 결의안을 24시간 내에 채택해 줄 것을 UN에 요청하였고, NATO도 6만 명의 다국적 평화유지군을 투입할 차비를 갖추었다. 다국적군중 미군은 최대 병력인 2만 4천명을 투입하게 되고 영국은 1만 3천명을 투입하였다. 또한 러시아도 2천명 이상의 병력이 투입되어 냉전 이후 처음으로 미ㆍ러가 군사작전을 갖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과 러시아는 보스니아에서 평화유지를 위해 세르비아의 협조가 최우선이라 보고 밀로셰비치 세르비아대통령을 적극 지원하였다. 한국도 OSCE 협력 동반자국으로서 1996년 9월 보스니아 선거시에 선거감시단으로 12명을 파견하였으며 1998년 9월에 실시되는 보스니아 선거에 감시단을 파견하였다.

구공산권의 몰락 이후 유럽에는 항구적인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인종, 영토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발칸반도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구유고연방이 해체되면서 인위적으로 획정된 국경에서는 여러 민족간의 갈등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쟁의 요인들은 냉전 시에는 잠재적으로만 존재할 뿐이었지만 냉전이 종식되고 나서는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점에서 보스니아사태는 발칸반도의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난 분쟁이라 하겠다. 동 분쟁이 시작되고 나서 발칸반도에서 여러 분쟁들이 표출되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유럽 안보 전체를 위협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보스니아는 민족ㆍ종교적 이질감이 강하고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하여 통일된 주권국가로서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고,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를 얼마나 잘 통제하느냐에 따라 평화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가 결정될 것이다.  



(에너미 라인스란 영화는 직접적인 학살모습이 묘사되었지만 배경만을 따왔을 뿐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르바비차가 내전 후 보스니아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봅니다.)  

 

 



9.바시르와 왈츠를 - 그리스도교 민병대의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사건

http://blog.aladin.co.kr/mephisto/2501393 





10.화려한 휴가 - 설명하면 맘이 아파짐.


 
뱀꼬리 : 기억이 나는 것들만....영화의 배경은 애석하게도..전부 실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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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2-05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틴 숲 사건에 대한 영화가 있군요.2차대전 당시 망명정부 폴란드군 총사령관 안드레스의 회고록 <망명군>을 읽으면 그 당시 상황이 자세하더군요.그런데 제가 가진 또다른 책은 소련 편을 들면서 이 사건이 나치의 조작이라고 나와요.요즘은 러시아에서도 소련 측 소행이라고 인정하고 있지만 한동안 저는 굉장히 헷갈렸지요.
르완다와 아민에 대한 정보가 매우 도움이 되는군요.유고연방의 해체과정에도 관심이 많습니다.세르비아인들이 이슬람 세력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목적으로 이슬람 여성들을 대규모로 강제수용한 뒤 강간하여 세르비아 남자들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들을 낳게 한 사실은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사람 두뇌에서 이런 것까지 고안해 내는구나...하구요.

Mephistopheles 2009-02-06 03:25   좋아요 0 | URL
카틴 숲 사건을 다룬 저 영화은 폴란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만들어졌다고 하더군요. 영화 자체의 전개는 상당히 느린데 비해 마지막 장면만큼은 헉 소리가 납니다. 꽤 디테일하게 그들이 어떻게 학살을 당했는지 자세하게 묘사되니까요.

르완다의 경우는 우연히 다큐를 보고 꽤나 충격을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학살과는 다르게 르원다는 군이 전면에 나서지 않았어요. 바로 옆집에 살던 사람이 어느날 돌변하여 내 가족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학살의 시간이 수년이 흐른 후 그 때 학살에 참가했던 투치족 민간인들은 대부분 무죄방면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인 이웃이 살고 있는 옆집에 태연하게 다시 살고 있더군요. 물론 이러한 과정이 RPF의 선동과 선전의 결과라고 하지만 이런 선동에 태연히 학살에 동참한 대중의 우매함까지 보여주더군요. 더군다나. 학살의 방식또한 꽤 잔인했던 사건이였습니다. 20세기에 일어난 사건인데 학살방식은 거의 중세수준이였으니까요.

마노아 2009-02-05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나중에 영화 소개서 쓰시는 것 아니에요? 오늘 서점 갔더니 진중권씨의 이매진이 영화를 소재로 한 책이더라구요. 메피님 생각이 났어요.

Mephistopheles 2009-02-05 21:06   좋아요 0 | URL
그게 말입니다. 영화를 감상하는 것과 많이 보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