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마음산책 짧은 소설
백수린 지음, 주정아 그림 / 마음산책 / 201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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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3 백수린.

4월 말부터 문화센터에 소설을 배우러 다닌다. 다음주가 종강이다. 처음에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세 쪽 짜리 짧은 소설을 써 가는 과제를 했다. 이미 원고지 80매 100매 군더더기 주렁주렁한 글을 써 본 뒤라 세 쪽 안에 완결된 이야기를 압축해 넣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매번 분량은 넘치고, 그런데 주제 중심적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데 매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물음표들을 받아야 했다. 그러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사실 하고 싶은 말도 별다른 생각도 없이 그냥 아무 말이나 주절거리고 싶은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불행히도 그런 걸로는 소설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냥 혼자 주절거리는 일기나 하염없이 수다 떨듯 늘어놓는 메일을 쓰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뭐 아무 거나 쓰면 어때. 시간만 잘 가면 되지. 어차피 삶을 채울 다른 유희 거리도 딱히 없어서, 쓰고 싶을 때 쓰고, 쓰기 싫을 땐 읽고, 둘다 싫으면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이러나 저러나 어떻게든 살아지고 언젠가는 사라지고 하지만 오늘은 아냐. 오늘은 어쨌거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몇 천자를 주절주절 끼적이다 집에 돌아왔다.

백수린은 박완서 작가 헌정 짧은 소설집이었나, 멜랑콜리 해피엔딩에서 제목을 맡은 듯한 언제나 해피엔딩, 이라는 짧은 소설로 알게 되었다. 그 글은 이 책에도 실렸는데, 처음에 훅 들어왔던 것에 비해 두 번째 읽을 때는 그저그랬다. 어쨌거나 그 소설 덕에 백수린의 단편집 폴링인폴을 읽었는데 꽤 괜찮았다. 내 취향 아닐 것 같은데 의외로 좋아, 막 이랬다.
이 책도 그랬다. 백수린은 짧은 소설 장인 같다. 짧은 안에도 온갖 장면과 감정과 상념을 밀도있게 접어 넣었다. 내가 소설 수업을 듣는 동안 했어야 할 일들이 이런 것이었을텐데. 아마 계속 못 할 것 같은 일이다. 나는 말에 붙은 실밥과 거스러미와 셀룰라이트 같은 걸 덜어내고 또 덜어내고 그래서 앙상해진 글에 진짜 붙일 게 무얼까 고민하다 그냥 세월을 보낼 것만 같다.

참담한 빛 이란 소설을 읽을 때는 부푼 배의 소녀와 소년만 보고도 울어버릴 것 같았는데, 사고와 오보와 그걸 감추는 소년과 희망이, 어쩌고 하는 걸 보고는 진짜 울어버렸다.
소설집과 같은 제목의 소설은 없지만 마지막 소설에 제목의 말이 나온다. 폭설 속에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고 누군가의 죽음을 지키는 일. 다 괜찮았지만 마지막 소설이 이 책에서 가장 잘 쓴 소설로 읽혔다.

어쨌거나 잘 쓰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니 나는 그냥 계속 그냥 못 쓰는 걸로. 못 써도 괜찮으니 아무 말이나 쓰기로 한다.

+밑줄 긋기

-오늘 밤이 지나면 사라져버릴지라도 지금은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기미와 흔적을 언어로 붙잡아두는 일. 굳은살처럼 딱딱해진 마음의 외피 아래서 벌어지는 사세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들을 기록하는 일. (작가의 말)

-“아” 그녀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아름답다니.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여전히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영화나 소설 같은 데서 본 것처럼 그녀의 발 앞에 남자가 무릎 꿇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소중한 듯 두 손으로 붙잡고 정성껏 입을 맞추겠지. 그녀는 타올을 살짝 위로 끌어당겼다. (어느 멋진 날)

-칼칼한 바람이 부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상준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해 생각할 조금의 여유마저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것은 대체 무얼까 생각했다. 우리로 하여금 끝내 자신의 고통에만 골몰하게 만드는 그것은. 그러는 사이 보행자 신호등의 초록불이 들어오고, 상준의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길을 건넜다. 횡단보도로 진입하려던 상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발길을 돌려 포장마차로 다시 향했다. 밀떡볶이와 순대를 사기 위해서. 염통도 잊지 말아야지, 상준은 생각했다. 이 세계는 사람들을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고 끊임없이 비참하게 만들며 타인에게 잔인해지도록 종용하지만, 이런 세계에 살더라도 그가 아내에게 주고 싶은 것은 오직 사랑뿐이니까.(누구에게나 필요한 비치타올)

-“그 시절에는 뭐가 그렇게 인생에 불안한 게 많던지, 영화만이라도 결말을 미리 알고 싶더라고요. 그러면 나는 해피엔딩인 영화만 골라 볼 수 있잖아요.”

“……괜찮아지나요?”

  박 선생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민주의 책상 위에 차가 담긴 종이컵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박 선생은 커다란 배낭을 다시 둘러메더니 과사무실의 문을 열고 아무도 다니지 않는 복도 쪽을 향해 유유히 걸어 나갔다.(언제나 해피엔딩)

-만약에,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내가 아니었다면,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더 사랑을 받았을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고 나는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나 아닌 무엇이 되기 위해 안달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나인 것을 온전히 좋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나는 점점 더 그런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잃어버린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오직 눈 감을 때에만 내게로 잠시 돌아왔다 다시 멀어지는 모든 것들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내 것인 줄 알아차리기도 전에 상실해버린 그 모든 것들이.(오직 눈 감을 때)

-“오늘 밤은 죽지 말아요.”

  그녀가 노인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다른 계界로 건너오라 재촉하는 유령처럼 눈송이가 또다시 유리창을 두드렸다.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는 것이 어둠인지 죽음인지, 아니면 삶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딘가의 지붕 아래서 노인들은 아기같이 울음을 터뜨리며 숨을 거두고, 노인 같은 얼굴의 아기들은 자궁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 일도 없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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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7-13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이 책은 읽지 못했어요 읽어봐야겠다!

반유행열반인 2020-07-13 22:00   좋아요 0 | URL
쉬이쉬이 읽히는데 마음과 머리가 띠이잉 하고 울려요. 요샌 자꾸 소설 읽다가 질질 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