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 손안의 가장 큰 세계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구병모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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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1 구병모.

잊음.을 새기고 싶음.

몸에 무언가를 새긴다는 건 그만큼 잊지 않고 오래 간직하고 싶다는 뜻으로 읽힌다.
도가도(비)상도를 새기고 싶다던 아이의 몸은 이제는 영영 볼 기회를 잃었고, 목덜미에 짐승주의였나 개조심이었나 아닌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였나 여튼 간에 문구를 말하던 친구의 말을 우스개로 듣던 날도 있었다. 지나보니 그런 소망에는 나름 그런 말에 매달리는 절실함이 있었겠다.
그렇다면 나는 무얼 새길 수 있을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푸훕훕
문신은 아니고 6년 전에 아이패드미니2 사면서 각인 서비스란 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 본 적 있었다. 태블릿 뒷면에 새긴 말은 obliviscor 였다. 잊음.을 새기는 건 잊음.을 잊지 않는다는 건지. 잊고 싶은 건지 사실은 잊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구병모의 중편? 짧은 소설? 오랜만에 읽었다. 버드 스트라이크 때 많이 실망해서 투덜투덜하고 팔아버리고 이제 안 읽을지도 몰라, 했는데 신간 나오니 또 샀다.
누군가의 뭔가를 좋아한다는 건 어쩌면 습관이고 관성인지도 모른다. 좋아한다는 건 익숙함과 거기서 느끼는 편안함 같은 건지도. 그래서 실망하고도 또 찾아가고 기다리고 궁금해하는.

피부 표면에 새겨진 그림들이 폭력으로부터 누군가를 구원한다는 설정은 절실하고 슬픈데 또 너무 무력해 보였다. 제도도 공동체도 주변의 타인들도 고통 받는 약한 사람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한다. 불도마뱀, 파도, 표범, 그런 그림들한테 겨우 이들을 맡기는 세상이라면. 거기는 지옥에 가깝지 않을까. 음 나는 피카츄를 새겨야겠다. 피카츄, 백만볼트!!!!
구병모 소설 속 인물들 이름은 늘 특이한데 이번에도 시미, 화인, 화인은 샐리맨더와 노골적으로 연결되는 느낌인데 시미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 시미가 새기는 이미지나 부위는 예상과 달랐고 그렇게 극적이지 않았다. 삶을 지탱해주는 뭔가는 사실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어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까.

이번 소설의 문장들은 나름 담백해지고 징글징글 집요한 느낌은 많이 사라졌는데, 읽을 수록 내가 쓰는 문장이 작가가 쓰는 모양새랑 비슷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잘 쓴다는 소리는 아니고, 나쁜 점만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ㅋㅋㅋ따라가려면 좋은 거만 따라가라고...

+밑줄 긋기
-상대가 젊다고 해서 꿈이나 희망, 낭만 따위의 말을 무심코 동원하여 한창 좋을 때네 부럽다, 같은 말을 했다간 아연실색한 표정과 쓴웃음이 돌아올 터였다.

-흘러넘친 끝에 고갈되었으나 일상의 바닥에 들러붙은 꿈의 침전물을 목격한 어느 날, 충동적으로 몸에 새긴 샐러맨더에 대해. 샐러맨더 한 마리를 몸 안에 키우면서, 잃었던 자신감과 의욕이 다시금 심장에 고이는 듯했던 날들에 대해. 저녁놀이 건드리고 지나간 것 같은 몸통의 그러데이션과, 그 무늬 아래 타래를 틀고 도사린 이야기들에 대해.

-“언제가 됐든 사라지니까요.”
그것은 아마도 육신에 관한 이야기. 필멸에 관한 이야기. 아무리 영원해 보이는 피부 위의 흔적이라도 죽음까지 봉인할 수는 없으니. 그런 면에서 문신이란 아이러니한 작품이었다.

-보란 듯이 시원하게 머리를 틀어 올리고 출퇴근하는 화인의 목과 어깨 사이에는 붉은 쉐이딩으로 표현된 샐러맨더가 경쾌하게 꿈틀거리고 있어서, 정작 그 주인의 시르죽은 표정과 대조되었다

-작곡 얘기 이후로는 모두 다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이렇게 난생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 쏟아붓는 것이 시미는 아깝지 않았다. 축복의 말은 입 밖으로 나온다고 하여 그것을 말한 사람의 내면에서 총량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실제의 축복이 달아나거나 가치가 감소하지도 않으니까.

-“사장님의 소원은 이루어졌나요.”
시미는 다만 혼잣말에 가까운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또는 어떤 존재가 당신을 지켜주었나요. 당신은 살아오면서 어떤 호의와······ 얼마만 한 경멸과 때로는 악의를 만나왔기에, 자신을 지키는 부적을 온몸에 그릴 수밖에 없었을까요.

-정말 통증이 나았는지는 지금의 논리로 알 길 없지만, 중요한 건 사람들이 그만큼 간절하게 바라고 믿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 몸이 어제와는 달라지기를, 나를 둘러싼 외부 조건이나 상황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기를.

-충동이 솟는다는 건, 태울 에너지가 생성됐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 누구보다도 빛나기를 바라는 열망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시미는 그것들이 몸 곳곳에 오래된 흔적처럼만 존재하여 가끔씩만 자신을 가볍게 흔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시미는 돌아서서 지나간 싸움과 현재의 공허가 앞으로의 날들에 드리울 그림자의 무게와 길이를 재어보았다.

-이 자국은 시미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아마도 처음으로, 계산이나 감가상각을 비롯한 그 어떤 실리나 전망과도 무관한 충동에 귀를 기울여본 흔적일 것이었다.

-전사나 스케치도 없이 그는 바늘로 수를 놓는 것처럼 살갗을 찔러나갔다. 바늘이 살갗에 닿는 순간 시미의 몸속에서 물방울 같은 것이 부서졌다. 입속에 신맛의 침이 고였다. 잔털 하나하나가 떨면서, 바늘을 밀어내지 않고 끌어당겼다. 일종의 선언이나 도전 같은 염료 자국이 손목에 남았다. 이 자국이 심장에도 새겨진다는 거지, 마치 헤링본이나 새틴 스티치처럼.

-스스로가 빛나지 않는다면, 시미는 다만 몇 발자국 앞이나마 비추어줄 한 점의 빛을 보고 싶었다.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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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 2020-07-1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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