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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수학 ㅣ 한무릎읽기
안 방탈 지음, 길미향 옮김, 문수지 그림 / 크레용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나에게 수학과 관련된 가장 인상깊었던 기억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간 오리엔테이션에서 <정석수학>을 몇 페이지까지 예습해 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수학에 대해서 별로 거부감 없던 터라,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그 책을 들여다 봤었다. 학교 숙제라 의무감으로 시작은 했지만 지금처럼 선행이 당연시되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 배우지 않은 '고등'수학을 접해 본다는 것에 꽤 흥분했었던 것 같다. 방학 때 분량만큼 시간을 배분해서 조금씩 풀었었는데 어려웠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참고서에서 나던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걸 보면 꽤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그건 수학에 대한 관심이었다기 보다는 새로운 것에 대한 흥분 정도였을까...
대학에 와서 한번도 수학을 접해보지 않았다. 이과도 아니고 수학이 필요한 문과도 아닌데 왜 그렇게 목을 메고 수학을 공부했었나 그 시간이 돌아보면 너무 아깝다. 아깝기 그지없다. 지금은 대학마다 학과 별로 필요한 과목은 추려서 수능을 보니까 예전만큼 비효율적이지 않을 것 같은데...돌아보면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했던 수학이 내 생활에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게 억울하기까지 하다. 얼마전에 <런닝맨>이란 프로그램에서 각 팀 별로 숫자 몇 개를 뽑고 수학 기호를 찾아내서 특정한 숫자를 먼저 구하는 팀이 이기는 미션이 주어진 것을 본 적이 있다. 더하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그런데 루트가 나오는데 갑자기 모르겠는거다. 뭐냐 이건. 뭐였더라. 많이 썼었는데 이거 어떻게 하는거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루트를 내 손으로 써 본 적이 없으니...순간적으로 당황스런 이 기분.
귀엽게 생긴 이 소년, <블레즈>의 엄마 아빠는 수학 박사다. 부모님이 수학 박사면 기분이 어떨까? 게다가 엄마는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이다. 우리 아버지는 전공이 역사이셨는데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 저학년때부터 나에게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우게 하셨다. 수많은 한자로 된 역사책을 열심히 넘기시며 이야기 해 주시던 나라 이야기, 왕들의 이야기...그땐 무척 지루했는데 지나고 보니 내가 역사를 어려워 하지 않고 즐겨 공부했던 하나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블레즈>는 상황이 다르다. 수학을 너무나 싫어하며 못하는 아이이다. 엄마 아빠의 대화의 주제는 어려운 수학 공식이나 수학자의 이야기뿐인데 이 아이 <블레즈>는 수학은 들어도 모르겠고, 문제를 풀면 더 모르겠는 아이이다.
정석 수학에 대한 흥분된 첫 만남 이후로 수학은 점점 나와 멀어져 갔기 때문에 난 어린 소년이지만 <블레즈>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아주 오랜만에 주인공 소년의 마음과 상황을 온전히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소심해서 말은 못하겠고, 거부도 못하겠고 부모님의 선한 얼굴에 실망의 그림자를 드리고 싶지 않은 어린 마음.
<블레즈>는 시인이 되고 싶다. 언어를 가지고 노는 아이. 똑같은 단어라도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많은 뜻을 내포하는 단어들을 사전에서 찾고 이렇게 저렇게 써 보는걸 좋아하는 아이. 그래서 아름다운 언어로 시를 쓰는 것이 꿈이다. <비우다>라는 단어가 '쓰레기통을 비우다'도 되고 '아빠가 잔을 비우다'도 되고 '마음을 비우다'가 되고 '머릿속을 비우다'도 되는 것에 즐거워 하는...하지만 블레즈의 아빠는 아들의 그런 상태를 알지 못하고 점점 낮아지는 수학 점수를 걱정하다 못해 토요일마다 두 세시간씩 아들에게 열성적으로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블레즈>는 그런 아빠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서 이해를 하지 못하는데도 이해를 했다며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잘 해야만 하는 아이들에게 거짓말은 일상이다.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했다고 해야 무사히 넘어가고 편해진다. 진짜 내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해야 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잘 해야만 하기 때문에 거짓으로 행동하고.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는 것은 어른들이다.
<굿바이 수학>은 이런 상황에 있던 <블레즈>가 어떻게 자신을 꿈을 당당하게 꺼내놓게 되는지 그 과정을 담은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고 어떻게 보면 뻔한 성장소설인데 내가 무척이나 감동을 받게 된 이유는, 블레즈가 쓴 자신의 꿈에 대한 글 때문이다. 작문 시간에 <어른이 되면 갖고 싶은 직업을 적고, 여러분이 현재 갖고 있는 개인적인 능력과 그 직업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자세하게 적어 보세요.>라는 시험 문제에 고민 고민을 하며 적어 내려간 블레즈의 글. 참 아름다운 꿈이고 아름다운 글이다.
내 꿈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물어봐요.
비행사, 소방관, 의사, 제빵사, 변호사, 축구선수 아니면 시청 공무원?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탐구자가 되고 싶어요. 언어의 탐구자요.
나는 달이 왜 때로는 둥글고, 때로는 둥그렇지 않은지 말해 줄 수 있는 단어들을 찾고 싶어요.
우주에서 본 파란 지구를 아름답게 얘기해 줄 수 있는 단어들도요.
그리고 다음과 같은 단어들도 찾고 싶어요.
찰랑거리는 파도와 나뭇잎의 모양, 그리고 구름의 두께를 말해 줄 수 있는 단어들.
연보랏빛, 하얀 진주빛, 옥빛, 물빛 등 색깔을 분명하게 표현해 줄 단어들.
잘 간직된 우주의 신비를 밝혀 줄 단어들. 먼 곳을 가까이서 보는 것처럼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어들.
학술적인 단어들이나 잊힌 단어들, 매일 쓰는 일상적인 단어들, 반대말과 모호한 단어들.
우리를 격려해 주는 웃음소리와 목구멍으로 삼키는 눈물 같은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들.
사랑하는 여자아이의 물결치는 검은 머리카락고 하얀 손을 노래하는 단어들.......
사전에 있는 단어들을 다 쓰고 나면 그때는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 거예요.
미래에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었죠?
나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유명해지는 것도, 돈을 많이 버는 것도 바라지 않아요.
내 시를 원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그냥 나눠 주면 돼요.
저녁 여섯 시 무렵 교외 기차역에서 말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퇴근 후 무거운 몸을 실은 기차 안에서 내가 쓴 단어들과 함께 또 다른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거예요.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가 돈을 많이 못 벌 것 같다며 안한다고 하는 우리 아들에게 이 부분을 읽어 주었다.
"유명해지는 것도, 돈을 많이 버는 것도 바라지 않아요.
내 시를 원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그냥 나눠 주면 돼요.
저녁 여섯 시 무렵 교외 기차역에서 말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퇴근 후 무거운 몸을 실은 기차 안에서
내가 쓴 단어들과 함께 또 다른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거예요."
아름답지 않냐고...이 아이의 꿈과 마음이 너무 멋지다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 녀석.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꿈이 무엇이든. 엄마 아빠는 엄마 아빠의 꿈이 있고, 엄마 아빠만이 잘 하는 것이 있듯이, 우리 아이들도 잘 하는 것이 있고 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고 꿈을 죽게 만드는 그런 환경은 만들지 말아야 겠다 싶었다. 누군가가 지친 일상을 뒤로 하고 또 다른 꿈을 찾아 여행을 하도록 도울 수 있는 꿈이라니. 이건 너무 멋진 마음이다. 아름답고 예쁜 꿈이다.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다.
너무 많은 것을 잘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하며 달려왔더니 꿈을 담은 무지개가 너무 멀어져 버렸다. 분명히 무지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함수도 하고 확률도 하고 적분도 했는데, 밤을 새우고 외우고 적고 읽었는데 가깝게 느껴졌던 무지개는 또 어느새 저만큼 멀어져 있다. 반평생을 살았는데 여전히 갈 방향을 몰라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되는 생활이 조금 버겁다. 우리 아이들의 삶도...지금의 현실에서 보자니 나의 때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도 어쩌면 만족스럽지 않은 길 위에서 여기저기 멀리만 있는 무지개를 찾아 다니기만 하면 어떡하나...
남보다 잘 하기 위해, 남들도 다 잘하니까 나도 잘 하기 위해가 아니라, '더' 잘 하기 위해가 아니라, '함께 행복하기'위해 이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한 무지개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