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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늘
임재희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1월
평점 :
오랜만에 집어 든 한국소설이었는데 아쉽게도 실패했다. 정말이지 한국소설은 괜찮은 작품을 만나는 게 소설가로 등단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듯하다. 이번에 읽은 <비늘>은 소설가들의 고충과 비애를 다루고 있다. 벌써부터 뻔한 내용에 하품이 나오려 하지 않는가. 이러한 소재들은 수백 년 전의 작가들이 여러 차례 써먹었기 때문에 기대조차 안되는 게 당연하겠고, 그 사실을 현대 작가들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또다시 우려먹으려면 며느리도 손주들도 모른다는 장인의 특제 쏘스를 듬뿍 넣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런 일개 독자의 생각과 견해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내추럴한 서사와 플롯으로 정면 승부하는 작품을 만나버렸으니 이것 참 오랜만에 손가락이 근질근질합니다요.
재경과 영조는 소설 습작생 커플이었다. 방금 전에 헤어져서 과거형이 되었다. 재경은 등단에 성공했으나 여전히 무명이었고, 영조는 번번이 낙방하여 결국 꿈을 접었다. 두 사람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책들을 전부 알라딘 서점에 갖다 팔고, 돈을 반씩 나눈 뒤에 남남이 되었다. 재경은 그 돈으로 존경하는 선배 소설가를 만나기 위해 하와이로 날아간다. 그러나 선배는 소설가를 관둔지 오래였고, 오래전에 실종된 친형을 기다리는 모친과 함께 살아가는 중이었다. 이 집에 약 일주일간 신세 지면서, 또 하와이에 머무르면서 작가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무엇인가,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등등의 진부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과 해답을 얻어 간다. 그게 다다. 놀랍게도.
유독 소설가들은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이미지가 있다. <비늘>의 주인공 재경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는데, 솔직히 이건 프레임이라고 본다. 소설가들이 집필에 앞서 얼마나 많은 연구와 현장조사를 하는데 허구한 날 골방에 틀어박혀서 머리 벅벅 긁고 줄담배 피워가며 키보드만 두드리는 올드 한 캐릭터를 강조하는지 모르겠다. 여튼 재경이 찾아간 선배는 습작생의 재경에게 마구 수치심을 안겨주던 사람이었다. 결국 등단에 성공한 재경과 선배는 인사이트를 주고받는 절친이 되었다. 그랬던 선배가 지금은 왜 글을 쓰지 않는가 했더니,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기 때문이라나. 소설은 현실에서 느끼고 체험할 수 없는 내용들을 글로 옮겨 독자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는 역할인데, 자신이 살아보니 현실 세계가 소설의 영역을 이미 뛰어넘고 있더란다. 그래서 선배는 글쓰기를 포기했다는데, 이유가 뭐 그것뿐이겠냐마는 왜 이렇게 진부하고 구질구질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하와이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이 가본 곳이 도서관이었다. 무더운 여름이라 시원한 도서관으로 인파가 몰려드는데 그 대부분이 노숙자들이다. 노숙자들이 계속 나와서 읽는 내내 악취가 느껴진달까. 아무튼 생각했었던 하와이의 모습과 딴판인 현실에서 이런저런 인사이트를 깨닫는 중인 재경과 곁에서 훈수 두는 선배. 그리고 이들에게 다가온 노숙자 피터를 통해 큰 깨달음을 얻는다. 언제나 마지막이 되었을 때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재경은 등단 이후로 자신의 열정을 쏟아보지 못한 일과, 떠나가는 사랑에 끝까지 매달려보지 못한 일을 떠올린다. 그렇게 애정 했던 책들까지 내다 팔아야 했는데도 어딘가 안일하게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이외에도 소설가로서의 생각, 감정, 경험, 통찰, 정신에 대해 참 좋은 글귀들이 있었지만 뭐랄까, 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내용이라 미동은커녕 그냥 빨리 끝났으면 싶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끝나버렸다. 아무런 뒷이야기도 없이 그렇게 뚝. 그래서 나도 이만 쓸란다. 뚝.