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20240623 필립 로스.
대부분의 책을 기대나 정보를 많이 갖지 않고 펼친다. 필립 로스나 보자, 얇은 걸로, 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걸 보기 시작했다. 첫문장과 마주한 내 시공도 새삼 6월, 한반도라 오, 했다.
-1950년 6월 25일 소련과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으로 무장한 북한의 정예 사단들이 38도 선을 넘어 남한으로 들어가면서 한국전쟁의 고통이 시작되었고, 나는 그로부터 두 달 반 정도 뒤에 뉴어크 시내에 있는 작은 대학 로버트 트리트에 입학했다. (13)
책의 6분의 1쯤에 이미 19년 산 마커스는 죽었다고 까놓아서 그래서, 어디서, 왜 죽었는데, 하고 내내 궁금해하며 마커스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사실 누구나 언젠가는 죽으니까 서사의 끝은 죽음이지 뭐. 4년 전 소설 강좌들을 때 선생님이 소설의 결말에 관해 (자세한 건 기억 안 나지만) 질문했는데 비슷하게 끝에선 다 죽는 거죠, 했던 것 같다.
마커스가 대학에 가자 얘가 어디서 망하거나 죽을까 봐 불안에 사로잡힌 마커스네 아빠는 애를 엄청 닥달한다. 엄동설한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왔더니 애새끼 당구치고 방탕하게 다니는 줄 알고 문 잠가버린 아빠한테 질린 마커스는 집근처 뉴어크의 대학을 때려치우고 미국 내륙 오하이오 주의 와인스버그에 있는 대학에 편입해 기숙사로 들어간다. 1950년대에 미국에 징병제가 있었다는 것을 소설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대학생은 징집 유예가 있었지만, 졸업하고 나면 군대 끌려가서 한반도에 사병으로 투입되서 죽을 확률이 엄청 높아진다. 마커스의 사촌들도 그렇게 1,2차 세계대전에서 둘이나 죽었다. 죽기 싫으니까 열심히 머리 굴려서 최대한 학점 잘받고, 알오티씨 들어가서 장교 입대 자격도 얻고, 졸업할 때 고별사 할 정도로 우수학생 되어가지고 최대한 죽을 자리 아닌 곳으로 입대하자, 그러고나서 로스쿨가서 변호사가 되자, 우리의 마커스 엄청난 J였다. 성실하고 똑똑하고 그렇지만 불합리에 못 견디고 자유로운 영혼. 어찌보면 예민하고 지랄맞은 구석도 있다. 밤늦게 시끄럽게 음악트는 룸메 레코드판 뿌숴 버리고 결국 기숙사 방 옮기고,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 욕했다고 새로운 룸메한테 욕해서 쳐맞고 또 방 옮기고, 그래서 너 적응에 좀 문제 있는 거 아니니, 하고 부른 학과장 방에 가서 러셀 타령하면서 갑자기 채플 필수 이수 그거 반대한다!!! 이러다가 못 참고 학과장방에 다 토해 버리고… 완전 공감은 아니지만 마커스가 왜 저러는지 자꾸 알 것만 같지…
채플 설교 중 마커스는 어린 시절 뜻모르고 부르던 중국 군가를 속으로 몇 번이고 외친다. 나중에 그 노래 부르며 몰려 내려올 죽음을 그땐 모르고… 그 노래가 지금은 중국 국가로 쓰이고 있다고, 서문에서 필립로스가 소개해 놔서 궁금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중국 국가 ‘의용군진행곡’을 찾아보고 유튜브로 한 번 들어 보기도 했다.
-우리 모든 동포의 가슴에 울분이 가득하다. (92)
노래 가사 속에서 이 책의 제목(indignation)이 나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상했다. 내가 찾아본 중국 국가 가사 해당 부분은 울분, 분노로 해석할만한 단어가 없었다. 함성, 외침, 등으로 번역한 중국어 가사 속 한자 단어는 아무래도 이것이었는데.
吼声
grand howl, loud call, roar에 가까운 중국어의 포효는 왜 영어 indignation을 거쳐 울분으로 번역되었을까. 책을 끝까지 읽으면 어떤 단서라도 얻게 될까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서문을 다시 보니 2차 대전 중에 번역된 노래라고 하는데, 번역 주체는 나와 있지 않고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을 지지하는 동맹국들이 많이 불렀다고만 되어 있다. 영원한 동맹은 없다…
짧은 생애지만 짧은 사랑도 있었고, 뭐 그랬다. “좆까, 씨발” 한 마디로 한반도 끌려가서 며칠 안 되어 전사하는 이야기는 슬프지만… 마커스가 죽은 무렵의 한국전쟁 전투를 찾아보니 아마도 파주 근방의 ‘장단-사천지구 전투’ 초반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천강이 지도 검색으로도 안나와서 보니까 그냥 임진강 급의 강은 아니고 사천이라는 개천 정도 같고, 장단면도 현재는 대부분 북한 땅에 행정구역명도 바뀌었다. 친구랑 전에 하던 이야기도 생각났다. 난 그냥 아닌 건 아니라고, 들이받고 지적하고 끝까지 그러니까 결국 건드리는 사람이 별로 없게 되었지.(친구도 별로 없음) 그러니까 친구는 그냥 운이 좋아 여태까지 진짜 나쁜 사람 만나지 않아서 무사한 거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전투 중이지도 않고 유신 시대도 아니고 왕정도 프랑스혁명도 아니고 마녀화형식도 없으니. 전근대시대였으면 사지가 남아나지 않았겠다. 혀도 뽑히고 하여간에 뽑힐 건 다 뽑혔을지도…
장단 사천강 전투는 해병대에게는 나름 전쟁 막바지의 중요한 전투/전장이었던 것 같다. 검색하면 주로 해병대의 공적 관련 자료가 나옴…
장단 사천 지구, 필립로스와 미국인들이 말하는 학살의 산은 백학산???
마커스 엄마는 마커스한테 건네듯 나에게도 감정에 대해 말했다. 야이 새끼야 성질 좀 죽이고 살아라...한 마디 할 걸 되게 착하게 다정하게 말했다. 맛탱이 간 남편하고 헤어질 결심 중에 그걸 번복하면서까지 그러니까 너도 그러고 살아, 하고. 그러고서 백살 가까이 산 마커스 엄마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저 성질 많이 죽인 거라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진짜예요...저 많이 착해졌답니다…
제목을 “좆까, 씨발”. 로 뽑으려다가 참았다. 저거야 말로 울분이 아주 농축되어 있는 언어 아니냐. 너무 농축되면 목 맥히니까 거꾸로 놓고 식히기로 했다.
+밑줄 긋기
-두 가지가 나를 사로잡았다. 하나는 절묘한 가르마였다. 나는 그때까지 어떤 사람의 가르마 앞에서 그렇게 마음이 허물어진 적이 없었다. 또 하나는 그에의 왼쪽 다리였다. 그 다리는 그녀의 오른쪽 다리 위에 걸쳐진 채 박자에 맞추어 아래위로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 유행대로 치마가 종아리 중간쯤까지 내려와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앉은 곳에서는 탁자 밑으로 다리의 쉼 없는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그애는 그 자리에 그렇게 두 시간은 앉아 있었을 것이다. 쉬지도 않고 메모를 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균등하게 양쪽으로 머리를 가른 가르마와 쉬지 않고 움직이는 다리를 본 것뿐이었다. 그렇게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여자아이에게는 어떤 느낌일지 자꾸 궁금했다. (56)
-삶에서처럼 나는 오직 있는 것만 알 뿐이고, 죽음에서는 있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바뀔 뿐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만 삶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계속 그 삶에 붙어 있게 된다. 아니면, 역시 이것도, 어쩌면 나만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 누가 내게 말해줄 수 있었을까? 사실 죽음이 끝없는 무가 아니라 영원히 자기 자신에 관해 숙고하는 기억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다 한들 죽음이 덜 무서웠을까? 어쩌면 이렇게 영원히 기억하는 과정은 그저 망각으로 가는 대기실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신자로서 나는 내세가 시계, 몸, 뇌, 영혼, 신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모양이나 형태, 내세는 기억이 없는 곳이 아니었다. 아니, 기억이 전부인 곳이었다. (64-65, 내세가 로스 할배의 상상대로라면, 나는 이미 내세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많은 시간을 자기 자신에 관해 숙고하는 기억에 파묻혀 살고 있(었)으니까… 종교인의 관점에선 야, 마커스, 니가 신을 부정해서 임마 니는 연옥에, 림보에 간 거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녹색 사각형 안뜰을 가로 세로로 교차하는 돌길을 따라 걸어다니는 다른 학생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았다. 왜 나는 학생들의 모든 요구에 답해주는 작은 대학의 광채 속에서 저들이 누리는 기쁨을 함께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기는커녕 왜 모든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일까? 갈등은 집에서 아버지와 시작되었다.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끈질기게 쫓아왔다. 처음에는 플러서, 다음에는 엘윈, 다음에는 코드웰. 누구의 잘못일까? 그들의 잘못일까, 아니면 나의 잘못일까? 전에는 문제라고는 한 번도 일으켜 본 적이 없는 내가 어쩌다 이렇게 빠르게 문제투성이가 되어버렸을까? 그러면서 왜 불과 일 년 전에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 여자애한테 알랑거리는 편지를 써서 더 큰 문제를 자초하고 있을까? (123, 마커스야...갈등의 목록도 역사도 생각보다 짧구나...더 길고 장구한 트러블메이커로서 드는 생각은…네가 경험이 적어서 그런 것 같다… 목록이 길어지기 전에 죽어서 아쉽+부럽구나...)
-너는 다른 모든 메스너와 똑같은 메스너야. 네 아버지도 한때 분별력 있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네 아버지도 다른 사람들처럼 미쳐버렸어. 메스너는 단지 정육점을 하는 사람들 집안이 아니야.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집안이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집안이고, 발을 구르고 벽에 머리를 찧는 사람들 집안이야. 이제 갑자기 네 아버지도 다른 메스너들처럼 나빠졌어. 너는 그러지 마. 너는 네 감정보다 큰 사람이 되어야 해. 너한테 이런 요구를 하는 건 내가 아니야. 인생이 요구하는 거야. 안 그러면 너는 네 감정에 쓸려가버릴 거야. 바다로 쓸려나가 두 번 다시 눈에 띄지 않을 거야. 감정은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어. 감정은 가장 무시무시한 속임수를 쓸 수 있거든. (184-185, 와… 다시 보니까 엄마의 혜안… 그치만 대부분의 엄마들이 하는 충고와 애원이 그렇듯 이것도 부질없지...)
-“팬티! 팬티! 팬티!” 사춘기가 시작할 때와 다를 바 없이 대학생들에게도 여전히 선동적인 이 말이 밑에서 우렁차게 되풀이하며 외쳐대는 환호의 전부였다. 여학생들의 방에서는 술에 취한 남자아이들 수십 명, 옷과 손과 상고머리와 얼굴에 블루블랙 잉크와 선홍색 피가 묻고 몸에서 맥주와 녹은 눈이 뚝뚝 떨어지는 아이들 수십 명이 닐 홀의 처마 밑에 있는 내 작은 방에서 영감을 받은 플러서가 혼자 했던 일을 집단적으로 재연했다. 그들 모두는 아니었다. 결코 그들 모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얼간이들만, 다 합쳐서 셋, 1학년 두명과 2학년 한 명-이들 모두 다음 날 가장 먼저 퇴학을 당하게 되지만-만 실제로 훔친 팬티에 대고 자위를 했다. 마치 손가락을 튀기듯 빠르게 자위를 한 다음, 각자 더럽혀진 팬티, 사정한 액체로 젖고 냄새가 나는 팬티를 아래로 던졌고, 밑에서는 뺨이 새빨개진 채 눈을 모자처럼 쓰고 용처럼 입김을 뿜으며 환호하는 하급생 무리가 두 팔을 들어올리고 그들을 선동했다. (214-215, 아이 참 드러운 놈들...의 가짜 광기. 집단 눈싸움에서 흥분한 무리가 떼지어 저지르는 난동 같은 걸 난 가짜 광기라 부른다. 진짜 광기를 보고 싶다면 독고다이로 모두가 차분하고 조용할 때 마커스의 방에다가 정액을 여기저기 싸지른 플러서의 앞부분 이야기로…)
-만일 그가 채플에 마흔 번 나가 마흔 번 출석표를 제출만 했다면 그는 지금 살아서 변호사 일에서 막 은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말도 안 되는 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알랑거리는 찬송가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신성한 교회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기도, 그 눈을 감고 하는 기도-썩어빠진 원시적인 미신! 하늘에 계신 우리의 어리석음! 종교의 치욕, 그 모든 미성숙과 무지와 수치! 아무것도 아닌 것을 둘러싼 광적인 경건함! 코드웰이 그에게 그래야만 한다고 했을 때, 코드웰이 그를 다시 사무실로 불러 마티 지글러에게 돈을 주고 대신 채플에 가게 한 것에 대해 렌츠 학장에게 반성문을 제출하고, 그런 뒤에 훈련의 방식이자 속죄의 방법으로 마흔 번이 아니라 총 여든 번 채플에 참석해야만, 다시 말해서 대학에 다니는 동안 거의 매주 수요일마다 채플에 가야만 퇴학을 안 시키겠다고 했을 때, 마커스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다름 아닌 메스너답게, 다름 아닌 버트런드 러셀의 제자답게, 주먹으로 학생과장의 책상을 내리치면서 두번째로 이렇게 내뱉는 것 외에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좆까, 씨발.”
그래, 멋지고 오래되고 도전적인 미국의 ”좆까, 씨발”. 그것으로 정육점집 아들은 끝이었다. 그는 스무 살 생일을 석 달 남기고 죽었다. 마커스 매스너(1932-1952)는 그의 대학 동기 가운데 불운하게도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238, 그래서 내가 할 일은 채플 필수 이수 대학 목록을 찾아두고 거기는 원서를 쓰지 않는 것...누가 받아준대니...성적부터 만들고 생각해라...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