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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을 거야 ㅣ 문지아이들 64
브리짓 페스킨 지음, 조현실 옮김, 황성혜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고 난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은 "너무 무서워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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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갑자기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인형을 재울 때 내는 소리와도 비슷했지만, 좀 더 처량했다. 분명한 건, 여자 목소리였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층계 몇 개를 내려갔다. 모두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소리는 우리를 차마 보고 싶지 않은 광경으로 이끌어 가는 주술과도 같았다...그러나 이젠 청소 안 한 화장실에서 나는 듯한 악취가 더 확실하게, 더 강렬하게 나기 시작했다. 마튜의 손과 내 손은 땀으로 끈끈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우리는 계속 올라갔다....
나는 얼굴을 들자마자 "싫어!" 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아서서, 마튜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 '싫다'는 것은 늘 나의 첫 번째 반응이긴 하다. 하지만 난 봤던 것이다. 한 노파가 탈진 상태로 비참하게 앉아 있었다. 다리는 앞으로 뻗고, 입술에는 멍청한 미소를 띠고, 머리카락은 뒤엉킨 채 때로 얼룩진 몸을 건들거리고 있었다. 난 단번에 모든 걸 다 보았다. 그건 공포 그 자체였다. 게다가 그 장면을 완벽하게 하려는 듯 신음 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난 귀를 막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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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로 바쁜 부모님 대신 외할머니와 관계가 좋은 나탈리의 눈에는
이 버려지고 처참한 광경의 노파는 공포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던 아이들에게도 책의 전체적인 내용과 상관없이
가장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웠던 내용이었던 것 같다.
<치매노인>에 대한 문제는 쉽게 정의내릴 수 없다.
한 시대를 건강하게 멀쩡히, 지적으로 살았던 한 인간도 참 허무하게 병 앞에 무너진다.
그저 기억을 잃는 정도가 아니라 지적 능력과 통제력 모두를 상실한 채
그렇게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버티는 상태가 되어 가는 것.
곁에서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의 무게와 인생의 허무함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탈리는 자신의 외할머니도 치매노인처럼 될까 하여 두려움에 휩싸인다.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어린 소녀에겐 그 어느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다가온 것.
그녀는 학교 백일장에 <노인에 대한 안락사 문제>를 써서 제출하게 되고
여러 면에서 큰 논란과 이슈를 불러일으킨다.
60세 이상 노인이 되면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실시해서 병이 발견된 노인들은
기한을 정해놓고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알약을 처방하자는 요지의 글이었다.
나탈리의 눈에는 말년에 그렇게 고통받고 처참하게 내버려 지는 것이
더 큰 무관심과 배려없음과 잔인함으로 보였던 것이다.
차라리 자신의 남은 기한을 알고, 제 정신일 때 죽음을 고상하게 준비하도록 돕자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 가물가물 꺼져가는 촛불처럼 스러지는 누군가를 곁에서 보고 있는다는 것.
반대로, 나의 육체와 정신이 피폐해지며 주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
그 양측 감정 모두 사람으로선 겪기 참 어려운 것이다.
나의 친할아버지께서도 10년 이상을 병상에 누워 계셨었고,
친할머니 역시 육체는 건강하셨지만 결국 4년여 치매를 앓다 돌아가셨었다.
기관이나 간병인에 맡기지 않고 집에서 돌보는 가족이 있었음에도
두 분의 임종은 참 보기 슬프고 비참하고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곁에서 그 분들을 돌보셨던 어머니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함께 사는 우리 모두는 매일 매일이 살얼음 판이었고, 감정적으로 우울했고,
격한 감정의 파도 속에서 죄책감 혹은 의무감 혹은 절망감에 사로잡혔었다.
어떤 날은, 이대로 돌아가시기를.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편안하게 돌아가셨기를 바랬던 적도 있다.
어렸을 적, 나를 그렇게 예뻐하시고 땅에 내려놓지 않을 정도로 아끼셨던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이신데 말이다. 그런 사랑을 받은 나였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이 꼭 치매 노인에 관한 이야기만 온전히 있는 것이 아님에도
내내 불편하기도 하고 뭔가 답답하기도 했던 것 같다.
주인공 나탈리는 자신이 발견했던 그 치매 할머니가 무사히 요양기관에 들어가 보살핌을 받을 때까지
계속적인 관심을 보이며, 어느새 삶과 죽음, 사회의 복지와 정책 등에 눈을 떠 가는
한층 성장된 소녀가 되어간다.
사춘기 소녀의 성장소설이니까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 하지만,
하지만 문제는 우리 사회는 <괜찮을거야> 속 사회처럼 <괜찮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치매 노인이 편안하게 보살핌 받을 수 있는 요양 기관은
돈이 많지 않으면 아예 꿈조차 꾸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치매노인의 특성상, 요양시설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통제하기 쉽게 방 안에서만 생활하게 한다던지, 심지어는 신경 안정제를 투여하여 계속 잠을 자게 한다던지,
비인격적이고 불친절한 관리가 치매 노인의 상태를 더 악화시키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그 문제는 고스란히 가족들이 떠맡아야 하는데
그러기엔 참으로 감당하기 버겁고 힘든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모두 함께 고민하고 대책들을 마련해야 하는 것인데
이런 문제는 닥치지 않으면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것들이라 더딜 수 밖에 없다.
<괜찮을거야>에서 꺼내들었던 <치매노인>이나 <안락사 논쟁>들은
아이들 눈높이의 수준에서 문제를 툭~던진 정도의 수준이나
사실 이 문제들은 <괜찮지 않다>.
나와 완전히 상관없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이 불편한 문제를 앞에 두고
생각을 많이 하게 한 책이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치매 할머니가 등장했던 부분 말고는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단다.
그 말은, 그렇게 재미있는 스토리는 아니라는 거다.
문제를 크게 벌여놓은 것 치고 마무리는 미미하고 김 빠진다.
아마도 <괜찮지 않은 문제>를 <괜찮다고 주장>하며 끝내려다 보니 생긴 문제가 아닐까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