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 엘 보르보욘 - 200g, 핸드드립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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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커피. 커피 리뷰 안 쓴다고 하고는 적립금에 눈이 어두워 매달 줄창 쓰는 구나. 
어제는 19살 때 딱 한 번 본 친구를 18년 만에 만났다. 어떤 인연들은 대면 없이 말로만 오래 이어지기도 한다. 밀레니엄 때 청소년기 보낸 내 또래들은 그런 친구들이 꽤나 있을지도. 가족이나 직장 동료외의 사회적 소통은 알라딘 댓글이 거의 전부인 나새끼를 보면 뭐...끄덕끄덕. 히키고모리의 사회생활이란. 
아, 여튼 신촌의 커피숍에 갔는데 커피 원두를 고를 수 있다고 했어. 커피 산지 같은 걸 알려주나 했는데 블루 브라운 옐로우(?마지막 건 정확한 색도 기억 안나...)중에 고르래. 산미가 있다는 블루를 골라서 이층 흡연실 옆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는 친구를 보았다. 너는 무슨 색 골랐냐. 나 블루. 나돈데. 그런데 친구는 아이스 나는 뜨거운 걸 마셨으니 원두가 같아도 같은 맛은 아니었겠지. 

원두볶아서 갈아놓은 거 보면 다 비슷비슷한 똥색 가루로 보이는데. 우리는 신맛 단맛 쓴맛 따지고 온갖 알고 있는 꽃과 과일의 향을 동원하여 다른 커피와 내가 마시는 커피를 구분하려고 애를 쓰지. 특히나 커피 마케팅을 위해 그런 표현들이 동원되고. 블렌딩에는 예쁜 이름이 붙고 싱글 원두에는 미지의 나라 이름과 지역명과 농장 이름이 붙은 채 흥미를 끌지.

우리의 상상력은 재미있어서, 언어로 지시되는 맛과 향과 식감을 정말 느끼는 것처럼 여기게 돼. 반대로 우리가 느끼는 맛과 향과 식감을 언어로 자꾸 표현하고 싶어 하고.
그렇게 기록된 기억은 생각보다 불완전해서, 막상 예전에 써 둔 커피 리뷰 보면서 원두 주문하려고 보면 먹었던 커피인데도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ㅋㅋ 그래서 커피의 이름과 원산지와 포장지 디자인을 보며 어렴풋하게 다시 살지 말지 고민하지. 그냥 그렇다는 말이 써 있거나 한 번 먹었으니 됐다, 하는 걸 거르는 정도. 

그래서 결국에는 신제품을 산다. ㅋㅋㅋㅋ그러니까 커피콩아 매달 신제품을 내는 전략은 구매욕을 자극하는 데는 나름 효과적이지 싶다. 미지의 맛과 향을 기대하며. 보랏빛 하늘에 먼곳을 바라보는 (아마도 재규어 같은) 고양이과 동물의 실루엣, 멀리 놓인 산이 포장에 그려져 있어.
엘 살바도르를 검색해보았어. 우리나라 자치도 하나 만한 작은 나라래. 저위도의 더운 나라. 살인율이 무지하게 높은 암울한 나라. 
그곳의 커피를 아침에 드립해 먹고 왔는데,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ㅋㅋㅋㅋㅋㅋ
코코넛, 아몬드, 그런 설명을 읽으면 정말 견과류 같은 고소함? 구수함? 이 있었던 것 같아. 산미는 지난 주까지 먹던 수국보다는 조금 약한 것 같다. 그냥 저냥 무난했다.
알라딘 커피는 마트에서 사는 거보다는 비싸지만 신선한 원두 먹는 건 좋아서 한 달에 한 번 할인쿠폰 핑계로 사치를 부린다. 내가 소비하는 건 결국 이미지, 순간의 향과 맛, 카페인으로 얼마간 번뜩이는 정신. 달아난 잠. 

뭔 쓸데 없는 소리를 주절주절 길게도 써놨다. 이럴 거면 커피 한 잔 마시고 책 읽고 독후감이나 쓰라고 말해다오 커피야. 암튼 잘 먹을게. 빠이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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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7-15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전 중학교 졸업하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언니는 재수를 했는데 꼴에 성인 됐다고 커피를 홀짝 홀짝 마시기 시작했는데
뭐 나라고 못 마셔? 그래서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게 또 중독성이 꽤 강하더군요.
마약 같아서 세상이 달라보이더라구요.
커피 마실 욕심에 아침에 눈도 잘 떠지고.
암튼 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7-15 22:10   좋아요 0 | URL
저는 성인되고도 한참 자라서 (아마도 서른 넘어서 수유 끊고) 커피를 시작했는데
커피 마시는 일이 그저 습관 같다는 생각이 부쩍 듭니다.

바다그리기 2020-07-19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피 맛을 온갖 과일향으로 표현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느껴본 적은 있지만(그 과일향을 1도 못느껴본 초딩 입맛이라^^), 무엇보다 커피에서 시작해 엘 살바도르란 나라를 검색까지 해보는 님의 호기심에 저는 또 호기심이.. ㅎㅎ 반갑습니다. 가끔 들러서 좋은 글 즐기고 갈께요~

반유행열반인 2020-07-19 11:1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바다그리기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0-07-29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쓸데 없이 진지하고 고퀄인 반님의 ㅋㅋㅋ 커피콩리뷰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7-30 06:4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쓸진고 아직 이 커피 많이 남았어요...읽은 책 없는데 뭐 쓰고 싶으니 아무말잔치 ㅋㅋㅋ

얄라알라 2020-08-09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피 리뷰 쓰면 적립금 이벵이 있었네요^^ 커피향 음미하시길~~^^

반유행열반인 2020-08-09 15:16   좋아요 0 | URL
네 이번에 또 신제품이 나와서 마침 얘 다 떨어져서 살까 말까 하는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전자책]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마음산책 짧은 소설
백수린 지음, 주정아 그림 / 마음산책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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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3 백수린.

4월 말부터 문화센터에 소설을 배우러 다닌다. 다음주가 종강이다. 처음에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세 쪽 짜리 짧은 소설을 써 가는 과제를 했다. 이미 원고지 80매 100매 군더더기 주렁주렁한 글을 써 본 뒤라 세 쪽 안에 완결된 이야기를 압축해 넣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매번 분량은 넘치고, 그런데 주제 중심적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데 매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물음표들을 받아야 했다. 그러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사실 하고 싶은 말도 별다른 생각도 없이 그냥 아무 말이나 주절거리고 싶은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불행히도 그런 걸로는 소설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냥 혼자 주절거리는 일기나 하염없이 수다 떨듯 늘어놓는 메일을 쓰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뭐 아무 거나 쓰면 어때. 시간만 잘 가면 되지. 어차피 삶을 채울 다른 유희 거리도 딱히 없어서, 쓰고 싶을 때 쓰고, 쓰기 싫을 땐 읽고, 둘다 싫으면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이러나 저러나 어떻게든 살아지고 언젠가는 사라지고 하지만 오늘은 아냐. 오늘은 어쨌거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몇 천자를 주절주절 끼적이다 집에 돌아왔다.

백수린은 박완서 작가 헌정 짧은 소설집이었나, 멜랑콜리 해피엔딩에서 제목을 맡은 듯한 언제나 해피엔딩, 이라는 짧은 소설로 알게 되었다. 그 글은 이 책에도 실렸는데, 처음에 훅 들어왔던 것에 비해 두 번째 읽을 때는 그저그랬다. 어쨌거나 그 소설 덕에 백수린의 단편집 폴링인폴을 읽었는데 꽤 괜찮았다. 내 취향 아닐 것 같은데 의외로 좋아, 막 이랬다.
이 책도 그랬다. 백수린은 짧은 소설 장인 같다. 짧은 안에도 온갖 장면과 감정과 상념을 밀도있게 접어 넣었다. 내가 소설 수업을 듣는 동안 했어야 할 일들이 이런 것이었을텐데. 아마 계속 못 할 것 같은 일이다. 나는 말에 붙은 실밥과 거스러미와 셀룰라이트 같은 걸 덜어내고 또 덜어내고 그래서 앙상해진 글에 진짜 붙일 게 무얼까 고민하다 그냥 세월을 보낼 것만 같다.

참담한 빛 이란 소설을 읽을 때는 부푼 배의 소녀와 소년만 보고도 울어버릴 것 같았는데, 사고와 오보와 그걸 감추는 소년과 희망이, 어쩌고 하는 걸 보고는 진짜 울어버렸다.
소설집과 같은 제목의 소설은 없지만 마지막 소설에 제목의 말이 나온다. 폭설 속에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고 누군가의 죽음을 지키는 일. 다 괜찮았지만 마지막 소설이 이 책에서 가장 잘 쓴 소설로 읽혔다.

어쨌거나 잘 쓰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니 나는 그냥 계속 그냥 못 쓰는 걸로. 못 써도 괜찮으니 아무 말이나 쓰기로 한다.

+밑줄 긋기

-오늘 밤이 지나면 사라져버릴지라도 지금은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기미와 흔적을 언어로 붙잡아두는 일. 굳은살처럼 딱딱해진 마음의 외피 아래서 벌어지는 사세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들을 기록하는 일. (작가의 말)

-“아” 그녀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아름답다니.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여전히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영화나 소설 같은 데서 본 것처럼 그녀의 발 앞에 남자가 무릎 꿇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소중한 듯 두 손으로 붙잡고 정성껏 입을 맞추겠지. 그녀는 타올을 살짝 위로 끌어당겼다. (어느 멋진 날)

-칼칼한 바람이 부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상준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해 생각할 조금의 여유마저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것은 대체 무얼까 생각했다. 우리로 하여금 끝내 자신의 고통에만 골몰하게 만드는 그것은. 그러는 사이 보행자 신호등의 초록불이 들어오고, 상준의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길을 건넜다. 횡단보도로 진입하려던 상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발길을 돌려 포장마차로 다시 향했다. 밀떡볶이와 순대를 사기 위해서. 염통도 잊지 말아야지, 상준은 생각했다. 이 세계는 사람들을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고 끊임없이 비참하게 만들며 타인에게 잔인해지도록 종용하지만, 이런 세계에 살더라도 그가 아내에게 주고 싶은 것은 오직 사랑뿐이니까.(누구에게나 필요한 비치타올)

-“그 시절에는 뭐가 그렇게 인생에 불안한 게 많던지, 영화만이라도 결말을 미리 알고 싶더라고요. 그러면 나는 해피엔딩인 영화만 골라 볼 수 있잖아요.”

“……괜찮아지나요?”

  박 선생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민주의 책상 위에 차가 담긴 종이컵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박 선생은 커다란 배낭을 다시 둘러메더니 과사무실의 문을 열고 아무도 다니지 않는 복도 쪽을 향해 유유히 걸어 나갔다.(언제나 해피엔딩)

-만약에,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내가 아니었다면,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더 사랑을 받았을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고 나는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나 아닌 무엇이 되기 위해 안달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나인 것을 온전히 좋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나는 점점 더 그런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잃어버린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오직 눈 감을 때에만 내게로 잠시 돌아왔다 다시 멀어지는 모든 것들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내 것인 줄 알아차리기도 전에 상실해버린 그 모든 것들이.(오직 눈 감을 때)

-“오늘 밤은 죽지 말아요.”

  그녀가 노인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다른 계界로 건너오라 재촉하는 유령처럼 눈송이가 또다시 유리창을 두드렸다.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는 것이 어둠인지 죽음인지, 아니면 삶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딘가의 지붕 아래서 노인들은 아기같이 울음을 터뜨리며 숨을 거두고, 노인 같은 얼굴의 아기들은 자궁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 일도 없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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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7-13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이 책은 읽지 못했어요 읽어봐야겠다!

반유행열반인 2020-07-13 22:00   좋아요 0 | URL
쉬이쉬이 읽히는데 마음과 머리가 띠이잉 하고 울려요. 요샌 자꾸 소설 읽다가 질질 짜요,,,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 2019년 제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윤이형 지음 / 문학사상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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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2 윤이형, ‘대니’-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자선소설로 실린 대니를 두 번째 읽었다. 나는 대니를 만난 민우 할머니 같은 처지였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는 정말 잘 쓰는 윤이형의 책 중에서도 최고였다. 막 이렇게 과거형 갖다붙이는 나새끼 잔인해. 실망하지 않으려고 지레 포기하고 기대하지 않는 척. 기다리지 않는 척.

+밑줄 긋기
-말들은 장식이다. 혹은 허상이다. 기억은 사람을 살게 해주지만 대부분 홀로그램에 가깝다. 대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어진 끝을 받아들였다. 나는 일흔두 살이고, 그를 사랑했고, 죽였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이 희미하게 사라져가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나는 여전히 살아 그것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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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 시인선 359
송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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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0 송찬호.

여름이 왔다. 봄이 가득한 시집을 읽었다. 다양한 계절이 넘치지만 나는 자꾸 꽃과 나무와 빈집이 나오는 시들에 붙잡혔다.
잊으면 사라질 기억과 마음이 책장 사이에 물성 가진 채로 남았다. 내어버릴 수가 없다. 울 줄 알고도 펼치고 읽다 울고 덮고.
나는 예쁜 말은 커녕 못나고 모난 모진 말만 던지다 죽을 것 같다.
봄이 사라지고 네 색이 천천히 빠지고 있는 나는 자음 글자만 남겨 내 이름을 겨울로 바꿨다.


냇물에 떠내려오는 저 난분분 꽃잎들
숲 자욱 얼룩진 너럭바위들
사슴들은 놀다 벌써 돌아들 갔다
그들이 버리고 간 관을 쓰고 논들
이제 무슨 흥이 있을까 춘절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염소와 물푸레나무와의 질긴 연애도 끝났다
염소는 고삐로 수없이 물푸레나무를 친친 감았고 뿔은 또 그걸 들이받았다
지친 물푸레나무는 물푸레나무 숲으로 돌아가고
염소는 고삐를 끊은 채 집을 찾아 돌아왔다

그러나 그딴 실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돗자리 말아 등에 지고 강아지풀 꼬릴 잡고
더듬더듬 들길을 따라오는 저 맹인 악사를 보아라
저 맹목의 초록이 더욱 짙어지기 전에,

지금은 청보리 한 톨에 햇볕과 바람의 말씀을 더 새어넣어야 할 때
둠벙은 수위를 높여 소금쟁이 학교를 열어야 할 때
살찐 붕어들이 버드나무 가랑이 사이 수초를 들락날락해야 할 때!
(’오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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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 손안의 가장 큰 세계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구병모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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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1 구병모.

잊음.을 새기고 싶음.

몸에 무언가를 새긴다는 건 그만큼 잊지 않고 오래 간직하고 싶다는 뜻으로 읽힌다.
도가도(비)상도를 새기고 싶다던 아이의 몸은 이제는 영영 볼 기회를 잃었고, 목덜미에 짐승주의였나 개조심이었나 아닌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였나 여튼 간에 문구를 말하던 친구의 말을 우스개로 듣던 날도 있었다. 지나보니 그런 소망에는 나름 그런 말에 매달리는 절실함이 있었겠다.
그렇다면 나는 무얼 새길 수 있을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푸훕훕
문신은 아니고 6년 전에 아이패드미니2 사면서 각인 서비스란 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 본 적 있었다. 태블릿 뒷면에 새긴 말은 obliviscor 였다. 잊음.을 새기는 건 잊음.을 잊지 않는다는 건지. 잊고 싶은 건지 사실은 잊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구병모의 중편? 짧은 소설? 오랜만에 읽었다. 버드 스트라이크 때 많이 실망해서 투덜투덜하고 팔아버리고 이제 안 읽을지도 몰라, 했는데 신간 나오니 또 샀다.
누군가의 뭔가를 좋아한다는 건 어쩌면 습관이고 관성인지도 모른다. 좋아한다는 건 익숙함과 거기서 느끼는 편안함 같은 건지도. 그래서 실망하고도 또 찾아가고 기다리고 궁금해하는.

피부 표면에 새겨진 그림들이 폭력으로부터 누군가를 구원한다는 설정은 절실하고 슬픈데 또 너무 무력해 보였다. 제도도 공동체도 주변의 타인들도 고통 받는 약한 사람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한다. 불도마뱀, 파도, 표범, 그런 그림들한테 겨우 이들을 맡기는 세상이라면. 거기는 지옥에 가깝지 않을까. 음 나는 피카츄를 새겨야겠다. 피카츄, 백만볼트!!!!
구병모 소설 속 인물들 이름은 늘 특이한데 이번에도 시미, 화인, 화인은 샐리맨더와 노골적으로 연결되는 느낌인데 시미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 시미가 새기는 이미지나 부위는 예상과 달랐고 그렇게 극적이지 않았다. 삶을 지탱해주는 뭔가는 사실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어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까.

이번 소설의 문장들은 나름 담백해지고 징글징글 집요한 느낌은 많이 사라졌는데, 읽을 수록 내가 쓰는 문장이 작가가 쓰는 모양새랑 비슷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잘 쓴다는 소리는 아니고, 나쁜 점만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ㅋㅋㅋ따라가려면 좋은 거만 따라가라고...

+밑줄 긋기
-상대가 젊다고 해서 꿈이나 희망, 낭만 따위의 말을 무심코 동원하여 한창 좋을 때네 부럽다, 같은 말을 했다간 아연실색한 표정과 쓴웃음이 돌아올 터였다.

-흘러넘친 끝에 고갈되었으나 일상의 바닥에 들러붙은 꿈의 침전물을 목격한 어느 날, 충동적으로 몸에 새긴 샐러맨더에 대해. 샐러맨더 한 마리를 몸 안에 키우면서, 잃었던 자신감과 의욕이 다시금 심장에 고이는 듯했던 날들에 대해. 저녁놀이 건드리고 지나간 것 같은 몸통의 그러데이션과, 그 무늬 아래 타래를 틀고 도사린 이야기들에 대해.

-“언제가 됐든 사라지니까요.”
그것은 아마도 육신에 관한 이야기. 필멸에 관한 이야기. 아무리 영원해 보이는 피부 위의 흔적이라도 죽음까지 봉인할 수는 없으니. 그런 면에서 문신이란 아이러니한 작품이었다.

-보란 듯이 시원하게 머리를 틀어 올리고 출퇴근하는 화인의 목과 어깨 사이에는 붉은 쉐이딩으로 표현된 샐러맨더가 경쾌하게 꿈틀거리고 있어서, 정작 그 주인의 시르죽은 표정과 대조되었다

-작곡 얘기 이후로는 모두 다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이렇게 난생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 쏟아붓는 것이 시미는 아깝지 않았다. 축복의 말은 입 밖으로 나온다고 하여 그것을 말한 사람의 내면에서 총량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실제의 축복이 달아나거나 가치가 감소하지도 않으니까.

-“사장님의 소원은 이루어졌나요.”
시미는 다만 혼잣말에 가까운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또는 어떤 존재가 당신을 지켜주었나요. 당신은 살아오면서 어떤 호의와······ 얼마만 한 경멸과 때로는 악의를 만나왔기에, 자신을 지키는 부적을 온몸에 그릴 수밖에 없었을까요.

-정말 통증이 나았는지는 지금의 논리로 알 길 없지만, 중요한 건 사람들이 그만큼 간절하게 바라고 믿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 몸이 어제와는 달라지기를, 나를 둘러싼 외부 조건이나 상황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기를.

-충동이 솟는다는 건, 태울 에너지가 생성됐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 누구보다도 빛나기를 바라는 열망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시미는 그것들이 몸 곳곳에 오래된 흔적처럼만 존재하여 가끔씩만 자신을 가볍게 흔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시미는 돌아서서 지나간 싸움과 현재의 공허가 앞으로의 날들에 드리울 그림자의 무게와 길이를 재어보았다.

-이 자국은 시미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아마도 처음으로, 계산이나 감가상각을 비롯한 그 어떤 실리나 전망과도 무관한 충동에 귀를 기울여본 흔적일 것이었다.

-전사나 스케치도 없이 그는 바늘로 수를 놓는 것처럼 살갗을 찔러나갔다. 바늘이 살갗에 닿는 순간 시미의 몸속에서 물방울 같은 것이 부서졌다. 입속에 신맛의 침이 고였다. 잔털 하나하나가 떨면서, 바늘을 밀어내지 않고 끌어당겼다. 일종의 선언이나 도전 같은 염료 자국이 손목에 남았다. 이 자국이 심장에도 새겨진다는 거지, 마치 헤링본이나 새틴 스티치처럼.

-스스로가 빛나지 않는다면, 시미는 다만 몇 발자국 앞이나마 비추어줄 한 점의 빛을 보고 싶었다.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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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 2020-07-1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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